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글에서는 희망(希望)과 소망(所望)의 뜻이 어원적으로 많이 다름을 보았습니다. 이번에는 두 낱말의 조어법과 용례를 찾아보면서 차이점을 조금 더 확실하게 살피려고 합니다.
비록 희망(希望)에도 망(望)이 들어 있지만, 사실 희(希)자와 망(望)자는 그렇게 서로 잘 어울릴 수 있는 말들이 아닙니다. 격이 맞지 않는다는 말이지요. 그래서 한국말 성경에서도 그냥 소망(所望)이라고 썼습니다. '바라는 바'라는 뜻입니다. 그것으로 필요하고도 충분합니다. 희(希)자의 도움을 받을 까닭이 전혀 없다는 말입니다.
사실 망(望)을 희(希)와 같이 쓰면 그 본래 뜻이 사뭇 달라져 버립니다. 희(希)의 뜻이 세 가지라는 건 앞에서 봤습니다. 첫 번째는 '성기다'이고 두 번째는 '드물다'입니다. 그리고 세 번째에 가서야 '바라다'는 뜻이 나옵니다.
희망(希望)의 희(希)가 첫 번째나 두 번째 뜻이라면 희망의 뜻이 영판 달라져 버립니다. '성기다'와 '드물다'는 모두 형용사이므로 명사 '바람(望)'의 수식어가 되어야 합니다. 그러면 '성긴 바람' 혹은 '드문 바람'이 됩니다. 그래서 '거의 바랄 수 없음'이라는 뜻이 돼 버립니다. 오늘날 쓰이는 뜻과는 오히려 반대의 뜻이 돼 버리잖습니까? 아무리 넉넉하게 접어주더라도 '바랄 수는 있지만 이루기는 어려운 것'이라는 정도의 뜻에 머물고 맙니다.
세 번째 뜻이라면 같은 말의 반복입니다. '바라고 바라는 것'이 됩니다. 같은 뜻이라면 굳이 반복할 필요가 뭐가 있겠습니까? 망(望)자가 '경험과 판단에 비추어 미래를 확신하며 준비하고 기다린다'는 뜻이라면, 거기다가 굳이 물욕과 허영의 뜻이 밴 희(希)자를 덧붙일 이유가 없다는 말입니다.
그런데도 요즘은 소망보다는 희망이 압도적으로 많이 쓰입니다. 국립국어연구원이 표준국어대사전을 편찬하면서 비교적 근래의 낱말 사용 빈도를 조사한 자료가 있습니다. 거기 보면 같은 분량의 문헌에서 '소망'은 41번만 사용됐지만 '희망'이라는 말은 183번이나 나옵니다. 현대 국어에서는 희망이 소망보다 4배 이상 더 자주 쓰이고 있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조금만 거슬러 올라가서 일제시대 직전까지만 가더라도 조선이나 대한제국 시대의 한글 문헌에서는 '희망'이라는 말은 찾아보기가 어렵습니다. 이를 확증하기 위해서라면 1894년에 편찬된 <한불자전>이나 1897년에 편찬된 <한영자전>에 '소망'과 '희망'이 어떻게 수록돼 있는지를 찾아 보는 게 좋겠는데, 불행히도 제가 지금 그 책들을 갖고 있지 않습니다. 아마 '소망'은 있지만 '희망'은 표제어로 수록돼 있지 않을 것이라는 것이 제 짐작이고 가설입니다. (그 책을 갖고 계시거나 찾아보실 수 있는 분은 시험 삼아 제 가설을 좀 검증해 봐 주시면 참 감사하겠는데요...)
사실 '소망'이라는 말은 한국식 조어법에 익숙합니다. 동사나 형용사 앞에 '바 소(所)'자를 붙여서 '--한/하는 바'이라는 형식으로 구성된 한자어의 예가 한국말에는 아주 많습니다. 얼른 생각나는 대로 몇 가지만 예로 들어도 이만큼은 됩니다. (다 국어사전에 있는 말입니다.)
소중(所重-중요한 바/것),
소원(所願-원하는 바/것),
소기(所期-기대하는 바/것),
소속(所屬-속한 바/사람),
소임(所任-맡은 바/것)
소신(所信-믿는 바)
소감(所感-느낀 바)
소견(所見-본 바, 관찰한 바)
소실(所失-잃어버린 바/것-주로 노름에서),
소솔(所率-딸린 바/사람-주로 식구를 가리킬 때),
소친(所親-친한 바/사람-친구를 가리킴)
소론(所論-논한 바)
소설(所說-주장하는 바/것)
소칭(所稱-일컫는 바)
소입(所入-들어간 바/것-어떤 일에 들어간 비용이나 노력)
(굵은 글씨로 쓴 낱말은 우리에게 아주 익숙하고 일상생활에서 자주 쓰이는 말들입니다.)
말하자면 희망(希望)보다는 소망(所望)이 전통과 전례가 있는 한국식 한자어라는 말입니다. 모르긴 몰라도 희망(希望)은 일본식 한자어일 가능성이 매우 높습니다. 문헌 조사를 해 보지 않은 상태에서 좀 위험한 주장이기는 하지만 그런 추측을 할 수 있는 근거는 있습니다.
한국에서 그 말이 쓰이기 시작한 것이 일제 강점기라는 점, 그리고 희망(希望)의 한자어 조어법이 엉성하다는 점이 그것입니다. 일본은 메이지유신 이후 서양 문물을 너무 급격하게 받아들이다 보니까 그걸 일일이 소화하는 일이 버거웠나 봅니다. 주로 한자어로 서양 용어를 번역해 냈는데 시간이 모자라고 전문 인력이 모자라서 그랬는데 졸속 번역이 참 많습니다.
