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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국작가 畵壇

[스크랩] 피카소 <Picasso, Pablo Ruiz y>

鶴山 徐 仁 2005. 7. 25. 11:30

로베르 드와노의 장난기인지 피카소의 발상인지는 모르겠으나 식탁에 올려논 손가락 모양의 빵으로 잠깐 착시현상을 일으키게 하는 위트있는 사진이다.

 

피카소 <Picasso, Pablo Ruiz y> (1881.10.25~1973.4.8)

기존 예술의 해체와 성적 광기로 얻은 미적 환희 스페인의 시골 청년 피카소는 19세기
사실주의적 내지 인상주의적 평면 회화를 해체시키고 20세기 새로운 입체파 회화를 창시하였다.
그리고 이전까지 금기시 한 성의 환희와 광기를
그의 회화의 주제로 삼아 인류의 영원한 수수께끼인 성의 신비를 풀다

 

 


1. 금세기 최고 예술가

피카소를 한마디로 규정하기란 쉽지 않다. 그는 끊임없는 열정과 샘솟는 실험 정신으로 미적 영역의 새로운 개념을 발굴하여 19세기 미술의 마침표를 찍은 장본인이었다.
또한 그는 세기의 심장을 꿰뚫은 천재이자 망나니요 미치광이이자 현대판 돈 환이었고 동시에 20세기 최고의 예술가였다.
8세에 이미 돈 걱정 안 하는 예술가가 되었고, 40세 대단한 부자였으며, 65세 이후 자수성가한 억만장자였다.
그를 거쳐간 아름다운 여인들과의 불꽃같은 사랑은 100년의 사랑을 1년 사이에 다 불태워 버릴 정도로 뜨겁고 격정적인 것이었다.
피카소는 그 이전에도 그 이후에도 없다.
그는 1차·2차 대전, 스페인 내란 등 엄청난 격동과 전쟁과 변혁과 혁명기였던 20세기에 새로운 메시지를 던진 예언가요 선각자였다. 그는 美야말로 인간의 최고의 철학이요 경제요 정치이며 문화임을 보여 준 최초의 사람이었다.
그의 예술은 난센스 즉 기존의 모든 고정 관념을 깨는 예술이었다. 그로 하여 그는 진정한 모더니티를 획득했고 그런 정신을 다각적으로 시도하며 평생을 살았다. 예술가가 꿈꿀 수 있는 모든 가능성에 도전하는 그의 예술 세계는 별난 해프닝과 예술적 실험으로 이어졌다.

 

2. 피카소의 인간 지상주의

그는 잠시도 동반자 없이 살 수 없는 인간 지상주의자였다.
그의 예술 세계에는 정신적 유대감과 함께 육체적 친밀성도 요구했다.
그에겐 어쩌면 자신의 예술에 대한 강력한 지지를 보내는 동반자가 필요했는지 모른다.
그가 주변 사람들에게 쏟다 분 사랑이나 우정의 강도가 보통 사람의 그것과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격정적이고 강력한 것이었다.
이런 소나기성 세례를 받는 사람은 그에게 매혹되지 않을 수 없었고 그를 열렬한 지지했다.
피카소는 죽마고우인 카사게마스을 비롯하여 폭넓은 교류를 가졌으며 특히 그 당시 전위적 시인들 막스 자콥,아폴리네르, 엘뤼아르, 프레베르 등과 가까이 지냈다.
그밖에도 독일 화상인 스타인 남매, 화가 앙리 마티스 그와 견해를 같이 했던 조르주 브라크 등과 끊어지지 않는 토론을 나누었다.

 

3. 사랑의 독재자

그의 여자에 대한 열정과 탐욕은 우리의 상상을 초월한다. 더욱 놀라운 것은 그와 함께 살았던 여자의 고백은 한결같다는 것이다.
"그와의 시절이 가장 행복했었다고…". 그가 그 많은 여자들을 어떻게 사로잡을 수 있었는지 그건 아직도 수수께끼다.
그는 20세를 넘기면서 주변에 젊고 싱싱한 여자들과 삶의 궤도를 같이했다.
그의 여성 취향이나 편력은 창녀 같은 거리의 여자에서 여신(女神) 같은 우아한 여성에 이르기까지 다양하다.
그는 여자가 바뀔 때마다 그의 그림은 달라졌고 주변의 여자들은 화가에게 서로 다른 영감을 불어 넣어 준 셈이다.
결국 그의 회화사는 여성과 깊은 관련성이 있다.
그는 평생 7명의 여자와 살았는데 그 중 결국 두 여자는 그를 잊지 못해 자살했고, 두 여자는 지나친 질투와 그의 대한 강박 관념으로 정신 이상이 되었고, 한 여자는 젊어서 요절했다.
프랑수아즈만이 간신히 그의 영향력에서 벗어났지만 그녀 역시 그의 영역에서 완전히 벗어나지는 못했다.

 

