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해를 어떻게 잘 맞을 수 있을까 생각만 계속하고 있었는데 벌써 새해가 사흘째입니다. 시간은 흐르는 물이고 쏘아놓은 화살이라더니, 옛말에 틀린 말이 없는 것 같군요.
'새해'를 수식하는 말로 가장 인기 있는 것이 '희망찬'입니다. 그런데 올해는 '희망찬 새해'라는 표현이 잘 써지지 않는군요. 소망을 살펴보다가 '희망'이라는 말을 파헤쳐 놓고 보니 그게 그다지 좋은 말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어서 그런 것 같습니다. 그렇다고 '소망찬 새해'라는 말은 아직 익숙하지 않구요.
앞에서 우리는 소망(所望)은 객관적이고 확실하고 밝은 것을 바라고 기다리면서 준비하는 것인 반면에, 희망(希望)은 주관적이고 불확실한 것에 대한 감정적인 바람인 것을 보았습니다. 게다가 '희망'은 한자 문화권에서는 족보를 찾아볼 수 없는 기형적인 한자어입니다. 19세기부터 서양어 '호프(hope)'를 번역하기 위해 졸속으로 만들어낸 일본식 한자어이기 때문이지요.
그렇다면 한국말에는 일제 강점기 이전까지 '불확실하기는 하지만 주관적이고 정서적인 바람'을 뜻하는 말은 없었을까요? 그런 말이 없었을 리가 없습니다. 고등언어에 속하는 한국말 어휘들이 그런 정도의 의미분화도 일으키지 않았다고 보기는 어렵기 때문입니다.
사실 그런 말로 '소원(所願)'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소원은 소망과는 조금 다릅니다. 소망이 주로 '확실성이 있는 미래에 대한 객관적이고 이성적인 바람'을 가리킨다면 소원은 '다소 불확실한 미래에 대한 주관적이고 감정적인 바람'을 가리킨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소망과 소원의 개념 차이는 요즘 한국말에서는 상당히 무너져 있습니다. 예컨대 대표적인 국어사전들을 보면 그러한 개념 차이가 거의 무시되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우선 <네이버 국어사전>의 뜻풀이를 보겠습니다.
<네이버 국어사전>
소망: 바람. 바라는 바. 소원. 희망. 의망.
소원: (무슨 일이 이루어지기를) 바람, 또는 바라는 바. 소망. 원.
희망: (어떤 일을) 이루거나 얻고자 기대하고 바람. 기망. 소망. 희원.
'소망'의 뜻풀이를 보면 소원과 희망의 동의어라고 아예 못 박혀 있습니다. 또 '소원'의 뜻풀이에도 소망이 같은 말로 소개돼 있고, '희망'의 뜻풀이에는 소망이 동의어로 나와 있습니다. 그래서 이 사전의 풀이를 액면 그대로 받아들인다면 '소망'과 '소원'과 '희망'은 본질적으로 같은 말입니다.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다른 사전에서도 사정은 비슷합니다. 최근의 용례를 중심으로 편집했다는 <연세대 한국어 사전>을 보시지요.
<연세대 한국어사전>
소망: 바라는 것. 희망하는 것.
소원: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일.
희망: 어떤 일을 이루고자 하는 바람.
이 사전은 동의어를 제시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뜻풀이만 가지고서 세 낱말의 비슷한 점과 차이점을 미루어 짐작해야 합니다. 그러나 세 낱말의 뜻풀이를 보아도 그다지 차이점을 발견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세 낱말의 뜻을 푸는 데에 모두 '바라다'는 말을 썼습니다. 그리고는 더 이상 덧붙여진 설명이 별로 없습니다. 그리고 '소망'을 푸는 데에 '희망하는 것'을 제시했기 때문에 소망과 희망을 같은 말로 취급하고 있기까지 합니다.
이처럼 동의어를 비교해 보거나 뜻풀이를 비교해 보거나, 오늘날의 국어사전에서는 '소망'과 '소원'과 '희망'을 그다지 구별해 주지 못합니다. 그런 사정은 국어사전의 결정판이라고 자랑해 마지않는 국립국어연구원의 <표준국어대사전>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표준국어대사전>
소망: 어떤 일을 바람. 또는 그 바라는 것. ≒의망. (비) 염원.
