鶴山의 草幕舍廊房

Faith - Hymn

음란한 여자를 아내로 맞으라!

鶴山 徐 仁 2016. 11. 10. 10:25
11월 10일 (목)
음란한 여자를 아내로 맞으라! (호세아 1:2-5)
  
 

2. 여호와께서 처음 호세아에게 말씀하실 때 여호와께서 호세아에게 이르시되 너는 가서 음란한 여자를 맞이하여 음란한 자식들을 낳으라 이 나라가 여호와를 떠나 크게 음란함이니라 하시니
3. 이에 그가 가서 디블라임의 딸 고멜을 맞이하였더니 고멜이 임신하여 아들을 낳으매
4. 여호와께서 호세아에게 이르시되 그의 이름을 이스르엘이라 하라 조금 후에 내가 이스르엘의 피를 예후의 집에 갚으며 이스라엘 족속의 나라를 폐할 것임이니라
5. 그 날에 내가 이스르엘 골짜기에서 이스라엘의 활을 꺾으리라 하시니라

 
  
  
 

<... 여호와께서 호세아에게 이르시되 너는 가서 음란한 여자를 맞이하여 음란한 자식을 맞으라 이 나라가 여호와를 떠나 크게 음란함이니라>(2절).

물론 하나님을 버리고 바알을 섬김으로써 깊은 영적 간음에 빠진 이스라엘을 상징하는 행위로 분부하신 것이지만 호세아로 하여금 실제 모압 땅의 음란한 여인 고멜을 아내로 취하게 하신 것은 인간적으로 몹시 가혹한 일이었습니다.

아내의 부정을 보면서도 미워할 수도, 버릴 수도 없었던 사람, 힘들어하고 괴로워하고 고통스러워하면서도 다시 용서하고 사랑으로 끌어안을 수밖에 없는 사람, 호세아는 극도로 불안정하고 끔찍한 음녀 고멜과의 결혼생활을 통해 이스라엘 백성들에 대한 하나님의 심정과 애증을 뼈저리게 체험하게 됩니다. 부정으로 인한 배우자의 배신이야말로 인간의 마음을 가장 아프게 하는 깊은 상처가 아닐 수 없습니다. 호세아는 그런 쓰디 쓴 경험과 고통을 통해 하나님의 아픈 마음을 조금이라도 이해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게 무엇이든, 사업이든 취미든 돈이든 명예든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고 신앙보다 더 소중히 여기는 것은 다 고멜이 다른 남자를 사랑하고 또 쫓아가는 행위와 같은 것입니다. 호세아서를 보며 우리가 다 혐오하고 손가락질 하는 고멜이 실은 바로 <나>라는 사실을 시인해야 합니다. 어쩌면 저럴 수가 있을까? 저것도 사람인가? 하며 경악을 금치 못했던 인물이 더도 덜도 아닌 바로 <나>라는 점을 겸허히 인정하고 회개해야 합니다.

호세아는 이스라엘이 다시 살 수 있는 유일한 길은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길밖에 없음을 호소했습니다. 비록 범죄하였으나 회개하면 하나님의 넘치는 사랑이 그들을 용서하시고 다시 받아들일 것이라고, 자신의 고멜과의 부부생활을 통해 강조했습니다. <고멜>이라는 이름의 뜻은 <끝> 또는 <마지막>입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고멜>처럼 막장으로 가던 우리가 그 길을 돌이켜 다시 하나님의 품으로 돌아오기를 간절히 고대하고 계십니다.

 
  
  
 

-우상숭배야 말로 영적 간음 행위임을 인정하십니까?
-호세아의 아내 고멜이 곧 당시 이스라엘이요 오늘 우리들임을 인정하십니까?
-비록 고멜과 같은 음란의 끝판 여왕도 회개하고 돌아오면 하나님이 다시 받아주실 것임을 확신하십니까?

 
  
  
 

주님, 호세아의 결혼생활을 통해 당시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관계와 모순을 연출하신 하나님의 뜻을 바르게 헤아리는 저희들 되게 해주시옵소서. 어느 시대나 그렇고,또 이 시대 저희들도 마찬가집니다. 겸허하게 진솔하게 저희 삶의 가증한 허물들을 시인하며 회개하게 하사 다시금 남편인 호세아에게로, 주님의 품으로 돌아오는 단호한 결단이 있게 해주시옵소서.

 
  
   
 

육신의 생각은 사망에 이르게 한다

육신의 생각은 사망에 이르게 합니다.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라고 합니다.
육신의 소욕을 거절하고 하나님의 영의 인도함을
받는 자가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합니다.
영적 어린아이에서 벗어나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려면 하나님의 영, 성령의 인도함을 받아
성숙한 신앙인으로 주님을 닮아가야 합니다.
육신에 속한 자들이 많은 교회는
분쟁이 끊이지 않고 시끄럽습니다.
이런 자들은 사탄의 밥이 됩니다.
하나님의 성령은 육의 소욕을 능히 이기게 하십니다.
-한태완 목사의 ‘육신에 속한 자’에서-

 
   
 
  
 


육신에 속한 자들은 본의 아니게
하나님의 일을 방해하고 있습니다. (롬7:14-20)
육신을 쫓는 자란 그리스도 안에서
육신에 속한 사람이란 뜻이 아니라
비 그리스도인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육신을 따라 난 사람들은 아담 안에서 태어난
모든 인류를 가리키고 있는 것입니다
성령으로 거듭난 사람들이 성령을 따라 행하는 것,
그것이 육신의 소욕을 이기는 성숙한 그리스도인이 되는 길입니다.

 
   
    
 

믿음

 

의인은 그의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하박국 2:4b)

우리에게 무슨 소망이 있습니까.
우리는 오직 하늘을 향한 믿음만으로 살아갑니다.