4. 피카소와 여인들

첫번째 연인 페르낭드 올리비에는 피카소와 20세의 동갑내기였는데 그녀는 야성형 여성으로 '장밋빛 시대'의 연인이다.
이 시기는 <아비뇽의 처녀들(1907)>의 작품 시기이기도 하고 '분석적 큐비즘'이 확립되는 시기이기도 하다.
그녀를 주제로 그린 그림은 <부채를 든 여인(1908)> 등이 있다.
두 번째 연인 에바(1911)는 청순 가련형 여자로 피카소가 정열적으로 사랑한 여인이었다.
이 시기는 '분석적 큐비즘'을 넘어 '종합적 큐비즘'이 무르익는 시기였다.
에바가 병이 난 사이에 피카소는 27살의 파리 태생의 가비 레스피나스라는 또 다른 애인을 두기도 했다.
에바를 모델로 그린 그림으로는 <옷을 벗은 에바(1912)> 등이 있다.
세 번째 연인 발레리나 올가(1917)는 귀족형 여자로 피카소를 상류 사회 사실주의 풍에 빠지고 한 장본인이다.
그 시기에 피카소는 그의 동료들로부터 큐비즘을 배반했다는 비난을 받기도 한다.
그녀를 모델로 한 그림은 <안락 의자에 앉은 올가의 초상(1917)> 등이 있다.
네 번째 연인 마리 테레즈(1927)는 천진난만형 여자로 피카소가 초현실주의에 영향을 받았던 시기에 만났다.
그는 마리 테레즈를 주제로 그린 그림이 특히 많은데 그녀는 피카소에게 연인일 뿐만 아니라 최고의 모델이기도 했다.
<팔꿈치를 기댄 마리 테레즈 (1939)> <꿈(1930)> 등이 그 대표작이다.
다섯 번째 연인 도라 마르(1936)는 지성형 여자로 피카소가 파시즘 광기와 싸우던 시절에 만났다.
이 여자는 피카소의 대표작 <게르니카(1937)>을 그리는데 많은 영감을 주기도 했다.
그녀를 모델로 한 그림은 <책에 빠진 여자> <우는 여자(1937)> 등 있다.
여섯 번째 연인인 프랑스와즈 질로는 자유 분방한 여자로 법대를 다닌 지적 여성이기도 했다.
그녀를 모델로 한 그림으로는 <꽃 여인(1943)> 등 다수 있다.
프랑수아즈도 아는 즈느비에브와 서로 모르게 두 여자를 따로 연인 관계를 맺어, 그후로 피카소와 완전히 헤어지는 계기가 된다.
일곱 번째 연인인 자클린은 피카소보다 40년 연하로 여자로 절대 헌신형이다.
이 시기는 피카소가 최고의 명성을 누렸던 시기로 피카소 말년의 생애에 오직 작품에만 전념하도록 도와준 여자다.
이 시기에 피카소가 도자기 예술과 고전 작가의 재해석에 심취한 시기였다.
그녀를 모델로 한 그림은 <옷을 벗고 앉은 여자(1959)> 등 수없이 많다.

 

5. 에로스는 모든 예술의 힘

그에게 있어 에로스는 모든 생명력의 근원이며, 그가 추구하는 미의 힘이며 원천이고 예술의 극치감을 맛보는 징검다리 같은 것이었다.
그는 죄책감이 없는 태초의 원시 세계를 꿈꾸었고 에로티시즘을 통해 인간과 우주와 예술이 결합을 시도하였다.
섹스의 기쁨은 창조의 기쁨이고 더 나아가 성스럽고 아름다운 창조 행위였다.
피카소는 창조하는 이에게는 모든 것이 허용된다는 신념 속에 살았다.
성의 혁명은 20세기 최대의 담론이 되었지만, 그는 이런 점에서 선각자였다. 놀라운 생명력과 다산성의 상징인 달과 대지(大地)와 여성과 침식을 같이하며 예술적 기운을 되찾았다.
그의 예술적 에너지는 바로 여기에서 생성되었던 것이다.

 

6. 유년기부터 빛났던 천재성 피카소는 스페인의 한 도시 말라가에서 1881년 10월 25일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시골 학교 미술 교사였는데 자신의 아들이 10살 때 이미 그의 아버지를 능가하고 있음을 알고 정말 무서운 아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드디어 스페인 문화 중심지였고 유서 깊은 도시인 바르셀로나에 있는 론잔 미술학교 입학 시험에서 14살의 나이로 한 달 걸려 그릴 수 있는 그림을 단 하루에 그려내어 모든 이들 경악하게 했다.
16살에 그는 모든 미술 콩쿠르를 석권할 정도였다.
1900년 19세인 피카소는 바르셀로나 뒷골목 [검은 고양이] 선술집에 첫 전시회를 열었다.
150편의 데생은 시인, 작곡가, 예술가 모습을 스케치한 작품으로 공개적으로 화가임을 선언한 전시회였다.
틀에 박힌 미술 감상법에 분노했던 피카소는 어느 새 예술가 모임의 중심 인물이 되었고 그는 이미 괴팍한 성격의 소유자로 소문이 났다.
그를 좋아하는 사람은 그에게 열광했지만 그를 싫어하는 사람은 그만큼 그를 격멸(擊滅)하기도 했다. 그는 특히 죽마고우 카사게마스와 친했고 그의 주변에는 늘 사람들이 들끓었다.
허물없는 솔직성과 남들이 도저히 모방할 수 없는 그만의 괴짜 기질이 그의 강력한 매력 중 하나였다.

7. 예술의 도시 파리로 진출

피카소 나이 19세 되던 1900년, 전세계 천재 예술가들의 집합소인 몽마르트르로 떠난다.
스페인에서는 더 이상 배울 것이 없었던 것이다. 처음에는 프랑스 어 못해 파리 생활에 고전했지만 그에게는 원대한 꿈이 있었다.
10월 몽마르트르 언덕 눈부신 가을, 모든 진보를 대표하는 도시 파리. 이 도시는 그의 능력을 제대로 발휘할 수 있는 유일한 도시였다.
그는 또한 여기에서 폴 고갱, 반 고호, 로트렉, 드가 등 대가들의 작품들을 박물관을 누비며 정열적 탐구욕을 보였다.
그는 특히 몽마르트르 빈민가의 화가 로트렉에 관심을 기울였다.
또한 그는 그 당시만 해도 야만적이라고 거들떠보지 않던 페니키아 이집트 예술에 크게 매려 되었고 후에 그의 예술의 고유한 영역인 큐비즘의 밑거름이 되었다.

