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도니야를 죽이라 왕상 2:19-25
08월 18일 (수)
아도니야를 죽이라 왕상 2:19-25 19. 밧세바가 이에 아도니야를 위하여 말하려고 솔로몬 왕에게 이르니 왕이 일어나 영접하여 절한 후에 다시 왕좌에 앉고 그의 어머니를 위하여 자리를 베푸니 그가 그의 오른쪽에 앉는지라 20. 밧세바가 이르되 내가 한 가지 작은 일로 왕께 구하오니 내 청을 거절하지 마소서 왕이 대답하되 내 어머니여 구하소서 내가 어머니의 청을 거절하지 아니하리이다 21. 이르되 청하건대 수넴 여자 아비삭을 아도니야에게 주어 아내로 삼게 하소서 22. 솔로몬 왕이 그의 어머니에게 대답하여 이르되 어찌하여 아도니야를 위하여 수넴 여자 아비삭을 구하시나이까 그는 나의 형이오니 그를 위하여 왕권도 구하옵소서 그뿐 아니라 제사장 아비아달과 스루야의 아들 요압을 위해서도 구하옵소서 하고 23. 여호와를 두고 맹세하여 이르되 아도니야가 이런 말을 하였은즉 그의 생명을 잃지 아니하면 하나님은 내게 벌 위에 벌을 내리심이 마땅하니이다 24. 그러므로 이제 나를 세워 내 아버지 다윗의 왕위에 오르게 하시고 허락하신 말씀대로 나를 위하여 집을 세우신 여호와께서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하노니 아도니야는 오늘 죽임을 당하리라 하고 25. 여호야다의 아들 브나야를 보내매 그가 아도니야를 쳐서 죽였더라 <밧세바가 이르되 내가 한 가지 작은 일로 왕께 구하오니 내 청을 거절하지 마소서 왕이 대답하되 내 어머니여 구하소서 내가 어머니의 청을 거절하지 아니하리이다>(20절). 밧세바가 아비삭 일을 <작은 일>이라고 한 걸 보면 아도니야의 그 부탁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여전히 잘 모르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밧세바는 그 일을 단순히 <애정 문제> 쯤으로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솔로몬의 판단은 완전히 달랐습니다. 당시의 관례로는 선왕의 후궁을 계승하는 것은 곧 그 왕좌를 계승하는 행위의 한 상징이었기 때문입니다(삼하 3:7, 12:8, 16:20-22). 따라서 만일 아도니야의 뜻대로만 됐다면 그는 다시 왕권 회복의 발판을 마련하는 것이었고, 또 아도니야의 추종세력들은 큰 힘을 얻는 계기가 될 수 있었을 것입니다. 솔로몬은 어머니 밧세바로부터 그 말을 듣는 순간 이전에 아도니야의 반역을 용서해주며 <악한 것이 보이면 죽으리라>고 한 자신의 경고가 떠올랐을 것입니다(1:52). 솔로몬은 격노했습니다. 어머니에 대해 다정다감했던 분위기가 한순간 깨어지고 말았습니다. 그것은 아도니야의 <한 가지 소원> 저변에 깔려 있는 역모의 흉계를 간파했기 때문이고, 또 그 사실도 모르고 중개를 자처하고 나선 어머니의 경솔함이 몹시 마음을 상하게 했기 때문입니다. <솔로몬 왕이 그의 어머니에게 대답하여 이르되 어찌하여 아도니야를 위하여 수넴 여자 아비삭을 구하시나이까 그는 나의 형이오니 그를 위하여 왕권도 구하옵소서>(22절). 결국 솔로몬은 <여호야다의 아들 브나야를 보내매 그가 아도니야를 쳐서 죽였더라>(25절)고 했습니다. 왕의 친위대장 브나야가 나서 직접 처단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단순히 왕권 도전 세력들의 제거라는 정치적 차원의 사건으로만 볼 것이 아니라 신정 왕국의 확립과 강화라는 측면에서 신적 공의의 실현이라고 봐야 옳을 것입니다. 따라서 솔로몬이 자기 형인 아도니야를 처형한 사건은 불행이지만 그러나 결과적으로는 정당하고 옳았다는 것입니다. 아도니야야말로 하나님의 뜻인 솔로몬의 왕권에 대한 잠재적 반란 세력이었기 때문입니다. -아도니야의 <한 가지 소원>(16절)이 밧세바에게 이르러서는 <한 가지 작은 일>(20절)로 바뀌었습니다.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본문 24절의 <솔로몬의 맹세>와 1:29의 <다윗의 맹세>를 비교해보십시오. -<여호야다의 아들 브나야>(25절)에 대해 아는 대로 적어보십시오. 주님, 아도니야는 결국 죽었습니다. 권력에 대한 야심을 포기하지 못하고 계속 기회를 엿보며 흉계를 꾸미려다 솔로몬의 진노를 샀습니다. 