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인들의 세발 솥(鼎)
유비가 제갈량을 세 번째 찾아가자 제갈량은 마지못해 모사(謀士)가 되어 주기로 허락합니다. 그러면서 처음 제시한 전략이 바로 정(鼎)이었습니다. "어차피 혼자는 다 못 먹으니까 셋으로 갈라서 하나만 먹어라"는 것이었지요. 천하(天下: 중국만 천하라고 한 걸 보면 제갈량도 세상 넓은 줄 몰랐던 게지요)를 셋으로 가르면, 발이 셋 달린 솥이 넘어지지 않는 것처럼 세상이 안정될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정(鼎)은 "발이 셋 달린 솥"이란 뜻입니다. 그리스도교의 가르침을 솥이라고 한다면 믿음과 소망과 사랑은 그것을 받치는 세 다리입니다. 세 발이 모두 제대로 튼튼해야 제대로 된 그리스도교인이 된다는 뜻이겠습니다.
지난 글에서는 그 세 다리 중에서 '사랑'에 대해서 보았습니다. 한국말 '사랑'은 '깊이 헤아려 생각해 주는 것'이고, 중국말 '아이(愛)'는 '꾹꾹 참고 견디어 주는 것'입니다. 반면에 헬라어 아가페를 비롯한 서양의 '러브(love)' 계열은 '짜릿하고 기분 좋은 것'이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고린도전서 13장에 나오는 성경의 아가페는 한국말 '사랑'과 중국말 '아이'가 결합된 내용이었던 것도 보았지요.
그런데 고린도전서 13장에는 그리스도인들이 목숨을 걸만한 (혹은 걸어야 하는) 개념이 두 개 더 나옵니다. 믿음과 소망입니다. 그래서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지난번에는 '사랑'을 봤으니까 이번에는 가운데에 끼인 소망을 한번 살펴볼까 합니다.
*희망(希望)이냐, 소망(所望)이냐.
그런데 소망을 따져 보기 전에 먼저 알아둘 것은, 요즘 소망(所望)이라는 말이 잘 쓰이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그리스도교에서 성경에 대해 이야기할 때를 제외하고는 '소망'이라는 말은 일반적으로 잘 쓰이지 않습니다. 요즘은 소망보다는 희망(希望)이라는 말이 더 널리 쓰입니다.
"네 장래 희망이 뭐냐"와 "네 장래 소망이 뭐냐" 중에서 어떤 말이 더 자주 쓰입니까? 물론 '희망'입니다. 왜 그렇게 되었는지는 좀 더 조사를 해 보아야겠습니다만, 19세기말까지는 희망(希望)이라는 낱말이 그다지 눈에 띄지 않습니다. 무엇보다도 개역 한글판 성경에 희망(希望)이라는 말이 단 한번도 나오지 않습니다.
이건 좀 이상합니다. 킹 제임스 영역본 성경에는 호프(hope)라는 말이 나오는 구절이 121개나 됩니다. 그러나 히브리어와 헬라어 성경과 함께 킹 제임스 영역본을 참고로 해서 번역된개역 한글판 성경에는 그 숱한 '호프'가 단 한번도 '희망'으로 번역된 적이 없습니다. 깡그리 '소망'입니다. 참고 삼아 호프를 소망으로 번역한 구절을 구약과 신약에서 각각 하나씩만 옮겨 놓아 보겠습니다.
(욥기 17장15절)
나의 소망이 어디 있으며 나의 소망을 누가 보겠느냐 (개역한글)
And where is now my hope? as for my hope, who shall see it? (KJV)
희망이 어디 있으며 기쁨이 어디 있겠는가? (공동번역)
내가 희망을 둘 곳이 달리 더 있는가?
