鶴山의 草幕舍廊房

Faith - Hymn

[스크랩] 사랑에 대하여 (4): 왜 아이(愛)는 참는 것일까

鶴山 徐 仁 2005. 8. 6. 21:27

 

한자 애(愛)와 성경이 해석한 아가페(agape)는 '참는 것'입니다.  애(愛)는 '목을 조르고 다리를 부여잡아도 뱉어 버리거나 풀어버리지 말고 끌어안고 가는 것'입니다.  성경의 아가페는 '오래 참고 ... 모든 것을 견디는 것'입니다.

 

그럼 성경과 한자문화권에서는 왜 사랑을 그렇게 정의한 것일까요?  어째서 '사랑은 참는 것'이라고 했을까요?  하(얀목)련님의 제언도 있고 해서 이번에는 그걸 한번 살펴보겠습니다.  한자 애(愛)를 먼저 보지요.  어째서 중국에서는 '사랑은 참는 것'이라고 개념화했을까요? 

 

보이에 라파이에트 드멘테(Boye Lafayette De Mente)라는 메국인 중국학자가 있습니다.  이분이 쓴 동아시아 한자문화권의 특징에 대한 저서가 스무 권이 넘는데, 그 중에 <중국에도 그 말이 있다(The Chinese Have a Word for It)>는 책이 있습니다.  삼백 다섯 개의 한자를 뽑아서 그 뜻을 풀고 거기에 담긴 중국문화의 특성을 비교적 깊이 있게 설명한 책입니다.

 

그 책에 첫 번째로 실린 말이 애(愛)입니다.  그건 뭐 그 말의 중요함을 강조하기 위해서 그런 건 아닐 겝니다.  아마도 애(愛)의 중국식 발음이 '아이'이고 그걸 로마자로는 'Ai'라고 표기했기 때문에 알파벳 순서로 가장 먼저 나오기 때문이겠지요.  그 글에서 드멘테는 중국인들의 '아이(愛)'에 대해 이렇게 썼습니다.

 

"중국 역사를 통해 남녀간의 사랑은 매우 드문 일이었다. 
절대적인 위계와 가문 잇기, 개성의 억압, 가족 우선, 그리고
중매 결혼 등에 바탕을 둔 사회에서는
서양식의 로맨스라는 개념이 있을 수 없었다.
어린 시절부터 남자아이와 여자아이는 대체로 따로 양육됐고,
총각 처녀들에게 데이트란 있을 수 없었다. 
이성에 대한 사랑의 감정은 제 자리를 찾을 수 없었다. ...
사회의 어느 분야에서건 개인적인 감정은
가족과 부족과 마을과 국가의 이익에 종속돼야 했다. 
확실하지도 않고 예측이 불가능한 남녀간의 사랑은
질서와 조화, 예측 가능성을 중요시하는 중국 사회와 상충되는 것이었다."

 

드멘테는 아무래도 서양 사람이므로 '사랑'에 대해 말할 때 주로 서양식 '러브' 개념을 생각하고 있을 겁니다.  '러브'는 '짜릿하고 좋은 것'입니다.  그리고 '러브'는 일차적으로 남녀간의 사랑을 가리키는 말이었습니다.

 

그런 관점에서 보면 중국에는 남녀간의 '러브'가 없었다는 겁니다.  그러나 드멘테는 중국에 '러브'는 없었지만 '아이'가 있다는 점을 알아차렸습니다.  그리고 '러브'와 '아이'는 성격이 사뭇 다르다는 점도 이해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 중국인들이 남녀간의 '러브'를 허용하지 않는 대신 형이상학적인 '아이(愛)'를 개발해 냈다는 것이지요.  좀 길지만 그의 말을 조금 더 들어보겠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중국사람들에게 '아이(愛)'가 필요 없었다거나
그들의 생활에 '아이'가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다.
그들은 사랑의 감정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를 잘 알고 있었다.
그 감정을 잘 통제해서 사회의 생존과 안정에 도움이 되도록 유도했다.
그래서 중국인들이 '아이'의 감정을 정의하는 데에
철학적인 입장을 갖게 된 것은 그리 놀라운 일이 아니다.
중국 고대의 많은 성인들은 '아이'를
인류와 우주를 조화시키는 정신 작용으로 정의하곤 했다.
그건 마치 그리스도교에서 말하는 사랑, 즉
'네 이웃을 네 몸 같이 사랑해라'는 개념과 비슷한 것이었다. ...
이렇게 이상화된 사랑 개념은 개인의 성품과 행동으로 연장됐다.
진정으로 사랑하는 사람은 따뜻한 마음을 갖고 행동이 올발라야 했고
자신과 이웃과 전 우주와 더불어 조화되는
우아한 삶을 살아야 하는 것으로 기대됐다. ...
이성에 대한 사적이고 개인적인 사랑이 금지됐기 때문에
중국인들은 그들의 사랑의 감정을 자녀와 조상,
예술과 공예, 그리고 정신 세계에 쏟았다."

