鶴山의 草幕舍廊房

Faith - Hymn

[스크랩] 소망에 대하여 (5): '소망'과 '바라다'

鶴山 徐 仁 2005. 8. 6. 21:30

 

'소망(所望)'의 진득한 뜻이 무엇인지 알아보려고 그와 관련된 낱말들을 비교적 샅샅이 조사했습니다. 

 

희망(希望)은 그다지 좋은 말이 아니었습니다.  희(希)의 뜻이 망(望)과 그다지 잘 어울리지 않는 데다가, 졸속으로 만든 일본식 한자어이기 때문입니다.  그 뜻도 이루어질 것인 확실치 않은 것을 감정적으로 원하는 것일 뿐입니다. 

 

잉어 호프(hope)도 그다지 정확한 말이 아니었습니다.  호프는 익스펙테이션보다는 앤티시페이션에, 그리고 망(望)보다는 희(希)에 더 가까운 뜻이기 때문입니다.

 

신약 성경의 '엘피스(Elpis)'는 소망이라는 말로 가장 잘 번역될 수 있다는 점도 보았습니다.  심지어 소망은 엘피스 보다도 더 엘피스적인 말이라고 해도 지나치지 않을 정도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교의 소망이 무엇인지 살피려면 희망이나 호프나 엘피스보다도 '소망'이라는 말의 깊은 뜻을 잘 헤아려 보는 것이 좋겠다고도 했습니다.

 

그런데 한가지 빼먹은 말이 있습니다.  그것은 한국말 '바라다'입니다.  내참, 빼먹을 게 따로 있지.  물론 나름대로 이유는 있었습니다.  '바라다'는 희(希)와 망(望)과 원(願)의 새김으로 두루 쓰여온 말입니다.  그래서 '바라다/바람'의 뜻이 지나치게 포괄적이어서 개념화하기가 쉽지 않겠다는 선입견을 가졌던 것이지요.

 

하지만 반드시 그런 것은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습니다.  coolwise님(일명, 콰이씨앤(快賢) 슨상님)의 말씀이 직접적인 계기가 됐지요.  '소망'에 해당하는 한국 고유 개념은 없는거냐는 질문이셨습니다.  그래서 관심을 새롭게 해서 다시 한번 살폈습니다.  그랬더니 한국말 '바라다'에도 만만찮은 깊은 뜻이 있더군요.  오늘은 그 얘기를 좀 해보겠습니다.

 

지금까지 국어학자들이 제시한 어원조사에 따르면 한국말 '보름'과 '바라다'는 어원이 같습니다.  둘 다 '밝다'의 어간 '밝'에서 나온 말이라고 합니다.

 

이건 참 재미있는 현상입니다.  망(望)이라는 한자가 '보름 망'으로도 새겨지고 '바랄 망'으로도 새겨지는 것은 이미 알고 있는 사실입니다.  그런데 그 새김에 해당하는 '보름'과 '바라다'의 어원이 같다는 것입니다.  참, 신기한 일이지요.  그게 뭐 그리 신기한 일이냐구요?

 

하나의 한자는 대개 두 개 이상의 새김을 갖습니다.  그럴 때 그 새김들은 대체로 어의적인 연관성을 갖거나 배경적인 연관성을 가집니다.  새김끼리 어의적으로 연결된다는 것은 일차적 새김이 논리적으로 확대되거나 연장되어서 이차적인 새김이 된다는 말입니다.  어의적 연관성의 예로 희(希)자를 들 수 있습니다. 

 

희(希)의 새김에는 '성길 희'와 '드물 희'와 '바랄 희'가 있습니다.  '성기다'와 '드물다'와 '바라다'는 논리적으로 연결될 수 있습니다.  '성기게 짠 옷감이니까 드물고, 드무니까 사람들이 바란다'는 것이지요.  그러나 세 새김이 논리적으로 연결된다고 해서 반드시 그들이 어원을 공유하는 것은 아닙니다.  한국말 '성기다'와 '드물다'와 '바라다'는 어원적으로는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새김이 배경적인 연관성을 갖는다는 것은 그 사이에 논리적인 연관성은 없지만 그 배경을 이룬 역사적 사건이나 설화, 문학작품 등을 통해서 연결된다는 말입니다. 

