鶴山의 草幕舍廊房

외국작가 畵壇

[스크랩] 인상주의를 극복한 개성의 꽃 - 후기인상주의 /고갱

鶴山 徐 仁 2005. 7. 25. 11:32


Gaugin, Paul (1848 - 1903)



아레아레아(기쁨) 유채, 75.0*94.0cm, 1892년


파리 출생. 프랑스 후기인상파 화가이다.
1865년 견습선원이 되어 상선(商船)을 탔으나
1871년 어머니가 죽자 선원생활을 그만두고
파리로 돌아와 증권거래점의 점원이 되어 점원생활을 하였다.
1873년에는 덴마크 출생 메트 소피 가드와 결혼하면서 경제적으로도 윤택해졌다.
이 무렵부터 회화에 흥미를 가지기 시작하여
특히 인상파의 작품을 수집하고 있었는데,
27∼28세부터는 일요일마다 본격적으로 회화연구소에 다녔다.
1876년 처음으로 살롱에 출품하여
C.피사로(1830∼1903)를 사귀게 된 것을 계기로
1880년 제5회 인상파전 후로는 단골 멤버가 되었다.
1882년 피사로의 소개로
P.세잔, A.기요맹(1841∼1927) 등과 친교를 맺어 화가가 될 결심을 굳혔다.
이듬해인 1883년 35세에 증권거래점을 그만두고 그림에 전념하였다.
그러나 생활이 어려워 아내와 사이가 나빠졌으며
한때는 처가가 있는 코펜하겐에 갔으나
결국 처자식과 헤어져 파리로 되돌아왔다.

1886년 6월 도시생활에 지쳐 브르타뉴의 퐁타방으로 이사하였다.
거기에서 종래의 인상파풍 외광묘사(外光描寫)를 버리고
차차 고갱 특유의 장식적인 화법을 지향하여
P.세뤼지에, M.드니, P.보나르 등,
후일 나비파(Nabis 派) 화가들에게 많은 영향을 주었다.
그해 11월 파리로 돌아와 고흐, 로트레크 등을 알게 되었으며,
특히 고흐와는 깊이 사귀었다.
1887년 처음으로 남대서양의 마르티니크섬에 갔다가 이듬해 파리로 왔으며,
이어 고흐와 함께 남프랑스의 아를에서 살았다.
그러나 두 사람은 서로 타협할 수 없는 성격이어서
고흐가 귀를 자른 사건을 계기로 비극적인 작별로 끝났다.
그 후 다시 퐁타방으로 가서 《황색의 그리스도》
《황색 그리스도가 있는 자화상》 등을 그리고,
조각 ·판화 ·도기(陶器)에도 손대어 보았다.
그러나 생활은 여전히 어려웠고
문명세계에 대한 혐오감만 더하여
마침내 1891년 남태평양의 타이티섬으로 떠났다.
《네버모어 Nevermore》《우리는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
《타이티의 여인들》《언제 결혼할까?》등은 만년의 작품들이다.

타이티에서도 빈곤과 고독에 시달리고
병마에 시달려 자살을 기도하기도 하고,
원주민을 옹호하여 현지의 백인 관헌과 충돌도 일으켰으나,
원주민의 건강한 인간성과 열대의 밝고 강렬한 색채가 그의 예술을 완성시켰다.
1901년 마르키즈제도의 히바오아섬으로 자리를 옮겼을 무렵
매독과 영양실조로 회복 가망성이 거의 없었다.
1903년 환상으로 본 풍경을 그린
《눈 속의 브르타뉴 풍경》 을 끝으로 기구한 생애를 마쳤다.
그의 상징성과 내면성,
그리고 비(非)자연주의적 경향은
20세기 회화가 출현하는 데 근원적인 역할을 하였다.

<아레아레아(기쁨)>
유채, 75.0*94.0cm, 1892년.
붉은 개! 1893년 뒤랑 뤼엘 화랑의 타히티 작품 전시회를 찾은 사람들은
붉은 개에게 관심, 혹은 두려움을 가졌다.
뒷 배경의 여인들은 토속신 앞에서 전통 춤을 추고 있다.

 

 


 
가져온 곳: [..]  글쓴이: 너와집나그네 바로 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