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래 글을 통해 현실 속에서 그 실체가 어떻게 드러나고 있는지를 한번 보시고 제대로 분별하시기 바랍니다.
나는 남조선의 '공산혁명'을 위해 한 때 내 목숨을 내놓은 적이 있다.
혁명 전사의 중요한 덕목은 지금이 혁명의 간조기인지 아니면 만조기인지, 정세를 정확하게 판단하여 시기에 맞는 투쟁 전략을 세우고 매일 점검하는 것이다.
나는 그런 자질을 갖추기 위해 노력했고 사상적 전향 이후에도 정세를 판단하는 나의 못된 옛 습관은 쉽게 없어지지 않았다. 특히 계급투쟁에서 문화를 이해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나는 대학시절 사회주의 예술론과 관련된 다양한 책을 읽으며 문화를 이해하기 위해 노력했다. 레닌이 쓴 프롤레타리아 예술에 관한 소고(小考)를 포함하여, 구조주의(structuralism)를 공산주의 이념에 연결시킨 루이 알뛰써, 예술과 문화의 영역을 혁명적 투쟁의 장소로 재조명한 안토니오 그람시의 글들은 물론, 시, 소설, 연극, 영화, 가요, 그림, 등 예술의 역사를 공부했다.
당시 이런 이론들을 공부한 것은
공산주의 혁명에서 문화와 예술이 갖고 있는 잠재력을 활용하여 인민대중에게 사회주의 이념을 단순한 정치 이론이 아니라, 그들이 직접 삶 속에서 생생한 ‘스토리’로 경험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단언컨대 2016년을 읽지 못하는 문화적 문맹이 되기에, 나는 문화에 대해 이미 지나치게 많은 것을 알고 있다. 나를 포함하여 좌파 예술론을 공부한 사람들의 문화를 읽는 능력은 그렇게 흐리멍덩하지 않다.
우리는 그 때 이미 역사를 움직이는 것은 '하부구조'이지만 '상부구조'에 포함되는 인간의 의식이 갖고 있는 창조적인 힘에 주목했고, 인간의 의식이 하부구조의 변화, 즉 자본제 사회에서 사회주의 사회로의 이행에 결정적 역할을 할 수 있다는 것을 간파하고 있었다.
그래서 나는 한 때 영화감독이 되려고 했던 적이 있다. 군대를 제대한 뒤 86년에 나는 영화이론을 공부하면서 당시 혜화동에 있던 소그룹에서 영화제작을 꿈꾸고 있었다.
내가 영화에 매력을 느낀 이유는
영화가 이미지를 다루고 있고, 영화는 미술, 문학, 음악 등과 같은 다른 예술장르와 쉽게 결합되는 종합예술이이서, 짧은 시간에 메시지를 다수의 청중들에게 반복적으로 주입시킬 수 있는 가장 강력한 수단이 될 수 있기 때문이었다.
영화야말로 강력한 기호(記號)를 체계적으로 구조화하여 일관된 의미를 담은 담론이 되므로, 현상의 이면에 있는 본질(예를 들면 노동 속에 숨겨진 자본가들의 착취)을 상징적으로 보여주어 청중이 이것을 역사 속에서 해석하여 주체적인 행동으로 나아가게 하는 효과적 선전 수단이 된다.
나는 87년에 영화에서 손을 떼고 다른 곳으로 갔지만 그 무렵부터 상당수의 좌파들이 나와 같은 생각을 갖고 충무로에 진출했다.
이런 현상은 단순히 영화 분야에서만 일어난 것이 아니다. 시, 소설, 연극, 영화, 가요, 그림, 등 거의 모든 예술과 언론을 포함한 다양한 문화적 매체의 영역에서도 같은 일이 일어났다.
1986년은 학생 운동권에 결정적 변화가 일어난 해이기도 하다. 86년을 기점으로 그 이전에 학생 운동권이 맞서 싸우는 주적(主敵)이 바뀌었다. 86년 이전의 투쟁의 주적은 독재정권이었다. 하지만 86년부터 운동권의 주적은 '미제국주의'로 바뀌었다.
