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과 '아이(愛)'와 '러브(love)'와 '아가페(agape)'에 대한 이야기를 이제 거의 다 했습니다. 서양의 '러브'는 '짜릿하게 기분 좋은 것'입니다. 한자 문화권의 '아이'는 '힘들어도 참는 것'입니다. 한국의 '사랑'은 '어여삐 여기며 따스하게 헤아려 주는 생각'입니다.
그래서 '러브'는 '짜릿한 느낌'을 강조한 개념입니다. '아이(愛)'는 '굳은 뜻'을 강조한 개념입니다. '사랑'은 '깊은 생각'을 강조하는 개념입니다. 생각과 느낌과 뜻은 모두 사람 마음의 움직임입니다. 그래서 흔히 생각과 느낌과 뜻을 마음의 세 차원, 혹은 마음의 세 작용이라고들 합니다.
이런 마음의 작용/차원을 가리키기 위해서 우리는 지정의(知情意)라는 말을 쓰곤 합니다. 지금도 전인격적인 상태를 가리키기 위해 자주 그 말을 씁니다. 그러나 저는 그 말을 별로 좋아하지 않습니다. 생각해 보면 그다지 정확한 말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우선 지(知)는 '생각'을 가리키는 게 아니라 생각의 결과로 나타나는 '앎'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한문을 배울 때도 '생각 지(知)'라고 하지 않고 '알 지(知)'라고 합니다. 게다가 '앎'은 생각의 결과뿐 아니라 느낌이나 뜻의 결과이기도 합니다. 앎은 깊은 생각을 통해서 얻어지는 것이기도 하지만 섬세한 느낌과 굳은 뜻을 통해서도 얻어질 수 있다는 말이지요.
지(知)가 마음의 작용이나 차원을 가리키는 말이 아니라는 결정적인 증거가 있습니다. 지(知) 자에는 마음 심(心)이 붙어 있지 않다는 점입니다. '앎(知)'은 마음 작용이 객관적으로 구체화된 결과물이지 마음 작용 그 자체가 아니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생각'을 가리키기 위해서는 지(知)라는 말을 써서는 안되고 그보다는 생각 사(思)를 쓰는 것이 맞습니다.
지정의(知情意)에서 의(意)자에도 문제가 좀 있습니다. 여기서 의(意)자는 의지(意志)라는 뜻으로 쓰였습니다. 즉 서양식의 '윌(will)'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하지만 서양식 '윌(will)' 개념을 가리키는 말은 한자 지(志)이지 의(意)가 아닙니다. 현대 중국어에서도 서양식의 '윌(will)'은 항상 '쯔'(志, zhi4)로 번역되지 '이'(意, yi4)로 번역된 예는 단 한 건도 없습니다. '쯔' 하나로 표현하기에 음절상의 부족함이 느껴지기 때문에 '이쯔'(意志, yi4zhi4)라는 말을 만들어 쓰기는 합니다만, 여전히 강조점은 '이'가 아니라 '쯔'에 있습니다.
의지(意志)의 '의(意)'는 '잘 생각해서 다져 먹은 마음'이라는 뜻으로 강조된 것에 불과합니다. 그건 '이쓰(意思, yi4si3))라는 말이 있다는 점에서도 확인됩니다. 의사(意思)는 '의지와 생각'이라는 말이 아니라 그냥 '생각'이라는 말이니까요. 그러니까 서양식의 '윌' 혹은 우리가 관습적으로 쓰는 의지라는 말을 가리키려면 의(意)가 아니라 지(志)를 써야 하는 것이지요.
그러면 지정의(知情意)라는 말은 사정지(思情志)라는 말로 바꿔 써야 본래 의도에 가장 잘 들어맞습니다. 사(思)와 정(情)과 지(志)는 모두 '마음 심(心)'을 부수로 갖고 있습니다. 그 모두가 마음의 작용이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그 각각의 글자는 '생각과 느낌과 뜻'이라는 마음의 상이한 작용을 잘 가리킬 수 있습니다.
