鶴山의 草幕舍廊房

외국작가 畵壇

[스크랩] 자유로운 형상, 이념의 실험 - 입체주의 /피카소 -14--

鶴山 徐 仁 2005. 7. 25. 11:33


Pablo Picasso (1881~1973)


아비뇽의 아가씨들 1907년, 캔버스, 유채, 245×234cm

파블로 피카소는 스페인의 안달루시아 지방
말라가에서 태어나 바르셀로나에서 성장했으며,
공예학교 미술교사였던 아버지의 지도로
10세때부터 본격적인 미술공부를 시작했다.
사람들은 흔히, 괴팍하고 아무렇게나 그려놓은 그림이나,
이해하기 힘든 그림을 보고 '피카소 그림 같다'고 빈정거리지만,
그것은 피카소의 전체를 파악하지 못해서이다.
바르셀로나의 피카소 미술관에서
그의 수많은 초기작품들을 보는 사람들은
전혀 소년의 그림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만치,
완벽하게 사실적으로 그려낸 수많은 유화와 뎃생을 통해,
천재 소년의 손놀림에 감탄 할 것이다.

세잔의 대 회고전이 열린 1907년, 26세의 피카소는 세잔의 작품과
아프리카, 이베리아 흑인 조각에 깊은 영향을 받아
입체주의적 표현의 기념비적인 작품 <아비뇽의 아가씨들> 제작에 몰두했다.
이 그림으로 시작되는 입체주의풍의 탐구는 피카소의 생애 뿐 아니라,
20세기 회화의 역사에도 결정적인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1925년부터 고전적 정신에서 멀어져 초현실주의에 접근하게 되며,
파리 피에르 화랑에서의 최초의 초현실주의전에 출품했고,
조각에 심취하기도 했다. "나에게 있어 작품 하나하나는 연구이다.
그림에 있어서 진보라는 말은 없다. 있다면 변화가 있을 뿐이다.
화가가 일정한 틀에 갇힐 때 그것은 바로 죽음을 의미 한다.
나는 모든 것을 말로 하지 않고 그림으로 나타낸다."....
미술의 혁명가이자 파괴자였으며 화려한 변신을 주저하지 않았던 피카소는
과거의 고상한 취미를 가진 화가들에게는 분노를..
새로움을 지향하는 소수의 외로운 화가들에게는 경탄과 희망을..
그리고 다수의 대중에게는 엄청난 충격을 남겨두면서
20세기 미술의 표징과 우상이 되었던 것이다.

20세기의 혁명적 대작으로 불리는 <아비뇽의 아가씨들>...
고대 그리스에서 아름다운 육체의 이상적 표현으로 나부상을 그린이래,
서구의 오랜 예술사에서도 이렇게까지 매력없고
추한 나부상이 그려진 적은 없었다.
유년시절 보아왔던 아비뇽의 아가씨들과 꽃다발, 과일 광주리에 의해..
현재의 쾌락을 상징했고, 왼쪽 여인이 손으로 받드는 시체에 의해..
이 세상 어떤 화려한 쾌락도 언제나 죽음의 그림자에 위협당하고 있다는 것과..
풍만한 육체의 미녀들도 보잘 것 없는 시체의 일시적인 모습에 불과하므로
항상 '죽음을 기억하라'는 비유를 그리고자 했던 것이다.

<아비뇽의 아가씨들>에서 출발된 입체주의 미술은..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는
데카르트식 사고방식의 특성을 보다 뚜렷이 했을 뿐 만 아니라
르네상스 이후의 공간 구성과 형태파악 이라는
전통적 그림언어에 깊숙이 잠들어 있던
우리들의 시각적 관념을 명쾌하게 파괴하여,
작가의 개인적이며 독특한 세계를 자신만만하게 만들었다.
마침내 피카소의 통쾌한 파괴로 쟁취한 표현의 자유는 다양하고 새로운 그림..
새로운 조형언어의 창조라는 기념비적 의미를 지니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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늙은 기타리스트

1903 캔버스에 유채 시카고미술관

피카소의 초기 작품들은 우수어린 청색이 지배하고 있어
흔히 청색시대라 불린다. 이 작품은 당시 가난과 굶주림에 허덕이는
농민의 참상을 나타낸 매우 스페인 적인 그림이다.






아비뇽의 아가씨들

1907 캔버스에 유채 뉴욕 근대미술관


  이 작품의 정확한 이름은 <바르셀로나의 아비니호거리의 여인들>이다.
이 작품에서는 무엇이 그려져 있는가 보다도
어떤 수법으로 화면이 구성되어 있는가가 중요하다.
고전적인 원근법을 멀리하고 인물과 공간이 같은 차원으로 취급되고 있다.




드뤼아스

1908 캔버스에 유채 레닌그라드 에르미타지미술관

    <숲속의 나부>로도 불리는 작품이다. 드뤼아스는
고대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요정의 이름이다.




부채를 든 여인

1909 캔버스에 유채 모스크바 푸시킨박물관


  이 그림에서는 광대의 모습이 남성에서 여성으로 변화는 것을 보여 주는 듯 하다.




