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설의
무희
일제강점기와 분단의 비극을 몸으로 부대끼며 산 예술가
20세기 초반 한반도의 상황은 매우 암울했다.
나라를 잃은 백성들은 식민지 정치 현실에서 허덕이며 희망을 잃어 가고 있었다.
그때 그런 암담한 환경을 뚫고 높이 무대 위로 도약해
사람들의 가슴에 희망이 되어준 여인이 있었다. 그녀는 무용가 최승희였다.
어떤 장르의 예술이든 사회적, 역사적 환경을 벗어나는 것은 매우
어렵다.
그러나 때로 어떤 경우에는 그것이 예술이기
때문에
환경을 벗어나 더 높은 경지로 날아 오를 수도
있다.
정치적 상황이 매우 어둡거나 경제적으로 궁핍한 나라에서 위대한 문학가나 미술가가
나와
세상을 놀라게 하는 것도 예술이 가진 자유로움 때문일
것이다.
인도의 전통 복장을 하고 있는 최승희
아름다운 코리안 댄서
1930년대 한반도에는 그 이름이 희망 자체인 사람들이 있었다.
베를린 올림픽 마라톤경기에서 금메달을 딴 손기정과
코리안 댄서로 해외에 그 명성을 드높인 최승희가 바로 그들이었다.
그 중에서 최승희는 해외에 나가 한국의 이름을 당당히 밝히고 한국의 춤을
당당히 공연했다는 점에서 더욱 사람들에게 사랑을 받았다.
1937년 구미 각국 순회 공연부터 시작한 최승희의 해외 공연은 눈부신 성공을
이루었다.
당대 서구의 많은 예술가들이 최승희의 춤에 흠뻑 빠졌다.
그 중에는 피카소와 장 콕토 등도 있었다.
최승희는 해외공연 시 자신을 언제나 코리안 댄서라고 명시했다.
한국을 식민지로 만든 일본의 댄서로 오해받기 싫다는 강한
의지였다.
식민지 한반도의 사람들은 최승희의 당당함과 용기에 환호를 보낼 수밖에
없었다.
그녀는 자신이 태어난 환경에 깊이 영향을
받고,
또 그 환경을 벗어나 높이 도약한 뛰어난 예술가였다.
힘차게 도약하는 최승희
총명하고 예술적인 소녀
최승희(1911-?) 는 어렸을 때부터 매우 총명한
소녀였다.
소학교를 월반에 월반을 거듭하여 4년 만에 수석으로 졸업할
정도였다.
숙명 여학교에 다니던 열 여섯 되던 해, 최승희에게는 인생을 결정할 사건이
생겼다.
당시 한국에 공연을 온 일본 무용가 이시이 바쿠의 공연을 본
것.
최승희는 이날 이후 자신의 앞날을 무용가로 결정하였다.
그녀의 집안에서도 최승희의 선택을 환영하였다.
일찌감치 개화한 집안에 기라성같은 엘리트 형제들을 둔
덕분에
최승희는 축복 속에서 이시이 바쿠의 수제자로 들어갈 수
있었다.
머리가 좋고 예술적 감각이 누구보다 뛰어났던
최승희는
이시이의 무용단에서도 곧 두각을 나타냈다.
그녀는 얼마 지나지 않아 이시이 무용단에서 가장 춤을 잘 추는 무용가로 성장했다.
이시이를 따라 일본 동경으로 무용을 배우러 갔던 최승희는 첫 번째 한국 귀국
때
이미 프로 무용가로서 자신의 독무대를 사람들에게 선보였다.
<부채춤 추는
최승희>
한국무용의 체계를 잡다
최승희의 무용관은 다분히 사회적이며 민중적이었다.
그녀는 사람들과 함께 어우러지는 무용을
좋아했고
예술이 상류 계급에만 봉사하는 것을 단연코
거부했다.
최승희는 안락한 이시이 무용단의 1급 무용수의 자리를 박차고 나와 한국으로
귀국한다.
그리고 가시밭길을 걷는 심정으로 불모지 한국에 무용 문화를 심으려는 노력을 시작한다.
1929년 서울에 ‘최승희 무용연구소’를 차린 최승희는 곧 이어 한국 전통무용에 눈길을
돌렸다.
그녀는 한국의 전통무용 속에서 백성과 어우러지는,
그녀가 생각하는 참다운 무용의 형태를 발견했다.
그녀는 많은 한국 전통무용 전수자를 쫓아다니며 그들의 무용을 사사한다.
