鶴山의 草幕舍廊房

Faith - Hymn

소에게 망을 씌우지 말라(신 25:1-4)

鶴山 徐 仁 2019. 1. 31. 10: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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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1월 31일 (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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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 본문 소에게 망을 씌우지 말라(신 25:1-4)

1. 사람과 사람 사이에 시비가 생겨서 재판을 청하거든 재판장은 그들을 재판하여 의인은 의롭다 하고 악인은 정죄할 것이며
2. 악인에게 태형이 합당하거든 재판장은 그를 엎드리게 하고 그 죄의 경중대로 여수히 자기 앞에서 때리게 하라
3. 사십까지는 때리려니와 그것을 넘기지는 못할찌니 만일 그것을 넘겨 과다히 때리면 네가 네 형제로 천히 여김을 받게 할까 하노라
4. 곡식 떠는 소의 입에 망을 씌우지 말찌니라

본문 해석

<사람들 사이에 시비가 생겨 재판을 청하면 재판장은 그들을 재판하여 의인은 의롭다 하고 악인은 정죄할 것이며>(1절).

성경에 의하면 이미 구약시대 때도 요즘 우리 사회 <사법 농단>, <재판 거래> 같은 법조비리와 부정이 있었고, 재판관을 돈으로 매수하는 불법한 사례들이 적지 않았습니다(16:9, 잠17:23, 사1:23). 그것은 예나 지금이나 사회의 선악 기준을 무너뜨리는 범죄이자 하나님의 공의에 위배되는 악한 행위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재판관이 오직 사심 없이 공의에 따라 최선의 양심적인 판결을 내리라고 강조합니다(출 23:6-8). 

<...그의 죄에 따라 수를 맞추어 때리게 하라 사십까지는 때리려니와 ... 그것을 넘겨 때리면 네가 네 형제를 경히 여기는 것이 될까 하노라>(2-3절).

이는 법집행을 보다 신중하고 엄격히 하라는 말씀입니다. 매 한 대도 원칙과 규정에 따라 때려야지 임의로 하거나 감정적으로 한다면 결코 하나님 앞에서 그 책임을 면할 수 없게 된다는 경고입니다. 다시 말해 <유전무죄 무전유죄> 같은 재판 모순과 비리는 결코 있어서는 안 된다는 당부십니다. 

 

<곡식 떠는 소에게 망을 씌우지 말지니라>(4절).

이스라엘 사람들의 타작법은 대개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큰 맷돌을 당나귀나 소로 하여금 돌리게 하는 방식과 다른 하나는 평평한 타작마당에 곡식단을 펴놓고 막대기로 두들겨 곡식을 떠는 방식입니다(삿 6:11). 그런데 소를 이용하는 경우 흔히 소가 그 곡식 낟알을 주워 먹기 마련인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소의 입에 망을 씌우지 말라고 합니다. 비록 짐승이지만 그 수고의 대가는 치러야 옳다는 것입니다. 주님이 <일꾼이 저 먹을 것을 받는 것은 마땅함이라>(마 10:10)고 하신 것이나 바울이 <사역자들이 교회로부터 응분의 대우를 받는 것은 당연하다>(고전 9:9-14, 딤전 5:18)고 한 것도 다 이런 보상의 원칙에 근거한 말씀이었습니다. 일찍이 하나님께서 주신 공동체를 위한 이런 규범과 규례들의 근본정신이 오늘날에 와서는 어떻게 해석되고 또 적용되고 있는지에 대해 다 같이 한번쯤은 깊이 생각해 보고 고민해 볼 일입니다. 

결단과 적용

-요즘 법원의 재판의 공정성에 대해 당신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사법부가 공의롭지 못하다면 그 원인이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곡식을 떠는 소에게 망을 씌우지 말라>는 말씀과 관련해 교회 유급 사역자들에 대한 당신의 견해는?

