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8월 14일 (금)
엘리의 두 아들 (삼상 2:12-17) 12. 엘리의 아들들은 행실이 나빠 여호와를 알지 못하더라
엘리의 두 아들에 대한 본문의 기록이 참 충격적입니다. <엘리의 아들들은 행실이 나빠 여호와를 알지 못하더라>(12). 엘리가 나이 많아 제사장의 직무를 제대로 감당하기가 어려워지자 그의 두 아들인 제사장 홉니와 비느하스가 이를 대신 했습니다. 그런데 그들에 대한 성경의 평가가 <행실이 나빠 여호와를 알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제사장에 대한 평가라고는 믿기 어려운 표현입니다. <여호와를 알지 못했다>는 말씀은 <여호와를 존경하는 마음이 없었다> 혹은 <여호와에 대한 관심이 없었다>는 뜻입니다.
그 두 아들의 여호와께 대한 무관심은 여호와께 드리는 제사에서도 그대로 드러납니다. 그들은 여호와의 제사를 멸시했습니다. <이 소년들의 죄가 여호와 앞에 심히 큼은 그들이 여호와의 제사를 멸시함이었더라>(17절). <멸시하다>는 말에는 <법을 무시하다>는 뜻도 있습니다. 홉니와 비느하스는 여호와께서 정하신 제사의 규례를 무시한 채 오직 자신들의 욕심을 따름으로 여호와의 제사를 멸시한 것입니다.
그 둘의 악행은 거기서 그치지 않았습니다. 22절은 그들의 죄를 더욱 적나라하게 고발하고 있습니다. 심지어 <... 회막문에서 수종 드는 여인들과 동침하였다>고 합니다. 백성들이 쉽게 접근할 수 없는 그 거룩한 곳에서 홉니와 비느하스는 자신들의 은밀한 욕망을 채웠던 것입니다. 홉니와 비느하스에게는 종교도 한낱 자신의 욕망을 충족시키는 도구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엘리의 두 아들은 그 시대를 반영하는 인물들이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들을 멸하시고 여호와를 위한 제사장을 새롭게 일으키시기로 계획하셨습니다. <내가 나를 위하여 충실한 제사장을 일으키리니 그 사람은 내 마음, 내 뜻대로 행할 것이라>(35절).
-엘리의 두 아들이 <여호와를 알지 못하더라>(12절)한 말씀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엘리의 두 아들을 보며 믿는 부모들이 깨달아야 할 중요한 교훈이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부모들의 무책임이 자녀들을 점점 더 불신자, 불량자로 만들어 가고 있는 현실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주님, 엘리의 두 아들 홉니와 비느하스 얘기는 오늘 저희 모두에게 큰 충격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들은 제사장 신분이었음에도 행실이 나빴고 여호와도 알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악하게 굴며 여호와의 제사를 멸시하며 하나님의 영광을 욕되게 했습니다. 부모된 자들의 자녀들의 신앙교육과 훈련에 더 많은 관심과 책임을 느끼게 해주시옵소서. 홉니와 비느하스의 비극이 이 시대 믿는 자들의 자녀 교육에 큰 깨달음이 되게 해주시옵소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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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과 감성을 파는 사회
“다음에 도래할 사회는 ‘드림 소사이어티’이다. 이는 기업, 지역 사회, 개인이 데이터나 정보가 아니라 ‘이야기’를 바탕으로 성공하게 되는 새로운 사회이다.”
롤프 엔센 저(著) 서정환 역(譯) 《드림 소사이어티》 (리드리드출판, 12쪽) 중에 나오는 구절입니다. 덴마크의 미래학자 롤프 옌센교수는 정보화 시대 이후의 도래할 시 대를 ‘드림 소사이어티’라고 불렀습니다. 지금이 바로 그 시대입니 다. 드림 소사이어티는 꿈과 감성 그리고 이야기가 주도하는 사회입니 다. 즉 감성 있는 이야기를 잘 만드는 사람이 세상에 영향력을 미치는 시대라는 의미로, 드림 소사이어티의 소비자들은 이제 ‘상품’을 사지 않고, 그 상품 속에 들어 있는 ‘꿈과 이야기’를 산다고 합니다. 그리 하여 《드림 소사이어티》의 부제가 바로 “꿈과 감성을 파는 사회” 입니다. 미국의 영문학자 존 닐(John Niels)은 1999년 ‘이야기하는 인간’ 즉 ‘호모 나랜스(Homo-narans)’ 라는 말을 처음 사용하였습니다. 인간은 이야기하고 싶고, 이야기를 듣고 싶어하는 본능을 가지고 있다는 주장 입니다. 오늘날은 한 단계 더 나아가 ‘디지털 호모 나랜스’가 도래했 습니다. SNS를 통해 수많은 자신들의 이야기 꽃을 피우고 있습니다. 자신만의 독특한 이야기가 있는 사람은 행복합니다. 무엇보다도 하나 님과 동행한 이야기가 있는 사람은 제일 행복합니다.
