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버이 우리를 고이시고, 동기들 사랑에 뭉쳐있고,
기쁨과 설움도 같이하니, 한간의 초가도
천국이라.
이 찬송시가 낯익으신 지 모르겠습니다. 소설가/시인이자 목사님이신 늘봄 전영택 선생이 쓰신 것인데, <찬송가(1983)>에 "사철에 봄바람 불어 잇고(305장)"라는 찬송으로 실렸습니다. 인용문은 2절 노랫말의 첫 부분입니다. 맨 앞의 "어버이 우리를 고이시고"에 보이는 '고이다'는 요즘말로 '사랑하다'입니다. 고유어지요.
앞글에서는 한자 문화권의 애(愛)가 헬라, 라틴, 게르만, 앵글로색슨으로 이어지는 서양 문화권의 러브(love)와 사뭇 다른 개념인 것을 보았습니다. 서양 문화권의 '러브'는 '짜릿하고 좋은 것'이지만 한자 문화권의 애(愛)는 '괴롭지만 참는 것'이었습니다.
애(愛)와 러브(love)는 외래어입니다. 국문법에서는 애(愛)를 외래어라고 하지 않고 '한자어'로 따로 분류합니다만 근본적으로 외래어입니다. 중국 글을 들여다가 한국식으로 읽는 것이기 때문이지요. 2천여 년 동안이나 써온 말이니까 모국어로 완전히 동화됐을 법도 한데 아직도 좀 이질감이 남았는지 '한자어'라고 따로 불립니다.
외래어가 아닌 고유어에도 애(愛)나 러브(love)에 버금가는 말이 있었습니다. 우선 '사랑'이라는 말이 있지요. 한국말의 어원이나 의미 추적은 대체로 훈민정음이 창제된 15세기까지 밖에 거슬러 올라가지 못한다는 제한점이 있습니다만, 그래도 여러 문헌을 보면 그때 이미 '사랑'이라는 말이 쓰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밖에도 15세기 문헌에는 위의 찬송시에 나오는 '굄'도 나오고 '다솜'이라는 말도 나옵니다. 모두 '사랑'의 동의어입니다.
강원대 국문학과의 손주일 교수님은 그 말들을 '닷다'와 '괴다'와 '사랑하다'라는 동사형태로 잘 설명해 놓으셨더군요. 15세기 중세국어에 따르면 '사랑하다'의 '사'와 '하,' 그리고 '닷다'의 '닷'에 쓰인 'ㅏ'자는 모두 아래아입니다. 그리고 '닷'의 'ㅅ'은 점점 반치음으로 변했습니다. 그러나 여기서는 번거로움을 피하기 위해서 그냥 현대식으로 표기하겠습니다.
그러니까 15세기만 해도 러브(love)나 애(愛)의 뜻에 상응하는 고유어가 세 가지나 됐었는데, 5백여 년의 세월이 흐르면서 '다솜'은 사라졌고 '굄'은 명맥만 유지됐고 '사랑'만 온전히 남은 셈입니다. '괴다'와 '닷다'가 어떻게 생겨서 어떤 뜻으로 쓰이다가 어떻게 사라지게 됐는지는 지금으로서는 알 수 없습니다. 말은 이미 없어져 버렸고 글로 남은 것도 아주 적기 때문이지요.
*'다솜': 따스하고 정겨운 사랑
가장 먼저 사라진 것은 '닷다/다솜'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것은 '닷다'의 문헌 용례가 가장 적고 그나마 최근 문헌에는 나타나지 않기 때문입니다. 한글 창제(1443년) 직후 한문으로 된 여러 책이 한글로 번역됐습니다. 처음에는 <훈민정음 언해>같은 언어학 책이었는데, 곧이어 불교 문헌과 시문집들이 번역되기 시작합니다. 그중 <용비어천가(1445)>와 <월인석보(1459)>에 나오는 '닷다'의 용례를 하나씩 예로 들어 보겠습니다.
션비를 다사실씨 (且愛儒生, 龍飛御天歌
80, 1445년)
愛心은 닷온 마사미오 (애심은 사랑하는 마음이요, 月印釋譜
二 22, 1459년)
한편 불교에 심취했던 세조 덕분에 한문 불경의 한글 번역이 매우 활발해 집니다. 그래서 1462년에는 <능엄경 언해>, 1463년에는 <법화경 언해>, 1464년에는 <원각경 언해>가 잇달아 출판됩니다. 이 불경 언해본에 보면 한자 애(愛)가 '닷다'로 번역된 구절이 자주 나옵니다. 각 불경 언해본에서 한구절씩만 예로 들어 두겠습니다.