소원: 바라고 원함. 또는 바라고 원하는 일. ≒원. (비) 희망.
희망: 앞일에 대하여 기대를 가지고 바람. ≒기망, 희원, (비) 소원.
이 국어사전에서도 우선 소망과 소원의 차이를 발견하기가 매우 어렵습니다. 뜻풀이를 거의 전적으로 '바라다'에 의존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소망의 비슷한말로 염원(念願)을 들고 있는데, 원(願)자가 거기 들어 있다는 점에 주의를 기울일 필요가 있습니다. 망(望)과 원(願)을 같은 뜻으로 취급한다는 말이지요.
'소원'의 뜻풀이는 우습기조차 합니다. 소원(所願)이라는 한자어를 직역하면 '바라는(願) 바'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이 사전은 '바라고 원함'이라고 했습니다. '원(願)함'이 '바람'이라는 뜻인 것을 몰랐던 것일까요? 같은 말을 쓸데없이 두 번이나 겹쳐서 써 놓았습니다. 게다가 '소원'의 비슷한말로 '희망'을 제시했습니다. '희망' 항목에서도 그 비슷한말로 '소원'을 제시한 것이 그다지 놀라운 일도 아닙니다.
결론적으로 각종 한국말 사전에 나타난 뜻풀이나 동의어를 보면 '소망'과 '소원,' 그리고 '희망'은 결국 그 뜻이 별로 차이나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 세 낱말이 원래부터 동의어는 아닙니다. 완전히 같은 말이라면 애초부터 그렇게 나눠 쓰지도 않았을 테니까요.
세 낱말이 원래는 서로 다른 개념이었다는 점은 한글 개역판 성경을 보면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한글 개역판 성경은 일제 강점기의 일본말이나 해방 이후의 잉국말의 영향을 받기 이전에 번역됐습니다. 그래서 일본말과 잉국말의 영향을 받지 않았고, 그렇기 때문에 한국 고유어나 고유 개념이 비교적 생생하게 살아 있습니다.
우선 한글 개역판 성경에서는 희망(希望)이라는 말이 단 한번도 쓰이지 않았다는 점은 앞글에서 밝힌 바 있습니다. 19세기까지만 해도 '희망'이라는 말은 한국말 어휘가 아니었다는 말입니다. 실제로 '한불자전(1894년)'이나 '한영자전(1897년)'에는 '희망'이 표제어로 수록돼 있지도 않습니다.
한편 소망(所望)이라는 말은 한글 개역판 성경에 전부 97번쯤 쓰였습니다. 그 모두는 고대 헬라어 엘피스(Elpis), 그리고 잉국말 성경 킹제임스 역본의 호프(hope)를 번역한 말입니다.
하지만 호프가 모두 소망으로 번역된 것은 아닙니다. 킹제임스 역본에서는 호프가 모두 121번 사용됐으니까 약 20여개의 호프는 다른 말로 번역됐다는 말이지요. 소망보다는 호프의 뜻이 더 넓어서 그렇습니다. 소망은 객관적이고 이성적인 '익스펙테이션(expectation)'을 가리키는 말이지만, 호프는 주관적이고 감정적인 '앤티시페이션(anticipation)'도 포함하는 말이기 때문입니다.
한편 한글 개역판 성경에는 소원(所願)이라는 말도 자주 나옵니다. 그러나 어떤 경우에도 소원이 소망과 같은 뜻으로 쓰인 적은 한번도 없습니다. 신구약 성경을 통틀어 소원(所願)은 34번 쓰였습니다. 그런데 그 대부분은 잉국말 디자이어(desire)의 번역어입니다. 소망이 대체로 호프(hope)의 번역어로 쓰인 것과는 대조적입니다.
호프와 디자이어가 각각 소망과 소원으로 명확히 구별되어 번역된 사실을 보기 위해서 구약과 신약성경의 구절을 각각 한 개씩 옮겨놓아 보지요.
(잠언 13장12절)
소망이 더디 이루게 되면 그것이 마음을 상하게 하나니 소원이 이루는 것은 곧 생명 나무니라 (Hope deferred maketh the heart sick: but when the desire cometh, it is a tree of life.)