8. 청색 시대

피카소의 그림 중 가장 널리 알려지고 사랑 받는 시기에 속하는 때가 바로 '청색 시대(1901-1904년)'다. 피카소가 무명이었던 이 시기의 작품들은 그림의 표현과 그림의 실제가 너무 닮아 감상하기 쉽다.
이 시대 유명한 작품 <삶>에서 보듯 그 당시의 그림은 차가운 느낌을 주는 청색으로 뒤범벅이 되어 있으며 온통 비참과 절망의 하나로 이어져 깊고 어두운 뒷골목의 삶을 잘 보여 주고 있다.
<장님의 식사> 그 당시 그의 작품의 또다른 주제는 '실명(失明)'이었다. 피카소는 제대로 먹지 못하고 입지 못해 눈 먼 자가 되지 않을까 하는 깊은 두려움과 절망에 빠져 있었고 게다가 심한 성병까지 앓고 있었다.
낭만적 파리 생활과는 또 다른 얼굴인 궁핍한 삶의 잔인한 고통과 밑바닥 삶의 근원적 외로움과 소위 민중적 삶의 비참함을 누구보다 몸소 체험하며 그 고통을 짙푸른 청색으로 표현했다.
청색 시대 피카소에게 가장 어려운 시대였지만 어찌 보면 가장 행복한 시기인지도 모른다.
죽마고우 카사게마스를 잃고 괴로워도 했지만 주변의 친구들이 그를 혈육처럼 돌봐 주었다.
특히 시인 막스 자콥은 그 자신도 입에 풀칠하기 어려운 처지에서도 극도의 빈곤에 빠진 피카소를 자신의 방으로 데려다 잠을 재워 주고 보살펴 주었다.
그는 피카소 그림에 매료되어 그를 옹호했고 흠모했던 그의 평생 동지였다.
그의 친구 중에는 동료 화가보다 시인 친구가 더 많았고 그들에게서 더 많은 예술적 영향을 받은 것은 특이한 점이다.

9. 장밋빛 시대

1904년 23세 피카소는 지독히 가난한 사람들 모여 사는 빈민굴 일명 세탁선(Bateau Lavoir)에서 살았다.
이 곳은 예전에 르누아르, 브라크, 막스 자콥, 모딜리아니 등 파리의 가난한 예술가 집합소였고 동시에 삼류 가수, 목수, 약장수, 건달, 다양한 계층이나 하층 계급들이 옹기종기 모여 사는 곳이기도 했다.
그러나 이런 무질서 환경은 오히려 그에게 자유분방(自由奔放)함 속에서 새로운 예술을 꿈꾸며 풍부한 아이디어와 창조력 키우는 토양이 되기도 했다.
그는 어느 날 고양이를 구해 주다 비속에 스쳐 가는 피카소 동갑내기인 페르낭드 올리비에(Fernande Olivier)와의 운명적 만남을 통해 같이 살게 된다.
그녀는 조각가와 결혼에 실패하고 이곳 세탁선에서 혼자 살고 있었다.
그녀는 피카소를 처음 봤을 때 인상을 "작고 까무잡잡했지만 눈빛이 너무나 강렬했어요. 무척 불안한 태도였지만 도저히 저항할 수 없었어요." 라고 말한다.
그녀의 등장과 함께 피카소의 질병의 호전되고 자신감이 넘치는 '장밋빛 시대'(1904-1906)를 맞이하게 된다.
올리비에는 피카소와 동거하기 시작했고 너무 가난해서 외출할 때 신을 구두 없을 정도였다.
그런 때는 그냥 며칠 밤 며칠 낮을 침대 속에 살아야만 했다.
석탄이 없어 발가벗고 나갈 수 없다며 석탄 값 외상을 미룰 뿐이었다. 그러면서도 그녀는 기꺼이 며칠을 꼼짝 않고 그의 모델이 되어 주었다.
그의 친구들이 저녁이 되면 매일 그의 아틀리에를 방문했고 피카소는 밥을 굶어 가면서도 그들과 토론하며 즐겨 매일 서커스 구경을 다녔다.
일명 '어릿광대 시대'라는 이 장밋빛 시대에 그는 광대나 여성 곡마사들과 무척 친하게 지냈고 그들을 무척 자랑스럽게 여겼다. 그래서 이 당시 피카소의 그림에는 어릿광대가 많이 등장한다.
피카소는 가난을 해결하기 위해서 그림을 이리저리 팔기 위해 차가운 겨울 거리를 나서야 했다.
그의 친구들은 이 사실을 가슴 아파하며 그를 도왔다.
보잘것없는 그의 거처였지만 피카소의 허물없는 시인 친구들은 이곳에서 신작시을 발표하곤 했다.
그곳은 늘 새로운 것에 대한 추구와 실험 정신으로 생동감이 넘쳤다.
피카소는 카페에서의 열기 찬 토론에 우연히 마주치는 예기치 않는 사건(해프닝)이나 괴상한 행위(퍼포먼스)를 즐겼다.
때로 카페에서의 이런 취미가 그의 광란적 행위로 주위 사람들을 놀라게 하고 당황하게 만들기도 했다.
이 시기에 이런 정신 착란증은 그의 그림에도 장밋빛, 황토색, 연한 장밋빛으로 고스란히 남아 있다. 청색 시대도 그랬지만 장밋빛 시대에도 역시 주등장 인물은 맹인, 반신불수, 난쟁이, 정신 박약아, 거지, 피에로, 창녀, 줄 타는 무희, 곡예사, 점쟁이, 유랑 악사, 마술사 등이다.
단지 청색 시대는 그런 인물은 어둡게, 장밋빛 시대는 그런 인물은 밝게 보았다는 차이 뿐이다.
그들은 대부분 소외된 사람 아니면 밑바닥 사람들이다.
그러나 아이러니컬하게 이런 그림들이 그 당시 부유층에게 많이 팔려 나갔다 한다.
이것은 부유층에게 현실의 부조리를 망각하는 위안의 세계를 열어 주었기 때문이리라.
피카소의 그림에서는 이런 버림받은 사람들의 소재가 한 사회의 잘못을 꾸짖기보다는 개인의 운명 탓으로 돌림으로써 오히려 신비한 기운이 감돌게 했다.
그는 서서히 유명해 졌고 러시아, 독일, 미국 화상들이 그의 그림을 사기 위해 모여들기 시작했다.
드디어 그는 극심한 빈곤에서 벗어나기 시작한 것이다.

10. 아프리카 원시 예술에 심취

피카소는 점차 회화 데생뿐만 아니라 조각 판화에서도 명성이 나기 시작했고 그 당시 인상주의나 사실주의에 염증을 내고 있었던 사람들에게 원시적 생명의 충만함을 표현하려는 미술로 새 돌출구를 찾고 있었다.

그러던 중 어느 날 25세의 패기만만한 피카소는 인류사 박물관에서 흑인 미술만이 가지고 있는 독특한 생명력에 매료된다.
그들의 역동성, 대지적 순결성, 춤이나 탈이나 조각 속의 원시적이고 원색적이고 직선적 표현 기법에 깊은 감명을 받는다.