 

 한가지 예로 '소 우(牛)'자를 들 수 있습니다.  한자 사전에서 우(牛)를 찾아보면 '별 이름 우'라는 새김이 있습니다.  '소'와 '별'은 아무리 머리를 쥐어 짜 보아도 논리적으로 연결시킬 수가 없습니다.  어떻게 소가 별 이름이 될 수 있는 것일까요? 

중국 송나라때 시인 소식(蘇軾)의 <적벽부(1082)>의 한 구절을 기억하면 실마리를 얻을 수가 있습니다.  그 작품의 거의 앞부분에 보면 이런 표현이 나옵니다.

 

"달은 동산 위로 떠올라서 남두육성과 견우성 사이를 배회한다
(月出於東山之上 徘徊於斗牛之間)"

 

여기서 소 우(牛)자는 '소'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견우성'이라는 별 이름입니다.  '견우' 하면 당연히 생각나는 이름이 또 있습니다.  견우의 애인 '직녀'입니다.  (견우의 애인은 '엽기적인 그녀'라구요?  으음.  동일 인물일지도 모르지요.) 

 

<견우와 직녀>는 중국 설화인데, 소먹이는 청년과 베 짜는 처녀의 슬픈 사랑이야기지요.  이 둘은 일년에 딱 한번 칠월칠석에 은하수 건너 만나기로 돼 있었지요.  소동파가 적벽부를 읊은 게 1082년 음력 7월16일이었으니까, 견우성과 직녀성은 만났다가 다시 헤어지기 시작하던 때였겠습니다.

 

참고로 두우지간(斗牛之間)이라는 표현의 두(斗)는 북두칠성(北斗七星)이 아니라 남두육성(南斗六星)을 가리킵니다.  북두칠성은 겨울 별자리니까 음력 7월에는 볼 수 없기 때문입니다.  중국 전설에서 남두육성은 사람의 태어남을 관장하는 신선을 상징하는데, 서양식 별자리에서는 궁수자리(Sagittarius)의 일부로, 북두칠성보다는 조금 작은 국자모양입니다.  국자 손잡이를 이루는 별이 세 개이기 때문에 손잡이가 네 개로 된 북두칠성과 다릅니다.

 

견우성은 서양식 별자리 독수리자리(Aquila)의 으뜸별인 알타이르(Altair)이고, 직녀성은 거문고자리(Lyra)의 으뜸별인 베가(Vega)입니다.  견우성은 독수리자리의 알타이르가 아니라 염소자리(Capricornus)의 으뜸별인 알게디(Algedi)라고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래야만 남두육성과의 거리가 가깝기 때문에 소식이 정확하게 달의 위치를 노래하고 있던 것을 알 수 있다는 군요.  전문가가 아닌 저로서는 그저 그런가 보다 할뿐이지요.

 

아무튼 이게 바로 소 우(牛)자가 별자리 이름으로도 새겨지는 까닭입니다.  <견우직녀> 설화와 소동파의 <적벽부>가 있었기에 그걸 배경으로 생겨난 새김입니다.  '소'라는 일차적인 새김이 논리적으로 확장되어서 만들어진 게 아니라는 말이지요.  당연히 '소'라는 새김과 '별'이라는 새김은 어원을 공유할 까닭이 없습니다.

 

이렇게 한 한자의 서로 다른 새김이 어원을 공유한다는 것은 매우 드문 일입니다.  그런데 망(望)의 두 새김, '보름'과 '바라다'는 그 한국말 어원이 같습니다.  둘 다 '밝다'에서 나온 말입니다.  국어학자들에 따르면 '밝다'의 어간 '밝'에 명사화 접미사 '암'(아래아)이 붙어서 '밝암'(둘다 아래아)이 됐는데, 이로부터 세 갈래의 변화가 일어났다고 합니다. 

 

첫째는 오늘날의 '밝음'으로 진화된 것입니다.  지금도 '밝다(明)'의 명사형입니다.  둘째는 '밝암'(둘다 아래아)의 어간 중 기역(ㄱ)이 탈락하여 '발암'(둘다 아래아)이 되었다가, 두 개의 아래아가 모음변화를 일으켜 '보름(望日)'이 된 것입니다. 