 

중국 사회는 개인의 '사랑의 감정'을 이성에게가 아니라 '자녀와 부모와 조상과 예술과 학문'에 쏟도록 유도했다는 것이지요.  그래서 '아이'는 일차적으로 남녀간의 사랑이 아니라 부모의 자식 사랑, 후손의 조상 공경, 예술과 학문을 위한 정진을 가리키는 말로 쓰이게 됐다는 것입니다.

 

자식 사랑이나 조상 공경, 예술/학문 연마는 '그저 좋아서 하는 것'만은 아닙니다.  시작이나 계기는 그런 게 있을 지 모르지만 그 과정은 험난합니다.  예술이나 학문에 정진하는 과정은 지루한 과정입니다.  대가족 제도 아래서 자식을 사랑하거나 조상을 공경하는 일도 어렵기 짝이 없는 일입니다.

 

중국사람의 조상 공경은 제사에 나타납니다.  4대조 할아버지까지 제사의 대상이지요.  그런데 제사라는 일이 보통 만만한 일이 아닙니다.  오죽하면 성인이라 불리는 공자까지도 제사의 중요성을 강조해 마지않았겠습니까?  논어 몇 구절을 보지요.

 

자공이 매달 지내는 제사에 양을 희생으로 하는 것을 그만 두기를 원했다. 공자가 말했다.  "사(자공의 이름)야! 너는 양을 아끼느냐? 나는 예절을 아낀다." (子貢 欲去告朔之羊 子曰 賜也 爾愛其羊 我愛其禮. 논어 팔일편).

 

자공은 공자가 자랑해 마지않던 현명한 제자의 한사람입니다.  그런 자공이 제사 비용을 좀 아끼려고 한 걸 보니까 당시 공자 문하의 살림에는 그게 버거웠던 모양이지요.  제사를 매달 지내는 것도 만만치 않은 일이었을 텐데 몇 마리였는지는 몰라도 그때마다 양을 잡았던 모양이니까요.  그러나 조상에 대한 예의를 위해서는 그걸 아껴서는 안 된다는 게 공자의 제사관입니다.  경제적인 이유로 제사를 소홀히 할 수 없다는 것이지요.  또 술이(述而)편에는 이런 말도 나옵니다.

 

공자가 평소에 신중히 하던 일은 제사지내기 전에 몸과 마음을 깨끗이 하는 일, 전쟁에 관한 일, 질병(특히 전염병)을 다스리는 일이었다. (子之所愼 齊戰疾, 논어 술이편).

 

공자의 매우 신중하게 처신했던 일이 전쟁과 질병과 제사였다는 말입니다.  질병, 특히 전염병은 많은 사람들의 목숨을 위협하는 일이고 전쟁은 백성 뿐 아니라 나라의 존망을 위태롭게 하는 일이니 중요했을 것이고, 그러니만큼 신중하지 않으면 안될 일임에 틀림없습니다.  그런데 공자에게는 제사를 지내기 위해 몸을 깨끗이 하고 마음을 단정히 하는 일(齊)이 그만큼 중요한 일이라고 강조했다는 것이지요.

 

공자가 노나라 시조 주공을 모신 묘(대묘)에서 제사를 맡았을 때 과정마다 여러 가지를 물었다.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누가 사람의 아들이 예절을 안다고 했는가? 대묘에서 모든 일을 일일이 묻지 않는가?" 공자가 듣고 말하기를 "그것이 (그렇게 묻는 것이) 예절이다." (子入大廟 每事問 或曰 孰謂 人之子知禮乎 入大廟 每事問 子聞之曰 是禮也, 논어 팔일편).

 

공자는 주나라때부터 내려온 제례를 꿰고 있던 사람입니다.  그러면서도 실제로 제사를 지낼 때에는 이렇게 일일이 담당자에게 물어가면서 집행했던 모양입니다.  단 한가지라도 실수하지 않으려는 신중함과 세심함 때문이겠지요.  공자는 제사에 대해 이렇게 마음을 쏟았다는 이야깁니다.  드멘테는 이런 것이 바로 '아이(愛)'라고 정의했던 것이지요.

