鶴山의 草幕舍廊房

외국작가 畵壇

[스크랩] 라파엘로-<<아테네 학당>>

鶴山 徐 仁 2005. 7. 25. 11:21


<<아테네 학당>>

라파엘로는 이탈리아의 화가이며 건축가이다. 라파엘로는 레오나르도 다빈치, 미켈란젤로와 함께 르네상스 3대 거장의 한 사람으로, 두 거장의 장점을 고루 체득하였으며, 살아있는 동안 예술가로서 최고의 영예를 누렸다. <아테네 학당> <성체논의> 등의 벽화가 유명하다.
<아테네 학당>은 바티칸 궁전에 있는 벽화. 바티칸 궁전에는 교황의 서재 겸 도서관이었던 '서명의 방'이 있는데, 이 곳에 그려진 벽화이다.
<아테네 학당>은 둥근 아치 형태의 구조물로 테를 두른 거대한 르네상스 전성기의 건축물을 배경으로 그리스 철학자들의 이상적인 회합을 그리고 있다.

[생애와 회화작품]

<수업기>

1483년 우르비노에서 화가, 궁정시인의 아들로 태어나 화가로서의 수업을 아버지에게서 받았고 같은 고향 화가 T.비테에게 사사했다. 99년 전후에 페루지아의 화가 페루지노의 공방에 입문하여 부드럽고 온화하며 명쾌하고 감미로운 전 고전적 양식을 급속하게 흡수하였다. 1500년 페루지아 어음 교환소의 벽화 장식에서는 스승의 조수로서 참가한 것으로 확인되었고, 최초의 대작인 [성모대관],[성모의 결혼]에서는 페루지노 양식에 완벽하게 동화되었음을 볼 수 있지만, 동시에 그의 독자적인 음악적 선의 리듬과 경쾌하고 우아한 감각이 나타난다. 이러한 천성적인 회화 자질은 이 시기의 [삼미신],[기사의 꿈],[성 게오르기우스]등의 소품에서도 환상적인 분위기를 표현하고 있다.

<피렌체시절>

1504년 가을 예술의 중심지인 피렌체로 옮겨 1508년까지 4년간 레오나르도 다빈치, F.바르톨로메오, 미켈란젤로 등의 피렌체파 예술을 왕성하게 연구하고 종래의 지방적 양식을 한층 새롭게 하였다. 특히 [성 안나]를 발표하여 화제를 일으켰으며, 레오나르도의 군상구성과 영묘한 명암 표현을 흡수하여 풍부 한 생명감을 불러일으키는 고전양식을 확립하였다. 이 시기의 대표작으로는 [대공의 성모],[목장의 성모],[아름다운 여의사]등 일련의 우아한 성모 그림과 성가족 그림, 초상화 [도니부처], 그리고 미켈란젤로의 영향을 나타내는 극적인 [그리스도의 매장]등이 있다.

<로마시절>

1508년 말에 고향 친구인 브라만테의 추천으로 교황 율리우스 2세에게 초청되어 로마로 옮긴 라파엘로는 20년 4월 37세의 젊은 나이로 죽을 때까지 12년간을 바티칸 궁정화가로 율리우스 2세와 레오 10세 아래에서 일하고 시대의 총아로 그의 작업의 정점에 이르렀다. 바티칸 궁에서는 시스티나 성당의 천정화를 제작중인 미켈란젤로로부터 깊은 영향을 받아 제3양식이라는 대양식으로 [서명실]을 비롯하여 [에리들로실],[볼고화재실]등 여러 방을 차례차례 벽화로 장식하였는데, [서명실]의 벽화 중 특히 르네상스 인문주의의 상징적 회화라고 할 수 있는 [아테네의 학당]은 장대한 건축공간과 다수의 인물군상의 완벽한 통일과 조화를 실현하여 고전양식의 규범이 되지만, [에리들로실] 이후의 장식활동에서는 조수 나 제자의 참여가 많아지고 작품도 마니에리슴의 경향이 강했다. 로지에이 장식에서는 고대 실내장식을 재생한 그로테스크 장식을 나타내고 <라파엘레스코>무늬라 하여 크게 유행하였다. 그 밖에 로마에서는 바티칸 궁을 위한 일과 병행하여 많은 귀족과 성직자 등의 고객을 위해 쉬지 않고 왕성한 제작활동을 전개하였는데, 그 중에서도 시에나 출신의 대은행가 아고스티노 키지를 위한 파르네지나궁의 벽화장식인 [갈라테아의 승리]및 대부분 제자들에 의해서 제작된 [프시케의 이야기]의 천장장식 외에 산타마리아 데라 파체 성당의 벽화장식인 [시브라들(1514)] 과 산타마리아 델 포폴로 성당의 키지가 성당설계와 둥근 천장의 모자이크 장식 등을 제작하였다. 제단화와 종교화 분야에서도 계속 많은 걸작품을 남겼는데, [폴리노의 성모](1513-14),[작은 의자의 성모]등이 있으며, 제자 로마노에 의해서 완성된 미완의 걸작 [그리스도의 변용](1518-20)은 정바로크적 이라고도 할 수 있는 새로운 면인 격렬한 극적 갈등과 명암대비, 깊은 내면적 종교성 등을 나타내고 있다. 초상화가로서의 활동도 커서 [율리우스 2세],[레오 10세와 두 사람의 추기경](1518-19)을 비롯하여 [궁정인의 서]의 저자인 인문주의자 [발타사르카 스틸리오네상]및 [라베라타] [라 포르나리나]등이 알려졌다.

[건축가로서의 활동]

건축에도 손을 대러 1514년 브라만테의 사후 뒤를 이어 레오 10세에 의해 성 베드로 대성당 건축주임에 임명되어 그 조영사업을 지도하였다. 또한 다음해에는 고대 유물 감독관에 임명되고 고대 유품들을 조사하였고, 유적지도의 제작도 시도했으나 미완에 그쳤다. 그의 설계로 알려진 건축작품에는 앞서 말한 키지가의 교회 외에 비드니카파렐리의 저택, 로마 근교의 빌라마다마 등이 있다. 그 작풍은 프란체스코 마우라나와 브라만테를 계승한 우아하고 엄격한 고전주의라 하지만 오늘날 그 작품의 대부분이 대폭적으로 수정되고 있기 때문에 정확한 평가는 어렵다.

[라파엘로의 신화와 후세에 끼친 영향]

라파엘로는 살아 있는 동안 예술가로서의 최고의 영예를 누렸으며, 막대한 재산을 축재하였고 단명은 했지만 많은 찬미가와 후원자, 제자들에 둘러싸여 화려하고 행복한 (왕후, 귀족과 같은) 생활을 보냈다. 뛰어난 용모와 명랑 쾌활한 성격으로 여러 사람들로부터 사랑을 받았으며, 결점이 없는 완전한 예술가로 일찍부터 신화화되었다. 라파엘로의 예술은 명석과 조화, 정밀과 전아라는 고전양식 조건을 완벽하게 갖춘 동시에, 감성이 풍부한 자연주의와 이지적 추상화, 섬세 우아한 요소를 융합한 회화예술의 완전함의 전형이라고까지 보여진다. 그의 작품은 각국의 왕후귀족이나 수집가들의 손에 의해 서유럽에 퍼져 마니에리슴에서 바로크, 신고전주의까지의 근세 서구 회화에서 권위 있는 미적 규범 및 관학적 학풍의 원천으로 압도적인 영향력을 계속 미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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