경제(經濟)니, 사회(社會)니, 철학(哲學)이니, 자유(自由)니 하는 말들이 다 그런 졸속 번역들입니다. 각 한자들의 어원과 역사적 용례를 면밀하게 따져서 만든 말들이 아닙니다. 얼른 생각에 '그럴 듯 하다'고 생각되면 채택했다가 굳어진 말들이 많습니다.
그런 졸속의 폐단은 무지하게 큽니다. 서울대 국문학과의 조동일 교수님은 일본에는 '일본 철학사가 없다'는 점을 지적하셨더군요. 개념이 제대로 세워지지 않았는데 체계화된 사상이나 철학을 일궈 낼 수가 없는 것이지요. 저는 일본에 제대로 된 철학이 없는 까닭을 그렇게 봅니다.
그러나 한국 사람들은 철학할 줄 압니다. 생각도 깊습니다. 오죽하면 중국 사람들도 손놓아 버렸던 기(氣) 철학을 끝까지 부여잡고 완성시킬 수 있었겠습니까? 혜강 최한기 선생의 작업이 바로 그것입니다. 그런 한국 사람들이 일본 사람들의 '대충 개념' 때문에 사유와 철학하기에 불편을 겪어야 한다는 게 저는 무척 억울합니다.
*미안할 수밖에 없는 텅 빈 희망(希望)
아무튼 희망(希望)은 그리 적당한 조어(造語)가 아님이 분명합니다. 그래서 그런지 희망(希望)이라는 말은 거의 절망(切望)이나 낙망(落望)과 비슷한 뜻으로 쓰이기까지 합니다. 1920년대의 '희망가'가 그 한가지 예라면, 1980년대 말의 <잎 속의 검은 잎>은 또 다른 예가 됩니다.
1989년 봄, 종로 2가의 한 심야극장에서 서른도 안된 나이로 숨을 거둔 시인 기형도의 유고시집 이름이 바로 <잎 속의 검은 잎>입니다. 제가 메국으로 건너올 때 챙겨온 유일한 시집이었는데, 시집 전체가 어두우면서도 강렬한 비장미를 띠고 있습니다. 하나하나의 작품들도 대체적으로 절망(切望)을 노래한 시들입니다. 기형도 시인의 대표작에 속하는 <정거장에서의 충고>는 이렇게 시작됩니다.
미안하지만 나는 이제 희망을 노래하련다.
(<정거장에서의 충고>의 첫 줄, 잎 속의 검은 잎, 1989)
그리고 그의 다른 시 <오래된 서적>의 도입부에도 다시 한번 희망 이야기가 나옵니다.
내가 살아온 것은 거의
기적적이었다.
오랫동안 나는 곰팡이 피어
나는 어둡고 축축한 세계에서
아무도 들여다보지 않는 질서
속에서, 텅 빈 희망 속에서
어찌 스스로의 일생을 예언할 수 있겠는가
(하략) (<오래된 서적>에서, 잎 속의 검은 잎, 1989)
희망을 노래하는데 뭐가 미안한 것일까요? 어째서 그의 희망은 텅 빈 것일까요? 그것은 바랄 수 있는 것이 전혀 없는데도, 아니, 바랄 수 있는 것이 전혀 없기 '때문에,' 희망을 붙잡고 있어야 했기 때문입니다. 감수성 예민한 시인이라면 당연히 느꼈을 80년대의 분위기가 바로 그랬습니다. 희망을 노래하고 싶은데 그 희망이 이루어질 가능성은 없다고 이미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자기도 믿지 못하는 바를 희망으로 삼아야 하는 시인의 비애... 그런 텅 빈 희망 때문에 기형도 시인은 미안했던 게 아닐까 싶습니다.
생을 마감하기 직전, 그해 가을 출판을 위해 써 놓았던 <희망>이라는 시에서 기형도 시인은 마침내 이렇게 읊었습니다.
이젠 아무런 일도 일어날 수 없으리라
언제부턴가 너를 생각할 때마다 눈물이 흐른다
이젠 아무런 일도 일어날 수 없으리라
그러나
언제부턴가 아무 때나 나는 눈물 흘리지 않는다
(<희망> 전문, <기형도 전집> 중에서 <사랑을 잃고 나는 쓰네>, 1999)
그는 희망을 생각하며 눈물을 흘리곤 했는데, 그건 "이젠 아무런 일도 일어날 수가 없"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그러자 결국 그 눈물마저 말라버렸습니다. 그렇지만 그건 기형도 시인의 잘못이 아닐지도 모릅니다. '희망'은 원래 그런 것입니다. '바랄 수는 있겠지만 이루어지기 어려운 것'입니다.
일제 강점기의 조선 민중이나 80년대의 기형도 시인이 가졌던 느낌은 기본적으로 같습니다. 좌절의 늪에 빠진 사람, 그걸 딛고 일어설 수 있는 조건이나 의지가 모자라는 사람들이 가질 수 있는 것이라고는 희망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소망은 다릅니다. 소망은 앞으로 올 것을 확실히 알면서 바라는 것입니다. 어려운 조건에 처했더라도 낙심하지 않습니다. 지금 조건이 좋다고 방심하지 않는 것입니다. 생각을 가다듬으면서 때를 기다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바람이 이루어질 것을 대비해서 오늘을 노력하는 것입니다.
그게 바로 소망(所望)입니다.
그런 소망이 해방도 이루고, 경제발전도 이루고, 민주화도 이룹니다.
그리고, 한국 교회를 제대로 세우는 일도
그런 '소망' 때문에 이루어질 것이라고 저는 믿습니다.
속절없는 '희망' 때문이 아니라....
평미레/
조정희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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