鶴山의 草幕舍廊房

Faith - Hymn

상수리나무 아래 앉다 왕상 13:11-22

鶴山 徐 仁 2021. 11. 23. 10:07

상수리나무 아래 앉다 왕상 13:11-22

 
 
 
11월 23일 (화)
   
상수리나무 아래 앉다 왕상 13:11-22


11. 벧엘에 한 늙은 선지자가 살더니 그의 아들들이 와서 이 날에 하나님의 사람이 벧엘에서 행한 모든 일을 그에게 말하고 또 그가 왕에게 드린 말씀도 그들이 그들의 아버지에게 말한지라
12. 그들의 아버지가 그들에게 이르되 그가 어느 길로 가더냐 하니 그의 아들들이 유다에서부터 온 하나님의 사람의 간 길을 보았음이라
13. 그가 그의 아들들에게 이르되 나를 위하여 나귀에 안장을 지우라 그들이 나귀에 안장을 지우니 그가 타고
14. 하나님의 사람을 뒤따라가서 상수리나무 아래에 앉은 것을 보고 이르되 그대가 유다에서 온 하나님의 사람이냐 대답하되 그러하다
15. 그가 그 사람에게 이르되 나와 함께 집으로 가서 떡을 먹으라
16. 대답하되 나는 그대와 함께 돌아가지도 못하겠고 그대와 함께 들어가지도 못하겠으며 내가 이 곳에서 그대와 함께 떡도 먹지 아니하고 물도 마시지 아니하리니
17. 이는 여호와의 말씀이 내게 이르시기를 네가 거기서 떡도 먹지 말고 물도 마시지 말며 또 네가 오던 길로 되돌아가지도 말라 하셨음이로다
18. 그가 그 사람에게 이르되 나도 그대와 같은 선지자라 천사가 여호와의 말씀으로 내게 이르기를 그를 네 집으로 데리고 돌아가서 그에게 떡을 먹이고 물을 마시게 하라 하였느니라 하니 이는 그 사람을 속임이라
19. 이에 그 사람이 그와 함께 돌아가서 그의 집에서 떡을 먹으며 물을 마시니라
20. 그들이 상 앞에 앉아 있을 때에 여호와의 말씀이 그 사람을 데려온 선지자에게 임하니
21. 그가 유다에서부터 온 하나님의 사람을 향하여 외쳐 이르되 여호와의 말씀에 네가 여호와의 말씀을 어기며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내리신 명령을 지키지 아니하고
22. 돌아와서 여호와가 너더러 떡도 먹지 말고 물도 마시지 말라 하신 곳에서 떡을 먹고 물을 마셨으니 네 시체가 네 조상들의 묘실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하셨느니라 하니라
 
<벧엘에 한 늙은 선지자가 살더니 그의 아들들이 와서 이 날에 하나님의 사람이 벧엘에서 행한 모든 일을 그에게 말하고 또 그가 왕에게 드린 말씀도 그들이 그들의 아버지에게 말한지라>(11절).
이 벧엘의 <늙은 선지자>는 아마도 이념적으로 여로보암이 세운 산당이며 종교 정책에 동의하는 인물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랬기에 자기의 아들들을 여로보암이 만든 절기에 참여하도록 했고, 또 받지도 않은 하나님의 말씀을 받았다며(18절) 거짓으로 <하나님의 사람>을 미혹한 듯  보입니다. 


그런 벧엘의 늙은 선지자가 <하나님의 사람>이 잠시 쉬고 있는 상수리나무 아래로 다가가 그를 자신의 집으로 초대합니다. <하나님의 사람>이 호의를 사양하며 <그대와 함께 들어가지도 못하겠으며 내가 이곳에서 그대와 함께 떡도 먹지 아니하고 물도 마시지 아니하리라>(16절)고 하자 <나도 그대와 같은 선지자라 천사가 여호와의 말씀으로 내게 이르기를 그를 네 집으로 데리고 들어가서 그에게 떡을 먹이고 물을 마시게 하라 하였느니라>(18절)하며 속였습니다. 


그래서 결국은 <하나님의 사람>이 <그와 함께 돌아가 그의 집에서 떡을 먹으며 물을 마셨다>(19절)고 합니다. 
이처럼 마귀는 우리를 무너뜨리는 방법을 너무도 잘 알고 있습니다. 여기서 또 한 가지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왕인 여로보암의 호의도 단호하게 거절했던 하나님의 사람이 상수리나무 아래서는 늙은 선지자의 말에 넘어갔다는 것입니다. 


주님은 <너희가 사람의 미혹을 받지 않도록 주의하라>(마 24:4)고 하셨습니다. 또 말세에는 거짓 선지자가 많이 출현한다고도 하셨습니다. 오늘 이 본문도 보십시오. <하나님의 사람>조차도 천사가 와서 여호와의 말씀을 전했다고 하자 당장 미혹되지 않았습니까? 늘 깨어 있어야 합니다. <많은 사람이 내 이름으로 와서 이르되 나는 그리스도라 하여 많은 사람을 미혹하리라>(마 24;5) 한 말씀을 잊지 말고 늘 기억해야 합니다. 