85년 가을부터 대학가에는 소위 “반제국주의” 문서가 등장했다. 약자로 반제(反帝) 문서라고 불리는 이 문서들은 현재 남한 인민들의 진정한 적은 제국주의 국가인 '미국'이라고 주장했다.
남한은 미국의 식민지며, 미국과 싸워 이기지 못하면 인민 해방은 불가능하다고 주장했다. 이 문서들에서는 내가 그 동안 접하지 못했던 생경한 단어와 표현들이 있었고, 나는 이 문서가 일본의 조총련 계열의 사람들을 통해 북한에서 들어온 문서로 추측했다.
나의 추측이 틀리지 않았다는 것이 곧 밝혀졌다.
86년이 되자 반제국주의 그룹은 그 가면을 벗었다. 그 가면 뒤에는 북한의 주체사상이 있었다. 주체사상은 빠른 속도로 퍼져나갔고, 결국 학생, 노동, 문화 운동의 다수파가 되었다.
86년 이후부터 문화 예술 분야에는 미국을 주적(主敵)으로 이해하는 좌파 예술가들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김대중 정부시절인 1999년에 영화진흥공사를 해산하고 새로운 영화정책 담당기구로서 영화진흥위원회를 설치하면서 진흥위원으로 문성근과 같은 좌파들이 들어가 김지미, 윤일봉 같은 노배우들을 다 쫓아내는 영화계의 쿠테타가 성공함으로 그들은 충무로에 영화 헤게모니를 잡기 위한 진지를 확보하였다. 이 때부터 영화계는 급격하게 좌측으로 돌기 시작했다.
나는 며칠 전 영화진흥위원회 홈페이지에 있는 박스오피스 기준으로 1999-2015년 기간의 역대 흥행작 1위부터 100위까지의 영화 리스트를 검토해보았다.
역시 예상대로 문제 있는 영화들이 상위권에 다수 포진되어 있다는 것을 쉽게 발견할 수 있었다.
역대 대통령 중 노무현 대통령을 미화한 “변호인(12위),”이나, 전두환 대통령 암살 계획을 다루는 유치한 내용의 “26년(100위)” 같은 영화는 내용 분석 자체가 시간 낭비이므로 일단 무시하기로 한다.
1980년 광주사태를 다룬 “화려한 휴가(24위)” 같은 노골적인 선동 영화나, 폭력적인 내용으로 반기업적 정서를 만들어내는 “강남좌파” 수준의 류승완 감독의 “베테랑(3위)” 같은 저질 영화는(지난 11월 14일 민중총궐기 포스터의 구호, “박근혜 정권 퇴진, 뒤집자 재벌 세상!”과 비슷한 정도로 저질이다) 미학(美學)적 분석의 대상이 되기에는 수준 미달이므로 일단 논의에서 퇴출시키기로 하자.
좌파 무정부주의 테러리스트들의 독립운동을 그린 “암살(7위, 2015년)” 역시 검인정 교과서의 역사 해석 프레임인 좌파 무장 독립운동만이 올바른 독립운동이었다는 것을 선전하는 것이 너무 뚜렷이 보이므로 별도의 분석이 불필요하다.
이런 영화들보다 더 심각한 영화는 관객들의 머리에서 남북 간의 이념적 차이를 지워버리고 공산주의 이념에 무방비 상태로 만드는 영화들이다.
남과 북의 이념적 경계선을 무너뜨리는 영화로 그 선두주자는 쉬리(35위, 1999년)로 볼 수 있다. 평생 자기 짝과 함께 살다가 짝이 죽으면 함께 죽는 “쉬리”라는 물고기를 영화 제목으로 삼은 이 영화에서는 사랑에 빠진 남과 북의 남녀 비밀첩보원을 통해 남과 북이 “쉬리” 즉, 사랑의 짝의 관계 속에 있다는 낭만적인 주제를 아름답게 그려냈다.
