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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aith - Hymn

[스크랩] 소망에 대하여 (2): 확신으로 기다리는 소망

鶴山 徐 仁 2005. 8. 6. 21:28

 

'소망에 대하여' 첫 글에서는 개역 한글판 성경은 '희망'이라는 말을 단 한번도 쓴 적이 없다는 점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1920년대에 '희망가'가 불리게 된 배경을 보면서 그게 요즘의 낱말 뜻처럼 그렇게 밝은 말이 아님을 살폈습니다. 

 

그것은 일제와 군부독재 시절의 암울했던 사회적 분위기가 그런 말에 어두운 색조를 덧칠했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일제에 부역했거나 군부독재에 빌붙었던 사람들을 제외한다면, '새벽'을 기다리던 사람들은 너나없이 '닭 모가지' 비틀리듯이 비틀리며 살았던 시기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굳이 그런 시대적 배경을 고려하지 않더라도 희망(希望)과 소망(所望)은 그 본래적 의미가 사뭇 다른 말입니다.  이번에는 두 말의 뜻 차이를 어원적으로 한번 살펴보겠습니다.

 

 

*허영과 물욕이 밴 희망(希望)

 

희망(希望)이라는 말은 원래부터 그다지 좋은 조어(造語)가 아닙니다.  '바랄 희(希)'자의 자원(字源)을 살펴보면 거기에 물욕이 배어 있음을 알 수 있기 때문입니다.  희(希)자의 일차적인 뜻은 '성기다'이고 두 번째 뜻은 '드물다'입니다. 

 

세 번째 가서야 '바라다'는 뜻이 나옵니다.  하지만 이미 5세기 전반에 중국의 범엽(398-445년)이 후한서(後漢書)를 쓰면서 희(希)자를 '바라다'는 뜻으로 쓴 예가 있는 것을 보면 그 연원이 오래된 것임에는 틀림없습니다.

 

희(希)는 효(爻)와 건(巾)의 합자입니다.  건(巾)은 '천, 옷감'이라는 뜻이고, 효(爻)는 천이나 옷감을 '짜다'는 뜻입니다.  가로 세로로 엇갈린 것이 길쌈 중인 실의 모습을 본떴습니다.  이것이 좀 변해서 '성기게 짜다, 혹은 특별한 방식으로 짜다'는 뜻도 생겼습니다.  그래서 희(希)자는 '성긴 천, 혹은 특별하게 짜여진 천'이라는 뜻입니다.

 

천이란 모름지기 촘촘하게 짜야만 좋은 것인 줄 알았는데, 희(希)자를 보니까 반드시 그런 것도 아니었던 모양입니다.  성기게 짠 천을 특별한 것으로 쳐주던 시절도 있었나 봅니다.  특별하다보니까 드물었을 것입니다.  드무니까 값도 비싸고 구하기가 어려웠겠습니다.  요즘 말로 하면 명품(名品)인 셈이지요.  그래서 이런 '값비싼 특별한 천'을 갖고 싶어하는 것이 바로 '바라다'는 뜻으로 변한 것입니다.  그래서 희(希)는 결국 '명품을 가지고 싶다'는 뜻이지요.

 

그래서 희(希)의 뜻은 동양 문화권에서는 그다지 바람직한 것이 아닙니다.  허영(虛榮)과 물욕(物慾)을 담은 말이기 때문이지요.  그러나 같은 '바라다'라도 망(望)의 뜻은 그 차원이 전혀 다릅니다.  이제 어째서 희망(希望)보다는 소망(所望)이 훨씬 더 나은 개념인지를 망(望)자를 중심으로 보겠습니다.

 


*바랄 망(望)

 

여느 때처럼 파자(破字)부터 해 봅니다.  망(望)자는 세 단위 한자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우선 망(亡)은 '사그러 든다, 죽는다'는 뜻입니다.  월(月)은 '달'이고요.  그런데 망(望)자의 제3요소가 약간 문제입니다.  한국 자전에는 임(壬)자가 '아홉번째 천간 임, 간사할 임'이라고만 새겨져 있습니다.  임진년(壬辰年), 할 때 그 '임'자입니다.

 

그러나 중국 자전을 보면 임(壬)자가 '정'(중국 발음으로는 '청(cheng)'으로 읽힙니다. 그 흔적은 한국 용법에도 일부 나타납니다.  '드러내 보이다, 드리다'는 뜻의 정(呈), '조정, 관청, 공정하다'는 뜻의 정(廷), '마음대로 못하다, 그래서 걱정하다'는 뜻의 정( ) 등이 그것입니다. 

 

이 글자들에서 정(壬)은 소리를 나타낸다고 하지만, 이 글자가 '정'으로 읽힐 때에는 그 뜻이 '학식 있는 사람(나중에 선비로 해석됨)이 서 있다'입니다.  그것은 선비 사(士)자와 변형된 사람 인(人)자의 합자이기 때문입니다. 

 

이제 망(望)의 어원적 뜻을 종합해 봅시다.  두 가지로 풀 수 있습니다.  먼저 정(壬)의 뜻을 무시한 해석은 "사그러들 달"입니다.  사그러들 달이라니요?  그렇습니다.  보름달입니다.  찰 대로 꽉 차서 사그러드는 일만 남은 달입니다.  그래서 망(望)자는 "보름 망"으로 새겨지기도 합니다. 

