앞글에서는 중국의 '아이(愛)가 참는 것'인 이유가 주로 사회적인 것이라는 걸 봤습니다. 적어도 메국인 중국학자 드멘테의 설명에 따르면 그렇습니다. 위계 중심의 조화와 질서를 강조하는 사회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개인적 성향이 짙은 남녀간의 '러브'를 용인할 수 없었던 것이지요.
그 대신 사랑의 감정을 부모와 조상, 자식, 예술과 학문 같은 대상으로 향하도록 유도했습니다. 그런 대상을 사랑하는 것은 '짜릿하게 즐기기'를 허락하지 않습니다. 모두 '참고 견디는 일'을 요구합니다. 그런 '참고 견디기'는 요즘 눈으로 보면 '개인의 억압'이라고 볼 수도 있겠습니다만, 당시로서는 사회를 위해 꼭 필요한 도덕이요 윤리였겠습니다.
그럼 성경은 어째서 사랑을 '꾹꾹 참는 것'이라고 한 것일까요? 그 이유는 '중국의 아이(愛)가 참는 것'인 이유와는 사뭇 다릅니다. 중국의 '아이(愛)'가 사회적 개념이라면 '성경의 아가페'는 아무래도 종교/윤리적이고 신앙적인 측면이 강하기 때문이겠지요.
'성경의 아가페'가 서양의 '러브'와 다르다는 점은 우선 성경의 잉국말 번역에서도 나타납니다. 저는 한국말 성경으로 개역 한글판을 주로 사용하는 것과 똑같은 이유로 잉국말 성경으로는 킹 제임스 역본(King James Version)을 씁니다. 둘 다 각 나라 말로는 최초의 본격적 번역판이기 때문입니다. 거기에는 성경을 충실히 번역하려는 노력과 함께 자기 나라 말의 뜻을 잘 살려 쓰려는 노력이 함께 묻어 있습니다.
그 잉국말 성경에 보면 헬라어 성경의 '아가페'를 두 가지로 번역하곤 했습니다. 때로는 '러브(love)'로 번역했지만 때로는 '채러티(charity)'라고도 번역했습니다. 킹 제임스 역본에서는 고린도전서 13장에 나오는 '아가페'를 모두 '채러티'로 번역했습니다.
요즘 잉메에서는 '채러티'를 주로 '자선사업이나 그런 사업을 하는 단체'라는 뜻으로 많이 씁니다. 그 때문인지 한국말에서도 채러티는 거의 자선(慈善)으로 번역되곤 합니다. 하지만 채러티의 원래 뜻은 그보다는 좀 광범위하고 포괄적입니다. 동정심에 바탕을 둔 자선 행위뿐 아니라, 불교의 핵심어인 '자비'와 프랑스 혁명의 핵심어인 '박애'도 바로 그 채러티입니다. (물론 프랑스어 프라떼르니떼(fraternite)는 '동지애/형제애/민족애' 정도의 뜻이므로 그걸 '박애'로 번역하는데는 문제가 좀 있기는 합니다. 그 얘기는 다른 기회에 하겠습니다.)
어떤 잉어사전은 채러티의 첫 번째 뜻으로 아예 '성서에서 말하는 사랑' 즉 '그리스도교의 사랑(Christian love)'이라고 풀기도 합니다. 그것은 후기 라틴어에서 채러티의 어원에 해당하는 '카리타스(caritas)'라는 말을 거의 전적으로 그리스도교의 사랑을 가리키는 뜻으로 사용했었기 때문입니다. 말하자면 '채러티'는 요즘 사용되는 '자선'이나 '러브'보다 훨씬 폭이 넓고 깊이가 있던 말이었다는 거지요. 아무튼 '성경의 아가페'는 요즘 뿐 아니라 이미 중세 유럽의 '러브'와도 사뭇 다른 개념이었음을 스스로 인정하고 있는 셈입니다.
그런 성경의 아가페 혹은 채러티를 고린도전서 13장에서는 '오래 참고 .... 모든 것을 견디는 것'이라고 정의합니다. 그럼 어째서 성경은 아가페를 '참는 것'이라고 했을까요? 다시 말해 무조건 참기만 하면 그게 곧 사랑일까요? 그런 것 같지는 않습니다. 핑계 없는 무덤이 없고 원인 없는 결과가 없는 법입니다. 성경이 사랑을 '꾹꾹 참는 것'이라고 정의한 데에도 분명 무슨 이유가 있겠다는 말입니다.