북쪽의 공화국은 더 이상 우리의 적이 아니라, 대한민국이 사랑해야 할 짝으로 변신한다. “쉬리”가 남과 북의 관계를 이성간의 사랑으로 그렸다면 그 다음해 2000년의 “공동경비구역 JSA”는 남과 북의 관계를 남자간의 우정으로 그렸다.
대한민국 육군과 인민군 병사들이 서로 오가면서 휴전선에서 우정을 키워가던 병사들은 지극히 인간적으로 묘사된다. 결국 이념 때문에 서로 총을 쏘고 죽어가는 병사들을 보여주면서 이 영화 우리의 머리 속에서 남과 북의 이념적 차이와 현재 진행 중인 남북 간의 전쟁을 상상하는 것조차 인간이기를 포기하는 죄악으로 만든다.
“태극기 휘날리며(10위, 2004년)”는 6.25 전쟁을 소재로 하면서 전쟁을 친형제 간의 형제애로 승화하고, “웰컴 투 동막골(21위, 2005년)”는 전쟁을 “팝콘”으로 승화한다. 수류탄이 옥수수 창고에서 터져 옥수수가 팝콘이 되어 눈처럼 내리는 그 순간 관객은 우리 머리 속에 있는 모든 반(反)공산주의적 사상과 태도를 다 튀겨서 허공으로 날려버린다.
이 영화에서 이념은 설 자리를 아예 얻지 못하고, 우리의 머리 속에서 추방된다.
“한반도(67위, 2006년)”는 통일의 과정에서 남과 북이 일본을 상대로 함께 싸우는 모습을 보여줌으로 이제 남과 북은 공동의 적과 싸우기 위해 “한 몸”이 될 미래를 예언한다.
“의형제(40위, 2010년)”와 “은밀하게 위대하게(26위, 2013년)”에서는 아예 남파 간첩이 주인공이다. 이들은 더 이상 우리의 적이 아니고, 친절하고 우리보다 더 나은 인격을 가진 우리의 이웃이다.
그러나 이런 모든 작품들을 능가하는, 한국 좌파 영화역사에 빛나는 수작(秀作)은 역시 뭐니 뭐니 해도 “괴물(4위, 2006년)”이다.
이 영화에서 미국은 악의 근원으로 묘사된다. 미군부대에서 방류한 독극물이 한강에 들어가 돌연변이가 일어난 괴물 물고기가 등장해 무차별 인명살상을 하기 시작한다.
한국 사회에서 “괴물”이란 기호(記號)는 그 이전에는 한번도 “미국”이라는 기호(記號)와 연결된 적이 없다. 하지만 봉준호 감독의 영화에서 이제 괴물은 곧 미국을 의미하는 상징이 된다.
괴물이 주인공의 딸인 어린 여자 중학생을 납치하고 괴물의 은신처에 고립된 교복을 입은 여중생이 공포 속에서 떨 때 관객들은 2002년에 일어난 신효순, 심미선양, 두 여중생이 미군 장갑차에 깔려 죽은 사건을 자연스럽게 연상하게 된다.
그렇다. 미제국주의의 군대가 우리 아이들을 잔인하게 죽였고, 지금 그 미국이란 괴물은 우리의 딸, 여동생을 포로로 잡고 있다.
영화에서 정부, 군대, 경찰 등 국가의 공권력은 문제를 은폐하고, 문제 해결에 전혀 관심도 없다. 그들은 무능하고 결국 두 젊은 남녀 주인공이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동분서주하고 결국 이 가족이 괴물을 죽이고 우리의 여중생을 구출한다.