네 내 마사말 다사며
(네가 내 마음을 사랑하며, 汝愛我心,능엄경언해 제4권, 1462)
비록 뎨 기피 다사나
(비록 그가 깊이 사랑하나, 雖彼沈愛, 법화경언해 제5권, 1463)
믜윰과 다삼과를 니르와다
(미움과 사랑을 가리키는 것이다, 원각경언해 하권, 1464).
그러나 15세기 이후의 문헌에서 '닷다'나 '다솜'이 나타나지 않는 것 같습니다. 물론 제 전공이 국문학이 아닌데다가 그걸 조사해 볼 자료도 없는 상태에서 어떤 결론을 내리기는 어렵지요. 하지만 이 말이 15세기 중반과 20세기 사이의 어느 시기에 사라져 버린 것은 사실입니다. 요즘 국어 사전에 보면 그 말이 없거나 있어도 '죽은 말' 혹은 '옛말'이라고 소개돼 있으니까요.
'닷다'가 '사랑하다'는 뜻이기는 했지만, 그게 구체적으로 어떤 사랑을 가리키는 말이었는지는 딱 부러지게 짐작할 근거가 별로 없습니다. 문헌 근거가 적어서 추측하기조차 어렵기 때문이지요. 다만 요즘도 쓰이는 '따뜻하다'의 고어 형태가 '닷닷하다'인데, 그 어근이 '닷다'와 같았던 것으로 보아, '닷다'는 '따스하고 포근한 느낌을 주는 사랑'을 가리키는 말이 아니었을까 짐작할 수 있을 뿐입니다.
*'굄': 어여삐 여기는 내리사랑
한편 '괴다'는 15세기 문헌에는 물론 송강 정철의 <사미인곡(1585년경)>과 <속미인곡(1585-89년경)과 같은 16세기말 문헌에도 나오고 앞의 찬송시에 보이듯이 20세기까지 사용된 바 있습니다. 게다가 국립국어연구원이 최근 펴낸 표준국어대사전에도 "특별히 귀여워하고 사랑하다"라고 풀이돼 있는데, 이 사전의 어원자료에 따르면 작자와 연대 미상의 <악장가사>에 실려 있는 고려가요 <사모곡>의 한 구절에도 '괴다'가 나옵니다.
아소 님하 어마님 가티 괴시리 업세라
(<思母曲>, 연대미상 <악장가사> 수록)
나 하나 졈어 잇고 님 하나 날 괴시니
이 마음 이 사랑 견졸 대 노여 업다.
(나 오로지 젊어 있고 임 오로지 날 사랑하시니
이 마음 이 사랑 견줄 데 전혀
없다, 정철, <사미인곡>, 1585년경)
어와 네 여이고 이내 사셜 드러보오
내 얼굴 이 거동이 님 괴얌즉
한가마는
(어와! 당신이로구나. 이 나의 사정을 들어보소.
내 얼굴 이 모습이 임이
사랑함직 하지마는, 정철, <속미인곡>, 1585-89년경)
그밖에도 국립국어연구원의 표준국어대사전에는 '괴다'가 쓰인 예문이 제시돼 있습니다. 그 두 문장을 인용해 놓겠습니다.
아이는 괴는 대로 커 간다. (속담)
임금이.... 괴는 궁녀에게 빠지지 않았다면 어찌 이런 일이 생겼습니까?
(<번역 중종실록>)
그럼 '괴다'는 근본적으로 어떻게 사랑하는 것을 가리키는 말이었을까요? 지금까지 든 '괴다'의 용례를 살피고, 그것을 '사랑하다'의 용례와 비교해 보면 그 말의 뜻과 쓰임을 조금 미루어 볼 수 있습니다. 우선 '괴다'는 윗사람이 아랫사람을 사랑하는 것이고, '사랑하다'는 사회적 위치가 비슷하거나 높은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었을까 짐작해 볼 수 있습니다.
전영택의 찬송시에는 "어버이 우리를 고이시고 동기들 사랑에 뭉쳐있"다고 했습니다. 어버이가 자식을 사랑하는 것은 '괴다'이고 동기들 사이에는 '사랑'이 있다는 것이지요. 또 정철의 사미인곡에서도 임금이 날 사랑하는 것은 '괴다'로 표현했고, 내가 임금을 사랑하는 것은 '사랑'이라고 표현했습니다.