내가 희망을 둘 곳이 달리 어디 있는지, 아는 사람이 있는가? (표준새번역)
where then is my hope? Who can see any hope for me? (NIV)
Where now is my hope? And who regards my hope? (NASB)
(로마서 8장 24절)
우리가 소망으로 구원을 얻었으매 보이는 소망이 소망이 아니니
보는 것을 누가 바라리요 (개역한글)
For we are saved by hope: but hope that is seen is not hope:
for what a man seeth, why doth he yet hope for? (KJV)
우리는 이 희망으로 구원을 받았읍니다. 눈에 보이는 것을 바라는 것은
희망이 아닙니다. 눈에 보이는 것을 누가 바라겠읍니까? (공동번역)
우리는 이 소망으로 구원을 받았습니다. 눈에 보이는 소망은 소망이 아닙니다.
보이는 것을 누가 바라겠습니까? (표준새번역)
For in this hope we were saved. But hope that is seen is no hope at all.
Who hopes for what he already has? (NIV)
For in hope we have been saved, but hope that is seen is not hope;
for why does one also hope for what he sees? (NASB)
욥기와 로마서의 구절을 보면 잉어에서는 일관되게 호프(hope)가 사용됐습니다. 킹제임스 역본 뿐 아니라 후대에 번역된 신국제 역본(NIV)에서나 신메국표준성경(NASB)에서도 모두 호프입니다.
그러나 그 호프의 한국말 번역은 시기에 따라 변화를 보였습니다. 20세기초에 번역이 끝난 개역한글판에서는 깡그리 '소망'입니다. 그러나 1970년대에 번역된 공동번역과 1990년대에 번역된 표준새번역 성경에서는 '소망'과 '희망'이 섞여 있지만 대체로 '희망'이 더 많습니다.
이런 경향은 다른 121개 구절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여기서 가장 중요한 점은 개역한글판 성경에 '희망'이라는 말이 단 한번도 나오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20세기초까지만 해도 한국에서는 '희망'이라는 말이 사용되지 않았을 것이라고 추측해 볼 수 있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그때까지는 그 낱말이 없었던 것일까요? 있었는데도 쓰지 않은 것일까요?
* 일제 강점기와 군부독재 시기의 '희망가'
문헌조사를 통해 '희망'이라는 말의 용례를 철저히 조사해 보아야 밝힐 수 있는 문제이겠습니다만, 그런 방대한 조사의 여력이 없는 저로서는 약식으로 한가지만 찾아보았습니다. 그것은 일제 강점기에 크게 유행했던 한 대중가요의 제목입니다. 요즘도 약주 한잔 걸친 분들을 툭 건드리면 터져 나오는 노래, '희망가'가 바로 그것입니다.
이 풍진(風塵)세상을 만났으니 너의 희망이 무엇이냐
부귀와 영화를 누렸으면 희망이 족할까
푸른 하늘 밝은 달 아래 곰곰이 생각하니
세상만사가 춘몽 중에 또다시 꿈같다
이 풍진 세상을 만났으니 너의 희망이 무엇이냐
부귀와 영화를 누렸으면 희망이 족할까
담소화락(談笑和樂)에 엄벙덤벙 주색잡기(酒色雜技)에 침몰하니
세상만사를 잊었으면 희망이 족할까 (희망가, 전문)
이 '희망가'에 희망이라는 말이 자꾸 나옵니다. '소망'은 없고 '희망'뿐입니다. 저는 이 노래가 식민지를 살아야 했던 한국 민중들에게 널리 퍼졌던 1920년대가 기존의 '소망'이 '희망'으로 이행을 끝낸 시점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사실 이 노래는 한국 가락이 아닙니다. 이 노래는 1850년 메국인 작곡자 제레미 인갈스(Jeremy Ingalls)가 잉국의 춤곡을 바탕으로 새롭게 작곡한 노래였고, 그 곡은 '우리가 집으로 돌아올 때'라는 제목의 찬송시와 합쳐져서 찬송가로 불렸습니다.