 

셋째는 '밝암'(둘다 아래아)의 기역(ㄱ)이 탈락하고 모음 아(ㅏ)가 첨가되면서 '바라암'(첫째와 세번째 아는 아래아)을 거쳐서 '바람(眺望)'이 된 것입니다.  명사형 '바라암'으로부터 동사형 '바라다'가 생겼습니다.  (최창렬 교수의 <우리말 어원연구(1986)>와 심재기 교수의 <국어 어휘론(1982)>의 내용을 간추린 표준국어대사전 편찬자료를 참고.)

 

사실 세 번째 경로에 대해서는 좀 미심쩍은 부분이 있습니다.  한국 낱말의 형태변화 규칙 중에서 명사형이 먼저 생겼다가 동사가 나중에 생기는 일이 과연 가능했었는지 의문입니다.  게다가 한글 초기문헌 <석보상절>에 보면 이미 '바라다'의 15세기 형태가 ' 라다'이고 뜻으로도 '원(願)하다'와 '바라다(望)'를 둘 다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니 ' 라 '이 ' 라다'를 낳았다는 설명은 문헌증거가 없는 가설이기가 쉽습니다.

 

아무튼 오늘날의 '밝음'과 '보름'과 '바라다'는 모두 '밝다'에서 나온 같은 어원의 낱말들입니다.  '바라다'가 '밝다'에서 나왔다는 것을 알면 상상력을 동원해서 그 깊은 뜻을 미루어 볼 수 있습니다.

 

우선 '바라다'의 최초의 뜻은 '(어떤 쪽으로) 향하다'였을 것입니다.  예컨대 '쳐다보다'라는 말을 봅시다.  '올려다보다'는 뜻입니다.  그렇다면 '치다'는 '(아래에서 위로) 올리다'는 뜻이겠습니다.  그와 같은 구성을 가진 '바라보다' 혹은 '바라다보다'는 '(그쪽을) 향하여 보다'는 뜻이므로 '바라다'는 '(그쪽으로) 향하다'는 뜻이겠다는 것이지요.

 

'바라다'가 일차적으로 '향하다'는 뜻이라는 점은 '해바라기'라는 이름에서도 확인할 수 있습니다.  굴광성인 해바라기의 줄기는 햇빛을 받지 못하는 부분의 생장이 빨라져서 꽃송이는 오히려 해를 향합니다.  물론 그것도 줄기가 굳어지기 전, 광합성이 왕성하게 일어나는 어린 해바라기에서만 볼 수 있는 현상이기는 합니다만.  어쨌든, '해를 바라는 꽃'이라는 뜻으로 해바라기라는 이름을 얻은 것이지요.  그러므로 '바라다'는 '(그쪽으로) 향하다'는 뜻입니다. 

 

그런 점은 '해바라기'의 한자 이름이 향일화(向日花) 혹은 향일규(向日葵)라는 점에서도 다시 한번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 이름은 '해를 향하는 꽃,' 혹은 '해를 향하는 아욱(葵)'이라고 해석되므로, '바라다'는 곧 '향하다'는 뜻이지요.

 

이쯤 해서 '바라다'가 어원적으로 '밝다'에서 파생된 말임을 되새길 필요가 있습니다.  '바라다'는 원래 아무 쪽으로나 향하는 것이 아니라 '밝은 쪽으로 향하다'는 뜻이었기 때문입니다.  지금이야 사정이 전혀 다르지만, 옛날에는 '밝다'는 말은 해나 달 이외에는 적용되지 못했습니다.  '밝을 명(明)'자도 해(日)와 달(月)로만 구성됐으니까요. 

 

그러니 바랄 만한 것이라고는 해와 달, 딱 두 개 밖에 없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밝은 쪽/것으로 향하다'는 말은 '해를 향하다(向日)'거나 '달을 향하다(向月)' 이외에는 다른 가능성이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상당수의 고대 종교가 해나 달을 그 숭배 대상으로 삼았던 것은 놀랄만한 일은 아닙니다.  이집트의 태양신 라(Ra)와 달신 콘스(Khons)가 그렇고, 고대 그리스의 해신 아폴론(Apolon)과 달신 아르테미스(Artemis)가 그렇고, 고대 바빌로니아의 해신 샤마슈(Shamash)와 달신 신(Sin)이 그렇습니다.