조각가 헨리 무어도 "아프리카 미술의 공통적인 특징은 강력한 생명력이다.
아프리카 미술에 있어서는 강력한 신앙과 희망과 공포의 표현을 엿볼 수 있다." 라고 말한 바 있지만 피카소는 아예 이것을 그의 그림의 시발점으로 삼았던 것이다.

죽음을 너머 거대한 생명으로 향해 달려가는 듯한 아프리카의 춤, 노래, 미술, 조각들이 화가에게 주는 힘과 원천적 에너지는 무궁무진한 것이었다.

 

11. 현대 회화의 신화 <아비뇽의 창녀들> 그는 계시처럼 다가오는 흑인 미술의 지극히 단순하면서도 기하학적 순수 감각에 반했다.
빈 장방형 눈, 원주 코의 구멍 등 새로운 조형 세계에 몰입하였으며 그의 유명한 혁명 큐비즘 미술의 길을 트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시각 미술, 영화, 건축을 포함 모든 예술 장르에 큰 영향을 준 큐비즘의 선각자 피카소는 결국 이런 과정과 모험을 통해서 그에게 전설적 명성을 안겨 준 유명한 작품 <아비뇽의 처녀들(1907년)>를 몇 달간 수백 장의 데생과 습작 끝에 그의 나이 26세늦여름에 내놓게 된 것이다.

이는 실로 거대한 작품이었고 주변의 친구들 큰 기대감 속에서 관심을 집중시켰다.
그러나 이 그림의 반응은 그를 절대로 지지했던 친구들 사이에서도 "이게 그림인가?" 할 정도였다.
그들은 분노와 경악으로 말을 잃고 말았다.
마티스 마저 격분했고 브라크도 이건 "우리에게 석유를 마시게 하고 밧줄을 밥으로 먹으라는 것과 같다" 라고 혹평을 했을 정도였다.
그러나 이 그림이야말로 지금까지의 모든 지구상의 모든 회화 세계를 붕괴시킨 미술사의 대혁명이었다.

지금까지 등장한 우아하고 풍요로운요정이나 비너스가 아니라 거리에서 몸 파는 천한 여인이 주인공이 되어서 문명화된 사람들을 향해 울부짖는 분노와 슬픔을 표현하고 있다.
이 그림의 위대성은 바로 이런 20세기의 정신을 누구보다 앞서 그림을 통해서 보여 주었기 때문이리라.

<아비뇽의 처녀들>이 주는 충격들은 바로 자연이 가지고 있는 3차원의 세계 즉 평면적 관점이 아닌 입체적 관점인 '원형, 원측, 원구'로 처리해 내는 데 있다.
그는 세잔의 회화적 비전을 현실화했으며, 지극히 복잡한 다원적 공간을 아주 단순하고 축소된 기하학적인 그림으로 창출해 내어 그 당시 사람들에게 엄청난 충격을 주었다.

12. 기존 통념 깨는 극단의 단순화

이와 함께 피카소는 사물의 외형적 모방을 하던 종래의 화법을 완전히 파괴하고 기하학적 도형으로 해체하여 형태를 구분하지 못하게 하는 큐비즘을 더욱 발전되었다.

<세 명의 악사> 절단된 얼굴, 한 개의 눈, 뒤틀린 황소를 머리 삼은 삼각형 나무는 원통으로 된 그림 형태에서 보듯 그의 그림은 선과 형을 굵고 극단적인 모습으로 단순화 내지 고급화시켰다.

그는 이 단순화 기법을 더욱 다양화하고 현대화하기 위하여 새로운 형태로 변형(deformation)시켰으며 일상적 소재를 통해서 더욱 그 폭을 넓혔다.
그는 사냥감을 찾는 늑대처럼 여기저기 버려진 낡아빠진 일상적인 고물을 주어다가 변형을 가해 독창적 마티에르 작품을 탄생시켰다.
또한 철물점 물감과 관계없는 물질들을 캔버스에 붙이는 최초의 콜라주를 탄생시켰고 철물점에서 손쉽게 구하는 종이, 헝겊, 함석, 밧줄, 톱밥을 섞어 캔버스에 붙이는 타블로 오브제 tableau-objet나 파피에 콜레 papier colle들을 애호하였다.
이런 마티에르 등이 주는 낯설음의 효과가 또 하나의 회화의 가능성을 열어 주어 그림의 고정 관념을 깨는 효과를 주었다.
마침내 그는 '천재적 넝마주이'라는 별명까지 얻게 되었다. 그는 이렇게 끊임없는 실험 정신으로 예술과 산업의 경계까지도 무너뜨렸다.

13. 에바(페르난드)와의 애틋한 사랑

1912년 31세 피카소는 첫번째 연인 페르난드와 헤어지고 가날픈 미모의 에바와 살게 되었다.
친구 마르쿠스의 연인 에바를 가로채 열렬한 사랑을 퍼부었다.
에바에 대한 열렬한 사랑을 글과 그림으로 표현하였다. 그의 그림 <나의 아름다운 여인 Ma jolie(1914)> 옆에는 '나는 에바를 사랑해(J'aime Eva)' 라는 그의 절절한 사랑 고백이 새겨져 있었다.

이 시기는 그의 분석적 큐비즘이 자리잡는 시기다.
기존의 회화를 해체하고 재조합을 연속적으로 이어가면서 신비한 효과를 내었다.
악기의 모양은 그림 속에 숨어 있는 것처럼 보이고, 피카소와 연인이 함께 즐겨 부르는 노래와 음악 소리가 들려 오는 것같이 연상시켜 주었다.