그리고 그것을 신무용과 과감히 접목시킨다.
그녀는 새롭지만 여전히 한국적인, 아름다운 무용 춤사위를 만들어
냈고
직접 무용수로서 그 아름다움을 구현하였다.
<최승희의 장고춤>
생존하기 위해서
때로 너무 뛰어난 예술가들은 그들의 의사와는 관계없이 쉽게 정치적으로 이용된다.
일본은 세계적인 명성을 가진 최승희가 코리안 댄서로서 자유롭게 활동하도록 놔두지
않았다.
전쟁을 목전에 둔 일본으로서는 최승희가 너무 좋은 선전
도구였다.
일본 군부는 최승희에게 ‘전선 위문 공연’을 강요한다.
한국과 일본을 통틀어 가장 자랑스러운 세계적 무용가가 된 최승희가
전선을 돌며 공연을 하는 것은 일본군의 사기 진작에도 도움이 될 뿐 만 아니라
이미 구미에서 명성을 얻은 최승희였기에 외국에 대한 선전효과도 아주 컸다.
1942년부터 2년 간 최승희는 일제의 총칼 아래서 하는 수 없이
만주와 중국 본토 등지를 떠돌며 전선 위문공연을 다녀야만 했다.
이것이 그녀의 삶에 있어서 가장 지울 수 없는 오점이 되었다. <전설의 무희 –최승희>
월북과 그 이후
최승희의 남편 안막은 일제 시대부터 사회주의 문학을 하던 문학가이자 이상주의자였다.
원래부터 무용을 통해 사람들과의 공감을 추구하였던
최승희에게
안막은 더 할 나위 없는 배우자였다.
1945년 해방 직후 혼란스러운 한반도의 정치 상황 속에서 최승희는 남과 북 사이에서
갈등하다
결국 남편을 따라 월북의 길을 택한다.
최승희의 남편 안막은 월북 후 얼마 되지 않아 숙청 당하고 만다.
최승희 또한 1969년 정치적으로 숙청 당하고 그 이후 함경도 일대를
떠돌다
80년대 초반에 죽었다고 한다.
최승희와 안막의 예술가적이며 이상적인 세계관을 받아들일 현실
정치는
한반도 어디에도 없었던
것이다.
<최승희와 손기정>
한 명의 천재적 예술가를 키우는 것은 훌륭하든,
훌륭하지 않든 그 예술가가 처한 주변의 환경일 것이다. 그리고 때로
예술가는
혼탁하고 어지러운 환경을 벗어나 높이 비상하기도
한다.
그러나 어떤 경우 천재 예술가를 키웠던 바로 그 환경이 예술가의 발목을 낚아채기도 한다.
우리에겐 천재 무용가 최승희가 있었다.
그녀는 식민지의 핍박 받는 한국의 예술가로 태어나 세계적 예술가로
성장하였지만
결국 그 한국의 혼란한 정치적 상황에 날개 꺾인 비운의 운명을 살아야만
했다.
동양의 이사도라 던컨- 최승희의 생과
춤
<최승희-격동의 시대를 살다간 어느 무용가의 생애와 예술>(정수웅 엮음. 눈빛 간)은 "이사도라 던컨이 그리스.로마 시대의 조각을 무용으로 재현하여 그러나 최승희는 최근까지 남과 북 모두에게 버림받은 비극적인 예술가였다.
일제 때 친일을 했으며, 해방 후 월북을 했기 때문에 남한에서 그에 관한 책은 한때 불온서적 취급을
받았다.
북한에서도 그는 통치이념을 거스른다는 이유로 말년에 정치범 수용소에서 비참한
최후를
맞았다.
그러나 탄생 90주년을 즈음으로 최승희에 대한 재평가가 활발하게 이뤄지기 시작했다. 최근에는 북한에서도 최승희의 묘를 애국열사릉 으로 이장시켜 정치적으로 복권시켰다고 한다. 최승희의 사망시기는 80년대초로 알려졌으나 확실치 않다.
이 자료집에는 20세기 격동의 시대에 파란만장한 삶을 산 현대무용가 최승희의 개인사를 보여주는 사진과 자료, 무용가로서의 활동을
보여주는
다양한 사진과 자료 등 보기 드문 자료 등이 다수 수록돼 있다.
자료집에 따르면 1911년 11월 서울 수운동에서 출생한 최승희는 26년 일본 현대무용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이시이 바쿠(石井漠)의 제자로
들어갔다.
