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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국작가 畵壇

[스크랩] 뭉크-["Sister Inger, 1884"]

鶴山 徐 仁 2005. 7. 25. 11:20


["Sister Inger, 1884"]

국 적 : 노르웨이
활동 분야 : 예술
출 생 지 : 노르웨이 뢰텐
주요 작품 :《생명의 프리즈》 《별이 있는 밤》 《백야(白夜)》

그의 기법은 20세기초 독일 표현주의 발전에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 그의 작품 [절규](1893)는 실존의 고통을 형상화한 초상으로 높이 평가받고 있다. 뭉크는 노르웨이의 정치와 문호에 이바지한 명문가에서 5남매 가운데 둘째로 태어났다. 어머니는 그가 5세 때 결핵으로 죽었다. 10년 뒤에 누나도 같은 병으로 죽었고, 누이동생은 정신병에 걸렸다. 아버지와 남동생도 뭉크가 어렸을 때 죽었다. 어린 시절을 가득 채운 죽음의 공포와 죽음에 이르는 질병이 주는 불안은 평생동안 그를 사로잡았고, 그의 작품의 가장 중요한 주제가 되었다. [병든 아이](1888, 노르웨이 오슬로 국립미술관 소장), [죽음의 방](1892, 오슬로 뭉크 미술관 소장), [죽음의 침상 곁에서](1895, 노르웨이 베르겐의 라스무스 마이어스 컬렉션 소장), [죽은 어머니](1889, 독일 브레맨 미술관 소장)같은 작품은 그가 어렸을 때 받은 죽음의 인상이 반영된 수많은 그림과 판화들 가운데 일부이다. 뭉크는 어릴 적부터 그림에 타고난 재능을 보였지만, 정식교육은 거의 받지 못했다. 그는 오슬로 크리스 티아니에 있는 미술, 공예 학교에 잠시 다녔다. 이 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던 노르웨이의 중요한 자연주의 확 크리스티안 크로그(1852-1925)는 뭉크를 지도했으며 그에게 프랑스의 인상주의를 소개했다. 뭉크가 1885년 처음으로 파리를 여행한 뒤에 그린 [저녁 시간]같은 그림들은 인상주의 양식을 보여주었다. 뒤이어 그 당시의 프랑스 미술과 접촉한 것은 그의 표현 양식을 보여주었다. 뒤이어 그 당시의 프랑스 미술과 접촉한 것은 그의 표현 양식에 중대한 변화를 일으켜, 1890년경에는 아르누보 디자인만이 아니라 폴 고갱과 앙리 드 툴루즈 로트레크 같은 프랑스 화가들의 후기 인상주의 작품에도 영향을 받았다. 인상파 양식인 [봄날의 카를 요한 거리](1891, 라스무스 마이어스 컬렉션 소장)와 표현주의 양식인 [저녁때의 카를 요한 거리](1892, 라스무스 마이어 컬렉션 소장)의 대조가 이러한 표현 양식의 변화를 극적으로 보여준다. 뭉크가 젊은 시절을 보낸 크리스티아니아는 작은 지방 도시였는데, 그는 이 도시를 다스리는 상류계급이 편협하고 독선적이며 문화에 대한 관심이 부족하고 진부하다고 생각했다. 뭉크는 일찍부터 사회적 행동과 도덕 및 예술에 대해 새로운 사고방식을 가진 자유분방한 사람들과 사귀게 되었다. 이런 환경은 인습의 굴레에서 그를 해방시키는 결과를 낳았고, 뭉크의 미술은 성과 사회적 상황에 점점 더 많은 관심을 나타냈다. 뭉크는 스칸디나비아의 극작가 헨리크 입센과 아우구스트 스트린드베리, 노르웨이의 소설가 크누트 함 순, 프랑스 상징파 시인 스테판 말라르메를 비롯한 중요한 작가들을 많이 사귀게 되었다. 그는 헨리크 입센의 사회주의 리얼리즘에 특별한 친밀감을 느끼고, 입센의 [왕위를 노리는 자들]에 삽화를 그렸으며, [헤다 가블러]와 [유령]을 상연할 때는 무대장치를 설계하기도 했다. 1892년에 뭉크는 베를린 예술가들의 단체인 베를린 예술가 협회의 초청을 받고 독일에서 그림을 전시하게 되었다. 45점의 그림을 출품한 이 전시회는 11월 5일에 열려 1주일만에 막을 내렸다. 