끝으로 표준국어대사전의 용례에서도 '괴다'는 모두 윗사람이 아랫사람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아이는 괴는 대로 커간다'에서도 '괴다'는 부모가 아이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또 <중종실록>에 나오는 '괴는 궁녀'라는 표현도 '임금이 사랑하는 궁녀'라는 뜻이므로 윗사람이 아랫사람을 사랑하는 것이지요.
'괴다'와 '사랑하다' 사이에는 차이점이 한가지 더 있는 것 같습니다. '괴다'는 오로지 사람만 목적어로 갖는 동사지만, '사랑하다'는 사람뿐 아니라 사물이나 추상적인 관념도 목적어로 삼을 수 있다는 점입니다. 그래서 '술을 사랑한다'는 말은 어법상 맞는 말이지만 '술을 괸다'는 말은 불가능한 것이지요.
*사랑: 생각하고 헤아리는 진지한 사랑
마지막으로 '사랑하다'는 가장 광범위하게 사용됐던 말이고, 지금도 그렇습니다. 우선 15세기 문헌에 '사랑/사랑하다'의 용례가 풍부합니다. 표준국어대사전에 따르면 '사랑하다'는 <두시언해 초간본>에도 나오고 <용비어천가>에도 나옵니다. 게다가 또 손주일 교수님의 조사에 따르면 <월인석보>와 <능엄경 언해>에도 적어도 한번 이상 나옵니다. 그런데 이때 쓰인 사랑이라는 말뜻이 한가지가 아니라 두 가지입니다.
思는 사랑할 씨라(思, <월인석보> 서 11쪽, 1459년)
사랑하며 恭敬할 (愛敬, <능엄경언해> 6권 33쪽, 1462년)
<월인석보>에 나오는 사랑은 '생각하다'는 뜻이고 <능엄경언해>의 사랑은 요즘과 같은 '사랑하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국어학자들은 5백년 전에는 '사랑하다'와 '생각하다'가 같은 뜻이었거나 혹은 적어도 밀접하게 관련된 개념이었을 것으로 추측합니다. '극진히 생각하는 것이 곧 사랑하는 것'이라는 해석이 나오는 것도 바로 그 때문입니다.
더 나가서 국어학자들은 '사랑'이라는 말이 사실은 '사량(思量)'이라는 한자어에서 나왔다고 주장합니다. 표준국어대사전의 어원자료에 보면 '사랑'은 '깊이 깊이 생각하며 헤아린다'는 '思量'이 귀화한 말이라고 못박았습니다. 사량(思量)의 발음이 '사랑'과 유사한 데서 그런 해석이 가능했던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또 '사랑'은 구양수가 말한 삼다(三多)와 관련됐을 지도 모릅니다. 즉 좋은 글을 쓰기 위해서는 많이 읽고(多讀), 많이 쓰고(多作), 많이 생각해야 한다(多商量)는 주장인데, 그 중에서 생각한다는 뜻의 '상량(商量)'도 '사량(思量)'과 마찬가지로 '사랑'과 발음이 유사하기 때문입니다.
아무튼 상량(商量)이든 사량(思量)이든, '사랑하다'가 '생각하다'와 연관돼 있었던 것만은 사실인 것 같습니다. 그렇지 않았다면 15세기 조선 정부가 나랏돈 들여서 책을 편찬하면서 사(思)자를 '사랑할 씨'라고 번역했을 리는 없었을 테니까요.
*닷다의 '어여삐 여김'과 괴다의 '따스함'은 '사랑'속으로
아무튼 '닷다'는 이미 죽어 버렸고, '괴다'는 거의 다 죽은 말입니다. 그러나 '사랑하다'는 살아 남아서 중국어 '아이(愛)'나 메국말 '러브(love)'와 비슷한 뜻을 가진 말로 요즘도 가장 널리 쓰입니다.
뜻 차이가 있던 여러 말이 한가지 말로 통합될 때에는 살아남은 말이 사라진 말의 뜻을 흡수하는 경향이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런 예로 '이르다'와 '가로다'와 '말하다'의 어의 변화를 들 수 있겠지요. 이 세 말의 쓰임새는 모두 달랐지만 요즘은 모두 '말하다'로 통일됐고, 그러면서 '이르다'와 '가로다'의 뜻이 '말하다'에 흡수됐기 때문입니다.
