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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국작가 畵壇

[스크랩] 르노아르-<<테라스 위의 두 자매>>

鶴山 徐 仁 2005. 7. 25. 11:23




<<테라스 위의 두 자매>>





르노아르 (Pierre-Auguste Renoir 1841.2.25~1919.12.3)





르노아르는 1841년 2월 25일 양질의 도자기 생산으로 유명한 중부 플아스의 리모즈에서 출생하였다. 석공인 아버지와 재봉사인 어머니 밑에서 가난하게 자란 그는 4살에 파리로 이사와 7살에 기독교 학교에 입학하였다. 그러나 가난이 더 심해져, 더 이상 르노아르를 학교에 보낼 수 없었던 부모님은 13살의 그를 학교에서 데려와 도자기에 그림을 그려 넣는 기술 훈련소에 보냈다. 그가 담당한 일은 도자기의 윗 그림 그리기였다. 이 작업이 결국 평생화가로서의 길을 걷는데 결정적인 영향을 주었다고 한다. 그는 17세가 될 때까지 이 훈련소를 다녔는데, 낮에는 이 곳에서 기술을 배우고, 저녁에는 무료로 하는 드로잉 수업에 가곤 했다. 르노아르는 그 때부터 아주 뛰어난 재능을 보였는데, 그의 애칭이 루벤스였다는 것과, 그를 제자로 삼겠다고 자청했던 이가 있었다는 것이 이를 잘 나타내 준다. 그의 부모님은 심각하게 고민할 수밖에 없었는데, 그의 아들의 재능을 살려주고 싶었지만, 당시 화가라는 직업이 가난으로 직통하는 확실한 지름길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림에 남다른 재능과 열정을 가지고 있던 르노아르는 결국 부모님의 어려운 선택에 힘입어 20세가 되던 1861년에 국립 에콜 데 보자르에 들어가 글레르의 아틀리에에서 정식으로 그림을 배우게 되었다. 화가가 되기로 그와 그의 가족이 결심을 굳힌 것이었다. 그러나 노동자계급의 아들로 태어난 그에게 그 길은 매우 힘든 일이었다. 그림을 그리기 위해 기본적으로 필요한 도구를 살 수도, 모델을 살수도 없었고, 먹을 것을 사는 것에도 어려움을 겪어야 했다. 그는 당시 글레르의 밑에서 함께 수학하며 촉망받던 의학도이자 부유한 화가 지망생인 바지우의 아파트에서 얹혀 살면서(물론 바지유의 집에 얹혀 산 것은 르노아르뿐만이 아니었다. 모네도 그들과 잠자리를 같이 했고, 시슬레도 얼마 후 같은 건물로 이사오게 된다.) 모델료가 들지 않는 자연을 직접 그리는데 몰두하였는데, 이것이 그를 훗날의 외광파의 일원으로 묶게 된 계기가 되었다. 그러나 르노아르의 운명이 그를 자연에만 몰두하도록 두지는 않았는데, 운 좋게도 Lise란 18세 소녀를 친구를 통해 알게 된 것이다. 이후 그녀는 그가 31세가 될 때까지 그의 작품의 모델이 되어주었다. 그의 전기작품에 자연과 함께 등장하는 여인은 거의 전부가 그녀이다. 글레르의 스튜디오를 나와 바티뇰에서 함께 살던 르노아르와 그의 친구들에게 화가 지망생으로의 생활은 매우 힘든 것이었다. 매일매일 배고픔과 싸워야 했으며, 자기가 칠하고 싶은 물감을 살 돈이 없어, 온갖 색으로 그들의 캔버스를 물들일 순 없었지만, 그들은 꿈을 가지고있었고, 자연에 대한 관찰의 즐거움을 공유하고 있었기에 즐거운 나날을 보낼 수 있었다. 햇빛이 쏟아지던 숲 속에서 캔버스를 펼쳐 둔 르노아르와 그의 친구인 모네, 시슬레에게 자연은 시시각각 그 모습을 달리하는 경외의 대상이었을 것이다. 당시의 젊은 화가들이 화가로서 인정을 받는 것은 살롱에서 그들의 작품을 인정받는 것이었다. 그러나 다른 인상주의자들과 마찬가지로 르노아르의 그림은 고전과 신화로 가득한 심사위원들의 마음을 녹일 수가 없었다. 르노아르는 분개했지만 이런 이유로 자신의 기법을 바꾸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1870년 흉갑 기병대로 2년간의 프러시아 전쟁 기간을 보내고, 파리로 돌아온 르노아르는 동료들과 자신들만의 협회를 조직하여 전시회를 열 것을 제의하였고, 그의 총감독 하에 1874년 첫 번째 전시회를 열게 되었다. 그러나 결과는 너무나 참담한 것이었다. 그들은 비평가들로부터 미쳤다는 소리를 들었고, 관람객들은 매우 적었으며, 재정적인 실패를 맛보아야 했다. 결국 이듬해 재정적인 곤란을 해소하기 위하여 자신들의 작품들을 경매에 부쳤지만 반응은 매우 냉담할 뿐이었다. 그들의 재정적인 힘이 되 주었던 부유한 바지유의 전시와 더불어 이 사실은 그들에게 앞으로의 인생을 심각하게 재고해야만 할 것을 강요하였다. 그러나 다행히도 이 무렵 그의 인생에 큰 전환점이 되어준 화상을 만나게 되었는데, 그가 바로 뒤랑-루엘 이었다. 그는 프러시아 전쟁기간에 런던에서 처음 모네와 시슬레를 알게 되었는데, 르노아르는 아마 모네를 통해 알게 된 것으로 보인다. 뒤랑-루엘을 통해 르노아르는 다른 여러 화상들을 만나고, 자신의 후원자들을 조직하게 되면서 커다란 힘을 얻게 된다. 즉 재정적인 어려움에서 어느 정도 벗어나게 된 것이다. 이후 르노아르는 살롱에 다시 한 번 그의 작품들을 출품하게 되는데, 1878년과 79년 두 차례모두 살롱의 심사를 통과하게 된다. 특히 79년 그는 [샤르팡티에 부인과 자녀들의 초상]으로 살롱에서 엄청난 찬사를 받게 된다. 이때부터 그려진 작품들은 소위 살롱의 검증 하에 출품되는 것으로 인식되어져 세계적으로 뻗어나가게 되어, 르노아르에게 부와 명성을 허락하게 된다. 자신만의 스튜디오를 파리에 갖게 되고