이 작품들의 강렬한 정서와 인습에 얽매이지 않은 자유분방한 회화적 형상은 격렬한 논쟁을 불러일으켰다. 독일 언론에서는 뭉크의 작품을 둘러싸고 뜨거운 논쟁이 벌어졌으며, 이 논쟁은 예술표현의 자유에 대한 투쟁으로 발전했다. 그러나 뭉크의 표현주의는 곧 인정을 받았고, 그는 주 거처를 베를린과 파리로 삼으며 유럽의 유명 인사가 되었다. 1890년대에 독일에서 되살아난 그래픽 아트의 영향을 받은 그는 1894년에 판화를 제작하기 시작했다. 에칭, 석판화 및 목판화 등을 다룸으로써 가장 중요한 현대 판화가의 한 사람이 되었다. 그의 판화는 특히 단순하고 솔직한 형상으로 유명하며, 그의 그림에서 볼 수 있는 것과 똑같이 강한 주관성이 두드러졌다.
뭉크가 베를린에서 첫 번째 개인전을 열었을 때부터 1908년 신경쇠약에 걸릴 때까지의 16년은 그의 생애에서 가장 중요한 시기였다. 그는 무서운 신경성 강박증에 시달렸다. 그는 구불구불한 선을 사용한 양식으로 인간 실존의 고종과 불안을 표현했다. 뭉크의 가장 유명한 작품인 [절규]는 현대인의 정신적 고뇌를 상징한다. 이 작품은 20세기초의 독일 표현주의회화에서 볼 수 있는 격정적 감성과, 현대를 상징하는 또 하나의 주요작품인 파블로 피카소의 [게르니카] (1937, 스페인 마드리드의 프라도 미술관 소장)에서와 같은 강렬한 현실감각을 뚜렷이 나타내고 있다. 1910년부터 뭉크는 노르웨이에 정착했다. 악의에 가득찬 세계와 자신의 정열에 희생당하는 개인을 묘사한 초기작품은 자기 소모적이고 내성적인 측면을 갖고 있지만, 후기 작품에는 삶의 기쁨과 자연의 풍요로움 및 인간과 자연의 친화가 그것을 대신하고 있다. 뭉크에게는 자연과 직접 접촉하는 것이 항상 중요했고, 이러한 접촉은 자유롭고 대담하여 힘찬 화풍으로 그린 수많은 풍경화에 표현되어 있다. 이 그림들의 색채가 더욱 화려하고 풍부해진 것은 그가 보다 긍정적인 사고방식을 갖게 된 것을 나타낸다. 이 시기에 그가 그린 가장 중요한 작품은 오슬로대 학교의 아울라(축제를 여는 큰 방)에 그린 벽화였다. 말년에 뭉크는 판화 제작을 그만두고, 오슬로 근처에 있는 집에서 홀로 지내며 지칠 줄 모르는 정력으로 죽을 때까지 계속 그림을 그렸다. 뭉크는 그가 갖고 있는 부동산뿐 아니라 그림과 판화 및 소묘작품도 모두 오슬로 시에 기증했으며, 오슬로 시는 1963년에 뭉크 미술관을 설립했다. 뭉크는 19세기 자연주의 회화의 경직된 아카데미즘에 반기를 들고, 20세기 표현주의의 선구자인 인간적인 미술을 탄생시켰다. 당대의 한 인물은 그를 '노르웨이 최초의 인상파 화가이자 유일한 인상파 화가'라고 묘사했다. 뭉크는 26세에 쓴 글에서 "나는 숨쉬고 느끼고 괴로워하는 사랑하는 사람, 즉 살아 있는 사람들을 그릴 것이다. 사람들은 이 작업의 신성함을 이해할 것이고, 교회에 있을 때처럼 모자를 벗을 것이다."고 말했다. 인간 조건에 대한 그의 미술적 표현은 사람의 감정에 호소하는 강렬한 힘을 갖고 있다. 이 호소력은 그를 노르웨이에서 가장 위대한 예술가로 만들었을 뿐 아니라 초기 현대 미술의 발전에 가장 중요한 인물 가운데 한 사람으로 만들었다.

1937년 나치스는 독일에 있는 그의 모든 작품을 퇴폐예술이라 하여 몰수해버렸다. 만년에는 은둔생활을 하였다. 한편 판화가로서도 근대의 대작가이며 표현파의 선구자이자, 노르웨이 근대회화의 이재(異才)로서 높이 평가되고 있다. 그 밖의 《봄》 《질투》 《절규》 《다리 위》 《저녁시간》 《죽음의 방 The Death Chamber》 등의 작품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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