鶴山의 草幕舍廊房

Faith - Hymn

여호와의 큰 날이 가깝도다 습 1:10-18

鶴山 徐 仁 2022. 3. 17. 10:39

여호와의 큰 날이 가깝도다 습 1:10-18

 
 
 
03월 17일 (목)
   
여호와의 큰 날이 가깝도다 습 1:10-18



10.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그 날에 어문에서는 부르짖는 소리가, 제 이 구역에서는 울음 소리가, 작은 산들에서는 무너지는 소리가 일어나리라
11. 막데스 주민들아 너희는 슬피 울라 가나안 백성이 다 패망하고 은을 거래하는 자들이 끊어졌음이라
12. 그 때에 내가 예루살렘에서 찌꺼기 같이 가라앉아서 마음속에 스스로 이르기를 여호와께서는 복도 내리지 아니하시며 화도 내리지 아니하시리라 하는 자를 등불로 두루 찾아 벌하리니
13. 그들의 재물이 노략되며 그들의 집이 황폐할 것이라 그들이 집을 건축하나 거기에 살지 못하며 포도원을 가꾸나 그 포도주를 마시지 못하리라
14. 여호와의 큰 날이 가깝도다 가깝고도 빠르도다 여호와의 날의 소리로다 용사가 거기서 심히 슬피 우는도다
15. 그날은 분노의 날이요 환난과 고통의 날이요 황폐와 패망의 날이요 캄캄하고 어두운 날이요 구름과 흑암의 날이요
16. 나팔을 불어 경고하며 견고한 성읍들을 치며 높은 망대를 치는 날이로다
17. 내가 사람들에게 고난을 내려 맹인 같이 행하게 하리니 이는 그들이 나 여호와께 범죄하였음이라 또 그들의 피는 쏟아져서 티끌 같이 되며 그들의 살은 분토 같이 될지라
18. 그들의 은과 금이 여호와의 분노의 날에 능히 그들을 건지지 못할 것이며 이 온 땅이 여호와의 질투의 불에 삼켜지리니 이는 여호와가 이 땅 모든 주민을 멸절하되 놀랍게 멸절할 것임이라
 
<여호와의 날>은 곧 <여호와의 큰 날>입니다. 그리고 <여호와의 큰 날>은 곧 <분노의 날이요 환난과 고통의 날이요 황폐와 패망의 날이요 캄캄하고 어두운 날이요 구름과 흑암의 날이요 나팔을 불어 경고하며 견고한 성읍을 치며 높은 망대를 치는 날>(15-16절)입니다. 그래서 선지자는 <너희는 슬피 울라!>(11절)고 합니다. 그들의 <피는 쏟아져서 티끌같이 되며 그들의 살은 분토같이 되며 온 땅이 여호와의 질투의 불에 삼켜지고 땅의 모든 주민들이 멸절하되 놀랍게 멸절할 것>(17-18절)이라고도 합니다. 이것은 지금으로부터 2,600년 전 스바냐가 선포한 <여호와의 큰 날>이지만 또한 앞으로 닥칠 이 세상 종말의 그림이기도 합니다. 


지금도, 이 시대에도 스바냐와 같은 예언이 필요합니다. 최후 심판에 대한 종말론적 메시지가 절실합니다. 교회 안팎의 현실을 직시합시다. 권력과 권위주의 그리고 인본주의와 율법주의, 하나님보다 물질과 세상적 가치관을 더 추구하는 세속주의, 또한 하나님과 우상을 함께 섬기는 혼합주의 등 참으로 혼란한 시대요 혼미한 정신사의 흐름입니다. 


스바냐의 예언과 선포는 그 어떤 선지자의 메시지보다도 극단적입니다. 그것은 그만큼 당시 유다 백성 안에 죄악이 심각했던 탓입니다. 만약 스바냐가 이 시대, 우리 시대를 향해 하나님의 심판을 선포했다면 아마 이보다 더 첨예하고 더 과격했을지도 모릅니다. 오늘 본문은 무시무시한 심판의 언어들로 가득 차 있습니다. 종말, 추수, 심판, 끝장이라는 의미의 <아사프>가 4번, 멸절하다, 자르다, 끊어버리다는 의미의 <카라트>가 3번, 벌하다는 뜻의 <파카트> 역시 3번이나 사용되고 있습니다. 


여호와의 큰 날이 가깝습니다. 역사의 종말이 머지않았습니다. 
<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웠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정신을 차리고 근신하여 기도하라>(벧전 4:7). 
 
-<여호와의 큰 날>이 분노의 날이요 환난과 고통의 날인 이유는 무엇일까요?
-스바냐가 선포한 <여호와의 날> 예언을 보며 역사의 종말에 있을 최후의 심판을 생각해야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현대 교회가 왜 갈수록 종말론적 긴장을 잃어가고 있을까요?
 