분석적 큐비즘이 그런 요소를 지니고 있지만 이 그림에서는 음악적 요소를 통해서 피카소와 그의 애인은 하나로 결합되고 연주되고 있다.
온화한 색깔 속에 뛰는 맥박 소리, 시원한 색감의 교차, 옅게 가물거리는 듯한 화필 터치는 피카소가 에바의 숨결까지 느끼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피카소는 그녀의 뛰는 숨결과 박자까지도 그림으로 가시화한 것이다.
이 여인과의 사랑을 우리도 이를 통해 시각적이면서 청각적으로 느낄 수 있다.
이렇게 이 그림 속에 에바의 운명적 사랑에 대한 훈훈한 열정으로 담고 있다.
그러나 그녀는 불행히도 1916년 지병인 결핵으로 추운 겨울 12월 14일 죽고 만다.
그녀를 열렬히 사랑한 피카소의 비통함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에바는 피카소의 변화무쌍함과 견디기에는 너무나 허약한 육체를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14. 울가와 정식 결혼

1914년 8월 1일 1차 대전 발발하자 그는 스페인 인이라는 이유로 동원되지 않았지만 그의 친구들이 거의 다 동원되어 파리는 텅 비게 되었다.
그의 부친의 죽음에 그가 그렇게 사랑한 에바의 요절은 그를 더욱 외롭게 했다.

에바가 죽은 얼마 안되어 피카소는 사티가 음악을 맡고 세르게이 디아길레프가 무용단을 안무하고 장 콕토가 쓴 발레극 퍼레이드 [대행진(Ballet Parade)]이 예정되어 있었다.
이 작품의 무대 장치는 결국 피카소에게 맡겨졌다. 왜냐 하면 이 발레곡은 전통극과 결별하고 초현실적 풍의 현대 전위극을 펼치는 새로운 형태의 무대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여기서도 또 하나의 여인을 만나게 된다.
과거 무수히 사귀던 다수의 여자를 잊은 채 60여명의 발레리나 중 가장 아름다운 25살의 울가에 빠진다.
이 발레곡은 파리에서부터 바르셀로나까지 공연되었으나 흥행에선 완전히 실패했다.
그러나 피카소는 이 순회 공연에 단원과 계속 동행해야 했고 거기서 그의 사랑의 결실을 보게 된 것이다.

드디어 1918년 7월 12일 36세의 피카소는 아폴리네르, 막스 자콥, 장 콕토가 증인으로 선 가운데 파리의 한 교외에서 첫아들 파울로를 낳아 준 올가와 결혼식을 올린다.

이 달콤한 신혼기에 어려운 몽마르트르 시절부터 13년간 절실한 친구였던 아폴리네르의 뜻밖의 죽음은 맞는다.
부친 사망 이후 또 한번 그를 난처하게 하는 사건이었다.
그러나 이미 피카소는 한 여자의 남편이 되었고, 부인 올가의 마음을 사로잡으려는데 마음이 쏠리고 있었다.
결국 그는 지나친 부와 화려한 사교 생활에 빠지게 되고 옛 친구들과 점점 멀어지게 된다.
그의 소중한 친구들을 조금씩 잃어 가고 있었던 것이다.

또 피카소는 평소 일관되게 유지해 온 입체주의가 아닌 감상자의 입맛에 맞는 강렬한 사실주의 풍 그림 탓에 일부 비평가로부터 입체주의를 배신한 기회주의자라는 신랄한 비난 세례를 받기도 한다.

15. 세계적 거부가 됨

마흔이 갓 넘은 피카소는 자신의 그림들이 파격적 가격으로 팔려 나감으로 점차 거부가 되어 간다.
그의 그림 값은 부르는 것이 값이 될 정도였다.
그러나 많은 돈이 화가로서의 그의 왕성한 창작력을 위축시키지는 못했다.

아들 파울로 낳은 후, 그는 유모, 요리사, 하녀, 운전사 등을 두어 더 사치스런 생활 계속했고 올가의 깔끔한 기질과 지나친 상류 사회 생활의 집착에 대해 피카소는 갑갑함을 느끼기 시작했다.
그 속박 속에 외로움이 나날이 커져 갔다.
또한 1924년부터 불기 시작한 초현실주의 문학 운동이 피카소의 안정된 생활의 분열을 부채질하였고 그의 결혼 생활까지도 경멸(輕蔑)시켜 그에게 이혼을 생각하게 했다.

16. 17살 소녀와 무모한 사랑

그런 와중에서 피카소가 17살 난 마리 테레즈(Marie-Th??e)를 만난 것은 너무나 믿기 어려운 사건이었다.
피카소는 라파이예트 갤러리(Galeries Lafayette) 근처를 거닐다가 우연히 지하철에서 금발 머리의 젊고 아름다운 한 처녀를 만나게 된다.
그녀의 얼굴은 그리스 비너스 고전 조각에서 만날 수 있는 똑바른 콧날과 푸른 회색 눈을 가진 아주 이상적 미인이었다.

피카소는 그녀를 결코 놓칠 수 없었나 보다. 마리 테레즈는 첫 구애 사건을 이렇게 고백하고 있다. 이 남자는 마구 내 팔을 잡고, "나는 피카소요. 당신과 나는 함께 훌륭한 일들을 할 수 있을 것입니다.'라고… 그녀는 미술에는 문외한이었고 오히려 수영, 등산 등으로 몸을 단련된 건강이 넘치는 천진한 소녀였던 것이다.

테레즈는 6달 동안 피카소의 프로포즈 거절 끝내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고 고백한다. "저는 여섯 달이나 저항했습니다. 하지만 어떻게 피카소를 거절합니까? 당신은 나를 이해하시지요 한 여자로서 피카소를 거절할 수 없었습니다." 피카소는 테레즈가 부모의 동의가 필요 없게 된 18세 생일날 그녀의 허락을 받아 내는 데 성공했다.

이렇게 무절제한 성적 격정은 타부와 한계를 모르는 거침없는 그의 작품이나 그의 태도와 너무나 닮았다. 남들이 도저히 흉내낼 수 없는 이런 기질은 이같이 터무니없는 사랑을 낳고 만 것이다.

피카소의 명화 <화가와 뜨개질하는 모델(1928)>과 유화 캔버스 <화가와 그의 모델(1928)>는 바로 마리 테레즈의 성적 환상에서 힌트를 얻어 작품이고, <겨울 앞에 한 처녀(1932)>도 초현실주의적 기법으로 그녀를 묘사한 작품이다.

