鶴山의 草幕舍廊房

Faith - Hymn

[스크랩] 사랑에 대하여 (3): 성경이 푼 사랑

鶴山 徐 仁 2005. 8. 6. 21:27

 

*러브(love)의 세계화(世界化)

 

사랑에 대한 첫 글에서는 서양의 '러브(love)'가 '짜릿하고 좋은 것'이고 중국의 '아이(愛)'가 '힘들어도 참는 것'이라는 어원적인 뜻을 가졌음을 봤습니다.  두 번째 글에서는 한국말 '사랑'의 어원적인 뜻은 '깊이 생각하고 따뜻하게 헤아려주는 것'이리라고 짐작해 봤습니다.

 

그리고 이미 첫 글에서, 요즘은 고유어 '사랑'이 갖고 있던 '생각'의 요소나 한자어 애(愛)가 가진 '의지'의 요소는 자꾸 희석되고, 그 대신 '감각'을 앞세우는 서양말 '러브(love)'가 지나치게 강조되는 경향도 있다고 지적했습니다.

 

그건 19세기말부터 시작된 '서양 문화의 세계화' 때문일지도 모릅니다.  20세기 전기간을 통해서 서양 문물과 문화는 우위성을 주장하면서 세계 곳곳으로 퍼져갔고 스며들었으니까요.  그러나 저는 세계화를 '각 문화가 자기 걸 내 놓아서 선택 가능성을 높이고 그래서 모두의 삶의 질을 높이는 것'이라고 정의하고 싶습니다.  '세계의 모든 문화권이 메국이나 유럽 것을 받아 들여서 동질화되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지요.

 

하지만 요즘 한국 상황을 보면 그런 우려가 없지 않습니다.  메국 사람들보다 더 햄버거와 랩 뮤직을 좋아하고, 도이치 사람들 보다 더 하이네켄과 하버마스를 좋아하고, 프랑스 사람들보다 더 입센 로랑과 푸꼬에 열광하고, 영국 사람들보다 더 베벌리 상표와 기든스를 사모합니다.  물론 그다지 오래 지속되지 못하는 단점이 있기는 합니다.

 

그런데 한번 보십시오.  고려말부터 5백년 이상을 중국 사람들보다 더 공자를 섬긴 우리 조상들을 보고 지금 우리가 뭐라고 평가합니까?  세계의 중심문화(中華)에 가장 근접한 '세계화' 문화였다고 말합니까?  아닙니다.  우리는 그것을 '사대주의'라면서 잊고 싶어합니다.

 

역사는 반복된다고들 합니다.  사실 반복되는 것은 역사가 아니라 역사적 조건일 것입니다.  그 조건 속에서 어떤 선택을 하느냐가 중요한 것이겠지요.  실수를 통해 배우는 사람은 현명합니다.  그러나 같은 실수를 자꾸 계속하는 것은 똑똑한 것도 현명한 것도 아닙니다.  그걸 '바보'라고 합니다.

 

성경에서는 좀 더 심한 표현을 씁니다.  "개가 토한 것을 또 먹는다"고 했습니다.  생각만 해도 구역질 나는 일 아닙니까?  또 "돼지를 구덩이에서 꺼내 놓았더니 그리로 다시 기어 들어간다"고 했습니다. 개 같은 사람, 돼지 같은 민족이라고 불리고 싶으십니까? 

 

*왜 성경인가?

 

이번에는 성경에서는 '사랑'을 어떻게 정의하고 있는지를 보려고 합니다.  성경을 보는 이유는 우선 제가 그리스도인이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자기 생각과 행동의 준거를 성경에 둘 것을 요구받습니다.  성경이 생활의 잣대라는 말입니다.  항상 그 잣대에 맞추어 살고 있는 것은 아니고, 자꾸 거기서 어그러지는 것도 사실입니다만, 그래도 그게 제 생각과 판단의 기준이라는 것이지요.

 

그런데 그런 신앙의 이유 말고도, 성경은 '한국말'과 '한국개념'을 살피는 데에도 아주 유용합니다.  이유를 설명하자면 좀 길고 복잡하지만 한마디로 줄인다면, 성경은 일본말과 서양말 및 그 개념에 물들기 이전의 한국말과 개념을 사용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아시다시피 한국말은 20세기 전 시기를 통해 일본말과 서양말 때문에 심각한 피해를 입었습니다.  사실은 말 뿐 아니라, 오랫동안 전해 내려온 개념들까지 깡그리 무너져 버렸습니다.  흔히 말하듯, 개념은 생각의 도구이자 재료입니다.  그래서 개념은 곧 학문이라는 집을 세울 때에 반드시 필요한 벽돌입니다.  한국식 벽돌을 잃어버렸기 때문에 한국식 집을 지을 수 없는 것처럼, 한국 개념을 잃어버렸기 때문에 한국 학문을 세울 수 없었다는 말입니다.

