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공력의 인식
인간이 공중을 날고 싶어하는 욕망을 실현하기까지는 2천년의 세월이 필요하였다. 이러한
욕망의 실현은 초기 氣球에 의해 조금씩 달성되었고, 최초의 군사적 목적을 위한 기구의 사용은 1859년 6월 24일
솔페리노(Solferino)부근에서 프랑스군이 오스트리아군 진지에 대한 사진정찰을 함으로써 기구의 군사적 가치를 인식하게 되었다. 이후
1870년 보·불전쟁 중 프랑스 수도 파리가 포위된 상황에서 기구에 의한 연락과 탈출 등으로 독일군을 곤경에 빠뜨리는 사태가 발생되면서, 기구는
전쟁에서의 새로운 수단으로 사용되기 시작하였다. 이전 화면쟁의 결과로 세계 각국은 군용항공기의 가치와 미래의 항공기에 대한 인식을 새롭게 하게
되었다.
항공기의 출현 배경
기구를 중심으로 한 군사적 수단은 조종 및 안전성의 한계로 인해, 각 국가들은
기계적인 추진력을 가진 비행선 연구에 박차를 가하게 되었으며, 가솔린 엔진의 발명으로 조종가능한 비행선을 완성케 하였다. 당시 비행선은 긴
항속거리와 많은 탑재가 가능하였기 때문에 전략적인 원거리 정찰과 폭격에 적합하였다. 1915년 1월 19일 독일의 제플린(Zeppelin)호는
고도 1,500m로 영국을 공습하였으며, 5월 31일에는 런던을 공습하였다.(1915년 1월 19일부터 1918년 8월 5일 까지 비행선으로
실시한 對英폭격은 37회였다.) 당시의 폭격은 전술적인 가치보다는 심리적인 효과를 달성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였기 때문에 독일군은 주로 전략적인
목적으로 비행선을 이용하였던 것이다. 이에 반해 연합군의 비행선 사용목적은 주로 연안경비, 기뢰탐색, 잠수함탐색, 선단호위 및 잠수함 공격 등에
사용되었으며, 지상목표에 대한 폭격에는 거의 사용되지 않았다. 따라서 1차대전 말기에 비행선의 군사이용에 관한 일반적인 평가는 폭격기로써는
부적당하였으나, 방공의 중요성과 항공기지 공습의 가치를 일깨워 주는데 일조를 하였다. 그러나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비행선과 기구는 비행기에
비해 속도가 너무 느리고, 공격을 받기 쉬운 단점으로 인해 군사상 이용가치를 대부분 상실하고 말았다.
항공기의 전쟁 투입
1차대전의 경험만으로는 항공기의 확보 및 운용을 위한 성공적인 항공력의 운용
교훈으로 채택하는데 많은 어려움이 뒤따랐다. 기구 및 비행선의 역할 제한으로 전쟁에서의 직접적인 승패를 위한 전력으로 성장하는데는 논란이
많았다. 특히 초기의 항공전략가들에 의한 이론에도 많은 반대가 뒤따랐기 때문이다. 제1차 세계 대전 이후 항공기는 탑재무장에 따라 지상군의 지원
및 폭격 등에 사용되었으며, 부분적으로 3차원 전력의 우월성을 보여주었다. 그 예들로써 프랑스가 모로코 진압을 위해 보병과 기병을 투입하였으나,
지형에 익숙한 토착민들에 대해 효과를 거둘 수 없었다. 이때 항공기를 투입하여 기총공격과 폭격으로 많은 피해를 주어 토착민들의 저항을 약화시켜
전쟁의 종결과 전황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치게 하였다. 또 다른 한 예로는 1935년 이태리가 이디오피아 원정작전을 실시하였을 때를 들 수 있다.
작전지역은 표고 2,000m∼3,000m의 산악지대로서 사막, 황지(荒地), 대삼림(大森林) 등으로서 지상군 이 작전하기에 매우 어려웠으며,
또한 시기적으로 여름이었고 정치적으로 원정에 실패할 경우 이태리가 국제적으로 궁지에 몰릴 가능성도 상존하고 있었다. 당시 군사전문가들은
에티오피아 정복을 위해 6년이 걸릴 것으로 예상했었지만 이태리공군의 활동으로 1년만에 에티오피아 전 국토를 점령하였다. 당시 이태리공군은 각종
공중정찰, 폭격 및 총격, 가스공격, 소이탄공격, 공중보급 등의 임무를 실시하였다. 1936년에서 39년까지 계속된 스페인 내전은 에티오피아
원정과는 달리 쌍방이 모두 항공전력과 지상의 대공화력 등 서로 동등한 전력을 갖추고 있었기 때문에 공중에서 우세를 획득하는 것이 승패를 좌우하는
중요한 요인이었다. 스페인 국내전쟁에서 이태리 공군과 독일공군은 「푸랑코(Franco)」장군측을 지원하였고, 소련은 공화파에 지원하면서 실전을
통해 양측은 경험을 쌓았다. 공중전에 있어서는 독일의 「메르데서」대위가 새로운 전투기 공중편대 롯데(Rotte), 슈알므(Schwarme)를
고안하였다. 2개 단위의 편대 군으로 전투하는 방법을 실전에 적용하여 공중전투에 새로운 국면을 개척하였다.
2차 세계대전 직전까지를 통해서 본 항공전의 평가
1차 세계대전에서 얻은 대부분의 항공기를 통한 전쟁의
교훈은 가치측면에서 매우 미약하여 장차 항공기의 대규모 운용과 기술의 비약적인 발전을 예측할 수 없었다. 또한 불행히도 2차대전 전 까지 함대가
항공기에 대해 위협을 받은 적이 없었기 때문에 해군의 보수주의자들은 해군력에 관한 전통적인 사고를 바꿀 수가 없었으며, 항공부대의 가치가
높아졌지만 여전히 거함거포주의 원칙하에서 해군준비를 진행하고 있었다. 이러한 사고는 실제로 많은 전함과 순양함이 항공기에 의해 격침되고서야만
바꿀수 가 있었다. 한편 항공우세의 유무가 지상작전의 승패에 결정적인 영향을 준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육군의 지상군 절대의
전통적인 사상이 강하였다. 이러한 것들이 공군의 증강과 공군독립의 기회를 억압해 왔다. 이상과 같은 어려운 상황하에서도 항공기술의 발전은
향상되어 갔으며, 항공기와 탑재장비의 성능향상과 더불어 항공부대는 점차 대규모로 운용될 가능성이 높아갔다. 따라서 가까운 장래에 3차원의 특성을
공격적인 자산의 가치로 전환시킬 가능성을 투명하게 하고 있었다.
자료 출처: http://www.airforce.mil.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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