趙甲濟 月刊朝鮮 편집위원
최근 일본 이사카와縣을 여행하던 중 두 권의 책을 사 읽었다.
''古代로부터의 傳言-壬申의 亂''은 산케이신문 기자 출신인 야기소우지(八木莊司)씨가 쓴 책(角川서점)이다. 8세기 초의 역사서인 日本書紀를
근거로 하여 상상력을 보태어 쓴 것이다. 소설적 기법을 동원했지만 史實에 충실하고 古代 이야기이면서도 현장감과 실감이
난다.
''壬申의 亂''은 서기 672년에 일본에서 있었던 大海人皇子 주동의 반란이다. 그는 형인 天智天皇에 의하여 후계자로 지명된
조카뻘의 大友皇子를 타도하고 정권을 잡은 뒤 天武천황이 되었다. 천황이란 직함을 처음 쓴 것이 이 사람이고 국호를 倭에서 日本으로 바꾼 것도 이
사람이다. 그는 또 고대국가로서의 체제를 확립한 사람이다. 일본역사에서 가장 많이 다뤄지고 있는 인물도 天武천황이고 사건도 壬申의 亂이다.
한국인의 관점에서 흥미를 끄는 것은 天武천황이 신라도래인의 도움을 받아 반란에 성공했다는 점과 집권한 뒤 反신라 정책을 포기하고
親신라 정책을 썼다는 점이다. 天武천황은 또 日本書紀의 편찬을 지시했다. 그가 죽은 뒤 나온 이 책은 신라를 폄하하기 위하여 만들어진 책이라는
느낌이 들 정도로 사실의 왜곡과 조작을 통해서 신라에 대한 우월감과 저주심을 드러낸다. 이는 신라에 대한 일본의 열등감과 원한을 감추기 위한
심리적 반응이리라. 이 책은 백제에 대해서는 시종 호의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日本書紀야말로 일본측에 의한 한국사 왜곡의 시발점이다.
壬申의 亂과 신라의 삼국통일 관계, 天武천황의 정체, 그리고 일본내 백제系 관리들에 의한 日本書紀 편찬과정을 흥미롭게 다룬 책이
''壬申의 亂의 수수께끼''란 책이다. PHP 문고판으로 나온 것인데 필자는 세키유지(關裕二)라는 고대사 저술가이다. 두 책이 함께 지적하고
있는 것은, 壬申의 亂이 신라에 의한 삼국통일과 관련이 있다는 것이다.
668년에 唐이 신라와 함께 고구려를 멸망시킨 뒤 한반도
전체를 지배하려고 하자 신라는 이에 반발하여 670년부터 對唐결전을 시작한다. 그때까지 親백제 反신라 정책을 써왔던 일본 조정은 새로운
국제정세를 맞아 혼란에 빠진다. 663년 天智천황은 황태자 시절에 조정내의 반대를 무릅쓰고 3만 명의 大兵과 400척의 함선을 보내 백제부흥을
지원하도록 한 사람이었다. 일본해군은 백촌강 해전에서 羅唐연합군에게 전멸하다시피했다. 공황상태에 빠진 일본은 대마도와 큐슈, 그리고 近畿지방에
성을 쌓고 羅唐 연합군의 침공에 대비하여야 했다. 대마도에 가면 이때 쌓은 山城이 잘 보존되어 있다. 단기간에 쌓은 성으로서는 매우 크다.
그만큼 일본인들의 공포감이 컸다는 이야기이다.
그런데 신라가 세계제국인 唐과 싸움을 시작하자 일본의 입장이 달라졌다. 唐은
일본측에 사절단을 보내 함께 신라를 견제하자고 하고, 신라도 일본에 사절단을 보낸다. 당과 신라는 경쟁적으로 한때의 敵國이던 일본에 손을
내민다. 親백제 정책을 폈다가 실패하여 안보위기를 부른 天智천황하의 일본조정에서는 세계제국을 상대로 통일전쟁 겸 독립전쟁을 벌이는 신라를 도와야
일본의 안전이 도모된다는 생각이 확산된다.
만약 신라가 唐에 복속해버리면 신라와 당의 연합군이 일본을 칠 것이다. 해군력에서 당과
신라에 비교가 되지 않는 일본은 훗날 몽골과 고려 연합군에게 당했던 것 이상으로 대타격을 받을 것이다.
외교정책을 둘러싼 갈등이
벌어지는 가운데 일본 고대사 최대의 반란이 일어난 것이다. 壬申의 亂은 신라가 당을 상대로 영웅적인 독립전쟁을 벌이고 있을 때인 672년에
발생했고, 親新羅 집단이 승리했다. 많은 일본학자들의 연구결과 勝者인 천무천황 자신이 신라계 도래인인 出雲系이며 그를 지원한 東國의 세력도
신라도래인계통이고, 따라서 天武천황 집권 이후 30년 간 일본과 신라는 밀월관계에 들어간다. 그렇다면 天武천황이 편찬을 지시한 日本書紀는
한일관계가 좋을 때 쓰여졌는데도 왜 이토록 신라를 저주하고 있는가. 이 미스터리를 추적한 것이 ''壬申의 亂의 수수께끼''이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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