(히브리서 6장11절)
우리가 간절히 원하는 것은 너희 각 사람이 동일한 부지런을 나타내어 끝까지 소망의 풍성함에 이르러 (And we desire that every one of you do shew the same diligence to the full assurance of hope unto the end:)
잠언의 말씀에서나 히브리서의 말씀에서나 킹제임스 역본의 '호프'는 한글 개역판 성경에서는 대체로 '소망'으로 번역됐습니다. 반면에 위에 인용한 두 구절에 보면 '디자이어'는 '소원(所願)' 혹은 '원(願)'으로 번역됐지요. 히브리서에서 '원(願)'을 쓴 것은 그게 동사이기 때문입니다. 소원이나 원은 결국 마찬가지이니까요.
재미있는 것은 한글 개역판 성경에서 34번이나 쓰인 '소원'이 잉국말 '호프'의 번역어인 경우는 단 한번도 없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잉국말에서 '호프'와 '디자이어'가 전적으로 다른 개념인 것과 마찬가지로, 한국말에서도 '소망'과 '소원'은 서로 다른 개념이라고 보아야 하는 것이지요.
소망과 소원의 개념 차이는 당연히 망(望)과 원(願)의 차이 때문에 생긴 것입니다. 적어도 한글 개역판 성경에 쓰인 용례를 잘 살펴보면 그 차이를 금방 알 수 있습니다. 소망은 '미래에 대한 객관적이고 확실하고 이성적인 바람'인 반면, 소원은 '미래에 대한 주관적이고 다소 불확실한 감정적인 바람'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이렇게 1백년전의 문헌인 성경에서 명확히 구별되어 쓰인 소망과 소원을 어째서 오늘날의 국어사전들은 혼동하고 있는 것일까요? 게다가 1백년 전에는 있지도 않았던 일본식 한자어 희망까지 한데 섞어서 서로 같은 말인 것처럼 풀어놓고 있는 것일까요? 저는 그게 '멘트로피' 법칙 때문이라고 봅니다.
'멘트로피'는 2년쯤 전에 제가 새로 만든 말입니다. 멘트로피를 설명하기에 앞서, '엔트로피'라는 말을 잘 아시겠지요. 1865년 루돌프 클라우지우스(Rodolf E. Clausius; 1822-88 독일의 물리학자)가 '변화하다'는 뜻의 그리스어 트로페(τροπη)의 앞에다가 에너지(energy)의 첫 음절을 합쳐서 만든 말입니다. 그대로 변역하면 '에너지의 변화'라는 말이지요.
엔트로피란 "일정한 닫힌 계(界)에서 에너지의 불활성 정도"를 가리키는데, 클라우지우스가 <열의 역학적 이론>이라는 이름으로 발표한 아홉 편의 논문중 맨 마지막 편에 나옵니다. 클라우지우스는 이 글에서 "우주의 엔트로피는 항상 증가한다"는 유명한 결론을 끌어냈는데, 이게 이른바 열역학 제2법칙입니다.
당연히 그에 앞선 열역학 제1법칙이 있습니다. 클라우지우스에 앞서서 로버트 마이어(Robert Mayer, 1814-78), 헤르만 헬름홀쯔(Herman Helmholtz, 1821-94), 제임스 주울(James P. Joule, 1818-89)등이 1840년대 초에 정리한 "에너지 보존의 법칙"이 바로 그것입니다.
에너지 보존의 법칙은 '일정한 닫힌 계(界)에 존재하는 에너지의 총량은 일정하다'는 법칙입니다. 위치에너지가 열에너지로, 열에너지가 운동에너지로, 그리고 운동에너지가 위치에너지로 바뀌는 일은 흔히 있는 일이지만, 그 모든 종류의 에너지를 다 합치면 총량은 언제나 일정하다는 것이지요.
클라우지우스는 열역학 제1법칙을 받아들이면서 거기에 일정한 방향성이 있다는 사실을 알아냈습니다. 에너지의 총량은 일정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사용할 수 있는 에너지의 양은 줄어든다는 것이지요. 그렇게 해서 나온 개념이 바로 '엔트로피'입니다.
가용 에너지가 줄어든다는 것은 곧 에너지의 불활성(不活性) 정도가 높아진다는 말이기도 하고, 다른 표현으로 하면 사물의 무질서(無秩序) 정도가 높아진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이러한 에너지의 불활성 정도, 혹은 사물의 무질서 정도를 흔히 '엔트로피'라고 부르기 시작했습니다.
