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평로] 한국 ‘검찰 없애기’ vs 영국 ‘경찰 힘빼기’
英 ‘수사·기소 분리’ 10년 준비…
협력·견제로 범죄 잡고 인권 보호
‘검수완박’ 18일만에 만든 민주당
경찰도 수사 잘하면 없앨 텐가
입력 2022.05.11 03:00
30일 오후 서울 여의도 국회에서 열린 제396회 국회(임시회) 제1차 본회의에서 ‘검수완박’ 법안의 한 축을 이루고 있는 검찰청법 일부개정법률안(대안)에 대한 수정안이 가결되고 있다. /국회사진기자단
범죄 수사와 기소를 어떤 기관이, 어떤 방식으로 담당하는지는 나라마다 차이가 있다. 오랜 세월 자리 잡은 형사사법 시스템을 시대와 상황에 따라 크게 뜯어고쳐야 하는 일도 생긴다. 한국과 영국은 서로 정반대 방식으로 이 문제를 다뤄왔다. 영국이 ‘경찰 힘빼기’였다면 한국은 ‘검찰 없애기’라고 볼 수 있다.
1986년 영국의 형사사법 시스템 개혁은 ‘경찰 힘빼기’가 될 수밖에 없었다. 영국에서는 1820년대부터 경찰이 수사와 기소를 모두 전담해왔다. 검찰은 아예 없었다. 경찰이 수사와 기소를 150년간 독점하면서 강압 수사와 무리한 기소가 심각한 사회문제가 됐다. 1970년대 ‘콘페이트 살해’ 사건에서 영국 경찰은 10대 청소년 3명이 자백했다며 기소했고 1심에서 유죄판결을 받아냈다. 그러나 진범은 따로 있었다. 지적 능력이 4세 수준으로 글을 읽고 쓸 줄도 모르는 소년에게 경찰이 가혹 행위로 거짓 자백을 받은 사실이 드러났다. 경찰이 피해자 사망 시점을 마음대로 추정해 놓고 당시 다른 곳에 있었다는 알리바이까지 있는 미성년자들에게 죄를 뒤집어 씌운 것이다. 3년 만에 항소심에서 무죄가 나왔다. 경찰의 수사·기소 독점을 근본적으로 개혁해야 한다는 국민적 요구가 나올 수밖에 없었다.
영국 정부와 의회는 10년간 개혁 방안을 숙고했다. 최고 전문가들이 참여하는 조사위원회와 왕립위원회가 가동됐다. 범죄에 효율적으로 대응하면서 인권침해는 최소화할 수 있는 대책을 6년간 연구했다. 이를 바탕으로 4년간 더 검토해 관련 법을 만들었다. 경찰에는 수사권만 남기고 기소권은 새로 만든 국립기소청에 넘기게 했다. 두 기관이 범죄자를 처벌하는 데는 적극 협력하되 인권 보호를 위해서는 서로 견제하라는 것이었다. 그 뒤로도 영국은 제도를 계속 보완하고 있다.
문재인 정권은 ‘검찰 없애기’를 납득하기 힘든 방식으로 밀어붙였다. 이른바 ‘검수완박(검찰 수사권 완전 박탈)’을 임기 만료 1주일 전에 해치웠다. 건국 이후 74년간 유지해온 형사사법 시스템을 허무는 입법을 불과 18일 만에 강행 처리한 것이다. 겉모습만 마치 영국처럼 수사는 경찰이 하고 기소는 검찰이 맡는 방향으로 됐다. 그러나 목적은 범죄를 제대로 잡고 인권을 보장하려는 것이 전혀 아니다. 애초 검수완박은 민주당이 문 정권의 불법을 수사하는 검찰총장을 몰아내려고 불쑥 꺼낸 것이었다.
문 정권 임기 만료 직전에 검수완박이 다시 추진된 이유는 누구나 알고 있다. “법률 처리 안 되면 문재인 청와대 20명 감옥 갈 수 있다”는 말이 민주당에서 나왔다. 경찰 출신 민주당 의원은 “검찰에서 수사 기능을 분리하면 검찰의 수사권은 그냥 증발하는 것”이라고 했다. 경찰이 이미 일에 치이고 있어 수사권을 다 넘겨받는다 해도 감당할 수 없을 테니 문 정권의 불법은 묻힐 수 있다고 미리 주판을 놓아본 것이다. 특정 개인이나 집단만 처벌받지 않도록 하려는 법률은 평등과 정의를 파괴하는 악법이다. 검수완박이 위헌이라는 소송들이 줄줄이 헌법재판소의 심판을 기다리고 있다.
윤석열 대통령이 취임하면서 정권이 교체됐지만 국회는 여전히 민주당이 잡고 있다. 검찰에 남은 부패·경제 범죄 수사권까지 1년 6개월 안에 다 없애려는 검수완박 2라운드를 민주당이 진행 중이다. 민주당은 국회에서 어떤 법률도 통과시킬 수 있을 정도로 절대다수 의석을 가지고 있다. 대통령이 거부권을 행사해도 재의결로 법률을 확정시키려 할 수도 있을 것이다. 민주당에 묻고 싶다. 만약 경찰이 제대로 수사해 문 정권의 불법을 밝혀낸다면 어떻게 하겠나. 경찰 수사권도 다 빼앗는 법률까지 만들 텐가. 민주당 국회에선 얼마든지 있을 수 있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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