<...네가 여호와의 말씀을 어기며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내리신 명령을 지키지 아니하고 돌아와서 여호와가 너더러 떡도 먹지 말고 물도 마시지 말라 하신 곳에서 떡을 먹고 물을 마셨으니 네 시체가 네 조상들의 묘실에 들어가지 못하리라>(21-22절).
 
-벧엘의 늙은 선지자가 왜 <하나님의 사람>을 속이고 굳이 떡과 물을 먹고 마시게 했을까요?
-당신은 거짓 선지자의 미혹을 당하신 적이 있습니까?
-벧엘의 늙은 선지자에게 속은 <하나님의 사람>에 대한 하나님의 징계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주님, 벧엘의 늙은 선지자는 <나도 그대와 같은 선지자라>며 <하나님의 사람>에게 접근했고, 천사의 계시라며 <하나님의 사람>을 속였습니다. 결국 왕의 호의마저도 단호하게 거절했던 <하나님의 사람>이 그의 미혹에 넘어가 범죄했고 따라서 치명적인 하나님의 징계를 면치 못했습니다. 이 마지막 때 무엇보다도 거짓 선지자들에게 속지 않는 저희들 되게 하사 본문의 <하나님의 사람> 같은 비극의 주인공이 되지 않게 해주시옵소서.
 
   
인공지능이 피카소 그림은 못 그린다?
 
“렘브란트는 가장 사실적인 그림을 그리기로 유명한 화가인데, 렘브란
트의 그림 345장을 학습한 마이크로소프트사의 AI 드로잉머신 넥스트
렘브란트(The Next Rembrant)가 전문가들도 못 알아볼 정도로 렘브란
트와 똑같은 그림을 그렸어요.“


김경일 저(著) 《창의성이 없는 게 아니라 꺼내지 못하는 것입니다》
(샘터, 35쪽) 중에 나오는 구절입니다.
AI 드로잉 머신은 사실적 그림을 그리는 렘브란트의 그림을 완벽하게
재현해 냈습니다. 그러나 피카소의 그림은 달랐습니다. 피카소는 평
범한 그림을 그리다가 언제부터인가 전위적인 색채와 구도의 독창적인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습니다.
“AI 드로잉머신이 피카소의 그림은 아무리 학습해도 우리가 알고 있는
피카소의 그림을 못 그리는 겁니다(중략). 피카소가 예전에 그리던 그
림을 아무리 학습해도 AI는 피카소가 그 다음 단계에서 그린 그림을 못
그린다는 거예요.”(35쪽)
이 사실을 보면 인간에게는 인간만이 가지는 독특한 특징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이를 가리켜 학자들은 ‘인간력’이라고 했습니다. 언젠가
피카소의 추상적인 그림도 AI 드로잉 머신이 재현해 낼 수 있을 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 시기에도 인공지능이 닿지 못하는 인간만이 할 수
있는 영역이 분명 있을 것입니다.
인공지능 AI를 비롯한 첨단 IT 기기를 잘 다루고 활용하는 능숙함이 필
요한 시대입니다. 그에 못지않게 인공지능과 IT로 채울 수 없는‘인간
력’을 간직하는 것이 4차산업 혁명시대의 실력입니다.  
무엇보다도 하나님께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하는 것은 사람만이 할 수
있는 최고의 특권이자 인간만의 고유의 영역입니다. ‘인간력’ 중의
최고의 인간력은 바로 ‘예배하는 인간’입니다.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영과 진리로 예배할지니라”
(요4:24)
   
스가랴 4장 6절
 
만군의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이는 힘으로 되지 아니하며 능력으로 되지 아니하고 오직 나의 영으로 되느니라
'Not by might nor by power, but by my Spirit,' says the LORD Almighty.
   
영광 돌리게 하시기 위해서
영은 하나님과 나와 교제하는 그러한 하나님의 축복 된 장소인데
, 하나님이 우리를 영적인 존재로 만드셔서
 하나님과 교제하면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살도록 만들어주신 것이다. 
그런데 왜 만들었느냐?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영광 돌리게 하시기 위해서이다
 이사야 43장 7절에는.
“내 이름으로 불려지는 모든 자 
곧 내가 내 영광을 위하여 창조한 자를 오게 하라 
그를 내가 지었고 그를 내가 만들었느니라”하셨다.
-작자 미상의 글 ‘너는 내 것이라에서’에서-


 내 영광을 위하여 창조한 자를 오게 하라! 
그래서 우리가 예수 믿고 나서 하나님의 자녀가 된 다음
, 내 삶의 목적이 무엇인지를 분명하게 깨달아 알아서 
하나님 영광을 위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
 나의 나 된 것은 주님의 은혜입니다.
 오직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사는 것이 
우리의 인생의 궁극의 목표입니다.
‘내가 무엇을 하든지, 내가 어디서 있든지,
 나의 삶을 통하여 주님이 영광을 받으시기 원합니다’가
우리의 고백이 될 수 있어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