1930년 2월1일 최승희의 신무용발표회가 처음으로 경성공회당에서
열리면서
무용가로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한다.
최승희는 기방이나 지방 춤꾼들로부터 전통춤을 익혀 전통무용과
현대무용과의 융합을 적극적으로 시도했다.
31년 5월9일 최승희는 스무살의 나이로 와세대대 러시아문학과에 다니고 있던 한 살 위의 안필승과 결혼했다. 안필승은 와세다대 졸업
후
이시이 바쿠의 이름을 따서 안막(安漠)으로 개명했다.
34년 최승희는 일본 청년회관에서 제1회 발표회를 열었다. 엮은이는 "그때 저명한 소설가 가와바타
야스나리는
일본 최고의 무용가가 탄생했다고 절찬을 아끼지 않았다"고 말한다.
무용을 시작한 지 10년, 조선과 일본의 저명인들이 최승희 후원회를 만들었다. 발기인에는 여운형,마해송, 가와바타 야스나리가 포함돼
있었다.
36년 최승희는 베를린 올림픽 우승자 손기정과 함께 억압받은 한국인의 우상이 되었다.
37년 최승희는 처음으로 미국 뉴욕 브로드웨이에서 첫 해외공연을 가진다. 그러나 최승희의 공연포스터에 '재퍼니즈 댄서'라는 소개에
자극받은
재미동포들의 반일운동으로 공연은
중단됐다.
중도에 포기하고 돌아갈 수 없었던 최승희는 뉴욕
할렘가에서 1년 가까이 그림 모델 등을 하며 버텼다.
<잡지모델로 일하던 시절의 최승희>
38년 12월17일 최승희는 고대하던 유럽 공연의 기회를 잡았다.
프랑스 파리에서 두번째로 큰 극장인 샬르 플레엘에서
최승희는 유럽에서 첫번째 공연을 가졌다.
초립동 춤이 가장 인기를 끌었는데, 최승희는 후에 김백봉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프랑스는 이상하다. 내가 초립동 춤을 추고 난 지 일주일 만에 파리 전체에 그 초립동 모자가 퍼지더라. 그만큼 유행에 민감한
곳이란다".
<족두리를 쓴 최승희>
브뤼셀,로마,헤이그 등 유럽 순회공연을
끝내고 다시 파리로 돌아온 최승희는
대망의 무대인 '예술의 전당' 국립극장 샤이오에
섰다.
관중 속에는 당시 피카소,장 콕도, 로망 롤랑 등 문화예술계 명사들이 있었다.
프랑스의 <피가로>지는 최승희에 대해 "선이 아주 환상적인 동양 최고의 무희"라고 격찬했다. 당시 파리 공연에서 주목받은 춤은 최승희를 대표하는 춤으로 평가받는 '보살춤'이었다.
유럽 공연의 성공으로 다시 뉴욕 브로드웨이에 진출한 최승희는 30년대 후반 유럽,미국,중남미 등에서 1백50여회의 공연을 해 동양의 무희로서 세계적인 명성을
얻었다.
그러나 최승희는 41년 12월8일 일본의 진주만 공격으로 태평양 전쟁이 발발하면서 만주와 중국에 주둔해 있는 일본군 위문공연에 투입되어야
했다.
공연 횟수가 1백회가 넘을 정도로 그는 관동군이 있는 곳이면 어디든 끌려가 공연을 해야
했다.
최승희는 몽고를 돌아 다른 전쟁터로 이동할 때 운강석굴을 방문했다. 운강석굴은 약 1천5백여년전에 만들어진 중국 최대의 석굴사원이다.
동굴에슨 5만1천개 정도의 불상이 조각돼 있다. 최승희는 이 거대한 불교예술에 큰 감명을 받아 불상의 다양한 자세를 무용으로
승화시켰다.
<석굴암의 벽조>가 그 대표적인
작품이다.
<최승희의 보살춤>
일본 군부로부터 예술가들에 대한 압력이 더욱 강해지는 가운데 최승희
부부는
만주의 일본군을 위문한다는 명복으로 중국으로향했다.
그 후 최승희는 두 번 다시 일본 땅을 밞을 수 없었다.
45년 8월 해방이 됐으나 중국에 있던 안막은 청년시절부터 사회주의를 신봉하고 있던 처지여서 해방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 지 몹시 고뇌했다고 한다.