 

17. 새로운 연인 도라 1935년 테레즈는 여전히 젊은 나이인 22살에 피카소의 딸 마리아 드
콘셉션(Maria de la Consepcion)을 낳았다. 딸을 낳은 바로 그 해 어머니가 된 테레즈를 피카소는 잔인하게 버리고 또 다른 여자 도라 마르(Dora Maar)를 사귀고 있었다. 테레즈의 아름다운 육체만으로는 바람기 많은 피카소를 잡아 둘 수는 없었다.
그녀의 소녀 같?끊임없는 순종과 희생에도 불구하고 피카소는 세련되지 못하고 무식하다는 이유로만 그녀를 버렸다.

피카소를 17살의 어린 나이로 만난 테레즈는 개성이 형성되지 못했고 성숙할 기회를 뺏긴 채 상처만 남긴 채 그녀의 인생은 엉망진창으로 만들고 만다.
"나는 어제보다도 더, 내일보다는 덜 그대를 사랑해요 그대를 영원히 사랑 할거야 사랑해! 사랑해! 사랑해! 사랑해! 사랑해! 마리 테레즈!"라고 달콤한 고백을 해 댔지만 그런 와중에서도 도라를 몰래 사귀며 테레즈를 속였던 것이다.

피카소를 두고 도라 마알과 마리 테레즈의 싸움은 나날이 격렬해졌다.
반면 피카소는 느긋해 했다.
테레즈는 순정을 바쳐 피카소를 평생 흠모하다가 끝내 피카소가 죽은 후에도 그를 따라 보살펴야 한다며 자살한 순애보의 불행한 여인이 되었고, 또한 날카로운 지성을 지녔던 여인인 도라 마알마저도 피카소와의 이별로 인해 정신 착란증을 일으켜 정신 병원에서 치료받는 불행한 여자가 되고 말았다.

18. 억압에 대항한 작품 <게르니카>

도라와 살면서 서로 스페인 어가 잘 통한 둘은 1937년 프랑스 파리 세계 박람회 스페인관 대표 작가 위촉을 받는다.
바로 그해 4월 26일 히틀러가 프랑코를 돕기 위해 3시간 동안이나 무차별 융단 폭격으로 바스크의 작은 도시 야만적으로 공격했다는 사실을 전해 들었다.
그 당시 이 도시 7천명 주민 중 1천 이상이 학살당했고, 도시 전체를 불바다로 되었던 것이다 이에 분노한 피카소는 1937년 4월 26일 미친 사람처럼 24피이트 너비 11피이트 그의 대표작 작품 <게르니카Gernica(1937)>를 완성을 위한 혼신의 열정을 다 쏟았다.
이 그림이 착상 주제뿐만 아니라 그림의 완성해 가는 과정에서도 피카소는 도라의 도움을 받으며 한 달만에 이 작품을 완성했다.

이 <게르니카>는 파시즘 독재와 공포 앞에 의연히 맞선 분노의 외침이며 혁명이었고 피카소의 상징이었다.
그는 이렇게 외쳤다. "회화는 아파트를 장식하기 위해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그것은 적과 대항하는 공격적이고 방어적인 전쟁의 도구"라고. 피카소는 이 그림을 그리면서 나폴레옹 군대가 1808년 5월3일 무고한 스페인 시민을 학살한 고야의 그림을 자주 언급했다고 한다.

19. 시인 피카소 희곡 작품 발표

피카소는 2차 세계 대전 소용돌이 속에서 1940년 59세 파리를 점령한 독일군의 군홧발 보아야 했다.
독일군으로부터 타락한 예술가로써 낙인찍힌 피카소는 전쟁과 그 공포 속에서도 자신의 그림을 지켜 나갔다.

피카소는 어떤 다른 화가보다 막스 자콥, 아폴리네르, 장 콕토, 폴 엘뤼아르, 앙드레 브르통, 자크 프레베르 등 시인들과 돈독한 우정을 나누었으며 그 역시 시인이 되기도 했다.
1936년 {예술 노트}에 시쓰기에 데뷔한 피카소는 60세 나이에 {꼬리 잡힌 욕망(1941년)}을 71세에는 {네 명의 소녀들(1952년)}라는 희곡을 쓰기도 했다.
초현실주의적 자동 기술법으로 쓰여진 {꼬리 잡힌 욕망}은 3년 후 공연되었고, 그 배역이나 연출을 맡은 사람들이 당대의 유명인인 사르트르, 시몬 드 보부아르, 조르주 위네, 알베르 카뮈 등이어서 이 공연은 잊을 수 없는 怜?중 하나가 되고 말았다.

20. 21살 짜리 새 연인 프랑수아즈

이 때 피카소에게 새 연인이 나타났다.
프랑수아즈 질로(Fran?ise Gilot)는 피카소의 옛 애인들과 달리 부유한 집안에서 자란 21세의 자유분방한 소녀였다.

프랑수아즈는 1941년 파리가 독일군에 점령되었을 때 피카소를 처음 알게 되었다.
그녀는 국제 변호사가 되기 위해서 법학 대학을 나왔으나 전쟁 상황이고 공부하는데 시간이 많이 걸려 이 공부를 포기하고 미술 석사 과정을 밟고 있었다.

그녀는 레스토랑에서 우연히 피카소를 만나 피카소에 명성에 끌려 놀러 갔다가 부모들의 절대적 반대에도 불구하고 1944년 집을 나와 그와 같이 살게 된다.
그녀는 1944년 해방된 후 살롱 도톤(Salon d'Automne)전에서 구식 미술 교육을 받은 미대생들이 그의 작품을 떼어 내 찢어 버리는 난동 사건이 있었는데 이 일를 저지하는 데 끼어 있었던 여학생이었다.

프랑수아즈는 피카소에 대해서 이렇게고백한 적이 있다.
"저는 저희 아버지나 남자 친구와는 대화가 되지 않는데 저보다 3곱절 연상인 당신과 말이 통하는 것이 믿어지지 않아요." 결국 프랑수아즈는 그녀도 잘 아는 친구였던 즈느비에브를 피카소가 둘이 서로 모르게 따로 연인 관계를 맺은 것을 알게 되면서 미련 없이 그를 떠나고 만다.

피카소의 첫아들 파울로 보다 어린 프랑스아즈는 60대 중반 피카소 사이에 아들 클로드 딸 팔로말 낳는다.
아주 현명하고 용의주도했던 프랑수아즈는 후에 법정을 통해 자신의 아들과 딸을 피카소의 자식으로 입적시켜 아버지의 많은 유산을 물려받을 수 있게 했다.

