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鶴山의 個人觀

한국인, "소 잃고, 외양간 고친다"라는 말을 아는가?

鶴山 徐 仁 2017. 9. 22. 23:48

현재 한국인들에게는 "소 잃고 외양간 고친다"는 말이 가장 시기적절하게 들려줘야 할 말이라고 여겨진다.

대한민국 국민 스스로 3권 분립의 자유민주주의를 지향하고 있는 대한민국의 입법부를 지난해 4월 13일, 제20대 총선을 통해 종북좌익 패거리들에게 주도권을 주었으며, 이를 발판으로 박근혜 대통령을 탄핵하여, 구속시킨 후, 바로, 이어서 지난 5월 9일, 19대 대선에서 행정부 또한, 그들에게 넘겨준 이후 드디어, 어제 5월 9일에는 사법부까지 마지막으로, 종북좌익 패거리들에게 쥐어주었으니, 이제 오는 24일부터는 국가 권력의 전권을 종북좌익 패거리들이 장악하게 되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이러한 현실은 시대의 흐름이요, 대한민국 국민이 자초한 것이기에 그 누구에게도 책임을 전가할 수0 없다는 게 타당하다고 본다.

따라서, 대한민국의 미래는 중국의 국공합작과 월남전에서 역사적 교훈을 얻게 될 것이고, 시대적 변화는 다소 감안해야 하겠지만 그 전철을 밟게 될 것이라고 유추하게 된다.

물론, 오판이기를 스스로도 간절하게 바라는 바이지만, 이미 진정한 자유민주주의 국가를 지키기에는 너무 시기가 늦었다고 절망하고 있다는 게 솔직한 심정이고, 제대로 사회 모든 부문이 균형 있게 성숙하고, 성장하기도 전에 현 대한민국 사회가 유사 이래 가장 풍요로운 국가로 군림하게 된 시기가 좀 빠르게 다가오지 않았는가 하는 오히려 회한하는 마음도 가지게 된다.

국제사회 전체가 세계가 공인하는 깡패 국가 북괴의 행패에 여러 가지 묘안을 차느라고 유엔을 통해 노심초사하고 있는 가운데서도 가장 가까이서 위급한 상황을 가장 먼저 맞닥뜨리게 될 대한민국 땅에서 살고 있는 국민임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해외에 나가서 살고 있는 동포들보다도 더 안일한 가운데 태평하게 생활하고 있다는 게 의아스러울 지경이다.

정부가 국민들을 부추기고, 이에 다수의 순진한 국민들이 부화뇌동하여, 열흘 간이나 이어지는 긴 추석 연휴를 맞아 해외여행 등, 공항을 빠져나가는 관광객들의 수가 110만 명에나 이른다고 하니, 단지 그냥 안보불감증이라고 넘기기에는 이 또한 위험수위를 넘어섰다고 봐야 할 것 같다.

그래서, 수년 전부터 어떤 중견 언론인은 대한민국 국민은, 우리나라가 현재 이 지구 상에서 얼마나 많은 풍요를 누리고 있는 잘 살고 있는 나라인지, 일본이 세계적으로 얼마나 막강한 위상을 가지고 있는 나라인지, 북괴가 얼마나 악질적이고, 독재적인 깡패인지, 이 세 가지를 너무 모르고 있다고 지적을 하였듯이, 코앞에 적을 두고도 국가  원수가 그것도 현재는 3권을 장악한 국군통수권자가 북괴를 주적으로 보지 않는다고 공언하고 있는 나라에서 살고 있으니, 이런 마당에 누구를 탓할 수 있을 것인가 싶다.

현재의 중국(중화인민공화국)도, 오늘의 중공을 건설하기 위해서, 과거 역사를 살펴보면, 그들의 세력이 약하고 별 볼일 없던 시기인 1920년에는 코민테른 제2회 대회에서 채택된 '식민지와 민족문제에 관한 테제'를 통해, 프롤레타리아 계급의 세력이 미약한 동안에는 일시적으로 부르주아 민주주의 세력과 제휴하여 제국주의를 몰아낸다는 방침에 따라서, 1924년 1월에 당대 합작을 거부한 당시 국민당의 요구로 국민당 제1회 전국대표대회에서 공산당원은 개인자격으로 국민당에 입당하기로 하였기에 1차 합작의 특징은 독자적인 군대도 없었던 공산당은 코민테른의 지시에 의해 합작을 결정하고 개인자격으로 국민당에 입당하여 그들의 목적을 달성하고자 시도했다는 점이다. 그러나, 국민당은 4·12 정변(1927)을 계기로 1차 합작이 결렬된 후 공산당은 국민당과의 합작 기간에 세력화한 조직을 기반으로 농촌에 소비에트 건설을 추진했고, 국민당은 몇 차례에 걸쳐 소비에트 지역을 포위·공격했지만, 이 시기에 일본군의 침략이 노골화되자 거국적인 항일을 호소하는 8·1선언(1935)을 발표하고 국민당에 다시 제휴를 제안했으며, 공동항일을 요구하는 시안 사건(1936)을 계기로 국·공 간의 내전이 정지되고, 양당의 담판 끝에 중일전쟁이 발발로 합작이 성립되었다.