저는 성경이 '사랑은 참는 것'이라고 못박은 이유는 '잘 생각해 보면 참을 수 있고, 그렇게 참는 것이 바로 사랑'이라고 설명하고 있다고 봅니다. 그건 고린도전서 13장을 조금 자세히 읽어보면 알 수 있습니다. '사랑의 정의(4-7절)'에 뒤따라 나오는 구절들을 한번 보십시다. 먼저 11-13절을 보겠습니다.
(11절) 내가 어렸을 때에는 말하는 것이 어린아이와 같고 깨닫는 것이 어린아이와 같고 생각하는 것이 어린아이와 같다가 장성한 사람이 되어서는 어린아이의 일을 버렸노라
(12절) 우리가 이제는 거울로 보는 것 같이 희미하나 그 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볼 것이요 이제는 내가 부분적으로 아나 그 때에는 주께서 나를 아신 것 같이 내가 온전히 알리라
(13절) 그런즉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 중에 제일은 사랑이라
13절 맨 처음에 나오는 '그런즉'에 우선 주목해 주십시오. 헬라어 원문이나 잉어 번역본에는 '그런즉'이라는 말이 없습니다. 그저 '이제'라는 정도의 말이 있을 뿐입니다. 그런데도 한국어 성경 번역자들은 그 말을 이유 접속사로 바꾸어 놓았습니다. 그건 한국의 성경 번역자들이 보기에는 11-12절의 말씀이 13절의 이유가 되기에 충분하다고 이해했기 때문이겠습니다.
사랑이 믿음과 소망보다 더 중요한 으뜸 덕목인데, 그것은 믿음과 소망을 갖는 것은 어린아이의 일(11절)이며 거울로 보는 것 같이 희미한 것(12절)하고 부분적으로 아는 것에 불과한 것(12절)인 반면에, 사랑하는 것은 장성한 사람의 일(11절)이며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보듯이 온전히 알 수 있기(12절) 때문입니다.
'거울로 보는 것 같이 희미하다'는 표현은 오늘날 기준으로는 좀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사도 바울이 이 편지를 썼던 2천년 전에는 거울이 주로 청동으로 만들어졌습니다. 유리가 없었거나 있었더라도 아주 조잡했기 때문이지요. 그래서 거울을 만들 때는 청동을 주물에 부어 판판하게 만든 다음 그걸 윤이 나도록 닦고 닦아서 비치도록 만들었습니다.
그걸 노래한 시도 있습니다. 제가 개인적으로 참 좋아하는 윤동주 시인의 '참회록'이라는 시에 보면 거울 닦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시가 별로 길지 않기는 하지만 여기서는 필요한 부분만 옮겨 놓아 보겠습니다.
파란 녹이 낀 구리 거울 속에/ 내 얼굴이 남아 있는 것은/
어느 왕조(王朝)의 유물(遺物)이기에/ 이다지도 욕될까.
(중략)
밤이면 밤마다 나의 거울을/ 손바닥으로 발바닥으로 닦아 보자.
그러면 어느 운석(隕石) 밑으로 홀로 걸어가는
슬픈 사람의 뒷모양이/ 거울 속에 나타나온다. (윤동주, <참회록(懺悔錄)>에서)
윤동주 시인은 자기 인생을 되짚어 비추는 '구리 거울'을 노래했지만, 구리 거울보다는 청동 거울이 더 나중에 나온 것이고 성능(?)도 더 우수했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우수해 봤자 청동 거울에 비치는 모습은 희미합니다. 쇳덩어리를 손바닥이나 발바닥이 아니라 가는 사포로 잘 갈아서 명주 수건으로 닦아 본들 거기 비친 모습이 또렷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거울에 비친 모습은 어렴풋하고 희미할 수밖에 없는 것이지요.
믿음이나 소망 같은 중요한 덕목도 그저 청동거울에 비쳐진 희미한 상을 보는 것에 불과하다는 게 사도 바울의 주장입니다. 그러나 사랑을 갖는 것은 눈으로 직접 보는 것처럼 확실하고 온전하다는군요.
청동 거울을 가지고 화장하는 일은 지난한 작업임에 틀림없습니다. 내 얼굴 모습 하나 비추어 보는 것도 힘든데 머리 모양이나 입은 옷에 어울리는 화장을 하기가 쉬울 리가 없습니다. 게다가 푸르스름하고 희미한 청동 거울 면에는 색깔이 제대로 안 나옵니다. 그러니 요즘 흔히 하는 말로 '코디네이션'은 거의 불가능하지요. 그게 바로 믿음과 소망 같은 것입니다. 물론 그런 거울이나마 없는 것보다는 훨씬 낫지만 완전하지 않다는 것이지요.
