鶴山의 草幕舍廊房

Faith - Hymn

[스크랩] 사랑에 대하여 (1): 애(愛)와 러브(love)

鶴山 徐 仁 2005. 8. 6. 21:26

 

"사랑이 무어냐고 물으신다면..." 하는 노래가 있었습니다.  어린 시절에 외삼촌들과 함께 듣던 라디오 프로그램 "엠비씨 육대 가수쇼"에서 처음 얻어들었는데, 아직도 입에 붙어 가끔씩 흥얼거립니다.  너무 오래된 노래라서 눈치가 보이기는 하지만 이따금 노래방에서 레파토리가 떨어지면 슬쩍 끼워 넣어 부르기도 합니다.  인상을 팍팍 써가면서 부르면 노래 맛이 더 살아납니다.

 

"사랑이 무어냐....."  유행가 질문치고는 참 큰 질문입니다.  사실 문학과 예술, 종교와 학문의 궁극적인 목적이 그 대답을 찾는 것일지도 모릅니다.  이름을 대면 누구나 아는 대문호들과 사상가들 중에 그 주제를 안 건드려본  사람이 없습니다.  옆자리의 짝꿍에 대한 관심에서 대 우주의 하모니에 이르기까지 얼마나 많은 일들이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찬양되고 또 갈구되어 왔는지 모릅니다.

 

평범한 사람들도 저마다 나름대로 사랑관을 갖고 있습니다.  연탄불 위에 꼼장어 익어가고 쐬주잔 부딪는 소리 어지러운 대포집에 가면 어깨너머로 자주 듣던 이야기가 바로 사랑 이야기들입니다.  물론 이런 표현은 80년대 식입니다만, 요즘도 술병 종류나 술잔 크기가 좀 바뀌었을 뿐 그 위로 오고가는 속사정들은  그때나 지금이나 비슷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사랑이라는 '집단 정신증'

 

그런데 사람들이 사랑을 추구하고 탐구하는 모습을 보면 일종의 집단 정신증 같기도 합니다.  거리의 약장사(요즘은 찾아보기 힘듭니다만)와 기업 강연회 강사들에서부터 아카데미 시상식 사회자에 이르기까지 청중의 관심을 사로잡으려면 사랑 이야기를 꺼내는 것만큼 효과적인 것도 없습니다.  거기다가 섹스를  빗댄 이야기를 슬쩍 곁들이면 효과만점입니다.  약도 많이 팔고 강사료도 오르고 인기도 높아집니다.

 

아카데미 시상식 얘기가 나와서 말이지만, 영화, 특히 흥행에 민감한 할리우드 영화들이 사랑을 건너뛸 리 없습니다.  주제가 아니라면 양념으로라도 반드시 끼워 넣습니다.  특히 남녀간의 사랑 이야기는 마를 줄 모르는 할리우드 영화의 단골 메뉴입니다. 

 

흥행이란 게 원래 사람들이 "좋아하냐, 안 좋아하냐"에 달렸지 않습니까?  그것만 봐도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사랑과 그 관념에 매달리는 지 알 수 있습니다.  간접 경험이라도 열망하는 거지요.  물론 저도 거기서 예외는 아니고, 또 그러고 싶지도 않습니다.  왕따는 싫으니까요. 

 

그런데 도대체 왜 사람들이 그러는 걸까요?  사랑에 웃고 사랑에 우는 집단 정신증세를 보이는 이유가 뭘까요?  그건 한마디로 사랑은 "좋은 것"이라고 여기기 때문이 아닐까 싶습니다.  짜릿하고, 구름에 뜬 것 같고, 안 먹어도 배부르고... 

 

'짜릿하고 좋음'을 표현한 비유 중에서 움베르토 에코가 푸꼬의 추라는 소설에서 쓴 표현만큼 기가 막힌 것도 드물 것입니다. 어린 벨보가 그다지도 불고 싶었던 나팔을 한바탕 불어 제낄 수 있게 되었을 때 "혈관에 꿀이 흐르는 기분"이라고 했더군요.  끔찍하지만 짜릿 만점입니다.  그리고 그게 바로 사랑이 주는 느낌이 아닐까 싶습니다.