민족의 젖줄인 한강에서 괴물을 죽여 제거하는 것은 한반도에서 제국주의 군대인 미군과 미국을 쫓아내는 것이며, 우리의 여동생은 미제국주의의 포로 상태에서 해방된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인 온 가족이 식탁에 둘러앉아 밥을 먹는 장면은 이제 미국이 떠난 한반도에서 그 동안 헤어져 있던 남과 북의 한 가족의 재결합(reunion)이며, 진정한 평화의 밥상 공동체의 회복이다.
봉준호 감독의 “괴물”은 영화의 상징과 이야기의 구조(structure)가 잘 짜여져 있다. 이 영화는 영화의 문법과 상징이 갖고 있는 힘을 활용하는 법을 잘 아는 사람이 만든 영화다. 이 영화가 역대 관객동원 역대 4등(1천 300만명 이상) 인 것은 이해할만하다.
이 영화에서 미국을 괴물로 형상화한 것은 미국을 우리가 싸워 물리쳐야 할 주적(主敵)이라는 것을 설명하지 않아도 사람들이 자연스럽게 느끼게 한다.
이 영화는 바이러스가 경기도 분당에 퍼져서 분당을 폐쇄한 뒤 미국이 미군 폭격기를 동원해서 분당을 폭격하려고 한다는 극적 설정을 갖고 있는 “감기(87위, 2013년)”같은 영화보다 훨씬 더 반미(反美)적이다.
반미는 곧 반제국주의로 연결되고, 반제국주의 투쟁은 대외적으로 미국과의 싸움이고 대내적으로는 재벌로 상징되는 부르주아 계급과 민주노총으로 상징되는 노동자 사이의 싸움이다.
이런 반미 정서는 2008년에는 광우병 난동으로 나타났다.
광우병은 미국을 바이러스의 근원으로 보게 하고, 반제국주의의 투쟁은 이제 국민의 건강을 지키기 위한 생존의 투쟁이 되었다.
좌파들에게 2002년의 효순, 미선이가 죽었을 때 불타오른 반미운동은 2008년 광우병 난동을 거친 뒤 별다른 반미투쟁의 기회를 잡지 못하고 있다.
흥미로운 것은 박원순 서울시장이 2015년 1월 1일 여의도 한강공원에 높이 3m, 길이 10m, 무게 5톤의 ‘괴물’ 조형물을 설치했다는 점이다.
괴물 조형물은 서울시의 ‘한강 이야기 만들기 사업’의 일환으로 제작되었고, 밋밋한 한강에 이야기를 입혀 서울의 랜드마크로 만들자는 박원순 시장의 빛나는 아이디어로 1억 8천만 원을 들여 탄생했다.
심지어 서울시는 괴물 사진 콘테스트까지 했다. 영화 '괴물'이 개봉한 지 8년이 지닌 시점에 흉측하게 보이는 조형물을 만든 것을 놓고 세금 낭비라는 여러가지 비판이 있었다.
하지만 박원순 시장이 “반미” “반미제국주의”를 상징하는 기호(記號)로서 괴물 영화의 성공을못내 아쉬워하는 사람이고, 그 시절을 잊지 못해 조형물을 만들었다는 것을 간파한 사람들은 그리 많지 않다.
수도 서울의 시장은 괴수 영화 마니아(mania)가 아니라, 반미(反美) 상징 마니아다. 그리고 서울의 교육감인 조희연은 “인천 자유공원 맥아더 동상을 아직도 허물지 못하고 있다” [중략] “대중과 사회를 좀 더 급진화해서 뚜렷한 계급의식을 갖도록 해야 한다”고 말하는 사람이기 때문이다(2007년 오마이뉴스 인터뷰에서 발췌).
이런 사람을 향해 공산주의자라고 지적하면 '철지난 색깔론'이라고 대답하며 자신이 갖고 있는 국가관에 대한 질문에는 침묵하고 있다.
역사논쟁은 본질적으로 이념논쟁이고, 그래서 지금의 이 싸움은 이념전쟁이다. 우리 시대에 이념전쟁은 총, 칼을 갖고 싸우는 전쟁이 아니라, 문화적 매체를 무기로 하여 싸우는 전쟁이다.