결국 45년 8월말 안막은 중국내 조선인 공산군과 함께 평양으로 향했다. 한편, 최승희는 이듬해 김백봉을 비롯한 제자들을
데리고
중국 천진에서 조국으로 돌아가는 배에 올랐다.
해방 후 서울에서는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가 발족됐다. 친일파로 몰린 최승희는 신문에 다음과 같은 글을 발표했다.
"일본이 우리 민족의 정신과 전통을 뺏으려고 할 때, 나는 우리 민족의 정신을 북돋으려고
노력했습니다.
이것이 국내에서건 국회에서건 내가 조선의 딸로 걸어온 길이었습니다."
그러나 최승희는 북한에 가 있던 안막으로부터 강력한 요청을 받고 46년 7월 38선을 넘어 북으로 갔다. 최승희는
평양에도착하자마자
김백봉과 함께 김일성을 만나러 갔다.
김백봉의 증언에 따르면 김일성은 "최승희 동무 살러 왔소, 다니러 왔소"라고 물었다. 김일성은"살러 왔다"는 최승희에게 원하던 대로 대동강변
요정이었던
동일관 자리에 최승희무용연구소를 설립해 주었다.
북한 무용동맹위원회 위원장이 된 최승희는 50년 6월초 2백명의 대규모 예술단과 역시 단원이었던 딸 성희를 데리고 모스크바에
갔다.
소련 각지를 돌며 공연한 지 얼마 되지 않아 6.25 전쟁이
터졌다.
<최승희와 딸
안성희>
6.25 전쟁 때 평양이 유엔군에 점령되면서 최승희무용연구소 건물도 폭격으로
파괴되었다.
최승희는 52년 김일성과 주은래의 배려로 중국 북경에 오게 되었다.
엮은이는 "최승희는 중국 고전무용을 발굴하고 현대화하는 데 힘을 쏟아
금은 중국을 대표하는 무용에 두 가지 유형이 있는데 그중 하나가 최승희 류"라고 전한다.
최승희에게 매료되었던 주은래는 최승희의 춤 가운데 <신노심불로>(身老心不老)를 특히 좋아했다고 한다.
53년 7월 6.25 전쟁이 끝나자 최승희는 평양으로 돌아갔다. 54년 남편 안막은 문화부 부부장으로 승진되었고,
2년 뒤에는 문화선전부 부부장의 자리까지 올랐다.
엮은이는 "최승희 부부의 위세는 마치 뜨는 해와 같았다"고 말한다.
그러나 59년 최승희 가족에게 불행이 닥쳐왔다. 북한 정권 내부에서 대규모 숙청이 단행된 것이다.
안막도 이때 숙청당해 강제노동 끝에 사망했다고 전해지고 있다.
최승희는 이런 위기상황 아래에서도 무용교재인 <조선민족무용기본>(1957)을 남겼다.
이 교본은 남한에서도 같은 이름으로 뒤늦게 출판(1991.동문선)되기도 했다. 한국춤의 기본동작을 문자와 그림으로 자세하게 기록했다는 점에서
무용계에서는 매우 중요한 자료로 여겨지고 있다.
'동양의 이사도라 던컨' 최승희의 생과 춤
<신간> 사진과 자료로 보는 최승희
출처 : "관점이 있는 뉴스 - 프레시안" (www.pressian.com)
2004-06-12
최승희는 '동양의 이사도라 던컨'에 비유되는 한국이 낳은 세계적인 무용가다. <최승희-격동의 시대를 살다간 어느 무용가의 생애와 예술> (정수웅 엮음. 눈빛
간)은
지난 90년대 초부터 10여년간 우리나라를 비롯해 일본.중국.미국.러시아.프랑스 등을 돌며
수집한 최승희의 사진과 자료를 모은 것으로, 최승희가 살아간 치열한 삶과 예술혼을 잘
보여주고 있다.
엮은이는 우리 무용사에서 최승희가 차지하고 있는 위상을 이렇게 말한다.
"이사도라 던컨이 그리스.로마 시대의 조각을 무용으로 재현하여 세계적인 명성을 얻은 것처럼
최승희는
중국 운강석굴의 조각에서 영감을 얻어 <석굴암의 벽조>라는 무용을 창작하고 그의
제자들이
실크로드 선상의 <돈황무용>을 천년 만에 재현했다".
그러나 최승희는 최근까지 남과 북 모두에게 버림받은 비극적인 예술가였다.