주님, 종말에 있을 <여호와의 큰 날>을 두려워하게 하사 저희로 하여금 항상 깨어 있게 하시옵소서. 그리하여 저희에게는 그날이 분노의 날이 아니라 축복과 구원의 날이 되게 하사 멸절이 아닌 영생의 날이 되게 해주시옵소서. 스바냐 선지자의 <여호와의 날> 선언이야말로 그 시대 유다만이 아니라 오늘 이 시대 저희에게도 여전히 유효한 종말론적 메시지임을 깊이 깨닫고 근신하는 성도들 되게 해주시옵소서. 
 
   
인간과 기계의 대결 3라운드 지능대결
 
“힘과 속도의 싸움에서는 기계를 이길 수 없다고 깨달은 인간은 지능을
대결해보기로 했다. 인간과 기계 간의 ‘체스 대결’이다(중략). 당시
체스 챔피언인 ‘카스파로프’와 슈퍼컴퓨터 IBM사의 ‘딥 블루’와의
대결이 첫 대결(중략).  1차전 성적은 카스파로프가 4:2로 승리했다.
사람들의 환호는 대단했다(중략). 하지만 이듬해 펼쳐진 1997년의 대결
에서는 컴퓨터에 완패하고 말았다.”


홍성원 저(著) 《생각하는 기계 vs 생각하지 않는 인간》
(리드리드, 31-32쪽) 중에 나오는 구절입니다.
IBM이 만든 딥 블루는 당시 체스 세계 챔피언 가리 카스파로프에게 도전
했지만 1승 2무 3패로 패배했습니다. 그러나 다음 해 1997년 기존 딥블
루를 개량한 ‘디퍼블루’로 다시 도전해 2승 3무 1패로 승리를 거뒀
습니다. 카스파로프는 훗날 “기계가 마치 신처럼 체스를 뒀다”고 말
했습니다. 시사 주간지인 <뉴스위크>는 이 대결을 ‘인간 두뇌의 마지막
저항(The Brain’s Last Stand)’이라고 표현했습니다. 이후 몇 차례
대결에서 기계가 계속 승리를 거두었습니다.
그러나 기계와 기술이 인간의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없습니다. 분명
사회가 고도화 될수록 인간의 존엄성과 인간미가 존중되어야 합니다.
미국의 미래학자인 존 나이스비트(John Naisbitt)는 《하이테크 하이터
치》에서 고도의 기술과 더불어 고도의 인간적인 감성이 조화와 균형을
이루어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즉,고도의 첨단 기술을 가진 하이테크
사회일수록 인간이 기계에 종속되고 소외되지 않기 위해서는 좀더 고도
화된 휴먼 터치(Human Touch)가 요구된다는 것입니다. 인간의 마음과
얼굴을 가진 기술자,경영인, 조직 관리자, 마케터가 되어야 한다는
것을 강조합니다. 분명 기계의 발달로 인해 세상은 점점 더 편리해지지
만, 그에 못지않게 인간은 상품화, 데이터화 되어 그 존귀함을 잃어버릴
수 있습니다. 시대에 따른 그리스도인들의 특수한 사명이 있습니다.
전도 선교 구제는 물론이고, 지금 시대의 그리스도인은 첨단화되어 가는
사회 속에서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된 인간의 존엄성을 지켜주어야
하는 사명이 있습니다.
 
“땅에 있는 성도들은 존귀한 자들이니, 나의 모든 즐거움이 그들에게
있도다.” (시16:3)
   
누가복음 4장 13절
 
마귀가 모든 시험을 다 한 후에 얼마 동안 떠나니라
When the devil had finished all this tempting, he left him until an opportune time.
Luke 4:13 [NIV]
   
섬기는 마음을 달라고 기도하라
행복한 사람의 특징은 섬기는 사람이다.
왜냐하면 섬길 때 높임을 받고 존경을 받기 때문이다.
돈 많은 사람은 돈 때문에 행복하지 않고 
그 돈으로 가난하고 헐벗고 굶주린 사람들을 
섬길 때 행복하다고 했다. 
그러므로 섬기는 마음을 달라고 기도하고 
행복한 생활을 해야 할 것이다.
예수님을 만나고 난 뒤에 예수님을 
자기의 생명처럼 여기고 예수님을 섬겼던 사람들은 
모두 행복한 생활을 했고 예수님께서
 또한 그를 많은 사람에게 존경받도록 하셨다.
-김춘환 목사의 ‘내 손 잡아 주신 주님’에서-


예수님을 섬기고 이웃을 섬기는 사람은 
하나님께서 그를 vip로 삼아주시고
어디를 가든지 존경받도록 해 주시고 
주님의 나라 가도록 축복해주시기에 
그는 진정한 행복자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십자가에서 모든 피와 물을 쏟아주시면서 
나를 구원해주신 예수님과 이웃들을 끝가지 잘 섬길 때 
하나님은 우리를 세상에서도 
귀중히 여김을 받로록 역사하실 것입니다.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요 12;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