鶴山의 草幕舍廊房

Faith - Hymn

복(신 28:1-6)

鶴山 徐 仁 2019. 3. 1. 10: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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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종소리 - 365일 하나님과 행복한 삶의 동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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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3월 01일 (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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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 본문 복(신 28:1-6)

1. 네가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삼가 듣고 내가 오늘날 네게 명하는 그 모든 명령을 지켜 행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를 세계 모든 민족 위에 뛰어나게 하실 것이라
2. 네가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순종하면 이 모든 복이 네게 임하며 네게 미치리니
3. 성읍에서도 복을 받고 들에서도 복을 받을 것이며
4. 네 몸의 소생과 네 토지의 소산과 네 짐승의 새끼와 우양의 새끼가 복을 받을 것이며
5. 네 광주리와 떡반죽 그릇이 복을 받을 것이며
6. 네가 들어와도 복을 받고 나가도 복을 받을 것이니라

본문 해석

<네가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청종하면 이 모든 복이 네게 임하며 네게 이르리니>(2절).

성경은 <복>(베라카)에 관해 언제나 두 가지 차원을 말씀합니다. 

첫째는 물질적이고 현세적 차원의 복이고, 둘째는 보다 영적이고 내세적 차원의 복입니다. 

전자가 상대적이며 한시적인 복이라면 후자는 근원적이고도 절대적이며 영원한 복입니다. 

그런데 구약시대에는 주로 복 개념의 외형적이고 물질적이고 현세적인 측면이 강조되었던 반면 신약시대에는 보다 내적이고 영적인 측면이 강조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복에 대한 성경의 근본 개념은 신구약이 서로 다르지 않습니다.

 즉 참된 복이란 인간이 추구하고 노력함으로써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지는 은혜로 인간의 하나님 말씀에 대한 순종에서 비롯된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성경이 말씀하는 복이란 단순히 하나님께서 인간들에게 베푸시는 어떤 유익을 넘어 하나님 자신이 바로 진정한 복의 근원이요, 복 그 자체라는 것입니다(창 15:1, 요 15:5). 

따라서 말씀에 대한 인간의 순종이란 복을 받기 위한 수단 이전에 하나님께서 우리의 원초적인 복이 되어주신 데 대한 감사와 응답이요 도리라는 것입니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성도들이 추구해야 할 참된 복은 육적이고도 현세적인 복보다는 오히려 영적이고도 내세적인 복이 되어야 마땅할 것입니다. 

 

주님이 가르치시고 선포하신 산상수훈의 팔복도 이와 결코 다르지 않습니다(마 5:3-12). 

그러므로 성도들은 물질적이고도 현세적인 복은 하나님의 주권적인 뜻에 맡기고 하루하루 주님과의 올바른 관계를 맺으며 오직 말씀에 청종하는 삶에 최선을 다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면 <모든 복이 네게 임한다>(2절)고 하셨고, <성읍에서도 들에서도 복을 받고>(3절), <네가 들어와도 나가도 복을 받을 것이라>(6절)고 하셨습니다. 

물질적으로도 영적으로도, 현세에서도 내세에서도 다 복된 성도가 되시길 빕니다.

결단과 적용

-당신은 어떤 <복>을 바라십니까? 

-<세계 모든 민족 위에 뛰어난>(1절) 복을 받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당신이 이해하는 <복>의 참된 의미를 적어 보십시오.

오늘의 기도

주님, 그렇습니다. 

저희에게는 하나님의 존재 자체, 주님의 존재 그 자체가 최상의 복이요 더 바랄 게 없는 복의 전부입니다. 

그럼에도 그 위대한 축복의 사실에 만족하거나 감사하지 못하고 자주 실망하고 불평하고 좌절하는 자신의 모습을 보곤합니다. 

저희의 어리석음과 헛된 탐욕을 용서하사 참된 축복의 의미부터 바르게 깨닫게 해 주시옵소서. 