이미 <악한 것이 보이면 죽으리라>(52절)하고 경고했음에도 경거망동하다 마침내 브나야의 칼에 목숨을 잃었습니다. 아도니야의 탐욕과 경솔함과 무모함을 보며 오늘 저희의 모습을 살피게 하시고, 더욱 겸손과 내려놓음과 늘 약속과 다짐에 신실한 모습으로 사는 성도들 되게 해주시옵소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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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言)은 바람에 날린 깃털 같으니 “날아가 버린 깃털을 다시 주워 담지 못하듯이, 당신이 저지른 악행을 진심으로 바로잡고 싶어도 당신이 내뱉는 말로 입힌 피해를 되돌리기란 불가능합니다.” 조셉 텔루슈킨 저(著) 이주만 역(譯) 《힘이 되는 말 독이 되는 말》 (마일스톤, 19쪽) 중에 나오는 구절입니다. 세계적인 유대인 랍비이자 작가인 조셉 텔러슈킨은 ‘말의 중요성’을 말하면서 어느 랍비가 겪은 이야기를 전해줍니다. 한 사내가 랍비를 험담하고 다녔습니다. 어느 날 가책을 느껴 랍비를 찾아가 용서를 빌었습니다. 이에 랍비는 사내에게 집으로 돌아가서 베 개를 찢어 안에 든 깃털을 전부 바람에 날려 보내고 난 뒤 다시 찾아오 라고 했습니다. 그는 랍비가 시킨 대로 하고는 랍비를 찾아갔습니다. “이제 저는 용서받은 건가요?” 랍비가 대답했습니다. “아직 한 가지 일이 남았습니다. 가서 깃털들을 전부 주워 오십시오” 이에 사내가 볼멘소리를 했습니다. “그건 불가능해요. 바람에 죄다 날아가 버렸거든요” “그렇습니다. 날아가 버린 깃털을 다시 주워 담지 못하듯이, 당신이 저지른 악행을 진심으로 바로잡고 싶어도 당신이 내뱉는 말로 입힌 피 해를 되돌리기란 불가능합니다...” 칼은 도로 칼집에 꽂기가 쉽지만, 날아간 화살은 되돌릴 수가 없습니다. 바람에 날린 깃털을 모두 모아 올 수는 없습니다. 말이 그러합니다. 다시 돌이킬 수 없기에 늘 신중해야 하고, 사람을 살리는 말을 해야 합니다. “선한 말은 꿀송이 같아서 마음에 달고 뼈에 양약이 되느니라.” (잠16:2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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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고보서 5장13절 너희 중에 고난 당하는 자가 있느냐 그는 기도할 것이요 즐거워하는 자가 있느냐 그는 찬송할지니라 Is any one of you in trouble? He should pray. Is anyone happy? Let him sing songs of praise.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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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전한 사랑 후치자와 노에는 여성들만 일깨운 선각자가 아니었다. 그녀는 조선의 여성들과 나아가 조선의 모든 기독교인을 일깨우고 있다. 새로운 삶에 대한 도전과 현실에 굴하지 않는 자세는 이 땅에 살아가는 교회공동체가 지향해야 하는 지점이다. 저항 공동체로서의 교회는 당대 사회와 세상에 대해 맹목적인 삶이 아니라 역사 가운데 자기 과제와 사명을 분명하게 세워나가야 한다. 사람의 눈을 열어주고 의식을 바꾸어주는 교육은 한 나라를 온전히 세우는 일이다. -나마쿠라 사토시의 [사랑으로 잇다] 중에서- 한 일본인이 우리를 위해 일생을 바친 이야기는 감동적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사랑이 얼마나 위대하고 큰지를 배웁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미움이 아니라 희생이며 주는 것입니다. 오늘도 교육사역을 통해 누군가의 눈을 열어주고 의식을 새롭게 하는 일은 위대합니다. 오직 하나님의 말씀이 전하여지면 변하여 새사람이 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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