일제 때 친일을 했으며, 해방 후 월북을
했기 때문에 남한에서 그에 관한 책은 한때
불온서적 취급을 받았다.
북한에서도 그는 통치이념을 거스른다는
이유로 말년에 정치범 수용소에서 비참한
최후를 맞았다.
그러나 탄생 90주년을 즈음으로 최승희에 대한 재평가가 활발하게 이뤄지기 시작했다.
최근에는 북한에서도 최승희의 묘를
애국열사릉 으로 이장시켜 정치적으로
복권시켰다고 한다. 최승희의 사망시기는
80년대초로 알려졌으나 확실치 않다.
이 자료집에는 20세기 격동의 시대에 파란만장한 삶을 산 현대무용가 최승희의 개인사를
보여주는 사진과 자료,
무용가로서의 활동을 보여주는 다양한 사진과 자료 등 보기
드문 자료 등이 다수 수록돼
있다.
자료집에 따르면 1911년 11월 서울 수운동에서 출생한 최승희는 26년 일본 현대무용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이시이
바쿠(石井漠)의 제자로
들어갔다.
1930년 2월1일 최승희의 신무용발표회가
처음으로 경성공회당에서 열리면서 무용가로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한다.
최승희는 기방이나 지방 춤꾼들로부터
전통춤을 익혀 전통무용과
현대무용과의
융합을 적극적으로 시도했다.
31년 5월9일 최승희는 스무살의 나이로
와세대대 러시아 문학과에 다니고
있던
한 살 위의 안필승과 결혼했다.
안필승은 와세다대 졸업 후 이시이 바쿠의
이름을 따서 안막(安漠)으로
개명했다.
34년 최승희는 일본 청년회관에서 제1회 발표회를 열었다. 엮은이는 "그때 저명한 소설가 가와바타 야스나리는 일본
최고의 무용가가 탄생했다고 절찬을 아끼지 않았다"고
말한다.
무용을 시작한 지 10년,
조선과 일본의 저명인들이 최승희 후원회를 만들었다.
발기인에는 여운형,마해송, 가와바타 야스나리가 포함돼 있었다.
36년 최승희는 베를린 올림픽 우승자 손기정과 함께
억압받은 한국인의 우상이 되었다.
37년 최승희는 처음으로 미국 뉴욕 브로드웨이에서 첫
해외공연을 가진다.
그러나 최승희의 공연포스터에 '재퍼니즈 댄서'라는 소개에
자극받은 재미동포들의
반일운동으로 공연은 중단됐다.
중도에 포기하고 돌아갈 수 없었던 최승희는 뉴욕 할렘가에서 1년 가까이 그림 모델 등을 하며
버텼다.
38년 12월17일 최승희는 고대하던 유럽 공연의 기회를 잡았다.
프랑스 파리에서 두번째로 큰 극장인 샬르 플레엘에서 최승희는 유럽에서 첫번째 공연을 가졌다.
초립동 춤이 가장 인기를 끌었는데, 최승희는 후에 김백봉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프랑스는 이상하다. 내가 초립동 춤을 추고 난 지 일주일 만에 파리 전체에 그 초립동 모자가
퍼지더라. 그만큼 유행에 민감한 곳이란다".
최승희의 쌍검무(34년 일본 청년회관에서 열린 제1회 발표회-좌)
최승희의 쌍검무(34년 일본 청년회관에서 열린 제1회 발표회-우)
브뤼셀,로마,헤이그 등 유럽 순회공연을 끝내고 다시 파리로 돌아온 최승희는 대망의 무대인 '예술의 전당' 국립극장 샤이오에 섰다. 관중 속에는 당시 피카소,장 콕도, 로망 롤랑 등
문화예술계 명사들이 있었다. 프랑스의 <피가로>지는 최승희에 대해 "선이 아주 환상적인
동양
최고의 무희"라고 격찬했다.
당시 파리 공연에서 주목받은 춤은 최승희를 대표하는 춤으로 평가받는 '보살춤'이었다.
유럽 공연의 성공으로 다시 뉴욕 브로드웨이에 진출한
최승희는 30년대 후반 유럽,미국,중남미
등에서
1백50여회의 공연을 해 동양의
무희로서 세계적인 명성을 얻었다.
그러나 최승희는 41년 12월8일 일본의 진주만 공격으로
태평양 전쟁이 발발하면서 만주와 중국에 주둔해 있는
일본군 위문공연에 투입되어야
했다.