 

또 사랑은 모두 우연이라든가, 제 눈에 안경이라든가,  국경이 있다든가 없다든가, 뭐 그런 이야기들도 많습니다만, 그런 이야기에 대해서 보시려면 에리히 프롬의 "사랑의 기술"이라는 책, 그 중에서도 첫 장을 한번 읽어보시면 충분할 것입니다. 

 

여기서는 단지 "사랑은 짜릿한 것"이라는 주장이 과연 귀담아 들을 만한 것인지에 대해서만 살펴보기로 하겠습니다.

 

사랑은 '짜릿하고 좋은 것'

 

웹스터 영어사전에 보면 러브(love)는 라틴어  루브에레(lubEre)에서 유래한 말인데 "기쁘게 하다"(to please)라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러브'는 "기분 좋은 것"입니다.

 

조금 더 거슬러 올라가 볼까요?  신약성경 시대의 헬라 사람들은 나누어 생각(分析)하기를 좋아해서 그런지 "사랑하다"를 네 가지 말로 표현했습니다.   아가페(agape)와 필리아(philia), 스토르게(storge)와 에로스(eros)가 그것입니다.  이 말들의 뜻과 쓰임새는 앞에 말한 에리히 프롬의 책에 비교적 자세히 나와 있었던 것 같습니다.  (웹에서 헬라어를 지원하지 않아 발음만 영어식으로 옮겨 놓았습니다.)

 

정욕적인 사랑을 가리킨다는 에로스나 형제애를 가리킨다는  필리아, 또 부모의 자식 사랑을 가리킬 때 더러 사용되는 스토르게도  모두 "좋아하다, 인정하다, 즐겨하다"는 뜻입니다. 

 

그리스도교에서는 아가페를 특히 소중하게 여깁니다.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라는 두 계명(誡命)이 모두 아가페이기 때문일 것입니다. 

 

아가페의 동사형인 아가파오(agapao)는 사람이나 하나님이 대상일 경우 "환영하다, 즐겁게 하다, 좋아하다"는 뜻이고, 물건이 대상이면 "(그것으로 인해) 기쁘다, 만족스럽다"는 뜻입니다.  한마디로 고대 헬라어의 "사랑"은 어원상 모두 "짜릿하다" 계열입니다.

 

사랑(愛)은 버림받지 않아도 '괴로운 것'

 

그런데 과연 그럴까요?  사랑은 기쁘거나 좋은 것이 아니라는  주장도 있습니다.  첫 번째 증거는 남진입니다.  (나훈안가요?  아직도 두 사람이 헷갈립니다.)  "사랑은 눈물의 씨앗"이라고 했으니까요.  그러나 그 말은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기 어렵습니다.  그 노래를 끝까지 불러보면 사랑하다가 "버림을 받으면" 울게 된다는 뜻이기 때문입니다.

 

헤어지거나 버림받지 않아도 사랑은 괴롭고 힘든 것이라는 주장이 있습니다.  그것은 한자(漢字) 문화권에서 발견됩니다.  사랑을 가리키는 한자는 애(愛)입니다.  그런데 이 애(愛)자는 세 부분으로 파자(破字)됩니다.

 

우선 맨 윗 부분은 기( )인데 이는 "목 메이다"는 뜻입니다.  음식을 삼키다가 목에 걸려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답답한 상태입니다.  두 번째 부분은 아시다시피  마음 심(心)입니다.  별다른 설명이  필요 없겠습니다. (웹에서 표시되지 않는 한자도 있습니다.  양해를 구합니다.)

 

맨 아랫부분은 "뒤져올 치( )"입니다.  걸어가는 사람(人)의 다리에 무거운  것, 예를 들면 차꼬 같은 것을 달아서  빨리 걷지 못하고 질질  끌면서 간다는 뜻입니다.

 

한자 문화권의 애(愛) 개념은 영어와 라틴어와 헬라어의  그것과는 달리 그다지 유쾌하지 않습니다.  마음이 메이고 무거운 짐 때문에 빨리  갈 수가 없는 상태를 가리키기 때문입니다. 