이렇게 2차합작으로 국민정부는 공산당의 합법적인 지위를 인정하게 되고, 홍군은 국민정부군 팔로군과 신사군으로 편성되어, 항전초기에 국민정부군이 패배 및 후퇴를 거듭한 데 반하여, 공산당은 전투구역과 일본군 후방에서 활약하여 세력을 신장했고 이에 불안을 느낀 국민당은 우한 함락(1938. 10) 이후 반공작전을 전개하게 되어, 1941년의 신사군 사건, 1943년 국민정부군의 공산당 근거지 포위로 양당의 관계가 악화되었으며, 종전 후 공동의 적을 잃게 된 양당은 일본점령지의 분배를 둘러싸고 무력충돌을 하게 되고 합작이 결렬되었다.

2차합작의 특색은 자신의 무력을 갖추게 된 공산당이 독자적인 판단으로 국민당과 대등하게 합작했다는 점이며, 합작을 통해 공산당은 국민당과는 게임도 되지 않을 만큼 아직도 약한 세력이었으나 선전선동과 기만, 권모술수를 기반으로 점차 세력을 공고히 하여 결국에는 막강한 세력의 국민당을 대만으로 쫓아버리고 중화인민공화국을 수립할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우리나라와 근대사의 역사가 비슷하게 전개된 베트남의 경우는, 1954년 7월 21일 당시 베트남을 지배하고 있던, 프랑스가 물러가면서 제네바 협정에 따라 북위 17도선 이남에는 자유월남이 이북에는 공산정권인 월맹이 수립되었다.

하지만, 신생독립국 자유월남 내에는 1960년 12월 공산 월맹의 지원으로 공산조직인 월남민족자유전선이 만들어져 월남 정부에 전면적인 공세를 취하면서 본격적인 월남전이 시작되었다.




그러나, 자유월남을 지원하기 위해 참전한 미국은 1964년 이후 연간 500억 달러를 퍼부으며 53만 여명을 파견, 전사자 5만 8256명 부상자 20만명이라는 피해를 입게 되고, 이로 인해 악화된 국내 여론 및 끝이 보이지 않는 전쟁에 발을 빼기 위해 1968년 5월 10일 파리에서 월맹과 비밀리에 평화협상을 시작하게 되었지만, 실제 월맹 측에서 제안한 평화협상은 단지 미군을 철수시키기 위한 작전이었으며, 현재 북괴처럼 그들의 진정한 속셈은 무력남침을 통한 공산화 전략 뿐이었다.

하지만, 실제적으로 월남전 패망의 더 직접적인 단초 제공은 자유월남의 사회 정치적 상황이었다고 하는 게 타당할 것이다. 공산월맹의 치밀함과는 상대적이었는데,

전쟁이 치열했던 1967년 9월3일 치러진 자유월남 대통령 선거에는 무려 11명의 입후보자가난립했다. 이 선거에서 패한 야당 지도자 쭝딘주 변호사는 외세 배척 및 우리민족끼리를 내세우며 동족 살상, 월맹에 대한 폭격금지, 미군철수, 조속한 남북 평화회담 등을 주장했고, 이같은 발언은 미국과 월남 국민들의 반전여론을 자극했으니, 마치 지금의 대한민국 내 종북좌파 패거리들의 행태와 유사했다고 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군사력은 현재 핵무장을 하고 있는 북괴와는 달리 공산월맹은 자유월남과는 게임이 되지 않을 정도였다. 즉, 철수 당시 미국은 월남과 방위 조약을 체결하면서 월맹이 평화협정을 파기하면 해군및 공군력을 동원하여 월맹에 대한 폭격을 재개하고 월남 지상군을 지원하기로 굳게 약속했었다.

