鶴山의 草幕舍廊房

Faith - Hymn

성경적 리더십(요한복음 1:35~42)

鶴山 徐 仁 2019. 7. 2. 12: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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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7월 02일 (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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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 본문 성경적 리더십(요한복음 1:35~42)

35. 또 이튿날 요한이 자기 제자 중 두 사람과 함께 섰다가

36. 예수께서 거니심을 보고 말하되 보라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

37. 두 제자가 그의 말을 듣고 예수를 따르거늘

38. 예수께서 돌이켜 그 따르는 것을 보시고 물어 이르시되 무엇을 구하느냐 이르되 랍비여 어디 계시오니이까 하니 (랍비는 번역하면 선생이라)

39. 예수께서 이르시되 와서 보라 그러므로 그들이 가서 계신 데를 보고 그 날 함께 거하니 때가 열 시쯤 되었더라

40. 요한의 말을 듣고 예수를 따르는 두 사람 중의 하나는 시몬 베드로의 형제 안드레라

41. 그가 먼저 자기의 형제 시몬을 찾아 말하되 우리가 메시야를 만났다 하고 (메시야는 번역하면 그리스도라)

42. 데리고 예수께로 오니 예수께서 보시고 이르시되 네가 요한의 아들 시몬이니 장차 게바라 하리라 하시니라 (게바는 번역하면 베드로라)

본문 해석

 성숙하고 책임있는 신앙의 리더는 한마디로 성경적인 리더십을 가지고 있는 사람입니다. 리더십이란 지도력 혹은 지도 스타일입니다. 어떤 사람은 이렇게 질문할지도 모릅니다. “겨우 일주일에 한번 교회 나오는 내가 무슨 리더가 될 수 있느냐?” 자기 자신을 지나치게 높일 필요도 없지만, 그렇다고 자신을 낮출 필요도 없습니다. 하나님은 믿는 자를 지도자로 세우셨습니다. 우리는 성경을 통해 어떤 리더십이 있는지를 살펴봅시다. 

 

  성경적인 리더십의 출발점은 이제 내가 누군가에게 내가 만나고 경험한 은혜를 나누고 그 사람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소개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소개의 리더십’이라고 부를 수 있습니다. 소개가 과연 리더십이 될 수 있을까요? 물론입니다. 리더십하면 대중 앞에 나아가 멋진 연설을 하는 것으로 보일 수도 있겠으나 거기에는 특별한 은사가 필요합니다. 하지만 소개는 간단하지만 중요합니다. 따라서 소개는 리더십의 출발점입니다. 

 

  예수님의 처음 제자들은 어디에서 왔는가에 대해 요한은 예수님의 처음 제자들이 세례요한에게서 왔다고 기록합니다(요1:35-38). 여기서 세례요한의 리더십에도 관심을 기울여야 합니다. ‘네 자신을 알라’는 소크라테스의 유명한 격언이 말해주듯 자기 주제를 아는 것은 그리 쉬운 것이 아닙니다. 더욱이 나보다 더 뛰어난 사람을 만났을 때 그를 인정해주고 그 사람에게 나의 모든 것을 넘겨준다는 것은 더더욱 힘든 일이며 어쩌면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일입니다. 그러나 세례요한은 자신이 예수님의 길을 예비하는 광야의 소리라는 소명을 기꺼이 받아들였고, 자신의 제자들 중 일부가 예수님에게 가는 것을 막지 않았습니다. 이것이야 말로 오늘날 한국의 모든 분야에서 받아들여야 하는 리더십이 아닐까요? 

 

  성경에서 안드레와 빌립은 베드로나 바울 같은 소위 ‘강력한 카리스마’를 보여주지는 않습니다. 안드레와 빌립은 세례요한의 제자로서 모두 소개의 리더십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안드레는 형제 베드로에게 주님을 소개했고, 빌립은 나다니엘을 주님께 데리고 왔습니다(요1:45). 안드레는 오병이어의 기적에서도 작지만 아주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한 아이가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지고 있는 것을 보고 그것을 주님께 소개했습니다. 만일 안드레의 소개가 없었다면 주님의 능력이 아무리 많고 위대하다 해도 기적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입니다. 이처럼 소개는 작지만 그 안에는 무한한 잠재력을 가지고 있으며 나중에 엄청난 위력을 발휘합니다. 소개는 무관심을 극복하고 적극적으로 타인과 소통하려는 행위입니다. 무관심은 그리스도인의 가장 무서운 적입니다. 관심이 없으면 소개는커녕 대화도 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소개는 리더십의 출발입니다. 리더는 무관심하게 자기 할 것만 하는 그런 사람이 아닙니다. 관심을 가지고 적극적으로 누군가에게 복음과 교회를 소개하는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만이 참으로 하나님이 원하고 시대가 필요로 하는 리더가 될 수 있습니다. 

결단과 적용

- 안드레와 빌립은 어떤 역할을 하였으며, 어떤 리더십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나요?

- 나는 먼저 관심을 가지고 소개하는 사람인가, 아니면 무관심한 사람인가요?

- 주님과 교회를 소개할 수 있는 리더십을 발휘하기 위하여 기도하십시다. 

