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사기 [三國史記]
1145년(인종 23) 무렵 김부식(金富軾) 등이 왕명을 받아 편찬한 삼국시대의 정사(正史). 중국의 정사체인 기전체(紀傳體)를 모방한 유교적·중국적 체재를 갖춘 한국 최초의 역사서이다.
초간본은 12세기 중엽에 간행되었으나 전해지지 않는다. 2차판각이 13세기 후반에 있었는데 성암본(誠庵本)으로 알려진 이 책은 남아 있는 《삼국사기》 가운데 가장 오래된 것으로, 일본 궁내청(宮內廳)에도 소장되어 있다. 3차판각은 1394년(태조 3)에 있었는데 잃어버렸고, 4차판각은 1512년(중종 7)에 있었는데 중종임신본(中宗壬申本)·정덕임신본(正德壬申本)·정덕본으로 통칭되고 있다. 조선시대 마지막으로 간행된 것은 《현종실록》자로 간행한 것으로 내사기(內賜記)에 의하면 1760년(영조 36) 무렵으로 짐작된다.
《삼국사기》는 인종의 명에 따라 김부식의 주도 아래 최산보(崔山甫)·이온문(李溫文)·허홍재(許洪材)·서안정(徐安貞)·박동계(朴東桂)·이황중(李黃中)·최우보(崔祐甫)·김영온(金永溫) 등 8명의 참고(參考)와 김충효(金忠孝)·정습명(鄭襲明) 등 2명의 관구(管句) 등 11명의 편사관이 엮었다.
이 책은 이들 엮은이의 독단적인 서술이 아니라, 《고기(古記)》 《삼한고기(三韓古記)》 《신라고사(新羅古史)》 《구삼국사(舊三國史)》와 김대문(金大問)의 《고승전(高僧傳)》 《화랑세기(花郎世紀)》 《계림잡전(鷄林雜傳)》 및 최치원(崔致遠)의 《제왕연대력(帝王年代曆)》 등의 국내문헌, 《삼국지(三國志)》 《후한서(後漢書)》 《진서(晉書)》 《위서(魏書)》 《송서(宋書)》 《남북사(南北史)》 《신당서(新唐書)》 《구당서(舊唐書)》 《자치통감(資治通鑑)》 등의 중국 문헌을 참고하여 재구성한 것이다. 이 책의 내용은 본기·지·표·열전으로 구성되어 있다.
① 본기(本紀):중국사서는 열전을 중심으로 이루어져 있으나 《삼국사기》는 본기가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내용은 신라에 12권(통일신라 7권 포함), 고구려에 10권, 백제에 6권을 할애하여 신라에 편중하지는 않았으며, 크게 정치·천재지변·전쟁·외교 등 4항목으로 분류할 수 있다.
정치기사는 본기 중에서 가장 큰 부분으로, 그 안에 축성(築城)·설책(設柵)·수궁실(修宮室) 등 대규모 인력을 동원한 기록, 민심수람과 국민결속을 강화하려는 순행(巡幸) 기사, 관리 임면(任免)이나 관청 설치에 관계되는 기록, 조상과 하늘의 제사와 흉풍에 따른 종교적 관례에 관한 기사 등으로 나누어진다.
천재지변기사는 930여 회의 자연변이의 기록이다. 천재에는 혜성·5성·유성·일식 등으로 대표되는 천변과 가뭄·홍수·벼락 등의 천재가 있으며, 지변에는 지진·화재·동물변이·수변(樹變)·인변 등이 있다. 전쟁기사는 삼국이 존속한 10세기 동안에 있었던 28개국과 440여 회의 전쟁사실을 기록한 것이다. 이러한 전쟁은 삼국간에 일어난 경우와 외국간의 싸움으로 구별된다. 끝으로 외교기사는 34개국과 620여 회의 교섭을 기록한 것이다. 이러한 외교기록은 거의가 조공으로 대표되는 한국·중국 관계가 중심이 되지만, 중국측에서 온 기록도 상당히 많다.