성경이 말씀하는 <복>의 진정한 뜻부터 마음에 깊이 새기게 해 주시옵소서. 

인문학 큐티더 보기
타인을 이해한다는 것의 의미
인문학 나눔

“‘이해’란 타인 안으로 들어가 그의 내면과 만나고, 영혼을 훤히 

들여다 보는 일이 아니라,  타인의 몸 바깥에 선 자신의 무지를 겸손

하게 인정하고,  그 차이를 통렬하게 실감해나가는 과정일지 몰랐다.”

 

김애란 외 11인 공저(共著) 「눈먼 자들의 국가」 (문학동네, 18쪽) 

중에 나오는 구절입니다.

소크라테스로 인해 유명해진 경구  “너 자신을 알라”는  “나는 내가 

무식하다는 것을 안다” 라는 의미와 같습니다.   소크라테스가 보기에 

많은 사람들은 자신이 무식하다는 것을 모르는 무지에 빠져 있었습니다. 

그런 사람들과 소크라테스 자신과의 차이는  “나는 내가 무식하다는 

것을 안다” 라고 했던 겁니다. 

한 사람을 이해한다는 것은 그 사람의 영혼과 내면을 모두 들여다 

다는 의미가 아닐 것입니다.  사르트르가 “타인은 지옥”이라고 했듯이 

타인을 온전히 이해한다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사람 속은 천 길 

물 속이라’고 했듯이,사람마다 온갖 복잡 미묘한 세계를 마음속에 

니고 있습니다.  자기 자신도 자신을 모르는 경우가 태반입니다.  

“나는 그를 잘 모른다.  그와 나는 차이가 있다” 는 것을 체득해 가면

서,  그를 받아들이는 과정을 가리켜 ‘타인을 이해해 간다’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나를 나보다 더 잘 알고 나의 행복의 길을 온전히 알고 있는 분은 하나

님이십니다.  또한 그 사람을 잘 알고 그 사람의 행복의 길을 온전히 

알고 계신 분도 하나님이십니다.  따라서 나와 타인이 하나님 안에 

있을 때,  모든 가능성의 시작입니다. 

기독 메시지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이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

(엡4:3)

그림 큐티더 보기
열왕기상 9장 3절
고린도전서 15:10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네 기도와 네가 내 앞에서 간구한 바를 내가 들었은즉 나는 네가 건축한 이 성전을 거룩하게 구별하여 내 이름을 영원히 그 곳에 두며 내 눈길과 내 마음이 항상 거기에 있으리니 The LORD said to him: "I have heard the prayer and plea you have made before me; I have consecrated this temple, which you have built, by putting my Name there forever. My eyes and my heart will always be there. 

도서 큐티더 보기
고통의 터널

기독교는 악은 엄연한 삶의 현실이라고 봅니다. 

고통을 고통으로 보고, 아픔을 겪어서 

고통의 터널을 관통해야 한다고 가르칩니다. 

그것을 관통하는 과정에서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임재가 필요하고 

또한 사랑하는 사람들의 마음이 필요합니다. 

그렇게 하여 고통을 겪어 내야만 합니다.

 악의 현실을 맞닥뜨린 사람은 불가피하게 ‘왜?’라고 질문하게 됩니다. 

하지만 그것은 대답을 알고 싶어서 하는 질문이 아닙니다. 

예상치 못한 악의 현실 앞에서 숨이 막혀 내지르는 비명이거나 

어이가 없어서 토해내는 넋두리입니다.

-김영봉의 [사랑하는 사람은 누구나 아프다] 중에서-

 

우리는 고통을 만날 때마다 악의 역사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더더욱 악과의 한판 승부를 치러야 합니다. 

심지어 악은 우리를 유혹하여 넘어뜨리려고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지혜가 필요합니다. 

악으로부터 오는 고통의 자리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도우심을 간절히 찾습니다. 

선하신 하나님은 모든 것을 선으로 바꾸시는 능력이 있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