-변정희 작가

 
    
 
  
 FIM국제선교회 유해석 선교사
 5분칼럼(유해석선교사)
  
  



11월 9일 (수)
여호와여 구원하소서! (호세아 1:1)
  
 

1. 웃시야와 요담과 아하스와 히스기야가 이어 유다 왕이 된 시대 곧 요아스의 아들 여로보암이 이스라엘 왕이 된 시대에 브에리의 아들 호세아에게 임한 여호와의 말씀이라

 
  
  
 

<호세아>라는 이름은 <여호수아>나 <예수>와 동일한 어근에서 파생한 말로 <여호와여 구원하소서!>라는 뜻입니다. 호세아는 북이스라엘 지역에서 여로보암 2세가 왕으로 재임하던 B.C. 755-725 사이 약 30년간 활동한 선지자였습니다. 호세아가 등장하기 전 북이스라엘 지역에서 활동한 선지자는 아모스였습니다. 그가 활동하던 때는 여로보암 2세가 남쪽으로는 유다까지 세력을 뻗치고 북쪽으로는 아람을 공격하여 그 수도인 다메섹을 정복하며 영토를 크게 확장한 시기였습니다. 따라서 대외적으로는 국력을 과시하고 내부적으로는 큰 번영을 이룰 수 있는 좋은 기회였습니다. 그러나 왕과 백성들은 그 같은 축복이 하나님께로부터 왔다는 사실을 망각하고 모든 공을 오직 자신들에게로 돌리며 삶을 즐기고 향락하는 데만 몰두했습니다. 다투어 우상을 섬기고 쾌락과 음행에 빠졌으며, 제사장들은 형식적인 제사를 드리며 백성들의 뇌물만을 챙겼습니다.

공의의 선지자였던 아모스가 백성들, 지배계급의 그 같은 허영과 사치와 불의를 성토하며 하나님의 심판을 경고하고 공법과 정의를 외치자 백성들이 그를 거부하다 결국은 그의 출신지인 유대 땅으로 추방합니다(암 7:13). 그리고 하나님이 그의 뒤를 이어 호세아를 부르사 사역하게 하신 것입니다. 이 때부터 호세아는 30년을 하루 같이 하나님의 사랑과 용서를 전합니다. 자신의 형극과도 같은 결혼생활의 경험을 통해 온몸으로, 삶으로 하나님의 마음이 얼마나 아프신지, 얼마나 힘들고 고통스러우신지를 호소합니다. 그러나 그들은 이미 우상과 죄악에 깊이 물들어 끝끝내 돌이키지 않고 타락의 길을 걷다 B.C. 722년 앗수르에 의해 멸망하고 맙니다.

호세아서를 통해 깨닫게 되는 것은 물질적인 번영은 인간 중심의 가치관과 우상숭배를 부추겨 결국은 하나님을 의지하기보다 자기 자신과 거짓된 우상을 의지하게 한다는 것입니다. 세상이 아니라 하나님에 대한 사랑으로 사십시오. 나를 향하신 하나님의 사랑을 어떤 경우에도 결코 배신하지 마십시오.

 
  
  
 

-호세아 선지자의 가정생활을 통해 하나님이 전하시고자 하신 메시지는 무엇이었을까요?
-끝까지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했던 호세아 선지자에 대해 당신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호세아 선지자에게 어울리는 별명을 한 번 붙여보십시오.

 
  
  
 

주님, 오늘부터 호세아서를 묵상합니다. 은혜와 깨달음과 결단과 실천할 수 있는 믿음을 주시옵소서. 호세아 선지자는 그야말로 비운의 선지자요 사랑의 선지자요 순명의 선지자였습니다. 인간적으로 생각해 보면 가장 잔혹한 하나님의 명령을 가장 철저하게 순종하고 실천한 위대한 하나님의 사람이었습니다. 저희로 하여금 호세아서를 통해 선포하시는 하나님의 메시지를 바르게 듣고 깊이 깨닫게 해주시옵소서.

 
  
   
 

입술로만 말하는 것은

세상에는 게임에 직접 참가하지 않으면서
룰이 이렇다 저렇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많다.
어떤 일을 직접 하지 않으면서 입술로만 말하는 것은
건설적인 일이 아니다.
특별히 요즘 한국교회의 가장 부정적인 면은 바로 이것이다.
듣는 귀가 커져만 가고 전하는 입술도 커져 가는데
전하는 자나 듣는 자의 행동이 따르지 못하고 있다.
이제는 말은 그만하고 행동으로 옮기자.
겉만 번지르르한 말에는 이제 정말 지쳤다.
-최승일 목사의 ‘행동하는 그리스도인’에서-

 
   
 
  
 


행동이 없는 허울뿐인 말에 대해 예수님께서도
‘외식하지 말라’고 지적하셨습니다.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회칠한 무덤 같으니 겉으로는 아름답게 보이나.‘(마 23:27)
말로만 떠드는 종교지도자들에게 하신 예수님의 말씀이다.
어렵게 보이는 문제가 실제로 부딪혀 보면
의외로 쉽다는 것을 발견할 때가 있습니다.
모든 성공자들은 말만 늘어놓는 사람이 아니라
말과 행동이 하나 되어
적극적인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이제는 행동하는 신앙인이 될 시간입니다.

 
   
    
 

간구

 

사랑하는 자여 네 영혼이 잘됨 같이
네가 범사에 잘되고 강건하기를 내가 간구하노라
(요한삼서 1:2)

우리 주님의 간구는 간절한 엎드림입니다.

-변정희 작가

 
    
 
  
 김옥엽 시인
 오직 십자가의 능력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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