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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aith - Hymn

재판은 하나님께 속한 것 신 1:17-18

鶴山 徐 仁 2022. 4. 7. 09:06

재판은 하나님께 속한 것 신 1:17-18

 
 
04월 07일 (목)
   
재판은 하나님께 속한 것 신 1:17-18



17. 재판은 하나님께 속한 것인즉 너희는 재판할 때에 외모를 보지 말고 귀천을 차별 없이 듣고 사람의 낯을 두려워하지 말 것이며 스스로 결단하기 어려운 일이 있거든 내게로 돌리라 내가 들으리라 하였고
18. 내가 너희의 행할 모든 일을 그 때에 너희에게 다 명령하였느니라
 
원래 재판은 하나님께 속한 것입니다. 재판의 절대적 잣대인 율법을 하나님께서 주셨고 또한 재판관도 최후의 심판주이신 하나님의 권위로, 하나님을 대신하여 사건을 판결하기 때문입니다. 
<재판은 하나님께 속한 것인즉 ... >(17절). 그래서 모세는 재판의 원칙을 몇 가지로 정리하여 이렇게 제시합니다. ① 쌍방간 공정하게 판결하라(16절) ② 타국인을 차별하지 말라(16절) ③ 외모를 보지 말라(17절) ④ 귀천을 차별하지 말라 ⑤ 사람의 낯을 두려워하지 말라(17절).   이를 한마디로 표현하면 <공의롭게 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면전에서, 하나님을 대신하여, 하나님이 하시듯 공평하고 의롭게 판결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결코 외모를 보시거나 부자를 편드시거나 권력자를 의식하거나 두려워하여 부당한 판결을 내리시지 않습니다. 


그러나 사람의 판결은 오늘날까지도 결코 공정하거나 공평하게 이뤄진다고 볼 수 없습니다. 지금도 법정의 재판이 억울한 사람을 만들지 않고 엄정하고 공명정대하게 이뤄지고 있다고 믿는 사람들은 그리 많지 않습니다. <유전무죄 무전유죄>가 지금도 여전히 통용되고 있다고 믿는 사람들이 다수인 것도 사실입니다. 


바울은 고린도전서 6장에서 장차 <성도가 이 세상을 심판할 것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2절)고 했습니다. 또 <우리가 천사를 심판할 것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3절)고도 했습니다. 이것은 장차 우리가 하나님과 함께 이 세상을 심판할 배심원으로 택함을 입은 자들이라는 뜻인데 이는 가히 믿는 자들의 혁명적인 자의식을 고백한 말씀이라 아니할 수 없습니다. 이 불의한 세계 속에 살면서도 이 세상에 속한 사람들이 아니라 도리어 훗날 이 세계를 심판할 사명을 가졌다는 말씀 아닙니까? 얼마나 대단한 성도의 동일성입니까?


부디 이 세상을 공정한 눈으로 바라보며 판단하십시오. 절대 외국인이라고 차별하지 마십시오. 외모를 보고 함부로 예단하지 마십시오. 귀천을 따져 대우하지 마십시오. 늘 사람의 낯이 아니라 하나님의 면전에서 하나님의 눈을 의식하며 사십시오. 우리 모두가 그렇게만 살고 그렇게만 판단하고 판결한다면 우리 사회와 우리의 법정과 공동체가 얼마나 건강하고 정의롭고 공평하겠습니까?
 
-<재판이 하나님께 속했다>는 성경의 가르침에 동의하십니까?
-인간사의 재판이 공의롭지 못한 이유를 당신은 뭐라고 생각하십니까?
-장차 <성도가 세상을 심판하고 천사를 심판한다>는 바울의 말씀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고전 6:2-3)?
 
주님, 재판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라는 말씀을 믿습니다. 그래서 반드시 공의로워야 하고 모든 재판관들은 하나님의 권위를 가지고 하나님의 뜻을 대행한다는 자부심과 책임감으로 판단하고 판결해야 함을 확신합니다. 그러나 현실은 늘 그렇지 못해 이 시대에도 여전히 억울한 사람, 부당하게 벌 받고 손해보는 사람들이 얼마든지 있습니다. 부디 하루 속히 이 땅에 하나님의 나라가 실현되게 하사 가장 공의로운 재판이 이루어져 하나님의 뜻이 온전히 성취되는 역사가 있게 해주시옵소서. 
 