더불어 주월미군이 철수하면서 그동안 미군이 보유하고 있었던 전차와 장갑차 400대 항공기 700대등 10억 달러 이상의 각종 최신 무기까지도 모두 월남에 양도함으로써 그무렵 월남의 공군력은 전세계에서 4위를 기록하기도 했으며, 남북의 경제력 차이와 미군의 철저한 유사시 지원 약속은 주월 미군이 철수하더라도 휴전 체제가 최소한 10년은 갈 것이라는 믿음을 주기에 충분했고, 미국은 그럴 것이라 판단하는 오류를 범했다.

것은 내부 적과 실상을 너무 간과하였기 때문이었으니, 그 이유는 총 인구 2천만 명 가운데 공산당원은 겨우 9,500명에 지나지 않았으나 0.25%의 좌익공산세력들이 자신들이 장악한 수십개의 언론사를 통해 정부에 대한 원색적인 비난과 유언비어를 유포하고 우익 인사들을 '무식한 전쟁광'으로 매도하는 한편 무자비하게 암살시도하기 시작했음에도 불구하고, 지식인과 중산층, 언론인 등 다수의 우익들은 비겁하게 침묵을 선택함으로써, 결국, 소수의 조직화된 좌익들의 공세에 당할수 밖에 없었고, 드디어, 1975년 3월 10일 월맹은 파리 평화 협정을 파기하고 월남에 이미 오래전부터 침입해 있던 간첩을 이용, 주민들을 선동하는 동시에 18개 사단이 총공세를 감행했다.

그러나, 이 와중에도, 즉각 전쟁을 중지하고 일치단결해서 침략군을 무찌르고 자유월남을 지키자는 당시 티우 대통령의 호소를 외면하고 짜후탄 신부와 야당 지도자들은 정부를 비난하는데만 여념이 없었다.

이미 분열과 총체적 부패 그리고 의욕상실에 빠져있던 자유월남 내에서는 나라를 지켜야 겠다는 의지가 남아있지 않았다.


1975.3.26  월남의 제 2도시 '다낭' 함락

1975.4.21  티우 대통령 하야. 해외 도피


1975.4.30 월맹의 총공세 50여 일만에 사이공 함락

1975.4.30 자유월남 패망


군사적으로나 경제력 및 인구등, 모든 면에서 월맹을 압도했던 자유 월남이었지만 결국 , 월맹의 총공세 이후 50여일만인 4월30일 지도상에서 사라져 버렸으며,

사이공 함락 후 월남의 군인과 경찰은 수용소로 보내졌고 공무원과 지도층 인사,

언론인, 정치인은 물론 반정부 반체제 운동을 벌이며 월남 패망에 앞장 섰던

짠후탄 신부 등 종교인, 교수, 학생 및 통일 운동가 까지 체포되어 '수용소'로 보내어 졌고
대부분 처형되는 등 수백만 명이 처형, 학살되었다.


"베트콩으로 활동한 월남인들은 모두 숙청되었고 일부는

재교육 수용소에 월남인 적들과 함께 수용해 제거해 버렸습니다."


리 라닝 ('베트콩과 월맹의 내막'의 저자)



당시 공산 월맹이 구사한 전술

 

'통일 전선전술'

  

약 6000여명의 정예 공산당원들을 월남에 침투시킴

민족을 내세워 월남의 종교인 지식인 언론인 정치인등을 배후 조종,

반정부. 반미 시위를 주도(남한의 종북세력과 똑같다)

결국 월남은 내부분열.

미군철수.

주적개념, 경계심 무너짐.

 월맹의 공격.

(월남의 전투기조종사는 자기가 지켜야할 대통령궁으로 기수를 돌려 맹렬한 폭격을 가함.

↓  

월남은 이미 전의 상실.

자유월남은 1975년 지구상에서 영원히 사라짐


출처: http://inthink.tistory.com/26 [인씽크]



안타까운 일이지만, 현재 대한민국의 상황도, 지난 1960년대 중반에서 1975년 4월까지 존재하다 사라진 자유월남의 전철을 밟게 되지 않을까 심히 우려스런 마음을 금할 길 없으니, 정치계는 더 말할 것도 없을 테지만, 각 분야가 꼭, 패망 당시의 자유월남 사회상을 연상케 하고 있는 것을 당시의 역사를 체험한 사람이라면, 아무리 세월은 많이 흘렀어도 공감하리라고 생각한다.

직접 지난 역사를 체험하지는 못했다고 하더라도, 올바른 사상과 사고력으로 사리를 분별할 수 있는 사람이라면, "소 잃고, 외양간 고친다"라는 어리석음은 면했어야 하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