르노아르는 편안하게 작품활동에만 몰두할 수 있게 되었다. 40세가 다 된 르노아르에게도 이 무렵에 사랑이 찾아왔는데, 무려 19살이나 연하인 20세의 모자상 Aline Charigot가 그 주인공이었다. 1880년 처음 만난 그들에게서 5년 뒤 그들의 아들 Pierre가 태어나고, 10년 뒤 결혼하게 된다. 젊은 화가 지망생을 굶주림과 싸워야 했던 그에게 이제 더 이상의 시련은 없는 것처럼 보였다. 사랑하는 아내와 세 아들, 남부러울 것이 없는 그의 명성은 그의 지난날의 고생을 모두 잊게 해줄 만한 것이었다. 그의 작품 또한 여러 가지 전개 과정을 거쳐 발전과 성숙, 완성미를 모색하게 되는데, 여기에는 알제리, 이탈리아 등으로의 여행이 힘이 되어주었다. 그는 이탈리아로의 그림여행을 통해 라파엘과 앵그르의 작품들을 자세히 관찰하게 되고, 그 결과 자신의 작품에 형태를 잡아줄 보다 많은 윤곽선을 넣고, 색조를 좀더 차갑게 해야만 한다는 것을 느꼈다. (물론 어떤 이들은 르노아르의 작품의 이러한 변화를 달갑게 여기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이 때부터 그려진 그의 작품들은 따라서 인상주의 작품이라기보다 고전주의 작품에 가까웠다. 물론 그의 그림이 가지는 사랑스러운 질감과 보풀거리는 듯한 느낌을 잃어버린 것은 아니었지만, 좀더 어두워진 색조와 분명해진 윤곽선은 이전과 분명 구별되는 것이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르노아르의 새로운 시도는 그리 성공하지 못하였다. 비평가들이나 후원자들에게는 낯선 것이 분명했고, 그들은 이런 르노아르의 변화를 달가워하지 않았다. 결국 르노아르는 새로운 변혁을 시도하여 짙은 색조를 화면에서 격감시켰지만, 고전에 대한 선망은 죽는 날까지 감해지지 않았다고 한다. 이는 그가 드가를 평생 찬사 했음에서 보여진다. 기지에 넘치고 날카로우며, 독설 적인 성격의 소유자(물론 만년의 르노아르는 마음씨 좋은 할아버지로 변하였다고 한다.) 르노아르는 유달리 라이벌 의식이 강했지만, 드가에게만은 예외였는데, 이는 그가 매우 높이 평가한 앵그르의 기법을 드가가 충실히 재현하여 발전 시켰기 때문이었다. 르노아르 이상으로 드가를 찬미한 사람은 없었다고 한다. 결국 르노아르는 다시 한번 새로운 변혁을 꿈꾸게 되는데, 자신의 작품에 보다 많은 빛과 밝음, 기쁨을 집어넣은 것이었다. 고전적 기법과 결합한 그의 이런 새로운 변혁은 매우 성공적이었다. 그는 그이 작품에 대해 살롱 뿐 아니라 정부의 인정을 받았고, 심지어 그림에 문외한인 사람들에게조차 찬사를 받았다고 한다. 그러나 그의 심각한 관절염은 그를 행복 속에만 있게 두지 않았다. 날이 차가워지면 그는 나갈 수도 없었고, 흐리거나 비가 오는 날은 그를 괴롭게 했다. 르노아르가 그의 노년을 아내와 프로방스 지방의 칸에서 보낸 것은 아마도 이 영향이 컸을 것이다. 강수량이 매우 적은 프로방스지방의 일기는 르노아르로 하여금 작업에 몰두할 수 있도록 해주었고, 손에 묶어 흔들리지 않게 한 붓은 예전 같은 붓의 터치를 어느 정도 가능하게 해주었다. 1916년 그의 아내가 죽고 3년 후 그가 사망할 때까지 그는 칸에 살았으며, 80세가 넘도록 작품활동을 계속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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