그런데 지정의(知情意)를 사정지(思情志)로 바꾸기 전에 한가지 더 생각해 볼 것이 있습니다. 15세기부터 19세기에 이르는 조선 언어학에서는 정(情)과 지(志)가 모두 '뜻'이라고 새겨졌다는 점입니다. 그리고 '뜻'이라는 새김을 갖는 한자가 또 하나 있습니다. 그게 바로 '뜻 의(意)'자 입니다.
조선의 언어학 책 중에는 수만 개의 한자 중에서 중요한 것을 뽑아서 그 새김(訓)과 발음(音)을 정리해 놓은 것이 많습니다. 각종 천자문이나 훈몽자회, 유합 등의 책들이 바로 그런 책들입니다. 예컨대 천지(天地)자를 써 놓고서 '하늘 천 따 지' 하는 식으로 설명을 달아 놓은 것이지요. 한자와 그 음훈(音訓)을 가르치기 위한 방법이었지만 요즘은 그 한자를 설명하기 위해 사용한 한글이 국어학 연구의 아주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습니다.
아무튼 15세기에서 19세기까지 출판된 조선의 음운/어의학 책들은 의(意)자와 정(情)자와 지(志)자를 일관되게 같은 새김으로 풀었습니다. 모두 '뜻 의(意)'와 '뜻 정(情)'과 '뜻 지(志)'로 정리한 것이지요. 그밖에는 다른 어떤 한자도 '뜻'이라는 새김으로 풀린 글자가 없습니다. 그러니까 조선 음운/어의학에서는 오로지 의(意)와 정(情)과 지(志)의 세 글자만 '뜻'이라는 뜻으로 설명되고 있었던 것이지요.
이런 사실로부터 우리는 한국말 '뜻'은 '마음의 작용 일반'을 가리키는 말로 두루 쓰였다는 점을 알 수 있습니다. 마음의 작용이기만 하면, 그 차원과 종류에 관계없이, 모두 '뜻'이라고 표현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생각도 뜻이고 느낌도 뜻이고 의지도 뜻이었던 것이지요.
그런데 오로지 의정지(意情志)의 세 글자'만' '뜻'이라고 새겨졌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정(情)은 느낌의 뜻이고 지(志)는 의지의 뜻입니다. 그러면 나머지 또 하나의 뜻인 의(意)는 무슨 뜻이었을까요? 그게 바로 '생각의 뜻'이었을 것이라는 게 제 생각입니다. 느낌과 의지를 뺀 나머지 마음 작용은 바로 생각이니까요.
느낌이라는 뜻으로는 감(感)이나 각(覺)이라는 글자가 있었지만 가장 근본적이고 중요한 느낌은 정(情)이라고 해석했던 것이 조선 어의학의 입장이었던 것 같습니다. 말하자면 정(情)이라는 개념으로 감(感)이나 각(覺)의 개념을 포함할 수 있다고 본 것이지요. 그와 마찬가지로 생각이라는 뜻으로 사(思)라는 글자가 있었지만 그보다는 의(意)가 더 근본적이고 중요하다고 보았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사(思)가 아니라 의(意)자에 '뜻'이라는 새김을 주었을 것이라는 게 제 추측입니다.
그래서 조선시대 언어학자들의 생각을 존중한다면 사정지(思情志)보다는 의정지(意情志)가 더 좋은 표현이겠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저는 '생각과 느낌과 뜻'을 뭉뚱그리는 말로 지정의(知情意)나 사정지(思情志)가 아니라 의정지(意情志)라는 말을 쓰기로 한 것입니다. 그리고 의정지를 순 한국말로 번역하면 그냥 '뜻'이 됩니다.
