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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에 불이 났다는 걸 들으면 “사람은?” 하고 먼저 묻는 게 상식이다. 그렇지 않고 “값비싼 자개 장롱은?” 하는 물음을 앞세운다면 그게
비상식이다. 공자가 이웃 어른처럼 가깝게 다가오는 것은 보통 사람의 체취가 싱싱하게 묻어나는 이런 대목들 덕분이다.
대통령이 제작·감독·주연의 1인3역을 맡고 있는 요즘의 한국 정치 드라마는 2500년 전 공자 시대와는 영 딴판이다. 집에 불이 났다는데도
국민 안부는 염두에도 없고 다들 말(馬)이야기에 정신이 팔려있다.
대통령이 5년 임기의 절반을 보내면서 먼저 물어야 할 것은 무엇일까. 그것은 당연히 국민의 안부다. 2년반 전보다 살기는 나아졌는가. 배를
곯거나 직장을 잃어버린 사람은 없는가. 가게 손님이 줄지는 않았는가. 아이들은 좋은 교육을 받고 있는가. 이런 것부터 챙기는 게 상식일 것이다.
그러나 국민 누구도 대통령에게서 이런 안부 인사를 들은 적이 없다. 그 대신 지역구도 타파를 위해, 대연정(大聯政) 성사를 위해, 2선으로
후퇴하거나 임기를 채우지 않고 사퇴할 수도 있다는 느닷없는 이야기로 넋을 빼놓았을 뿐이다.
아무리 경위가 없다 해도 이럴 수가 없다. 대통령으로선 여소야대(與小野大)가 괴로울 것이다. 지역구도가 큰 문제인 것도 사실이다.
중대(中大)선거구도, 내각제 개헌도 못할 것은 없다. 그러나 일에는 선후(先後)가 있고 밟아 나갈 순서가 있다. 지역구도 타파가 선거구 바꾼다고
쉽게 될 일인가. 내각제 개헌하면 국민 살림이 펴지는가. 아니지 않은가. 옛날의 악정(惡政)은 괜히 이웃나라와 전쟁을 벌이거나 만리장성이니
대운하(大運河)니 하는 불필요한 토목공사를 일으켜 백성을 고달프게 하는 것이었다. 공연히 선거를 치르겠다는 것은 현대판 만리장성 쌓기이고 대운하
파기와 다를 바가 없다. 그때마다 괴롭힘을 당하는 건 국민이다. 나라를 살리는 대통령 구상이란 게 선거와 얽힌 것뿐이라면 그게 대통령을 살릴지는
몰라도 국민을 살릴 수는 없다.
대통령은 여소야대 때문에 뜻대로 일할 수가 없다고 한다. 대통령제(大統領制)란 대통령이 마음대로 휘두를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듯하다.
그러나 그것은 대통령제의 기원(起源)과는 한참 거리가 먼 얘기다. 대통령제를 처음 도입한 미국 헌법 기초자들의 모든 걱정, 모든 연구는 어떻게
하면 대통령의 권력을 억눌러 ‘선출된 독재자’의 출현을 막느냐에 모아졌다. 대통령 탄핵과 의회의 대통령 견제 장치는 그 걱정과 연구의
소산(所産)이다. 대통령이 이 헌법적 한계(限界)를 뚫고 나가려면 국민과 국회, 특히 야당을 성심성의껏 설득하는 수밖에 없다. 그런 성의 한번
제대로 보이지 않은 채 제도만을 탓해선 안 된다. 중대선거구제만 해도 그렇다. 이웃 일본은 중대선거구로선 여당의 안정과반수가 불가능하다 해서
소선거구로 돌아섰는데 한국에 중대선거구를 도입하면 지역구도와 여소야대 타파라는 이중의 기적이 이루어진다는 근거가 어디 있는가.
석가모니는 위대한 교사였다. 아무리 멍청한 질문을 해도 꾸중하시는 법이 없었다. 그 석가모니께서 질문자를 야단치시는 대목이
아함경(阿含經)에 실려있다. “세상이 무한한가 유한한가”라는 질문에 대답해 주지 않으면 도를 닦지 않겠다는 제자에 대해서다. “독화살을 맞고
죽어가는 사람이 화살을 쏜 사람, 화살과 활줄의 재료, 화살의 색깔을 알기 전에는 치료받지 않겠다고 우기면 죽을 수밖에 없다”고 나무라신
것이다.
본질적 질문이란 게 언뜻 그럴듯하게 들려도 사실은 이런 허망한 것이 대부분이다. 한국 경제가 어려운 근본 원인이 격차 때문이니 그걸 해소할 대책을 세워야 한다면서 차일피일 하고 있는 것도 그런 어리석은 근본주의의 하나다. 이 정권은 불이 났을 땐 사람의 안부를 먼저 묻고, 독화살을 맞았을 땐 화살을 먼저 뽑을 줄 아는 사리분별(事理分別)부터 회복하지 않으면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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