사실 피카소는 프랑수아즈가 그를 떠날 만큼 자유롭지 못하다고 믿었다.
왜냐 하면 역대 여자들이 그를 태양처럼 숭배했기 때문이다.
"피카소는 자신만만한 태양이었다.
그는 태양같이 타올랐고 그를 접근하는 모든 사람들은 자기 자신까지도 남겨 놓지 않고 한줌의 재로 만들었다."라는 즈느비에브 말마따나 피카소라는 태양에 타 버리지 않는 여자들은 없었다.


떠난다고 하는 그녀를 내버려 둘 리 없었다.
심지어 자신이 자살하겠다고 그녀를 위협했지만 그것이야말로 당신(피카소) 자신을 행복하게 할 것이라며 응수하며 피카소의 그늘에서 빠져 나왔다.
그녀는 다른 여자와는 달리 부유한 가정에서 태어났고 가난한 피카소의 옛 애인들보다는 자유분방하고 사소한 감정에 얽매이지 않았다.
그녀는 경제적으로 정신적으로 충분히 그로부터 독립되어 있었던 것이다.
이에 화가 난 피카소는 2달 동안 180여 개의 데생을 그렸댔는데 이것들은 훗날 지옥 같은 증오 계절에 피카소가 남긴 삽화적 일기로 고스란히 남아 그의 사생활의 한 단면을 생생히 읽을 수 있게 되었다.

 

21. 2차대전 후 공산당 입당

1944년 파리가 해방이 되자 피카소는 이미 세계적 인물로 부각되었다. 비록 총을 들지는 않았지만 나치의 블랙리스트에 첫머리에 기재된 정도로 파시즘의 대항한 간판 스타가 되었던 것이다. 그래서 그의 작품전이 프랑스 파리 해방 기념 첫 사업으로 열리게 된다.

그를 만나기 위해 먼길에 수많은 젊은이들이 그를 방문했고 앙드레 말로, 헤밍웨이 등 거물급 지식인 등도 그를 찾아왔고 나중에는 프랑스 관광 안내서의 에펠 탑과 나란히 피카소 만나기 위해 프랑스에 많은 관광객들이 몰려 둠으로써 그는 이제 현대판 마이다스 왕이 되었다. 게다가 대저택 필요하면 돈 대신 정물화를 그리면 될 정도였다.
이렇게 유명해진 피카소는 1944년 10월 10일에 프랑스 공산당 입당하여 더욱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사람들은 피카소를 다 미쳤다고 했지만 이 때부터 피카소는 보다 더 정치적으로 영향력을 미치는 예술가가 되었다. 그러나 예상과는 다르게 공산주의 국가에서 그는 위대한 인간적 명성은 얻었지만 예술적으로는 퇴폐적이라는 이유로 도외시되었다.

1951년 1월15일 피카소는 그의 프랑수아즈와 애들이 살던 발뤼리에서 <한국의 대량 학살> 작업 시작하였는데 이 작품은 한국 전쟁의 잔인성을 고발하도록 공산주의 친구들의 독려에 영향을 받은 것 같은데 이 그림은 프랑스 공산당으로부터 혹독한 비평으로 받고 피카소는 프랑스 공산당과 멀어지는 계기가 된다. 이 그림에는 임신부의 표정 없는 양민의 공포와 체념의 표정이 담겨져 있고 전쟁의 처참함과 그 학살하는 장면이 우화적으로 그려져 있다.

 

22. 마지막 생의 동반자 자클린 피카소의 마지막 연인 자클린은 도자기 공장 관리인 조카로서 공장의 뒷일을 돌보는 젊은 이혼녀였다.
자클린은 피카소를 필사적으로 유혹해서 결혼에 성공했다.

1961년 80세의 피카소는 마지막 여자가 될 자클린과 발로리스 시청에서 비밀 결혼을 올렸다.
그날 신문을 장식한 이 사건은 많은 사람들 놀라게 하였다.
피카소에게 절대 헌신적 여자였던 자클린은 피카소의 생의 훌륭한 동반자였다.
그녀는 위대한 화가의 말년을 창작 활동 하나에만 전념하도록 도와줌으로 피카소를 지극히 행복하게 한 여자였다.

23. 모든 미술 장르에 도전

모든 미술 장르에 관심이 있었던 피카소는 그의 나이에 상관없이 열정적 탐색을 끊이지 않았다.
그는 마침내 발로리스 도시에서 재발견한 도자기 예술 등 새로운 미술 개척에 흥분하여 들떠 있었다. 조각, 회화, 데생이 결합시킨 그의 도자기는 손쉬운 조각에서 시작되었고 명랑하다가도 순식간에 어린 폭군으로 변하는 자신의 변덕과 비슷한 유아적인 장난기와 익살을 그의 도자기 작업에까지 옮겨 놓았다.

이제 당시 전설적 인물이 된 피카소는 개인을 떠나 국가적 차원에서 거대하게 상징화되었고, 모든 예술에서 새롭게 변형되어 낯설게 보이는 것은 다 피카소적이다 할 정도로 유명해졌다.
이렇게 피카소는 위대한 화가일 뿐 아니라 20세기 최대의 조각가 중 하나가 되었다.

24. 대가들과의 대결

그는 이제 말년에 고전 회화를 재정리하면서 자기 스타일로 대가들의 작품을 하나씩하나씩 재해석해 나간다.
이전의 대가들을 모방하려는 무의식은 19세기나 20세기에 모든 예술가들의 머리 속에 한순간도 떠나지 않았다.
마네나 세잔 같은 화가들 스트라빈스키 같은 음악가들 그리고 장 콕도 같은 시인들도 다 그랬다.
옛 거장들의 작품을 풍자하고 모방하는 궁극적 목표는 어느 장르건 마찬가지 고전적 규율 그것을 더 잘 이해하기 위해 모방하는 것이고 그 결과 그것에서 자유로워지고 싶었던 것이다.