새삼 마음의 작용이니, 의정지(意情志)같은 말을 늘어놓게 된 것은 '사랑' 개념을 더 잘 이해해 보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사랑'이라는 말은 우리가 늘상 쓰는 말이고 누구나 그 뜻을 잘 알고 있다고 믿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그런 이해가 부정확하거나 모자라는 게 사실입니다.
그래서 이 글에서는 한국말 '사랑'이 중국말 '아이(愛)'나 서양말 '러브(love)'와 같은 말인 것처럼 쓰이지만, 사실은 그 원래 뜻이 사뭇 다르다는 점을 보였습니다. 그리고 그 '다름'은 의정지(意情志)의 세 마음 작용 중에서 어디에 강조점을 두었는지에 따라 나타난 것임도 보였습니다. '사랑'은 원래 '깊은 생각'에 바탕을 둔 것이고 '아이'는 어원적으로 '굳은 뜻'을 강조한 개념인 반면에, '러브'는 원래 '짜릿한 느낌'을 내세우는 말이었습니다.
그런 어원적인 차이에도 불구하고 요즘은 그 세 가지가 모두 '러브'로 흡수되는 경향이 있다는 점도 이야기했습니다. 요즘은 한국의 '사랑'이거나 중국의 '아이'이거나 모두 서양의 '러브'를 추종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런 경향은 말이 사회 상황을 반영한다는 증거가 될 수 있겠습니다. 적어도 19세기 이래 지금까지 한국과 중국에는 하도 서양의 것이 판을 치니까 이제는 개념까지 서양의 것으로 흡수되거나 대체되는 것이지요.
그런 경향을 그냥 바라만 보고 있을 수만은 없습니다. 적어도 저 같은 사람은 그렇습니다. 그건 제가 유별난 사람이어서가 아닙니다. 말을 사용하는 언중(言衆)의 심중을 좀 읽을 수 있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 한국이나 중국의 일반 언중은 무의식적으로나 혹은 잠재의식적으로 그런 경향에 저항하고 있습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무분별하게 '사랑'과 '아이(愛)'를 '러브(love)'와 혼동하는 것 같으면서도 좀 더 깊이 들여다보면 그런 경향에 저항하는 면도 보입니다.
예를 들어 중국에서는 극장마다 '러브 석(席)' 혹은 '러브 코너'를 마련해 두고 있다는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런 낱말을 글로 쓸 때에는 어쩔 수 없이 '애석(愛席)'이라고 할지는 몰라도 말로 할 때에는 굳이 외래어를 그대로 써서 '러브 코너'라고 부릅니다. 얼른 보아서는 무분별한 외국어 사용이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러브'와 '아이'를 헷갈리지 않으려는 무의식적인 노력이라고 볼 수도 있습니다.
한국에도 그런 게 있습니다. 연인들이 '잠시 쉬었다(?) 가는 곳'을 '러브호텔'이라고 부릅니다. 그런 여관이나 호텔을 '사랑의 보금자리'라고 부르는 걸 아직 보지 못했습니다. 그것은 한국의 언중이 무의식적으로 혹은 잠재의식적으로 그런 호텔에다가 '사랑'이라는 말을 붙일 수 없다고 느끼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냥 '러브'나 하는 호텔이라고 부르는 것이지요.
이런 언중의 생각과 느낌을 대변해 주는 학자들이 그다지 많지 않습니다. 오히려 서양 문물에 압도당한 동양의 학자들은 오히려 서양화를 부추기는 역할을 하는 게 대부분입니다. 저는 그러기가 싫을 뿐입니다. 언중들의 눈 높이에서 그들이 쓰는 말과 그 뜻을 살펴보고 싶은 것이지요.
끝으로 '성경의 아가페'가 무슨 뜻인지 살펴봤습니다. 그것은 제가 그리스도인이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개역 한글판 성경에는 한국말의 뜻과 그 용례가 본래대로 잘 사용됐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성경의 뜻을 잘 이해할 수 있을 뿐 아니라 한국말의 뜻도 잘 되짚어 볼 수 있는 것이지요.