공연 횟수가 1백회가 넘을 정도로 그는 관동군이
있는 곳이면 어디든 끌려가 공연을 해야 했다.
최승희는 몽고를 돌아 다른 전쟁터로 이동할 때 운강석굴을 방문했다.
운강석굴은 약 1천5백여년전에 만들어진 중국 최대의
석굴사원이다.
동굴에슨 5만1천개 정도의 불상이 조작돼 있다.
최승희는 이 거대한 불교예술에 큰 감명을 받아 불상의
다양한 자세를 무용으로
승화시켰다.
<석굴암의 벽조>가 그 대표적인 작품이다.
일본 군부로부터 예술가들에 대한 압력이 더욱 강해지는
가운데 최승희 부부는 만주의 일본군을
위문한다는
명복으로 중국으로 향했다.
그 후 최승희는 두 번 다시 일본 땅을 밟을 수 없었다.
45년 8월 해방이 됐으나 중국에 있던 안막은 청년시절부터 사회주의를 신봉하고 있던 처지여서 해방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 지 몹시 고뇌했다고
한다.
결국 45년 8월말 안막은 중국내 조선인 공산군과 함께
평양으로 향했다. 한편, 최승희는 이듬해 김백봉을 비롯한 제자들을 데리고 중국 천진에서 조국으로 돌아가는 배에
올랐다.
해방 후 서울에서는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가 발족됐다.
친일파로 몰린 최승희는 신문에 다음과 같은 글을 발표했다.
"일본이 우리 민족의 정신과 전통을 뺏으려고 할 때,
나는 우리 민족의 정신을 북돋으려고 노력했습니다.
이것이 국내에서건 국회에서건 내가 조선의 딸로 걸어온
길이었습니다."
그러나 최승희는 북한에 가 있던 안막으로부터 강력한
요청을 받고 46년 7월 38선을 넘어 북으로
갔다.
최승희는 평양에 도착하자마자
김백봉과 함께 김일성을 만나러 갔다.
김백봉의 증언에 따르면 김일성은 "최승희 동무 살러 왔소, 다니러 왔소"라고 물었다.
김일성은 "살러 왔다"는 최승희에게 원하던 대로 대동강변 요정이었던 동일관 자리에
최승희무용연구소를 설립해 주었다.
< 석굴암의 벽조(1943) >
북한 무용동맹위원회 위원장이 된 최승희는 50년 6월초 2백명의 대규모 예술단과 역시 단원이었던 딸 성희를 데리고 모스크바에
갔다.
소련 각지를 돌며 공연한 지 얼마 되지 않아 6.25 전쟁이 터졌다.
6.25 전쟁 때 평양이 유엔군에 점령되면서 최승희무용연구소 건물도 폭격으로 파괴되었다.
최승희는 52년 김일성과 주은래의 배려로 중국 북경에 오게 되었다.
엮은이는 "최승희는 중국 고전무용을 발굴하고 현대화하는 데 힘을 쏟아 지금은 중국을 대표하는
무용에 두 가지 유형이 있는데 그중 하나가 최승희 류"라고 전한다.
최승희에게 매료되었던 주은래는 최승희의 춤 가운데 <신노심불로>(身老心不老)를 특히 좋아했다고
한다.
주은래가 특히 좋아했다는 최승희의 춤 <신노심불로>
53년 7월 6.25 전쟁이 끝나자 최승희는 평양으로 돌아갔다. 54년 남편 안막은 문화부 부부장으로 승진되었고, 2년 뒤에는 문화선전부 부부장의 자리까지
올랐다. 엮은이는 "최승희 부부의 위세는 마치 뜨는 해와 같았다"고 말한다.
그러나 59년 최승희 가족에게 불행이 닥쳐왔다.
북한 정권 내부에서 대규모 숙청이 단행된 것이다.
안막도 이때 숙청당해 강제노동 끝에 사망했다고 전해지고 있다.
최승희는 이런 위기상황 아래에서도 무용교재인 <조선민족무용기본>(1957)을 남겼다.
이 교본은 남한에서도 같은 이름으로 뒤늦게 출판(1991.동문선)되기도 했다.
한국춤의 기본동작을 문자와 그림으로 자세하게 기록했다는 점에서 무용계에서는 매우 중요한 자료로 여겨지고 있다.
<왼쪽부터 30년대초 최승희, 검무, 무당춤 >
<
왼쪽부터 30년대 최승희, 승무, 보살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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