 

미국 텔레비전의 우유 선전 시리즈 중에 뻑뻑한 쿠키를 잔뜩 입에 쑤셔 넣고는 그걸 녹여 삼킬 우유가 없어서 쩔쩔매는 장면이 있었습니다.  또 숙직 근무 중에 빵을 먹으면서 라디오 퀴즈 프로그램을 듣는데, 우유가 없어 목이 메이는 바람에 1백만 달러 짜리 문제를 맞출 기회를 놓치는 이야기도 나오지요.  아무리 광고를 위한 허구라 해도 그 답답한 마음만은 이해가 가지 않습니까?

 

또 남자 분들은 행군을 해 보셨지요?  그럼 완전 군장에다가 다리에 묵직한 모래주머니 달고도 해 보셨나요?  그러면 사랑 애(愛)자가 무슨 뜻인지 실감나시겠군요.

 

이렇게 목이 메이고 다리가 무거운 것은 마음을 주는데 거절당해서 그렇다는 게 아닙니다.  사랑을 하면, 그래서 원하던 사람과 함께 살게 되면 그렇다는 겁니다.

 

그런데 아무리 목이 답답하고 숨막혀도  "카악"하고 내뱉어 버리면 사랑이  아닙니다.  아무리 무거워도 차꼬를 훌쩍 풀어내 버리면 그것도  사랑이 아닙니다.  숨통을 죄고 발목을 부여잡아도 그영저영 견디며 버티어 나가는 것이 사랑이랍니다.  한마디로 고(苦)입니다.  이런 걸 하고 싶으십니까? 

 

애(愛)에서 러브(love)로

 

대부분의 영화와 유행가는 "사랑하면 좋고, 그걸 못하면 안 좋다"로 요약됩니다.  재주를 부려서 그럴 듯한 변종을 만들어도 사실은 거기서 몇 걸음 못 벗어납니다.  이런 사랑 개념은 그 근원이 헬라, 라틴, 게르만, 앵글로색슨으로 이어지는 서양 문화권의 러브(love) 개념입니다.  러브는 어원 자체가 "기분 좋다"이니까요.

 

에리히 프롬이 30년쯤 전에 "그게 아니다"고 설득을 열심히 했습니다만, 얼마나 효과가 있었는지는 모르겠습니다.  이 러브는 아마도 1950년대 이후에 한국에 도입된 것 같습니다.  혹은 일제 강점기 일본 유학생 중심의 소위 지식인들이 선구적으로(?) 들여왔는지도 모릅니다.  '자유연애'라는 기치아래 말입니다.

 

'러브'가 주제인 한국 소설 중에서 세간의 폭발적인 인기를 얻은 처음 것은 1954년의 신문소설 <자유부인>입니다.  그때가 한국에서 애(愛)가 러브(love)로 넘어가는 분수령이었지 싶습니다.  끝에 가면 '다들 가정으로 돌아간다'로 되어 있어서 좀 어정쩡하기는 합니다만, 소설 전편은 '좋은데 어쩌란 말이냐?'로 점철되어 있습니다.

 

늦게 배운 도둑질에 날새는 줄 모른다던가요?  요즘 한국의 세태를 보면 그저 '러브' 일색입니다.  물론 대중문화에서는 그게 가장 심각한 형태로 나타나고요.  마치 '러브' 이외에는 사랑이 없는 것 같이들 호들갑을 떱니다.

 

더구나 90년대이래 인기를 끌어온 소위 '바디(body) 담론'과 '섹스(sex) 담론' 덕분에 이젠 러브조차도 아주 말초적으로 국지화되어 갑니다.   그런 담론이 '서유럽의 천재 사상가들의 말씀'에 기반을 둔 것이어서 그런지 다들 아주 안심하고서, 아니 열을 올려가면서, 거기 몰입하고 있습니다.

 

요즘 한국 사회의 여러 분야에서 '제몫 찾아주기' 운동이 한창입니다만, 러브 개념만은 그 사정권에서 완전히 벗어나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한자 문화권의 애(愛)는 원래 서양의 러브(love)와는 사뭇 다른 개념이라는 점을 알아두어야 합니다.  애(愛)는 원래 '좋은 것'이 아니라 '힘들어도 참는 것'입니다.  '짜릿하고 좋은 것'이 아니었다는 말입니다.

 

조정희 드림

평미레(ncolumn1.daum.net/jc72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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