“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하더니 하나님이 그를 데려가시므로 세상에 있지 아니하였더라.” (창5:2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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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베소서 6:17
구원의 투구와 성령의 검 곧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라 Take the helmet of salvation and the sword of the Spirit, which is the word of God.(NIV)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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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신 헌신이란 몸과 마음을 바쳐 있는 힘을 다하는 것이다. 이 말을 새겨보면 부지런하고, 진실하며, 성실하고, 참아내며, 충성한다는 단어를 생각나게 한다. 이런 단어들이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성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인 성령의 열매와 비슷한 것은 부부의 사랑에서 나오는 깊은 헌신이 성령이 충만한데서 나오는 것이기 때문이리라 -신언혁의 [사랑, 다시 한 번] 중에서-
헌신은 사랑입니다. 부부가 서로 헌신한다는 것은 충성을 다하는 것입니다. 모든 것을 이기고 견디어 한 몸을 이룬 가정을 세워갈 때, 부부는 서로에 대한 예의와 헌신을 다짐하였습니다. 이 일을 위해 가정은 늘 주님의 주권가운데 있어야 하며, 늘 주의 성령이 운행하시도록 깨어 기도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부부를 통해 온전한 그리스도인이 되게 하시는 훈련을 시키십니다. |
08월 13일 (목)
가난하게도 부하게도 (삼상 2:6-11) 6. 여호와는 죽이기도 하시고 살리기도 하시며 스올에 내리게도 하시고 거기에서 올리기도 하시는도다
<여호와는 죽이기도 하시고 살게도 하시며 스올에 내리게도 하시고 거기에서 올리기도 하시는 도다>(6절). 이같은 수사학적 표현방식은 동의적 내용을 반복 언급함으로써 그 본래의 의미를 더욱 강조하기 위한 것입니다. 이런 형태의 대구법 표현 양식은 히브리 시에 흔히 나타납니다(시 1:1, 2:1). 이어지는 7절도 마찬가집니다. <여호와는 가난하게도 하시고 부하게도 하시며 낮추기도 하시고 높이기도 하시는 도다> 이는 다 인간의 생사화복, 빈부귀천의 문제가 전적으로 하나님의 절대 주권에 맡겨져 있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한나는 하나님께서 그렇게 이 세상에 대한 당신의 절대적 주권을 행사하실 수 있는 근거까지를 명확히 제시합니다. <... 땅의 기둥들은 여호와의 것이라 여호와께서 세계를 그것들 위에 세우셨도다>(8절). 하나님은 이 세상의 기초를 놓으셨을 뿐 아니라 그 위에 만물을 창조하시고 조성하신 분이십니다. 또한 그 만물을 유지, 운행, 섭리하시는 분이시기도 합니다. 바울도 하나님의 그런 절대주권 사상을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롬 11:36).
한나의 하나님의 절대주권에 대한 이 모든 진술은 자신의 생생한 체험에서 나온 고백이요 감사였습니다. 브닌나의 조롱과 치욕 가운데서 구원받은 자신의 은혜를 간증한 것입니다. <가난한 자를 진토에서 일으키시며 빈궁한 자를 거름더미에서 올리사 귀족들과 함께 앉게 하시며 영광의 자리를 차지하게 하시는도다>(8절).
세상은 여전히 나나님의 주권을 비웃지만 당신은 한나처럼 하나님의 절대주권을 시인하며 확신하며 고백하십시오. 그러면 하나님이 반드시 살리시고 올리시고 부하게 하시고 높이시는 은혜로 당신을 축복하사 <영광의 자리를 차지하게>하실 것입니다.
-당신은 하나님의 절대주권을 인정하시며 믿으십니까? -본문 6절에 나오는 <스올>에 대해 아는대로 적어 보십시오. -당신은 하나님이 <살리시고 진토에서 일으키심>을 체험 하신 적이 있습니까?