오늘의 기도

주님, 하나님은 재판을 공의롭게 하고, 결코 사사로운 감정으로 <네 형제를 경히 여기지 말라>고 당부하고 계시지만 현실은 언제나 그렇지 못한 것 같습니다. 예나 지금이나 재판 비리, 재판 거래 같은 부정이 끊이질 않고, 이 시대에도 그런 모순은 여전히 계속되고 있습니다. 부디 재판관들이 재판관을 재판하실 최후의 재판관이신 하나님을 두려워하게 하시옵소서. 우리 사회의 모든 약자들이 법의 보호를 받을지언정 법의 희생자가 되지 않도록 지켜주시옵소서. 

인문학 큐티더 보기
상처를 주는 존재
인문학 나눔

“우리는 평소에 아무렇지도 않게 이런 말을 한다. ‘역에서 내리자마자 

골목이 보일거예요.  그 골목 막다른 곳에 집이 있어요.  그 집을 끼고 

오른쪽으로 돌아서 두 번째로 보이는 하얗고 큰 집이 우리 집이예요.’

언뜻 보기에 이 설명에는 특별한 문제가 없다. 하지만 집을 갖고 싶어도 

갖지 못하는 사람들(중략),  비좁은 아파트에서 시어머니와 얼굴을 맞

대며 아슬아슬하게 지내는 여자에겐 견디기 힘든 한마디가 된다.”

 

소노 아야코 저(著) 김욱 역(譯) 「약간의 거리를 둔다」(책 읽는 고양

이, 107쪽) 중에 나오는 구절입니다.

우리는 흔히 이웃이 내 손톱 밑에 찌른 작은 가시는 늘 기억하면서도,

내가 이웃에게 청룡도를 휘둘러 상처를 준 것은 쉽게 잊습니다.

그리하여 “우리가 우리에게 죄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 라고 기도하는 것이 부끄럽습니다. 

우리는 자신을 가리켜  ‘상처를 받은 존재’ 라고 생각하지,  ‘상처를 

주는 존재’ 라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죄성이 많은 우리는 의

도하건 의도하지 않건 우리는 상대방에게 상처를 주는 존재입니다.

구약 성경에서 죄 용서를 받는 제사 중에 ‘속죄제’ 라는 것이 있습니

다.  죄의 내용을 보면 “부지중에 범하는 죄” 가 나옵니다. 

기독 메시지

“만일 이스라엘 온 회중이 여호와의 계명 중 하나라도 부지중에 범

하여 허물이 있으나 스스로 깨닫지 못하다가 그 범한 죄를 깨달으면 

회중은 수송아지를 속죄제로 드릴지니.” (레4:13,14)

 

우리는 자신이 알지 못하는 중에 죄를 범하고 이웃에게 상처를 주는 

존재입니다.  이것이 늘 겸손해야 하는 이유이고 우리의 입을 위하여 늘 

기도해야 하는 이유입니다.

그림 큐티더 보기
로마서 11장 6절
고린도전서 15:10

만일 은혜로 된 것이면 행위로 말미암지 않음이니 그렇지 않으면

은혜가 은혜 되지 못하느니라.

 

And if by grace, then it is no longer by works; if it were,

grace would no longer be grace.

도서 큐티더 보기
성령의 바람

이들 삶에 그리고 우리 삶 가운데 성령의 바람이 불기 시작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인생이라는 배를 더 편안한 삶을 위해 

잔잔한 바다로 나아가게 하는 순풍은 아닙니다. 

어쩌면 폭풍의 중심, 즉 하나님의 존전으로 

우리를 인도하는 풍랑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배를 때에 맞게 조정해야 합니다. 

만일 잔잔한 물결을 향해서만 항해하다 보면 

바다 가운데홀로 떨어져버리게 될 뿐 아니라, 

성령의 바람에 저항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래리 크랩의 [네 가장 소중한 것을 버려라] 중에서-

 

하나님의 일하심을 느끼고 목도하는 것은 중요합니다. 

성령님이 일하시는 때를 알고 반응하는 것은 더 중요합니다. 

성령님은 인격적이십니다. 

성령님은 상황에 따라 우리의 생각과 달리 

앞으로 전진할 수 있도록 우리를

 더 깊은 바다 한 가운데로 몰고 갑니다. 

때로는 침잠하는 폭랑속에서 강하게 떠미십니다. 

성령님은 평강 가운데 우리를 오게도, 가게도 하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뜻과 때를 아는 것은 중요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