성경의 아가페는 중국의 아이(愛)처럼 '힘들어도 참는 것'입니다. 즉 고린도전서 13장은 '굳은 뜻'으로서의 사랑을 여러 번 강조했지요. 하지만 그 '참는 의지'는 강압에 의한 것이거나 억지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상대방에 대한 깊은 배려와 이해에 바탕을 둔 인내이기 때문입니다. 그런 배려와 이해는 '깊고 넒은 생각'에 바탕을 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의 아가페는 한국말 '사랑' 개념과도 아주 가깝게 연결될 수 있습니다. 말하자면 성경의 아가페는 중국말 '아이'의 인내와 한국말 '사랑'의 깊은 생각을 합한 개념이라는 말입니다.
성경의 아가페가 서양식 '러브'에 대해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있는 것은 시사적입니다. 적어도 지금까지 해석으로 보면 서양식 '러브'는 성경의 아가페와는 아무 관계가 없습니다. '짜릿한 느낌'은 그리스도교의 사랑과는 아무 상관이 없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그게 중요하지 않다고 볼 필요는 없다고 봅니다. 서양의 '러브'는 훨씬 본능적이고 말초적입니다. 요즘 철학자들이나 결혼상담가들이 수정한 현대적인 뜻은 어떨지 몰라도, 적어도 어원적으로는 '러브'는 상당히 동물적인 끌림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그건 '메이크 러브(make love)'라는 동사가 '섹스하다'는 뜻인 것만 보아도 알 수 있지요. 그게 비유적인 뜻이 아니라 본래적인 표현이라는 점은 지금까지 논의를 통해 금방 알 수 있습니다. '짜릿하고 기분좋은 상태'를 만드는 것이고 그 가장 쉬운 방법은 섹스를 하는 것이니까요.
그러나 사람도 동물이기 때문에 그런 짜릿한 '러브'가 중요한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사람이 동물 이상의 존재라는 점을 생각하면 그저 '러브'에 머물러 있을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중국인들은 '아이(愛)' 개념을 만들어 냈고, 한국인들은 '사랑' 개념을 만들어 낸 것이지요. 서양인들도 성경의 도움을 받아서 '채러티' 개념을 만들어 냈던 것이구요.
그러므로 '러브'를 소중하게 여기되 거기에 머물러서는 안 된다는 게 여러 문화권의 사랑 개념이 힘을 합쳐 우리에게 알려준 교훈이라고 봅니다. 우리의 사랑은 의정지(意情志)의 어느 한쪽 측면만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이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지요. 세 가지 마음 작용을 모두 중요하게 생각하는 사랑을 추구하는 게 우리에게는 가장 남는 장사가 되겠다는 말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그다지 노력하지 않아도 얼마든지 누릴 수 있는 '러브'를 포기할 필요는 없겠습니다. 그러나 거기에 머무르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 '사랑'과 '아이(愛)'와 '성경의 아가페'가 가르치는 교훈입니다.
특히 '성경의 아가페'로부터는 배울 점이 아주 많습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을 깊이 이해하고 넓게 헤아려 줄 뿐 아니라 (사랑) 그런 이해를 바탕으로 길이 참아 줌으로써 (愛), 성경의 아가페를 배우고 실천할 수 있겠기 때문입니다.
'Faith - Hymn' 카테고리의 다른 글
[스크랩] 소망에 대하여 (2): 확신으로 기다리는 소망 (0) | 2005.08.06 |
---|---|
[스크랩] 소망에 대하여 (1): 소망(所望)과 희망(希望) (0) | 2005.08.06 |
[스크랩] 사랑에 대하여(5)왜 성경의 아가페는 참는 것일까? (0) | 2005.08.06 |
[스크랩] 사랑에 대하여 (4): 왜 아이(愛)는 참는 것일까 (0) | 2005.08.06 |
[스크랩] 사랑에 대하여 (3): 성경이 푼 사랑 (0) | 2005.08.0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