저는 사람들의 마음과 사람들이 사용하는 언어의 의미에도 '엔트로피 증가의 법칙'이 적용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마음을 제대로 가다듬지 않으면 마음의 무질서도는 증가하게 됩니다. 또 언어를 잘 가꾸고 다듬어 쓰지 않으면 그 언어의 뜻은 점점 혼란스러워집니다.
그런 마음과 언어의 무질서 혹은 불활성의 정도를 멘트로피(mentropy)라고 부를 수 있습니다. '마음'이라는 뜻의 그리스어 메노스(menos)의 첫음절과 '변화하다'라는 뜻의 '트로페'를 합친 말이지요. 마음과 언어를 가꾸지 않고서 자연 상태에 방치하면 멘트로피가 높아지게 마련입니다. 그러면 생각하고 느끼고 뜻하는 사람의 마음의 능력은 무디어집니다. 그와 함께 사람이 사용하는 언어의 뜻도 점점 혼란스러워집니다.
'소망'과 '소원,' 그리고 '희망'이라는 말이 지난 1백여년 동안 겪어온 변화는 바로 멘트로피가 높아지는 과정이었습니다. 처음에는 그 말들은 명확히 뜻이 구별될 수 있는 말들이었지요. 하지만 한국 사람들이 그 말들을 사용하면서 주의를 기울이지 않게 되자, 말뜻이 점점 모호하게 돼 버린 것입니다. 그게 바로 오늘날의 국어사전에 반영된 소망과 소원, 희망의 뜻에 나타나 있습니다. 서로 구별하기 어려울 정도로 섞여 버린 것이지요.
엔트로피 증가의 법칙은 물리(物理)의 법칙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어떤 노력을 기울이더라도 에너지의 가역성을 증가시킬 수가 없다고 합니다. 우주의 운명이 비관적이라는 결론이 그래서 나오게 됩니다.
그러나 멘트로피 법칙은 물리(物理)가 아닙니다. 그것은 심리(心理)이고 말뜻의 이치(意理)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노력을 기울이면 멘트로피의 증가를 막을 수 있습니다. 마음의 작용을 날카롭게 벼릴 수 있고, 말뜻을 더욱 명료하고 정확하게 다듬어 나갈 수가 있습니다. 그런 노력을 지속적으로 기울이면 멘트로피는 오히려 감소시킬 수가 있습니다. 멘트로피가 낮은 마음과 개념은 철학에는 반드시 필요한 요건입니다.
오늘날 크게 혼동되고 있는 소망과 소원을 다시금 곰곰히 생각하면서 그 뜻을 다듬는 것은 한국말의 멘트로피를 감소시키는 과정입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소망과 소원의 뜻을 명확하게 드러내고, 정확하게 사용할 수 있게 권할 수도 있습니다. 그게 바로 이 글의 목적이겠습니다.
요약하면, 소망은 '확실한 미래의 일을 객관적으로 내다보고 이성적으로 바라면서 그것을 준비하는 것'이지만, 소원은 '비교적 불확실한 미래의 일을 주관적/감정적으로 바라는 것'입니다.
한편 희망은 소망보다는 소원에 가까운 뜻이겠습니다만, 일제 강점기에 한국에 들어와 만연된 족보가 없는 일본식 한자어이기 때문에 되도록 쓰지 않는 게 좋겠다고 생각합니다. 혹은 희망이라는 말을 계속해서 쓰더라도 소망이나 소원이 갖지 못한 다른 뜻을 가리키는 말로 쓴다면 그것은 또 다른 문제이기는 하겠습니다.
평미레/
조정희 드림.
'Faith - Hymn' 카테고리의 다른 글
[스크랩] Andrea Bocelli / 성가 연속듣기 (0) | 2005.08.07 |
---|---|
[스크랩] 믿음에 대하여 (1): 사랑은 항상 제일(第一)일까? (0) | 2005.08.06 |
[스크랩] 소망에 대하여 (5): '소망'과 '바라다' (0) | 2005.08.06 |
[스크랩] 소망에 대하여 (4): 호프(hope)와 엘피스(Elpis) (0) | 2005.08.06 |
[스크랩] 소망에 대하여 (3): 희망이 아니라 소망 (0) | 2005.08.0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