② 지(志):《삼국사기》에는 잡지(雜志)라 하였으나, 그 내용은 지이다. 제 1권은 제사(祭祀)·악(樂), 제 2권은 색복(色服)·거기(車騎)·기용(器用)·옥사(屋舍), 제3∼6권은 지리지(地理志), 제 7∼9권은 직관지(職官志)로 중앙관부 7권, 궁정관부 8권, 무관과 외직 9권으로 되어 있다. 전체적으로 신라제도의 해설에 치중하였고, 특히 지리지에 가장 큰 비중을 둔 것은 오행지에 중점을 둔 《한서(漢書)》나, 예악지에 중점을 둔 《당서(唐書)》와 그 특징이 다르다. 우선 제사지에는 5묘(廟)·3사(祀)의 설명이 중심이며, 악지는 악기·가악(歌樂)·무(舞)·악공(樂工)의 차례로 되어 있다. 직관지에서는 강력한 왕권유지의 제도적 뒷받침을 엿볼 수 있다.
③ 표(表):BC 57년(박혁거세 즉위년)부터 935년(경순왕 9)까지를 연표 3권으로 나누고 있다. 이는 중국문헌의 연표와 비교해 볼 때 그 내용이 빈약하고 간소하다. ④ 열전(列傳):열전은 10권으로 매우 빈약한 편으로, 인물기준도 항목별로 된 것이 아니고 왕후·공주열전도 없다. 특히 10권의 열전 가운데 김유신(金庾信) 열전이 3권이며, 나머지 68명을 7권에 포함시키고 있는데, 위국충절(爲國忠節)의 인물나열이 핵심이 된다.
《삼국사기》에서 주목되는 부분은 논찬(論贊)인데, 이 책에서는 논과 찬을 구별하지 않고 모두 논이라 하였다. 신라본기에 10측, 고구려본기에 7측, 백제본기에 6측, 열전에 8측 등 모두 31측의 논찬이 있는데, 그 내용은 대개 예법준칙, 유교적 덕치주의, 군신의 행동, 사대적 예절 등이다. 이러한 논찬은 한국 현실성과 독자성을 고려한 현실주의적 입장을 띠고 있으며, 12세기의 시대정신과 사회상을 고려할 때 중국 중심의 풍조 속에서 한국을 찾으려는 노력이 엿보이고 있다.
《삼국사기》는 문화적 사대주의라고 혹평받기도 하지만 사실(史實) 위주로 편찬한다는 중국의 역사편찬 방법에 충실하여 고대의 역사서에 흔히 거론되고 있는 비합리성·비현실성이 비교적 도외시되고 대신 유교적 윤리관을 바탕으로 합리성·객관성을 중시하였다.
현존하는 판본 중 문화재로 지정된 것은 다음과 같다.
⑴ 《삼국사기》 권1∼50:이 책은 1512년(중종 7)의 개각판에서 73년(선조 6) 무렵 경주부(慶州府)가 인출하여 옥산서원에 보내준 것이 전존(傳存)된 것이다. 인쇄가 깨끗하지는 못하지만 전래되고 있는 완질본 2벌 중 하나에 해당하므로 귀중하게 평가된다. 목판본. 보물 제525호. 옥산서원 소장.
⑵ 《삼국사기》 권44∼50:지금까지 알려진 것 중 가장 오래된 판본이다. 간기(刊記)와 발문이 없어 정확한 간행연대는 알 수 없으나 13세기 후기에 인간된 것으로 짐작된다. 상태가 좋지 않고 잔존본이기는 하나, 이것으로 중종조간본(中宗朝刊本)의 오류와 탈락된 글자를 바로잡을 수 있게 되었다. 목판본. 보물 제722호. 성암고서박물관 소장.
⑶ 《삼국사기》 권1∼50:중종조(1506∼44)의 간본에 해당한다. 이계복(李繼福) 등의 발문에 의하면 《삼국사기》 《삼국유사》의 양본이 모두 경주부에만 있었는데, 오랜 세월이 경과되는 사이에 마멸되어 1행에서 4∼5자를 해독할 수 있을 정도였으므로 자신이 이를 개각(改刻)하고자 성주목사 권주(權輳)로부터 완본을 구해, 여러 읍에 나누어 새기게 한 다음 경주부가 돌려받아 간직한 것이라 하였다.
간행사유를 적은 이 발문은 본서에는 없고 《삼국유사》에만 붙어 있는데, 이는 《삼국사기》의 개각에 이어 《삼국유사》의 간역(刊役)을 진행시켜 완료하고 양자에 걸친 발문을 작성하여 뒤에 이루어진 것에 붙인 듯하다. 이 중종조간본에는 3종의 판에서 찍어낸 것이 섞여 있으며 현재까지 알려진 중종조간본 가운데 완질본으로 인쇄가 가장 선명하다. 목판본. 보물 제723호. 개인 소장.
(인용처: 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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