그런 것처럼 '닷다'와 '괴다'가 점점 사라지면서 그 뜻이 '사랑하다'로 녹아들었다고 보는 것이 자연스러울 것입니다. 그래서 '사랑'이라는 말은 '다솜'의 '따쓰함'과 '굄'의 '특별히 귀여워하는 내리사랑'이라는 뜻도 가지게 된 것이겠지요.
그래서 '사랑할 때의 생각'은 학문할 때 가져야 하는 차갑고 냉철한 생각도 아니고 정신을 놓고 있을 때 떠도는 멍청한 생각도 아닙니다. 그 생각은 '상대방을 어엿비 여기는 따스하고도 헤아려 주는 생각'이지요.
*'사랑'과 '애(愛)'와 '러브(love)'
'사랑하다'의 가장 근본적인 뜻이 '생각하다'라는 점은 아주 중요합니다. 그것은 중국어 '애(愛)'와 서양어 '러브(love)'와 비교할 때 고유어 '사랑' 개념이 갖는 독특한 특징이기 때문입니다.
앞에서 보았듯이 서양어 '러브(love)'의 근본적인 개념은 '짜릿하고 좋다'는 뜻입니다. 사람의 '느낌'을 강조한 개념이지요. 그래서 '러브'는 감정(感情)에 호소하는 개념입니다. 반면에 한자문화권의 애(愛)는 '힘들어도 참는 것'입니다. 그러기에서는 '뜻'을 단단히 세우지 않으면 안됩니다. 한마디로 애(愛)는 의지(意志)에 호소하는 개념이지요.
그러나 우리 고유어 '사랑'의 근본적인 뜻은 '깊이 생각하고 헤아리다'입니다. 그래서 한국어 '사랑'은 '생각'을 강조한 개념입니다. 그래서 '애(愛)'나 '러브(love)'와는 달리 '사랑'은 지각(知覺)에 호소하는 개념입니다.
굳이 서양철학의 도움을 받지 않더라도 우리는 사람의 마음 작용이 '생각과 느낌과 뜻'의 세 가지로 요약된다는 점을 알고 있습니다. 흔히 지정의(知情意)라고 줄여서 말하곤 합니다.
저는 그걸 의정지(意情志)라고 바꿔서 표현하기로 했습니다. 그 이유는 다른 글을 통해서 말씀드릴 기회가 있으리라고 생각합니다. 지금으로서는 '생각'은 의(意)에, '느낌'은 정(情)에, 그리고 '뜻'은 지(志)에 상응한다는 점만 지적해 두려고 합니다.
그래서 각 문화권마다 사랑 개념을 정립하고 발전시킬 때에 의정지(意情志)의 어떤 한가지 측면을 좀 더 강조하는 경향이 있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서양에서는 감정(感情)을 강조하는 '러브' 개념을 만들었고, 중국에서는 의지(意志)를 강조하는 '애(愛)' 개념을, 그리고 한국에서는 지각(知覺)을 강조하는 '사랑' 개념을 발전시켜 왔던 것이지요.
그 중에서 어떤 것이 더 낫다거나 못하다고 평가할 일은 아니라고 봅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실제로 느끼는 사랑은 때로는 '짜릿한 감정'이기도 하지만 때로는 '굳은 의지'이기도 하고, 또 때로는 '사무친 생각'이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그 세 측면 중에서 어떤 한가지'만' 바람직한 사랑이라고 주장하는 것도 우스운 일일 것입니다. 짜릿하지 않은 사랑은 심심하겠지만 그렇다고 짜릿하기만 한 사랑은 깊이도 없고 오래 지속되지도 못할 것입니다.
참아주지 못하는 사랑은 사랑이라고 부르기가 어려울 것이지만 또 언제까지나 느낌이나 생각없이 참기만 하는 것도 바보 같은 일이겠지요. 또 사랑에는 깊은 생각과 헤아림이 있어야 하겠지만 거기에 느낌이나 의지가 없다면 "소리나는 구리"나 "울리는 꽹과리"에 불과할 것이 분명합니다.
말하자면 생각(意)과 느낌(情)과 뜻(志)을 모두 갖춘 사랑이 진짜 사랑이라고 볼 수 있겠습니다. 물론 사랑의 세 요소는 영합(zero-sum)관계에 있는 것은 아니겠지요. 한가지가 많으면 다른 것이 쪼그라드는 것은 아니라는 말입니다. 따라서 그 세 요소가 하나도 빠져 있지만 않다면, 각각이 아무리 많아도 상관없을 것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조정희 드림
평미레(/jc72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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