실제로 피카소는 이 어려운 난제를 풀어 나갔고 그것을 실행에 옮겼다.
들라크루아 <알제의 여인> 14점이나 벨라스케스 <메닌느가의 사람들> 44점 그리고 마네의 <풀밭 위의 식사> 27점 등 과거 대가들의 그림을 해체하고 재조립함으로써 과거와 대화를 나누었고 진정한 피카소식의 큐비즘의 핵심을 정리해 나갔다.

25. 말년의 쇄도한 피카소 전

이제 그는 20세기에 가장 유명인이 되고 말았다.
1956년(75세) 독일 뮌헨에서 피카소 회고전을 시작으로 1962년(81세) 미국 뉴욕에서 피카소 80세 기념 회고전, 1964년(83세) 일본 동경에서 피카소전, 1970년(89세) 스페인 아비뇽 법황궁 고딕식 성당에서 피카소 전, 1971년(90세) 프랑스 파리에서 피카소 탄생 90년 大회고전 등 그는 미술사에서 드물게 보는 성공적 예술가가 되었다.

그는 말년의 자신의 죽음과 싸우는 자신의 모습까지도 그의 자화상에 솔직하게 닮았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렘브란트 당신은 죽음을 냉소했지만 난 죽음을 뚫어지게 쳐다보고 싶소"

26. 항공모함 피카소 호의 침몰

드디어 그는 1973년 4월 8일 92세의 나이로 남 프랑스 별장에서 사망 눈 내리는 4월 10일 생 빅투아르 산기슭 보방 오그리라는 산비탈에 묻혔다.
그는 이런 의미심장한 말을 남겼다. "진실은 존재할 수 없는 것이다." 유언처럼…

피카소의 장례식에 마리 테레즈의 딸 마야, 프랑수아즈 낳은 아들 클로드, 딸 팔로마는 결국 자클린의 거부로 장례식에 들어가지 못했다.
술에 취한 파울로(피카소의 장남)가 자클린에게 출입을 완강히 거절당하자 더욱 심한 알코올 중독자가 되어 피카소 죽은 지 2년만에 죽고 만다.
이 사건은 또한 파울로의 아들 파블리토(피카소의 손자)가 독약을 마시게 되고 결국 삼 개월 후 그를 자살하게까지 이르게 했다.

또한 마리 테레즈는 피카소 죽은 지 3년 후, 피카소를 만나지 바로 50년 되는 그 날 이런 말을 딸에게 남기고 차고에 목매 자살했다. "사랑하는 내 딸 마야! 너를 영원히 사랑하지만 또 하나의 사랑을 찾아 떠난단다.
아버지와 나는 세상에서 단 하나의 사랑이었다.
저 세상에 그가 혼자 있을 것을 생각하면 단 하루도 견딜 수 없는 고통이란다.
그는 내가 있어야 편하게 잠잘 수 있어 그는 영원히 내 곁에 있을 거야."

또 그의 마지막 연인이었던 자클린은 피카소가 죽은 후 검은 커튼으로 내린 채 한번도 열지 않았고 식탁에 피카소 자리를 마련한 채 피카소의 망령을 잊지 못해 노래를 들려주거나 기이한 의식을 치르곤 했다. 피카소가 죽은 현실을 더 이상 견디지 못하고 1986년 권총 자살로 세상 마감하고 만다. 이렇듯 그의 유족들과 주변의 여인들은 그의 사후 비참한 최후를 맞고 만다.

27. 사후에 승리자

피카소가 죽었을 때 남긴 작품은 거의 50,000만 점 정도였다. 페인팅이 1,885점, 조각이 1,228점, 도자기가 2,280점, 동판화가 18,095점, 석판화가 6,112점, 리놀륨 판화가 3,181점, 149개 드로잉 노트, 스케치 4,659점을 남겼다 이는 실로 방대한 양이다.

이런 열정은 어디서 오는 것인지 지금도 풀 수 없는 영원한 수수께기지만 그것은 아마도 그가 여성에게서 얻은 힘이 아닐까 한다.
피카소의 모든 그의 그림에서 강조한 모성애와 여성미의 절대 찬양은 여기에서 나오는지 모른다.
이 점은 초현실주의자 앙드레 브르통과 의견과도 바로 일치한다. "남성 예술가는 효과적이고 우수한 것을 창조하기 위해서는 전적으로 여성의 힘에 의존하지 않으면 안된다."

피카소는 현대사에서 아인슈타인, 다윈, 프로이트, 칼 마르크스와 함께 가장 영향력 있는 사람되었다. 평면 회화 해체와 신 미술의 창조와 지각 변동을 준 엄청난 혁명이었다.
음악에서 쇤베르크, 바르톡 문학에서 베케트, 카프카의 업적을 넘어서는 미술에서 업적남겼다.
피카소는 미켈란젤로, 셰익스피어, 모차르트 그 이상이다.

그는 우리 시대 갈등, 불안, 전쟁, 고난, 아픔 같이한 끝없는 삶과 예술 괴로워하면서 절망하면서 갈등, 증오와 한정된 인생의 지평을 무한대로 열어 준 천재 예술가요 여자를 너무 사랑한 열정과 광기의 소유자였고, 피카소는 미의 힘으로 통해서 돈과 전쟁과 사랑까지 지배한 영원한 독재자였던 것이다.
그의 긴 투쟁의 삶은 20세기 바로 그 자체였다.

그의 작품은 모든 주제를 망라해서 다루어 있고 또한 거의 모든 양식을 시험하면서 현대의 전위 미술의 모범이 되었다.
그러나 한편 변덕스럽고 일관성 없다는 비판을 면치 못했다.
그러나 그는 이렇게 자신의 작품을 옹호하고 있다. "나는 미리 세워 놓은 미학의 기반에서 선택하지는 않는다.
하느님도 사실은 또 하나의 예술가일 뿐이다.
그는 기린과 코끼리와 고양이를 발명하셨다. 그분은 어떤 스타일도 갖고 있지 않다. 그는 여러 가지를 시도했다. 조각가도 마찬가지다.
나는 기본적으로 우리 시대의 문화적 불만과 태도에 호흡을 맞추고 있는 독창적 예술가다." 이는 그가 구사한 삶과 예술에 대한 당당한 발언이자 그의 마지막 자기 정체성을 요약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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