 

부모의 자녀 사랑은 또 어떤가요?  요즘처럼 자식이 많아야 두 명일 때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자식이 7-8명인 게 평균이었던 때의 이야기입니다.  10명이 넘는 경우도 다반사였지요.  그 정도면 요즘 군대 편제로 1개 분대 급입니다.  1개 분대 병력의 먹을 거리와 입을 거리만 장만해 대는 것도 부모로서는 벅찰 일이었겠습니다.  그러니 일일이 하나씩 껴잡고서 '개성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인성 교육'이라는 게 가능이나 했겠습니까? 

 

그러다 보니 말 잘 듣는 온순한 녀석이 한 녀석이면 속썩이는 녀석이 셋입니다.  그러니 부모의 마음이 편할 날이 있을 리 없습니다.  가지 많은 나무에 바람잘 날 없다는 말이 그래서 나온 것이지요.  그런데도 부모는 자식을 팽개치지 않습니다.  자식이 아무리 잘못됐어도 끝까지 돌봐 주려는 게 부모의 사랑입니다.

 

그런 부모의 심정을 짐승에 빗댄 일화가 바로 '단장(斷腸)' 고사입니다.  직역하면 '창자가 끊어졌다'는 말인데, 주인공은 사람이 아니라 원숭입니다. 

 

진(晉-東晉을 말함, 317∼420)나라의 장군 환온(桓溫)이 촉(蜀)나라를 정벌하려고 군함 여러 척에 군대를 싣고 양자강 중류의 삼협(三峽)을 통과할 때의 일이었습니다.  보급과 급수를 위해 배가 강안에 정박하는 동안 부하 한 사람이 새끼 원숭이를 한 마리 붙잡았던 모양입니다.  배가 출발하자 어미 원숭이가 강가에서 울부짖는 소리가 들렸답니다.  병풍처럼 깎아지른 협곡 벼랑을 따라서 어미 원숭이는 필사적으로 배를 쫓아 왔다고 합니다. 

 

배는 1백여리를 더 가서야 다음 정박지에 도착했습니다.  배가 강기슭에 닿자마자 따라온 어미 원숭이는 곧장 배 위로 뛰어올랐는데 그대로 거꾸러져 죽고 말았다는군요.  병사들이 어미 원숭이의 배를 갈라보니 너무 슬퍼한 나머지 창자가 토막토막 끊어져 있었답니다.  보고를 받은 환온 장군은 원숭이 새끼를 잡아온 부하를 매질해서 쫓아버렸다는 이야기입니다.

 

황당한 이야기입니다.  어미 원숭이가 1백리나 쫓아왔다는 것도 믿기 어렵지만 원숭이가 배에 올라와 죽으니 병사들이 배를 갈라 봤다는 이야기는 더더욱 그렇습니다.  저 같으면 그냥 '지쳐서 죽었나 보다' 할텐데 그 병사들은 일부러 피를 봐 가면서 배를 갈라 봤습니다.  원숭이 고기를 먹으려고 그러지 않았다면 믿기 어려운 이야기지요. 

 

하긴 이 고사가 실린 책이 <세설신어(世說新語)>입니다.  중국 남송(南宋)의 유의경(劉羲慶)이 420년에 편찬한 것인데, 후한(後漢) 말부터 동진(東晉)시대까지 명사들의 일화를 수집해서 기록한 것입니다.  그런데 책이름이 '세설(世說)'입니다.  '세상 사람들의 이야기' 혹은 '세상 사람들의 평가'라는 뜻입니다.  그러나 '떠도는 이야기' 정도로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꾸며낸 이야기라도 짐승을 빗대어 중국식의 부모 사랑을 형상화한 것으로는 아주 뛰어난 작품입니다.  게다가 한갓 미물도 자식을 그렇게 사랑하는데 사람들은 마땅히 그렇게 해야 한다는 교훈 혹은 권고가 들어 있는 이야기이기도 하지요.  이런 게 바로 중국사람들에게 '아이(愛)' 개념을 세뇌(?)시키는 한가지 방법이었겠습니다.

 

그래서 중국인들이 생각하는 '아이'는 서로 끌리는 남녀 사이의 '짜릿하고 기분 좋은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부모와 조상을 신중하게 공경하고 자녀를 다함없이 돌보아야 하는 지난한 과정이었습니다. 

 

또 양반이나 귀족들이나 누릴 수 있었던 학문과 예술 사랑도 마찬가지입니다.  옛날 중국식 공부를 아시는 분들은 아시지요.  오죽하면 '백 번을 읽으면 뜻을 저절로 알게 된다(讀書百遍意自現)'는 말까지 나왔겠습니까?  학문을 한다는 게 인내와 끈기를 요구하는 지루하고도 어려운 과정이었다는 말입니다.

