鶴山의 草幕舍廊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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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김동길 교수의 미국학 강의-10. 식민 활동과 노예 수입

鶴山 徐 仁 2005. 7. 31. 12: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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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장 아메리카의 꿈 - 10. 식민 활동과 노예 수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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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06/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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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쨌든 그 사회는 모든 것이 수준 높은 것은 아니었고 퓨리턴이라는 것이 철두 철미 깨끗했던 것만은 아니었던 것이 사실입니다. 오히려 어지러운 현상이었던 것이 확실합니다. 카톨리시즘과 프로테스탄티즘의 그러한 싸움 속에서 다 신천지로 가자, 이래서 식민 활동에 발벗고 나서는 사람이 생기는 겁니다.

여러분이 혹시 미국에 여행을 가면 매사추세츠주의 플리머드라는 곳에 가보세요. 플리머드라는 이 항구 도시에는 큰 돌이 있는데, 그 돌에 1620년이라고 새겨져 있어요. 그돌을 플리머드 록(Plymouth Rock)이라고 하는데, 퓨리턴들이 메이플라워호를 타고 이곳에 와서 내릴 때 맨 처음에 디딘 돌이라고 합니다. 그것이 사실인지 아닌지는 모르는 일이지만 많은 사람들이 와서 기념삼아 그 돌을 잘라 갑니다. 그러니까 돌이 자꾸 작아지지 않겠어요? 그래서 지금은 사람이 손이 닿지 않도록 장치를 해 놓았대요.

이런 일은 세계 어디나 마찬가지인 모양입니다. 조금이라도 기념이 될 만하면 가져다가 집에 두려고 하고 말입니다. 그렇지만 그 돌이 사실인지 아닌지 모를 일이지요. 이민 온 사람들이 그 돌을 디딜 때 사진을 찍은 것도 아닐 테고 말이에요. 모를 일이건만 바로 그 돌에 내렸다 하니까 굉장한 가치가 생긴 거지요.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그리스인 조르바'(Zorba the Greek) 라는 작품에 보면 어떤 사람이 성지 순례를 떠나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를 향해서 동네 사람이 부탁을 합니다. 성자 무덤 문지방의 뭐라도 하나 뜯어다 달라고, 자기는 그것을 기념으로 간직하고 싶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이 친구가 좀 건덜건덜한데다 생활의 권태로부터 어떤 활력의 계기를 마련하려고 했는지, 그 사실에 몰두해서 성지 순례를 마치고 돌아오면서 동네 사람의 부탁을 잊은 겁니다. 그러니 어쩌겠어요? 생각한 끝에 자기 집 문지방 한쪽을 뜯어서 갖다주면서 가져왔다고 했어요. 그 동네 사람은 그걸 소중하게 생각하여 목걸이를 해서 늘 목에 달고 다닌 겁니다. 그런데 그 다음부터는 목걸이를 한 그 사람이 용감해지고 크게 달라진 겁니다. 비록 가짜지만 성지에서 가져온 거라 생각하고 몸에 지니게 되니 힘이 생긴 겁니다.
사람의 생각이 이거라고 생각하면 이것이 되고, 그러면 또 그것에 대한 절대 믿음에서 힘이 솟는 모양입니다. 세계에 널려 있는 십자가의 부스러기를 모으면 십자가가 열 몇 개가 나온다고 해요. 나머지는 사실 아닌 것이 많지만 그것은 믿음에서 나오는 문제인 겁니다.

어쨌든 1620년에 청교도들이 그 돌 위에 내렸다고 믿고 다들 가봅니다. 플리머드에 가서 그 돌을 다들 봐요. 미국 사람들이 플리머드 록이라고 해서 아주 훌륭하게 생각하고 있어요. 버지니아에는 이보다 훨씬 전인 1607년에 제임스타운(Jamestown)이라는 식민지가 생깁니다. 영국인이 합중국에 건설한 최초의 영국 식민지이죠. 그러니까 버지니아가 미국 식민의 시작인 셈입니다. 그리고 이미 1619년에 흑인 노예가 수입됩니다. 사람이 어떻게 수입되느냐 하겠지만 좋은 표현이 없습니다. 어떻게 표현해야 하겠어요? 흑인을 한 분 두 분 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한 마리 두 마리 하면 더욱 안될테고……. 하여튼 수입이라는 표현이 적절하지 않을지는 모르나 그 문제가 그렇게 까다로운 문제였습니다.

백인들이 총 들고 아프리카에 가서 그냥 흑인들을 가지고 온 것도 많습니다. 노예 선이라는 것이 안락한 것으로 유람선 같은 것인 줄 아세요? 짐승 우리 같은 조그만 데에 넣어 가지고 오다가 죽는 경우도 많고, 그러면 끄집어내서 바다에 던져 버리고, 그들에게 무슨 호적이 있는 것도 아니니까요. 사망 신고를 해야 하는 것도 아니고, 그렇게 흑인은 살았습니다.
그 노예가 그렇게 해서 오면 노예 시장에 가서 매매가 됩니다. 가격은 한 사람당 몇백 달러까지 하지요. 그 시대에는 백인 한 사람이 노예를 수십 명 혹은 몇백 명까지 갖기도 했는데, 그렇게 되면 굉장한 부자였습니다.
노예는 한 인간의 재산이었습니다. 17 세기 말이 되면 노예가 그 사회의 제도로서 정착됩니다. 특히 남부에는 더욱 그랬습니다. 18 세기 중엽에는 이미 남부의 농업 경제를 위해서는 이 노예 제도가 없어서는 안될 제도가 됩니다.

출처 : 교육학 관련강의
글쓴이 : 관리자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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