반면에 누군가 센스있는 사람에게 내 화장을 맡긴다고 해 봅시다. 그러면 그 사람의 눈은 내 얼굴과 머리와 옷과 심지어 주변의 배경까지 고려해서 완전히 '코디네이티드'된 화장을 해 줄 수 있습니다. (로마시대 영화를 보면 귀부인들이 시녀들의 화장을 받는 모습이 더러 나오지요? 쿼바디스에서도 한번 본 것 같습니다만.) 그 화장 시녀의 '눈'은 '청동 거울'에 비할 바가 아니겠다는 말입니다. 당시 시세로는 시녀 한사람의 값보다 청동 거울 값이 훨씬 비쌌다고 하더라도 말입니다.
11절에는 믿음/소망을 어린아이에게, 사랑을 어른에게 비유했습니다. 어린아이와 어른은 그 안목에서 차이가 납니다. 어린아이는 당장 눈앞의 것만 볼 줄 압니다만, 어른은 눈앞의 것과 그 주변의 것을 연관시켜 이해할 수 있고, 지금의 현상을 과거나 미래의 모습과 연관지어 이해할 수 있습니다. 시공(時空)의 면에서 안목이 훨씬 길고 넓다는 것이지요. 그렇게 보면 사물의 좀 더 확실하고 온전한 모습을 볼 수 있다고 합니다.
사랑이 바로 그렇다는 겁니다. 사랑은 지금 당장의 모습만 보는 것이 아니라 그 사물/사람의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조리 있게 연관지어서 보는 것과 같습니다. 또 그 사물을 똑 떨어뜨려서 독자적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그 사물과 주변의 다른 사물들과의 연관관계를 통해서 이해하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지금 아무리 개망나니 짓을 하더라도 그의 과거 환경이나 지금 상황을 이해하면 달라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러면 그 사람을 참아줄 수 있습니다. 과거에 비추어 이해가 되고, 환경에 비추어 동정과 연민이 일고, 미래를 내다보면 돕고 싶은 의지가 생기기 때문입니다. 그런 이해와 의지 때문에 그 사람을 참고 견디어 줄 수 있는 것이지요.
이게 바로 고린도전서 11-12절에서 말한 어린아이/장성한 사람, 그리고 희미한 거울 모습과 직접 보는 온전한 모습의 비유가 가리키는 바가 아닌가 싶습니다. 사랑은 장성한 사람의 행태이고 온전한 모습을 직접 볼 수 있는 통찰력의 소산인 것이지요. 그런 전체적인 그림을 가질 수 있으면 우리는 울컥하거나 조바심을 내는 대신 꾹꾹 참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게 바로 사랑이라는 말입니다.
사실 이런 내용은 8-10절에서도 이미 한번 나온 바 있습니다. 거기서는 예언/방언/지식과 사랑을 대비시켰습니다.
(8절) 사랑은 언제까지든지 떨어지지 아니하나 예언도 폐하고 방언도 그치고 지식도 폐하리라
(9절) 우리가 부분적으로 알고 부분적으로 예언하니
(10절) 온전한 것이 올 때에는 부분적으로 하던 것이 폐하리라
8절에서는 예언과 방언과 지식이 사라지겠지만 사랑은 사라지는 게 아니라고 합니다. 어떻게 사도 바울은 예언/방언/지식 같은 '재주'와 사랑을 비교할 생각을 했었을까요? 그것은 사도 바울이 시간의 속성을 이해했기 때문이라고 봅니다. 시간은 변화를 일으킵니다. 그리고 예언과 방언과 지식은 모두 시간의 구속을 받습니다. 그래서 그것들은 모두 부분적입니다.
예언은 미래에 대한 통찰력입니다. 그러나 사람은 아무리 날고 뛰어도 미래를 완전히 예측해 낼 수는 없습니다. 심지어 그 예언이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하는 경우에도 그렇습니다. 386급에 불과한 사람의 용량이 슈퍼컴퓨터에 해당하는 하나님의 의도를 소화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아무리 날고 기는 예언자라도 그 통찰력과 예언력에는 제한이 있기 때문입니다. 일정한 지역에서 일정한 시기에 대한 예언으로 국한된다는 말이지요.