그런데 이 노래가 일본으로 전해졌을 때는 진혼가(鎭魂歌)로 탈바꿈했습니다. 1910년경 일본에서는 여학생 12명이 강을 건너다 배가 뒤집혀 몰사하는 참사가 발생했는데, 이때 비명에 간 소녀들을 추모하기 위해 미스미 스즈코(三角錫子)라는 여교사가 제레미 인갈스의 곡에 일본인 취향의 시를 붙였습니다. 그 노래의 제목이 '새하얀 후지산의 뿌리'(眞白き富士の根)였는데, 일본 전역에 널리 퍼졌다는군요.
그 가락이 한국에 들어온 것은 1920년대의 일로 보입니다. 그러나 한국에서는 이 노래가 찬송가도 아니고 진혼가도 아니었습니다. 그냥 일반 대중가요였지요. 그 노랫말은 오늘날 보는 그대로였지만 제목은 다양했습니다. 예컨대 '오동나무 창가집'이라는 대중가요 모음집에는 이 노래의 제목이 '탕자경계가'(蕩子警戒歌)로 돼 있고, '신유행 창가집'에는 '탕자자탄가'(蕩子自歎歌)라는 제목으로 실렸습니다.
이 노래에 '희망가'라는 제목으로 붙은 것은 1920년경 민요가수 박채선(朴彩仙)과 이류색(李柳色)이 무반주 2중창으로 녹음할 때였습니다. 이어서 1925년에도 민요가수 김산월(金山月)이 '희망가'를 취입했으나 그다지 인기를 끌지는 못했던 모양입니다.
이 노래가 민중에 퍼진 것은 국내 최초의 대중가수라고 하는 채규엽(蔡奎燁)이 취입한 작품입니다. 그게 바로 1935년경입니다. 그러니까 1920년경에 시작된 '희망가'는 1935년에 가서야 민중의 호응을 얻게 된 것이지요.
그런데 이 노래가 좀 웃깁니다. 제목은 '희망가'이지만, 내용은 요즘 낱말 뜻 '희망'과 거리가 아주 멀기 때문입니다. 말하자면 표리부동(表裏不同)한 노래입니다. '희망가'의 표리부동 때문에 웃지 못할 일이 생기기도 했습니다.
쿠데타를 성공시킨 전두환 일당은 1980년 언론에 재갈을 물리기 위해 서울 일간신문 기자들을 안양연수원이라는 곳에 강제 입소시켜 사흘씩 '연수'를 받게 했습니다. 그 교육과정 중에 소위 '건전 가요 부르기'가 포함돼 있었는데, '희망가'가 거기 포함돼 있었다는군요. 아마도 노래 내용은 모르고 제목만 본 담당자가 교육용(?)으로 끼워놓은 모양입니다.
당시 그 연수에 참가했던 서울신문의 박강문 기자가 96년 10월12일자 <뉴스피플>에 쓴 걸 보니까, 연수 도중에 신아일보와 동양방송국이 폐간됐다는 소식을 들은 연수생들이 집단으로 '희망가'를 불렀다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희망가'를 부르면서 '절망'을 노래한 것이지요. 그 뒤로 '희망가'는 연수원 노래집에서 빠졌다는 후문도 전했더군요.
아무튼 '희망'이라는 말이 일제 강점기에 유포되기 시작했다는 점은 그 말이 혹시 일본식 한자어가 아닌가 하는 의문을 갖게 합니다. 그리고 '희망가'가 삼일운동이 실패한 직후에 녹음됐다는 점과 군부독재 시기에 널리 불려졌다는 점은 역설적입니다.
희망이 없는 상태에서 그 희망 없음을 노래하면서 실낱같은 희망이나마 바라던 마음들이 노래로 나타났던 것일까요? 그런 역사적, 시대적 배경 때문에 '희망'이라는 말은 시작부터 그 색조가 좀 어두운 것이 사실입니다.
평미레/
조정희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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