 

그렇지만 성경에는 그런 게 아직 살아 있습니다.  한국말 성경 번역은 일제 강점기 직전에 시작했고, 일제의 문화적 침탈이 시작되기 전에 끝났기 때문입니다.  방대한 번역인 만큼 한국 사람의 마음 생활에 필요한 거의 모든 개념이 거기에 보존되어 있습니다.  게다가 번역어를 선택할 때에도 일본어나 서양어의 침해가 있기 전의 한국말과 개념을 고려한 흔적이 뚜렷합니다.

 

더구나 다행인 것은 이 성경이 일제 강점기와 해방이후 여러 차례의 개정을 거쳤음에도 불구하고 일부 어법과 고어투를 제외하고는 거의 초기 번역본을 크게 뜯어고치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개역 한글판 성경은 한국말과 개념을 연구하는 데에 대단히 중요한 문헌입니다.  (그 점은 믿음과 소망에 대한 다음 글에서 본격적으로 밝혀드릴 수 있다고 봅니다.)

 

*성경이 말하는 '사랑'

 

뜻밖에도 성경이 설명하는 사랑은 우선 한자어 애(愛) 개념과 비슷합니다.  흔히 사랑의 장(章)으로 불리는 고린도전서 13장에 나오는 사랑, 즉 아가페(agape)가 그렇습니다.  이 구절은 고운 멜로디에 붙여져서 애창되고 있습니다만, 그 아름다운 멜로디 때문에 처참하고 참담한 '사랑의 실상'이 가리워진 감이 있습니다.  이미 익숙하시겠지만 그 구절을 한번 더 보십시다.

 

"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투기하는 자가 되지 아니하며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하며
무례히 행치 아니하며 자기의 유익을 구치 아니하며
성내지 아니하며 악한 것을 생각지 아니하며
불의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진리와 함께 기뻐하고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
"
(성경, 고린도전서 13장 4-7절)

 

사랑을 정의하는 낱말 중에서 '좋다'느니 '즐겁다'느니 '짜릿하다'느니 하는 감정 형용사는 하나도 없습니다.  형용사인 것처럼 보이는 '온유하다' 조차도 원문을 보면 '자기 마음을 부드럽게 만들어서 내 보이다'는 뜻의 크레스튜오마이(Chresteuomai)라는 동사입니다.  모두가 능동 동사이거나 그 부정형이기 때문에 위의 내용을 공들여 실천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이 짧은 구절에 '참다'와 '견디다'는 말이 세 번이나 나옵니다.  우선 맨 처음과 맨 마지막의 동사가 "사랑은 오래 참고 ... 모든 것을 견딘다"로 수미쌍괄식입니다.  '참다'와 '견디다'가 강조된다는 뜻입니다. 

 

또 마지막 줄은 앞에서 여러 가지로 정의된 사랑을 요약한 구절입니다.  "모든 것을 참으며 ... 모든 것을 견딘다."  다시 수미쌍괄식입니다.  또 다시 강조되고 있습니다.  그래서 성경의 사랑을 요약하면 '참고 견디는 것'입니다.

 

*성경의 사랑은 '꾹꾹 참는 것'

 

여기 나오는 '참는다'와 '견딘다'의 세 낱말은 고대 헬라어에서는 모두 다른 말입니다.  처음의 '참는다'는 마크로쑤메오(macrothumeo)인데, '다른 사람에게서 받은 공격과 상처를 끈질기게 견딘다'는 뜻입니다.  '복수를 아주 오래 있다가 한다, 즉, 절대로 복수하지 않는다'는 뜻도 있습니다.

 

두 번째의 '참는다'는 스테고(stego)인데, 다른 사람의 실수나 잘못을 '덮어주고 까발리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마지막의 '견딘다'는 후포메노(hupomeno)로 상대방으로 인해 생긴 불행의 '아래에 그대로 머물러 있는다, 거기서 도망가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성경이 다시 정의한 아가페(agape)는 바로 이런 뜻입니다.  '아가페'라는 헬라어 자체는 '좋다/유쾌하다'는 말입니다만, 그것을 풀어서 설명한 성경의 정의는 그와는 정 반대입니다. 

 

성경의 사랑 개념은 오히려 한자(漢字) 문화권의 애(愛)개념과 비슷합니다.  헬라, 라틴, 게르만, 앵글로색슨 문화권의 그것과는 사뭇 다르기 때문입니다.  성경의 아가페(agape)는 애(愛)처럼 '뱉어버리지 말고 풀어버리지 말고 꾹꾹 참고 견뎌라'입니다.  '복수하지 말고 까발리지 말고 도망가지 말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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