지식은 주로 과거에 대한 논리적인 이해입니다. 그리고 방언은 논리를 초월한 지식의 표출 방식입니다. 그러나 과거나 초월에 대한 우리의 이해도 제한적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것은 우리 감각이 제한적이고, 우리 이해력이 모자라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것을 부분적이라고 한 것이지요.
반면에 사랑은 시간의 제약을 받지 않습니다. 사랑은 시간과 시간이 일으키는 변화를 다 이해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사람의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연관성 있게 이해할 수 있고, 혹은 적어도 그렇게 이해하려고 노력하기 때문입니다. 그 사람만 떼어놓고 보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을 둘러싼 다른 사람들과 주변환경 속에서 이해하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랑은 부분적이지 않고 온전합니다.
우리의 경험으로만 보더라도, 우리가 사고의 맥락을 조금만 넓혀서 생각하면 훨씬 덜 동요하게 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더 많이 이해하면 덜 화내고 덜 조바심 내고 훨씬 더 느긋할 수 있습니다. 그게 바로 사랑이 참을 수 있는 이유입니다.
'지금 당장'과 '바로 여기'에만 초점을 맞추면 성을 내거나 자랑하거나 교만할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 시야를 좀 더 넓혀서 보면 그다지 성낼 일도 없고 그다지 낙심할 일도 없다는 걸 알게 됩니다. 그런 내용을 담은 탈무드 이야기가 하나 있습니다.
"한 사람이 샘물을 마시고는 돈지갑을 잊고 놓아 둔 채 가버렸다. 다음 사람이 와서 샘물을 마시다가 돈지갑을 발견해서 가져가 버렸다. 세 번째 사람이 와서 샘물을 먹고 있는데 첫 번째 사람이 와서 지갑 내놓으라고 요구하다가 어이가 없어 신경질이 난 세 번째 사람에게 맞아 죽고 말았다."
얘기가 여기에 이르면 듣는 이들은 '세상에 정의라는 게 있는 거냐'고 탄식하곤 합니다. 첫 번째 사람은 억울하게 죽었고, 두 번째 사람은 도둑놈이고, 세 번째 사람은 흉악하다는 것이지요. 그러나 랍비의 설명이 이어집니다.
"첫 번째 사람의 아버지는 십 수년 전에 세 번째 사람의 아버지를 아무도 모르게 죽인바 있었다. 두 번째 사람의 아버지는 수년 전에 첫 번째 사람의 아버지에게 억울하게 사기를 당한 바 있었다. 자, 이런 과거를 알고 나면 샘터를 둘러싸고 일어난 그 사건이 오히려 정의롭다고 볼 수 있지 않겠냐?"
생각의 준거 기간을 단 한 세대만 연장해도 이렇게 '불의'가 '정의'로 바뀔 수 있습니다. 생각의 범위를 개개인에서 그 가족까지만 넓혀도 '억울함'이 '공평함'으로 둔갑될 수 있습니다.
믿음과 소망을 갖는다는 것이 단선적이고 일차원적인 덕목이라면 (그래도 덕목은 덕목입니다만) 사랑을 갖는다는 것은 복선적이고 다차원적인 덕목이라는 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랑은 온전하며 언제까지든지 끊어지지 않고, 믿음과 소망에 앞서는 으뜸 덕목이라는 것이지요.
사랑이 으뜸 덕목인 바로 그 이유 때문에 사랑하는 사람은 참을 수가 있습니다. 그 참음과 견딤은 막무가내로 이를 갈며 억지로 참고 견디는 것이 아닙니다. 폭넓고 안목이 긴 이해를 통해서 온전히 '통(通)'하였기 때문에 즐겁게 참고 견딜 수 있는 것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성경의 아가페'는 '오래 참고 견디는 것'입니다. 한자문화권의 아이(愛)와 근본 뜻이 같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오래 참고 견딜 수 있는 이유는 사뭇 다릅니다.
'아이(愛)'가 참는 것인 까닭은 그 대상을 이성으로부터 부모/조상, 자식, 학문/예술로 돌렸기 때문입니다. 섬기고 돌보고 연마하는 데에 인내가 필요한 대상들입니다. 그래서 '아이'는 참는 것이 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성경의 아가페'가 참을 수 있는 것은 '폭넓고 깊이 있는 생각' 때문입니다. 그런 생각을 통해서 상대방에 대한 전체적이고 온전하고 복선적이고 다차원적인 이해가 얻어질 수 있습니다. 그런 이해가 '참고 견디는 힘'을 만들어 주는 것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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