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가가 그에게 이르되 네가 나와 함게 거주하니 나를 위하여 아버지와 제사장이 되라 내가 해마다 은 열과 의복 한 벌과 먹을 것을 주리라>(10절).
미가는 이를테면 지독한 실용주의자였습니다.
실용주의는 진리가 무엇인가 묻지 않습니다. 옳고 그른 것도 따지지 않습니다. 오로지 이 종교, 이 신앙이 내게 이익이 되느냐 그렇지 않으냐 에만 관심할 뿐입니다. 실용주의자는 신앙생활을 하면서도 절대 하나님의 뜻을 묻지 않습니다. 자기 집 앞마당에 교회를 세우는 일이 하나님의 뜻에 합당한지 아닌지도 고민하지 않습니다. 오직 자기가 편하면 그만이고, 자기에게 덕이 되면 그것으로 족합니다.
사사시대에는 하나님이 지정하신 예배처가 엄연히 따로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집이 실로에 있을 동안에 미가가 만든바 새긴 신상이 단 자손에게 있었더라>(18:31). 이렇듯 하나님의 집이 실로에 있었고, 실로는 당시 미가가 살고 있던 에브라임에서 그리 먼 곳도 아니었습니다.
그러니까 미가는 가까운 곳에 하나님의 집을 두고도 더 가까운 곳을 찾다 아예 자기 집 마당에 신당을 세우고 하나님이라며 신상을 만들어 안치하고 처음에는 자기 아들을, 나중에는 떠돌이 레위인을 제사장으로 세워 자기를 위해 하나님께 예배하게 한 것입니다.
그는 하나님 중심, 말씀 중심이 아닌 오직 자기 중심, 자신의 유익과 편의 중심으로 신앙생활을 했습니다. 요즘도 가장 문제가 되는 신앙생활의 행태가 바로 이 실용주의입니다. 물론 지금은 더 철저하고 극단적입니다.
하나님을 생각하고 이웃을 위하기보다 복음을 생각하고 교회의 덕을 고려하기보다 우선적으로 자기의 유익과 행복을 따져보고 그게 보장되지 않으면 언제든 떠나고 미련 없이 모든 걸 버립니다. 그래서 이제는 희생이니 헌신이니 십자가니 고난이니 사랑이니 하는 말이 거의 호소력이 없습니다. 설득력을 잃었습니다. 무조건 편리해야 하고, 쾌적해야 하고, 강요하지 않아야 하고 부담이 없어야 하고 이익이 돼야 합니다.
어쩌면 이런 실리주의, 편의주의, 실용주의가 이 시대 믿는 자들의 최대 난적인지도 모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