   
자원이 많은데 가난한 나라
 
“경제성장과 관련하여 ‘자원의 저주’라는 개념이 있다. 자원이 풍
부한 나라일수록 경제성장이 빠를 것이란 기대와는 달리 오히려 국민의
삶의 질이 낮아지는 현상을 말한다. 한국,일본, 이스라엘은 인구대비
자원 빈국에 가깝다. 중남미의 자원 부국인 베네수엘라, 아르헨티나,
브라질은 자원의 저주 국가에 해당하는데,그렇다면 자원의 저주는 왜
생겨나는 것일까?”


장인수 저(著) 《수신》 (아트 앤 아트피플,116쪽) 중에 나오는 구절
입니다.  
‘자원의 저주’를 받은 나라들은 공통된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은 자원으로 얻은 부가 한쪽에 집중되기 때문이다. 석유를 생산
하는 중동 대부분의 나라가 군주국이고,아프리카의 자원 부국들이 독
재와 내전에 시달리고 있으며,미얀마에서 군부가 여전히 무력지배 중인
일들의 배경에는 자원이 결정적인 역할을 하고 있다. 모자람보다 넉넉
함이 오히려 재앙이 되고 불행이 되는 형국이다.”(117쪽)
복은 나누어야 합니다. 4차산업혁명, 인공지능의 혜택도 몇몇 부류에
게만 집중된다면, 첨단 기술은 축복이 아니라 갈등의 씨앗이 됩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믿음의 조상으로 부르신 이유가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네게 보여 줄 땅으로 가라.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하게 하리니 너는 복이 될지라.”
(창12:1,2)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복의 통로로 부르셨습니다. 우리를 부르신 이유도
동일합니다. 남보다 많이 받은 것은 곧 ‘사명’을 의미합니다.
   
디모데후서 1장 16절
 
원하건대 주께서 오네시보로의 집에 긍휼을 베푸시옵소서
그가 나를 자주 격려해 주고 내가 사슬에 매인 것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고
May the Lord show mercy to the household of Onesiphorus, because he often refreshed me and was not ashamed of my chains.
2 Timothy 1:16 [NIV]
   
누군가가 창으로 가슴을 푸욱 찌를 때
제가 전에 섬기던 목사님께서 항상 강조하신 말씀이 있다. 
목사는 누군가가 창으로 가슴을 푸욱 찌를 때 
그때 잘해야 한다는 것이다.
 억울하다고 변명하거나 아프고 힘들다고
 그 창을 뽑아서는 안 된다는 거다. 
그 창을 부여잡고 십자가를 생각하며 기도하라는 것이다.
 그 창을 십자가의 사랑으로 녹여내면 
결국 하나님께서 문제를 풀어주신다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목사가 승리하는 비결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아직도 내 모습을 보면 참 멀었다는 생각이 든다. 
조금만 힘들어도 나도 모르게 원망이 나온다. 
속이 상해서 잠 못 이루기도 한다. 
그것은 내가 십자가 앞에 온전히 죽지 못하고 
내 욕심이, 내 뜻이 살아있다는 증거이다. 
-안두익 목사의 ‘어떤 삶이 행복한 삶입니까’에서-


사도 바울은  “나는 날마다 죽노라”(고전15:31) 고백합니다.
   우리가 죽는다는 것은 십자가에 자신을 못 박는 것입니다.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 예수 그리스도가 사는 것입니다.
 우리는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신을 십자가에서 버리신
그리스도를 따르는 믿음의 길을 걸어야 합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사람들이 추구해야 할 존재방식입니다.
  우리의 영성은 ‘자아를 얼마나 죽였는가?’입니다. 
 아무리 은혜를 받고, 스스로 은사를 가졌다 할지라도
 아직도 내 안에 혈기가 죽지 않고, 
내 고집과 내 주장이 살아있다면 더 엎드려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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