 

사실 멀리 갈 것도 없습니다.  고구려 사람들은 돌을 쌓아 무덤을 만들었는데 여기에 여러 가지 벽화를 그려 놓았습니다.  그 중에서 고구려의 두 번째 수도였던 국내성 인근(지금은 중국의 집안 지역)에 마련된 오회분 5호묘에는 무덤의 천장 받침돌에 해신과 달신이 나란히 그려져 있습니다.

 

오회분의 여러 묘에는 해신과 달신 말고도 수레의 신, 농사의 신, 철의 신 등이 그려져 있지만, 해신과 달신은 다른 신들과 뚜렷하게 다른 모습을 갖고 있습니다.  두 신만 긴 꼬리를 갖고 있기 때문입니다.  말하자면 해신과 달신 만은 여타의 신들과는 차원이 다른 초월적인 존재였다는 말입니다.  (벽화 이외에는 이 신화가 기록된 문헌이 없어서 그 해신과 달신의 이름은 전해지지 않습니다.)

 

세상 만물 중에서 딱 두 개, 그러니까 해와 달만이 '바랄 만한 것'이 된 것은 그것이 밝기 때문입니다.  요즘에야 달이 밝은 것은 해 때문이라는 게 널리 알려졌지만 옛날에는 해와 달이 모두 독자적으로 밝은 것으로 알고 있었겠지요.  그러다 보니까 해와 달이 모두 '향할 만한 것' 즉, '바랄만한 것'으로 인식됐겠습니다.

 

이렇게 밝은 것, 즉, 해와 달이 '바랄만한 것'이라고 인식됐던 데에는 까닭이 있었을 것입니다.  밝은 것이 그 자체로 바랄만한 것이기도 했겠지요.  깜깜한 곳에 빛이 나타나면 누구나 저절로 그 쪽을 향하는 경향이 있으니까요.

 

해와 달은 그 자체가 밝기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그 밝음 때문에 사람들에게 바람직한 결과를 가져다줍니다.  우선 밝기 때문에 사물을 분명하게 보여줍니다.  낮의 해는 사물을 분명히 보여줍니다.  시골에 살다보면 그믐밤과 보름밤의 분위기가 완연히 다르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믐밤에는 정말로 아무 것도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실낱같은 초생달이라도 달이 떠 있으면 길이 보입니다.  보름달이면 말할 것도 없지요.  그래서 해와 달이 '바람직'한 첫 번째 까닭은 '사물을 분명하게 보게 해준다'는 것입니다.

 

또 해와 달은 사람들에게 '아름다움'을 느끼게 해 줍니다.  산등성이나 지평선에 떠오르는 해나 바다에 가라앉는 해를 보고 사람들은 아름다움을 느낍니다.  지리산 천왕봉이나 석굴암의 일출과 서해의 낙조는 아름답기 그지없습니다. 

 

달도 마찬가지입니다.  수많은 시문과 노래가 달의 아름다움을 기립니다.  앞에서 든 적벽부에서도 도입부에서부터 달 이야기가 나옵니다.  송강 정철의 가사 관동별곡에서 나오는 강릉 경포대는 아름다운 '다섯 개의 달'로 유명하지요.  하늘의 달, 바다의 달, 호수의 달, 술잔의 달, 그리고 내 님 눈동자에 뜬 달.... (저는 달밤의 경치를 이렇게 간단하면서도 아름답게 묘사한 걸 본 적이 없습니다.)