토토사의 벽돌공장

1909 캔버스에 유채 레닌그라드 허미티지
 
  이 작품은 엄격한 건축학적 해석과 원근법까지 갖춘 특성을 갖고 있다.




칸바일러의 초상

1910 캔버스에 유채 시카고미술관


  분석적 입체주의 수법으로 그려진 이 걸작 초상화의 모델은
피카소와 가까이 지내왔던 미술품 상인이다




기타리스트

1909~1910 캔버스에 유채 파리 근대미술관


  이 작품은 피카소의 입체주의 시대를 대표하는 작품의 하나이다.




파이프를 든 사나이

1915 캔버스에 유채 시카고미술관


  이 작품은 피카소가 입체주의 화가들이 잘 이용했던
콜라주 수법을 유화로 역이용하여 표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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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악사

1921 캔버스에 유채 뉴욕 근대미술관


   <파이프를 든 사나이>와 비교될 수 있으면서
훨씬 장식적이고 평면적으로 나타낸 작품아다.




게르니카

1937 캔버스에 유채 뉴욕 근대미술관


   1930년대에 그려진 피카소의 통렬한 파시스트 고발 및 반전 작품이다.
독일 나치스가 프랑코장군을 지원하기 위해 게르니카라는
작은 도시를 폭격한 만행을 그린 것이다.




오바드

1942 캔버스에 유채 파리 근대미술관

  2차 세계대전이 한창 치열하게 전개되고 있던 당시의
시대적 배경이 어둡고 음산한 색조를 띄게 했다


피카소 
(1881~1973)


피카소는 대표적인 입체주의 화가로 가장 유명한 스페인 출신의 현대화가이다.
그는 스페인과 프랑스를 오가며 많은 작품을 남겼는데,
그릴 대상을 마음대로 분해하고, 그렇게 분해된 여러 요소를
자신의 의도로 다시 재구성하는 입체주의 기법을 즐겨 사용하였다.

 

 

 

[게르니카]
-1937
-캔버스에 유채, 351*782cm
-마드리드 프라도 미술관


1930년에 그려진 피카소의 통렬한 파시스트 고발 및 반전 작품이다. 뿐만 아니라 20세기의 정치, 예술 논쟁을 불러일으킨 최대의 걸작이며 대작이다. 1936년 피카소의 모국 스페인에서는 프랑코(뒤에 종신 총통)에 의해 공화국 체제를 반대하는 쿠데타가 발생했다. 나치스 독일과 이탈리아의 파시스트가 프랑코를 지원하는 가운데 1937년에는 나치스의 폭격기가 피레네산 근처의 작은 도시인 게르니카를 짓이겨 버렸다.

그 죄악상을 파리에서 전해 들은 피카소는 당장 일련의 데생을 하기 시작했다. 죽음과 공포 속에서 울부짖는 인간과 쓰러진 말과 소 등이 상징적으로 강조된 형태로 그려졌다. 그리고 그것들이 대작 <게르니카>로 집대성 된 것이다.

그전에 피카소는 마침 파리에서 개최될 예정이던 만국박람회의 스페인관을 위해 벽화를 스페인 정부로부터 위임 받았었다. 피카소는 이를 위해 <게르니카>를 약 한달만에 완성시켰다고 한다. 그것은 독재 세력과 잔인한 살육에 대한 정치적 저항과 분노를 표명한 피카소의 최초의 대작이면서 동시에 입체주의의 평면화라는 피카소의 또 다른 새로운 방법을 펼쳐준 작품이다

 

 

[늙은 기타리스트]
-1903
-목판에 유채, 122.3*82.5cm
-시카고 미술관


피카소의 초기 작품들은 우수 어린 청색이 지배하고 있어 흔히 청색 시대라 불린다. 1901년부터 1905년의 시기이다. 그러나 그 시기의 청색이 어디서 왔는가에 대한 만족할 만한 설명은 아직 없다. 1902년 가을을 파리에서 보낸 피카소는 고향인 바르셀로나로 다시 돌아가 1904년 봄까지 머물렀다. 그의 청색 작품은 그때 집중적으로 그렸다. 주제로는 불구자나 거지를 다룬 것이 많은데, 거리에 나앉은 불쌍한 늙은 기타리스트도 그 중하나이다.

이 작품은 느낌에 있어서 매우 스페인적인데, 그러한 요소는 피카소가 바르셀로나에서 노넬(1872~1911)이라는 급진적인 사회 고발의 화가와 접촉한 데서 온 것이다. 노넬은 양식화된 사실 수법으로 가난과 굶주림에 허덕이는 스페인 농민의 참상을 거듭 그리고 있었다. 이 작품의 비참한 노인상은 분명히 노넬의 영향인 것이다. 뿐만 아니라, 그 당시 피카소는 엘 그레코의 세계에서도 영감을 받고 있다

 

 


 
가져온 곳: [..]  글쓴이: 너와집나그네 바로 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