 

'독서백편의자현'이라는 말은 중국 남당시대의 서개(徐金+皆, 920-974)가 쓴 세시광기(歲時廣記) 2편 4권, 겨울(冬) 문세여(問歲餘) 편에 나오는 말입니다.  원래는 역사책 삼국지(三國誌)의 '위서(魏書) 왕숙전(王肅傳)'에 나오는데 위서는 없어졌고 그 책을 인용한 여러 책에 전하는 이야기라고 합니다.

 

이야기인즉슨, 후한때 동우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학식이 높다고 소문이 나서 당시 황제였던 헌제에게 '황문시랑'이라는 벼슬로 발탁됐습니다.  주로 경서를 연구하고 가르치는 자리였답니다.  그에 대한 서개의 서술은 이렇습니다.

 

위략에 말하길 동우는 학문을 좋아했는데 그에게 배우려는 사람들이 많았지만 동우는 그들을 가르치기를 기꺼워하지 않았다.  그가 말하기를 학자는 마땅히 먼저 책을 백번씩 읽어서 뜻이 스스로 나타나도록 해야한다.  (當先讀書百遍而義自見-여기서는 現자 대신 見을 썼는데, 천년 전에는 그게 같은 뜻이었다고 합니다.)  배우려는 자가 (그렇게 여러번 책을 읽을) 여가의 날이 없어서 힘들다고 했더니, 동우는 마땅히 세 가지 여가(三餘)를 사용해야 한다고 했다.  세 가지 여가가 뭐냐고 뜻을 묻자, 동우는 겨울은 한해(歲)의 여가요 밤은 하루(日)의 여가요 윤달은 달(月)의 여가라고 대답했다.  (魏略 董遇好學 人從學者 遇不肯敎云 當先讀書百遍而義自見 學者云 苦暇無日 遇曰 當以三餘 或問三餘之意 遇曰 冬者歲之餘 夜者日之餘 閏者月之餘)

 

같은 책을 백번 읽는 것만도 쉽지 않은 일입니다.  그런데 동우는 평소 마땅히 해야 할 다른 일을 다 하고 나서 남는 시간에만 책을 백번씩 읽으라고 한 것이지요.  이게 바로 중국인들이 학문을 사랑하는 방법입니다.  쉬는 시간 없이 정진해서 불가능해 보이는 일을 이루라는 것이지요.  그렇게 해서라도 깨달아야 한다고 믿었으니까요. 

 

이게 바로 드멘테가 서술한 바, 중국인들이 '아이(愛)'를 실천하는 방법들입니다.  부모와 조상을 공경하는 일, 자식을 기르고 가르치고 돌보는 일, 그리고 학문과 예술에 정진하는 일이 바로 그것입니다.  그것은 하나같이 힘겹고 어려운 일이며, 그래서 끊임없이 참고 견뎌야 하는 일이었던 것이지요.

 

드멘테의 말이 맞다면, 중국사람들이 '아이' 대신 서양식 '러브'를 채택한 것은 1970년대 후반이라고 합니다.  중국정부가 중매결혼을 법으로 금지한 것은 1950년대의 일이지만 여전히 성행하고 있고, 시골일수록 그렇다는 군요.  그러나 70년대 중반 이후로는 도시, 특히 대도시를 중심으로 '러브'와 '연애결혼'이 확산되고 있답니다.  그래서 지금은 중국 사람들도 남녀간의 '러브' 개념을 알고 있고 생활에서 적극 실천중이라는군요. 

 

재미있는 것은 중국에서 서양식 '러브'를 실천하는 데 방해가 되는 가장 큰 일은 사람 수와 공간이라는군요.  사람이 너무 많다보니까 단 둘이서 '짜릿하게 즐길 수 있는' 공간이 마땅치 않다는 말입니다.  그부분에 대한 드멘테의 말을 인용하면서 중국식 아이(愛) 이야기는 마칠까 합니다.

 

사람이 많아 북적거리는 중국 대도시에 '로맨틱 러브'가 성행하기 시작하면서 생긴 가장 큰 문제는, 남녀가 만나서 친밀한 관계를 이어나갈 공간이 별로 없다는 점이다.  요즘은 두 종류의 장소가 애용되고 있다.  하나는 도시 공원이고 다른 하나는 극장이다.  특히 극장에서는 이런 남녀를 위해서 두 자리씩 붙여 칸막이를 해 놓은 반쯤 격리된 좌석을 제공하고 있다.  사람들은 이런 좌석을 흔히 "러브 석(席)" 혹은 "러브 코너"라고 부른다.

 

평미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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