 

해와 달은 사람들에게 실질적인 '유익함'도 줍니다.  햇빛이 따뜻하기도 해서 영원한 난로역할을 합니다.  열대지방 사람들은 뜨거운 햇빛이 괴로움의 원인일지 모르겠지만, 적어도 적당한 위도 이상에 사는 사람들에게는 햇빛은 꺼지지 않는 난로입니다.  게다가 햇빛은 식물의 신진대사에 절대적으로 필요한 광합성의 촉매일 뿐 아니라, 사람들은 해의 움직임을 통해서 일년과 계절과 하루의 시간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달도 사람들에게 아주 유익합니다.  농사주기를 알려주는 중요한 시계였을 뿐 아니라, 조수의 간만을 짐작하게 하는 기능도 합니다.  한마디로 과학기술이 등장하기 전까지 수 천년 동안 달은 사람들의 주요 생계수단이었던 농업과 어업을 위한 아주 중요한 정보원이었다는 말이지요.

 

이처럼 해와 달은 그 자체가 밝을 뿐만 아니라, 사물을 분명하게 보여주고, 아름다움의 원천이 되고, 실생활에 유익을 줍니다.  그래서 해와 달은 '바랄 만한 것,' 즉 '바람직한 것'으로 인식됐습니다.  사람이 그것을 '향할 만한 대상'이라는 것이지요.

 

해와 달이 모두 '바랄 만한 것'이었다면, 어째서 한국말 '바라다'와 한자 '망(望)'이 해가 아니라 달과 연관돼 있는 것일까요?  그 어원적인 뜻인 '밝다'의 면에서라면 달보다는 해가 훨씬 밝습니다.  그런데도 한국말 '바람/보름'이나 '망(望)은 모두 달과 관련된 뜻을 가집니다.  왜 그랬을까요?

 

그 역시 '바라다'의 일차적인 뜻인 '향하다'와 관련돼 있다고 봅니다.  해는 그 밝기가 사람이 감당하기 어려울 만큼 강렬합니다.  그래서 사람이 해를 향하는 일이 그다지 쉽지 않습니다.  예컨대 일출이나 일몰때가 아니면 사람이 해를 똑바로 바라볼 수가 없습니다.  너무 눈이 부시기 때문입니다. 

 

잉국의 뉴튼이 만년에 급속하게 시력을 잃은 것은 그가 자주 해를 똑바로 쳐다보았기 때문이라지요.  나중에는 유리에 촛불 그을음을 묻혀서 안경처럼 사용하는 법을 알아냈지만 처음에는 멋모르고 해를 육안으로 직접 관찰하느라고 눈을 많이 상했기 때문입니다.  (과학의 길은 참 멀고도 험합니다.)

 

말하자면 해의 빛은 압도적입니다.  그래서 사람이 해를 향하기란 상당히 어렵습니다.  그러나 달은 사람이 부담없이 향할 수 있습니다.  직접 바라볼 수 있습니다.  아마도 그런 차이 때문에 '밝은 것을 향하다'는 뜻의 '바라다/바람/보름/망(望)'이라는 어의군이 주로 해가 아니라 달과 연관된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그런데 '바라다(望)'에는 '향(向)하다'는 뜻 말고도 '원(願)하다'는 뜻도 있습니다.  <석보상절>에도 그런 용법이 나타난 걸 보니까, 이미 15세기 한국어에서는 '바라다'가 '원하다'는 뜻으로 사용하는 관행히 정착된 것으로 보입니다. 

 

아마도 '원하다'는 '향하다'에서 파생된 뜻일 것입니다.  사람이 어딘가 혹은 어떤 것으로 '몸'을 향하는 것이 '바라다'의 일차적인 뜻입니다.  '원하다'가 '바라다'의 이차적인 뜻이 된 것은 '몸'이 아니라 '마음'을 그쪽으로 향하기 때문이겠습니다.  마음을 무언가로 향한다는 것은 곧 그것을 '원한다'는 뜻일 것이기 때문입니다.