주님, 한나는 진심으로 하나님의 절대주권을 고백하며 찬양하며 감사했습니다. 자신이 그걸 실제 체험한 사람이었으므로 누구보다 확신에 넘쳤습니다. 그는 그야말로 스올에 내려갔다가 거기서 다시 올라온 사람이요 진토에 떨어졌다가 거기서 다시 세움을 받은 사람이었습니다. 부디 저희로 하여금 한나처럼 하나님의 절대주권을 믿으며 고백할 수 있게 해주시옵소서. 그야말로 영광의 자리에 앉게 하시는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을 경험할 수 있게 해주시옵소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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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다라
“과연 그럴까. 과연 그 미소 아래서 중생들의 온갖 번뇌가 사라져 버 리는 것일까? 부처가 신이 아니고 인간일진대 그렇게 태연자약한 얼 굴로 요지부동 침묵만 할 수 있을까? 지금 이 시간에도 숱한 중생들이 배고파서, 병들어서, 옥에 갇혀서, 권력과 금력 가진 자들에게 억눌려 서,신음하고 있는데…… 그렇게 빙그레 웃고만 있을 수 있을까?”
김성동 저(著) 《만다라》 65-66쪽) 중에 나오는 구절입니다. 소설 《만다라》는 소위 땡중인 지산과 진지한 수도승인 법운이 허위에 찬 세상 속에서 참다운 구도의 길을 찾는 내용입니다. 어느 날,지산이 나무토막을 깎아 부처상을 만들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법운이 보니 이제껏 보았던 부처와 너무 달랐습니다. 대자대비(大慈大悲) 한 부처의 모습이 아니라 세상의 온갖 번뇌에 시달려 이지러진 부처의 얼굴이었습니다. 놀라고 있는 법운에게 지산이 그 연유를 설명합니다. “적어도 석가가 인간이었고 인간을 위하여 이 세상에 나온 것이라면, 하나쯤 그리워하고 슬퍼하고 분노하는, 그리하여 팔만사천 번뇌에 싸여 고통스러워하는 모습의 불상이 있어야 할 게 아닌가 말이야? 함께 울고 함께 웃어야 하는 게 아닌가 말이야? 인간의 얼굴을 하고 있지 않은 부처를 그대는 사랑할 수 있다고 생각하나?...” (66쪽) 지산은 지금 부처를 묵상하는 것이 아니라 마치 예수님을 묵상하는 듯 합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묵상하면 손과 발에 못이 박히고, 가시관에 찔린 이마에는 피가 흐르고, 얼굴은 고통으로 일그러져 처참한 주님의 모습이 떠오릅니다. 바로 그 얼굴이 우리의 얼굴입니다. 버림받고 실 패하고 상처투성이인 사람들의 얼굴이 예수님의 얼굴입니다. 우리가 예수님께 위로를 받는 것은 그가 지닌 하늘의 능력 때문이기도 하지만, 우리를 치유하시기 위해 우리와 똑같은 상처와 고통을 당하신 그 사랑 이 더 큰 이유일 것입니다.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 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 (사53: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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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계시록 1:3
이 예언의 말씀을 읽는 자와 듣는 자와 그 가운데에 기록한 것을 지키는 자는 복이 있나니 때가 가까움이라 Blessed is the one who reads the words of this prophecy, and blessed are those who hear it and take to heart what is written in it, because the time is near.(NIV)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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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 교회 역시 도시 생활에서 찌든 때를 일주일에 한번 닦아 주고, 죽으면 가는 ‘더 좋은 세상’인 천국을 보장해 주는 도시의 종교 기관으로 전락했습니다. 종교 생활이 이처럼 도시의 필요에 맞춰 개조되자, 도시에서는 진정한 신앙생활이 어렵다는 패배의식이 싹텄습니다. 그 결과 일부는 신앙을 지키기 위해 배타적으로 고립되었고, 다른 일부는 세련된 혼합주의를 추구하면서도 진정한 신앙생활을 하는 양 자신을 속이고 있습니다. -김형국의 [도시의 하나님 나라] 중에서-
자신의 안전과 보호를 위해 사람들은 모였습니다. 그것이 도시의 기원입니다. 그것을 위해 도시마다 자신들을 지켜줄 신을 섬기기 시작하였고, 그곳에 종교가 세워졌습니다. 교회 역시 데살로니가, 고린도와 같은 도시에 생겼습니다. 그러나 도시는 점점 타락하여 더 이상 교회의 자리매김이 쉽지 않습니다. 더구나 사람들은 도시가 주는 부요함에 빠져 하나님을 멀리하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우상의 시작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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