그러므로 역사 논쟁은 문화 전쟁이다. 최근 국정이냐 검인정이냐, 현재 교과서 내용에 문제가 있으냐 없느냐, 이 문제를 바라보는 시각이 정반대가 될 수밖에 없는 이유는 역사적 경험 뿐 아니라 문화적 경험이 다르기 때문이다.
우리는 모든 예술, 문화 분야에 뿌리 내린 좌파 이념에 충실한 활동가들과 싸워 그들의 진지를 빼앗고, 그들의 손에서 문화적 헤게모니를 빼앗아 오지 못한다면 이 싸움에서 이길 수 없다. 이 싸움은 긴 싸움이고, 전선이 매우 넓은 싸움이다.
좌파 영화감독들은 남녀 간의 사랑을 저속하게 묘사하는 19금 영화를 잘 만들지 않는다. 왜냐하면 이들은 어린 학생들이 그들의 영화를 보고 공산주의에 대해 경계심을 풀게 하고, 예술의 이름으로 공산주의에 친화적인 사람으로 만들기를 원하기 때문이다. 그들은 영화도 이제 이념 전쟁의 장(場)으로 만든다.
좌파는 이것이 전쟁이라고 생각하고 영화를 만들고, 우파는 이것이 전쟁이라고 생각하지 않고 영화를 만들지만, 결과는 똑같다. 영화는 이념 전쟁의 전장(戰場)이다.
영화를 보면서 나도 그냥 낭만에 젖어 감상하고 싶지만, 지금의 정세는 영화를 분석하게 하고 현재 사회 속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계속 분석하는 피곤한 일을 하게 만든다.
아직 한반도에서 이념전쟁은 끝나지 않았다. 많은 사람들이 착각속에 부르짓듯 “색깔론은 이미 지나버린, 흘러가버린 광기어린 시대와 이념전쟁의 낡은 유산”이길 진심으로 나도 바라지만, 내가 분석한 것처럼 이념전쟁은 아직 현재진행형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인류의 현대사에서 공산주의 이념과 싸우는 마지막 전쟁터인 이 땅에서 살고 있다. 나는 이 점을 분명히 인식하고 있고, 나는 2016년 이 시점까지 두 눈을 시퍼렇게 뜨고 세상이 돌아가는 것을 꼼꼼히 보면서 살아가고 있다.
1950년 대한민국은 북조선 인민민주주의공화국 군대에 쫓겨 낙동강 전선까지 후퇴했다. 낙동강 전선에서 마지막 방어의 교두보를 만들고 인민군과 싸울 때 우리에게는 더 이상 후퇴할 땅이 없었다. 여기서 후퇴하면 이제 나라를 잃어버리게 된다.
나의 아버지는 당시 고등학교 2학년 학생이었고 학도병으로 제대로 훈련도 받지 못한 채 동네의 친구들과 낙동강 전선에 투입되었다.
65년이 지난 지금 나는 역사 교과서 전선에 서 있다. 나의 아버지는 총을 들고 싸웠지만, 나는 펜을 들고 싸운다. 한 가지 다행스러운 것은 나는 훈련도 못 받은 학도병이 아니라, 유경험자라는 것이다.
애국세력들은 이미 수도 서울을 빼앗겼고 교과서도 이미 빼앗겼다. 낙동강 전선까지 밀린 애국세력들에게는 이제 더 이상 후퇴할 곳이 없다. 역사 교과서 전선은 우리가 진지를 파고 들어가서 목숨을 걸고 방어해야 할 전선이다.
여기에서 밀리면 이제 우리에게 대한민국은 없어질 지도 모른다. 나는 나의 아버지가 낙동강 전선을 지켰듯이 이 교과서 전선에서 물러나지 않고 지킬 것이다. 그것이 내가 2016년을 제대로 살아가는 방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