 

몸을 향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마음을 향하는 것도 세 가지 이유 때문입니다.  그쪽이 '분명/확실'하고, '아름답고,' 실질적으로 '유익'하기 때문입니다.  사실 우리가 뭔가를 '원'할 때에는 대개 그런 이유 때문입니다.  숲 속의 새 열 마리보다 내 손의 새 한 마리를 더 원하는 것은 그것이 확실히 내 것이기 때문이지요.  예쁜 여자나 멋있는 남자, 좋은 옷이나 보석을 원하는 것은 아름다움 때문입니다.  그리고 양식이나 돈이나 명예나 권력이나 하나님을 원하는 것은 그것이 나의 육체적/정신적/영적인 삶에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바라다'의 원래 뜻은 '몸을 밝은 쪽으로 향하다'는 것이었지만, 요즘은 '분명하고 아름답고 유익한 쪽으로 마음을 향하다, 곧 그런 것들을 원하다'는 뜻을 갖게 된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바람/망(望)'의 근본적인 뜻입니다.  모든 '바람'과 '소망'은 근본적으로 밝고, 분명하고, 아름답고, 유익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지금 그리스도교의 소망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중입니다.  만일 '바람(所望)'이 '마음을 밝은 쪽으로 향하다'는 뜻이라면, 그리고 더 나아가서 '마음을 확실하고 아름답고 유익한 쪽으로 향하다'는 뜻이라면, 그리스도교의 소망도 그런 성격을 갖는 것일까요?

 

저는 그렇다고 봅니다.  사람이 소망을 갖는 것은 확실한 것을 바라는 것입니다.  확실하지 않은 것을 막연히 바라는 것은 '희망'입니다.  그러나 소망은 깊은 생각을 통해 확실하고 분명하다고 여겨지는 것을 바라는 것이지요.  그리스도교의 소망은 확실합니다.  허다한 증인들이 말과 행동으로 증언해 온 것이기 때문이고, 성경이 그렇게 증언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교의 소망은 아름다운 것입니다.  그것은 소망을 가진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의 삶을 비교해 보면 금방 알 수 있습니다.  소망을 가진 사람의 삶은 지저분하지 않지요.  돈과 명예와 권력을 위해서라면 이전투구도 마다하지 않는 사람은 하나님 나라의 소망을 갖지 못한 사람입니다.  그러나 하나님 나라의 소망을 가진 사람은 세상살이에 상당히 유연하고 관대하고 여유가 있습니다.  언제나 확실한 비빌 언덕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교인이라고 말하면서도 소망이 없는 것처럼 사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불교식으로 말하면 삼독(三毒), 즉 탐욕(貪)과 분노(瞋)와 어리석음(癡)에 빠져서 허부적 거리는 사람들입니다.  목회자나 신학자라는 사람들 중에서도 삼독에 빠진 사람들이 적지 않습니다.  무슨 무슨 장(長)자리 한번 하겠다면서 회유하고 협박하고 매수하고 협잡을 서슴지 않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분명 소망이 없는, 입으로만 그리스도인일 뿐입니다. 

 

소망을 갖지 못하면 그리스도인다운 아름다운 삶을 살지 못하는 것은 당연합니다.  그리스도교의 아름다움의 원천은 바로 그 소망이기 때문이지요.

 

그리스도교의 소망을 가지면 실생활에서도 유익한 점이 많습니다.  무엇보다도 현실의 고통과 부조리와 불의에 압도당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고통과 부조리와 불의를 수동적으로 마냥 받아들이기만 하는 것은 아닙니다.  무던히 참되, 그 참는 이유는 그런 고통과 부조리와 불의를 고쳐놓을 수 있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그런 소망에 대한 믿음 때문에 고통을 견딜 수 있고 불의와 부조리에 대항해서 싸울 수 있는 것이지요.  소망은 그런 인내와 싸움의 과정에서 실질적인 힘을 줍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이라고 하면서 사람과 삶이 음습하면 그것은 소망이 없는 것입니다.  생각과 판단과 행동이 분명하지 못하고 흐리멍덩한 것도 소망을 가진 사람의 사고방식이나 행동방식이 아닙니다.  사람의 분위기나 삶이 아름답지 못하면 그것도 소망을 갖지 못한 것입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스스로나 주위 사람들과 사회 일반에 유익함을 주지 못하면 그 역시 소망 있는 그리스도인의 삶이라고 하기 어렵겠습니다. 

 

왜냐하면, 한국 고유어 '바람'과 한자어 '소망'의 원래적인 의미는 '자기 마음을 밝고, 분명하고, 아름답고, 유익한 것으로 향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평미레 드림.


 
가져온 곳: [평미레]  글쓴이: 평미레 바로 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