 

한편 정(壬)의 뜻을 고려한 해석은 '식자(識者)가 사그러들 달을 바라본다'입니다.  이때 망(望)자의 새김은 '바라보다'가 되지요.  이 '바라본다'는 말은 고개를 들어서 하늘의 달을 본다는 뜻만은 아닙니다.  보름달이 기울어들 것을 '내다본다'는 뜻도 있습니다. 

 

그래서 망(望)자는 공간적으로 '바라본다'와 시간적으로 '내다본다'는 뜻을 모두 가집니다.  관찰과 생각을 통해서 '아하, 이제 달이 기울기 시작하겠구나'하고 알게 되는 것이지요.  '저걸 좀 갖고 싶다'는 뜻인 희(希)와는 근본이 틀린 말이지요?  그러니 희망(希望)이라는 말이 자연스럽게 어울리는 말일 수가 없는 것입니다.

 


*확신을 갖고 기다리는 소망(所望):

 

소망은 旋ㅐ岵?바램만이 아닙니다.  부정적인 면도 예측과 기대의 범주에 듭니다.  망(望)이란 '달이 찰' 것이 아니라 '기울' 것을 내다봅니다.  어두운 면을 내다보는 것이지요.  혹은 밝고 어둡고를 떠나서 객관적인 사실을 있는 그대로 내다본다는 뜻으로 새길 수 있을 것입니다. 

 

소망(所望) 개념의 또 다른 뜻, 사실은 더 중요한 뜻은 그것이 '확실성을 가지고 기다린다'는 것입니다.  인류의 오랜 경험을 통해서 보름달이 사그러드는 것만큼 '확실한' 일이 또 있겠습니까?  오죽하면 '달이 차면 기울게 마련'이라는 속담까지 생겼겠습니까? 

 

게다가 예측과 기다림을 가리키는 망(望)자에는 '식자(識者)'까지 동원되어 있습니다.  '달이 차면 기운다'는 것은 안 배운 사람도 모두 경험으로 압니다.  그런데 왜 이 글자에 '배운 사람'을 등장시킬 필요가 있었을까요?

 

조조가 천자를 보호 겸 감시하기 시작한 직후에 도읍을 낙양에서 허도로 옮긴 이유를 기억하십니까?  왕립이라는 당시의 한 인텔리겐치야가 하늘의 별을 보면서 "화성의 기운이 떨어지고 토성의 기운이 올라오는 것을 보니 곧 천자가 갈리겠구나"했기 때문이었답니다.  조조의 모사였던 순욱도 왕립의 이론을 지지하면서 "화성기가 있는 낙양을 버리고 토성기를 머금은 허도로 갑시다"고 권했습니다.

 

(저는 삼국지 번역본 중에서 고우영씨 작품을 제일 좋아합니다.  이문열 삼국지(1988)가 문체가 현란하기는 하지만, 해석 면에서는 고우영 삼국지(1978)가 더 낫다고 봅니다.  두 작품의 해석이 겹치는 부분도 있기는 한데, 그런 경우에는 먼저 책을 낸 사람을 쳐주어야 하지 않을까 싶군요.  게다가 만화라서 읽기도 쉽습니다. 

 

몇 년 전에 <딴지일보>가 70년대 서슬 퍼런 당국의 검열 때문에 삭제됐던 부분을 복원한 원본 삼국지를 연재했었는데, 제 자신도 믿기 어려운 인내와 끈기로 그걸 일일이 다운로드해 놨습니다.  파일 수가 1천6백개가 넘습니다.  저, 지독합니다.  짠돌이... 몇 만원만 주면 살 수 있는 건데.  씨디 값보다 우송료가 더 비쌀 것이기에 그랬던 것 같습니다.  작년에는 제가 존경해 마지않는 황석영 선생님의 삼국지(2003)가 완간됐다는 데 아직 읽어보지 못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옛날 지식인들은 천체의 운행을 보고 인간과 나라의 흥망과 생사화복을 '미루어 알아냈다'고 합니다.  뻥이라고 무시하지 마시기를 바랍니다.  그 당시에는 그게 최고의 지식이요 과학이었으니까요.

 

정확한 예측을 위해서는 면밀한 관찰 뿐 아니라 관찰 결과에 대한 주의 깊은 '해석'도 요구되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경험과 생각, 혹은 관찰과 해석, 이 두 가지는 소망(所望) 개념의 두 가지 중요한 구성 요소입니다.  쉽게 말해 '바라보고(관찰) 내다보는 것(해석)'입니다.

 

망(望)의 파자(破字)에 따르면 소망(所望) 개념은 '경험과 관찰, 생각과 해석을 바탕으로 앞으로 일어날 일을 확신하면서 기다린다'는 뜻입니다.  그 예측과 기다림은 근거 없는 바램이 아닙니다.  인류의 경험과 식자의 관측, 그리고 깊은 생각과 면밀한 해석으로 뒷받침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어떻습니까?  이런 소망(所望) 개념이 그간 단순하게 생각해 온 '소망'과 같습니까?  더더구나, 이런 소망 개념이 물욕을 머금은 희망 개념과 같겠습니까?  저는 아니라고 봅니다.  개념에도 출신 성분이 있고 족보가 있는 법입니다.  소망은 희망에 비해 훨씬 정치하고 우아한 개념입니다.

 


평미레/
조정희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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