오늘의 기도

저희를 택하시고 부르신 하나님, 오늘 이렇게 주님 안에서 행복한 삶을 살아가는 것은 누군가의 기도와 인도하심 때문임을 믿습니다. 이제 내가 만난 주님을 이웃에게 소개하는 영적 지도자로서의 삶을 살기 원합니다. 구원의 확신과 담대한 믿음과 용기를 주셔서 이 사명 주님오시는 그날까지 잘 감당하게 하시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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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학 나눔

“플로베르는 말한다,‘나는 악착같이 문장들을 갈고 깎는다.’ 

소설을 이루는 가장 기초적인 단위는 문장이다(중략).  

훌륭한 소설은 훌륭한 문장으로부터 나온다.”장석주 저(著) 

《장석주의 소설 창작 특강》 (들녘, 155쪽) 중에 나오는 구절입니다. 

한 작가가 있었습니다. 화창한 아침에 친구들이 찾아와 소풍을 가자고 했습니다.  

그러자 그 작가는 작품을 써야 하기 때문에 갈 수가 없다고 했습니다.  

할 수 없이 친구들만 소풍을 갔다가 돌아왔습니다. 

그 작가는 일을 많이 해서 기분이 좋다고 했습니다.  

친구들은 작품을 얼마나 썼는가 보여달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작가가 보여준 원고는 그들이 소풍 가기 전 본 것과 달라진 것이 없었습니다.  

도대체 무슨 일을 했느냐고 묻자 작가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종일토록 쉽표(,)를 쌍반점(;)으로 바꿨다가 오늘 다시 쉼표로 바꿨다네.  

정말 열심히 일했네...”《보바리 부인》의 작가 

귀스타브 플로베르(Gustave Flaubert)의 일화입니다.   

“나는 악착 같이 문장들을 갈고 깎는다.”

그의 위대한 작품들은 쉼표 하나도 허투루 찍지 않는 

치밀함과 정밀함 속에서 탄생한 것입니다. 

이것이 프로 정신입니다. 예수님에게는 야고보서를 쓴 야고보라는 동생이 있습니다.  

야고보는 많은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있는 형 예수를 보며 

미쳤다고 생각하고 붙잡으러 간 적도 있습니다(막3:21).  

그러던 동생 야고보가 변하였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체험한 것입니다(고전15:7).  

야고보는  “주 예수 그리스도” 라고 고백하며 자신을  

“하나님이신 주 예수 그리스도의 종” 이라고 소개했습니다.  

그는 초대교회의 중요한 지도자가 되었습니다. 

야고보가 죽은 후 장례를 지내기 위해 그의 시신을 

수습하는 과정에서 사람들은 깜짝 놀랐다고 합니다.  

그가 너무 많은 시간 무릎을 꿇고 기도를 해서 무릎이 낙타의 무릎과 같이 된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그 후 야고보는 ‘낙타무릎’(camel knees)으로 불려 지게 되었습니다.

밤낮으로 무릎 꿇고 기도하다가 낙타 무릎같이 된 야고보. 

그리스도인은 무릎에 붙은 굳은 살이 그 프로(?) 신앙임의 표식일 것입니다. 

기독 메시지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의 종 야고보는 

흩어져 있는 열두 지파에게 문안하노라.” (약1:1)

그림 큐티더 보기
디모데후서 1장 3절
고린도전서 15:10

내가 밤낮 간구하는 가운데 쉬지 않고 너를 생각하여 청결한 양심으로 조상적부터 섬겨 오는 하나님께 감사하고 

I thank God, whom I serve, as my forefathers did, with a clear conscience, as night and day I constantly remember you in my prayers. 

도서 큐티더 보기
그리스도인의 옛 성품과 새 성품

그리스도인의 마음속에는 두 성품이 있다고 성경은 말씀한다.

 하나는 옛 성품인데

 내 육신의 소욕과 주관에 따라 살려고 하는 마음이다. 

또 하나는 자기의 의로는 구원받을 수 없고

 의를 이룰 수 없다는 것을 고백하며 전적으로

 자기를 포기하고 십자가를 붙들 때 위로부터 부어지는 

새로운 은혜의 그리스도인 닮은 성품이 있다.

 이 두 성품은 한마디로 공존불가이다. 

 예수님은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영으로 난 것은 영이라'고 말씀하셨다. 

육은 육, 영은 영,. 양자 관계 속에 엄격한 단절이 있음을 말씀한다.

 육신이 발전하고 개선되고 수양을 해서

 절대로 영이 되는 것이 아니라는 말씀이다.

- 이천수 목사의 ‘충만함을 누리는 비결’에서- 

 

지식을 통하여, 철학적인 깨달음을 통하여 

진리에 도달하고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자 하지만,

 그래봤자 그건 다 육적인 일에 불과한 것입니다. 

내 인격을 수양하고 도를 갈고 닦아서

 해탈의 경지에 이르러서 의를 이루려고 합니다만

 그것도 별수 없이 육에 속한 것입니다. 

그것은 다 인간의 자기한계 내에서 이루어지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자기의 각성을 통하여, 노력과 선행을 통하여 

 구원받으려고 노력을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 안에서 거듭난다고 하는 것은 

옛 성품의 개선이 아닙니다. 

 전적으로 새로운 것입니다. 

 육신의 생각은 그것이 아무리 선하다 할지라도 

하나님의 법과 일치하지 않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