鶴山의 草幕舍廊房

Free Opinion

[넷향기] 공병호 박사의 "불공평한 삶을 극복하는 끈기" 외 6

鶴山 徐 仁 2015. 7. 21. 22:03
불공평한 삶을 극복하는 끈기
공병호

지방에서 상경해서 서울의 명문대 경영학과에 입학해서 공부를 아주 잘 하고 있는 한 젊은이를 만났습니다. 이런 이야기를 저에게 하더군요.
“지방에서는 그렇게 큰 차이가 없었는데 서울에 오니깐 동기간에도 집안의 경제력 차이가 너무나 커서 가끔 당혹스러울 때도 있고 또 가끔은 내 자신에게 가족에게 화가 날 때도 있습니다.”라는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 이야기를 듣고 30년 전 제가 대학을 입학해서 다닐 때가 생각났습니다.
그때도 지방과 서울에는 경제력 차이가 많았고 또 이따금 친구들의 집에 초대를 받아서 가보면 문화적인 조건 같은 부분들이 큰 차이가 났습니다.
물론 또 대학을 들어오는 단계에서 과외 같은 부분들이 차이가 났음은 틀림없습니다.

세월이 아무리 흘러가더라도 이런 상대적인 격차, 많이 가진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 사이의 격차라는 것은 완전히 없앨 수는 없습니다.
우리 역사의 모든 부분을 흩어보더라도 이와 같은 부분들은 늘 존재했을 겁니다.
다만 과거에는 신분이 상당부분 결정했고 지금은 어느 정도 개인이 극복할 수 있는 통로나 능력을 가진 경우에는 가능성만 차이가 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여러분들은 어떻게 생각하실지 모르겠지만 저는 어차피 삶이라는 것은 불공평 하다고 생각합니다.
삶 자체가 불공평하다는 것을 저는 아주 기꺼이 받아들일 필요가 있다고 봅니다.
후천적으로 우리가 아버지를 누구를 두고 조상을 어떤 분을 두었냐는 것은 물질적인 혜택이나 교육적인 혜택 외에도 이미 유전자를 받는 것, 자체가 너무나 큰 차이를 낳게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런 불공평을 어떻게 받아들일 것이냐라는 문제는 개인이 좀 더 깊게 생각해야 될 부분가운데 하나입니다.

우리가 이렇게 격차가 주어졌을 때 이 격차를 어떻게 극복해 나갈 것인가 하는 문제가 모든 사람에게 주어진 과제입니다.
그런 격차를 자연적인 현상으로 보고, 인정하고, 기꺼이 받아 들이는 경우가 있을 수 있고 또 다른 하나는 자신의 삶을 통해서 ‘이런 격차를 한번 극복해야겠다.
또 이런 격차를 극복해 나가는데 좀 더 도전적인 삶을 살아야겠다.는 선택도 누구든지 내릴 수 있습니다.
그 젊은이처럼 명문대학을 가고 명문학과를 가는 것은 격차를 줄이는 가능성에 한걸음 더 다가선 경우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와 같은 티켓을 갖고 있다고 해서 반드시 모든 사람들이 격차를 줄이는데 성공하는 것은 아닙니다.
모든 것은 확률입니다.
대체로 그와 같은 격차를 줄일 수 있는 가능성에 좀 더 높은 단계에 도달했다 정도로 이야기 할 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주어진 격차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고 당대에, 자신의 힘과 자신의 노력을 통해서 격차를 극복해 나가려고 하는 사람들은 정말 혼신의 힘을 다해서, 자신의 목표를 위해서 노력해 가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격차를 줄이기를 간절히 염원하는 사람들은 상당부분의 희생과 헌신이 없이는 격차를 줄이는게 어쩌면 불가능한 일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또 설령 그런 노력을 한다고 하더라도 격차를 줄일 수 있는 보장은 어느 곳에서도 주워질 수가 없습니다. ‘대체로 그러하다’ 다시 이야기 하면 가능성의 문이 좀 더 주워질 뿐이다. 라고 해석할 수 있겠습니다.

사람이 사는 역사 속에서의 모든 것은 계층간에 또는 집단간에 격차의 역사라고 볼 수 있습니다.
또 인류의 성장의 동력은 격차를 극복해 나가기 위한 인간의 혼신을 다한 노력이 집적되면서 오늘의 삶이 가능했다고 봅니다.
모든 젊은 분들은 격차에 대해서 분노를 느낄 수도 있겠지만, 그런 격차를 자신의 힘으로 극복해 나가는 부분에서 얻을 수 있는 큰 기쁨과 용기, 위안이 있음을 꼭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늘 도전하는 인생을 당차게 살아가시는 여러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숭고한 의미의 스트레스
이시형

“스트레스 해소를 어떻게 하느냐?”라는 질문을 많이 받습니다.
이번 시간에는 스트레스 뒤에는 항상 숭고한 인생의 의미가 있다는 말씀을 드리려고 합니다.
그 의미를 알고 하면 정말 싫고 힘든 스트레스도 우리는 이겨 낼 수 있습니다. 이것이 결론입니다.

여러분은 어떤 일이 제일 싫은지 모르겠습니다.
세상에 신나는 일만 있으면 얼마나 좋겠습니까마는 살다 보면 싫은 일도 더러는 해야 할 때가 있습니다.
말씀드리기 부끄럽지만 의사인 저에게도 싫은 환자가 있어요. 안 왔으면 좋겠는데 자꾸 옵니다.
너무 까다롭거나 너무 잘 따진다든가, 내가 보기에는 많이 좋아졌는데도 만날 죽겠다고 엄살 부리는 환자는 사실 좋지가 않습니다.
언젠가 제가 원장을 할 때 어느 환자가 계산서를 갖고 왔습니다.
“원장님, 제가 링거를 반병밖에 안 맞았는데 왜 한 병 값이 계산됐습니까?” 해서, 제가 “잘못했습니다.” 하고 즉각 간호실에 전화를 했습니다.
“이 환자분 퇴원하실 때 남은 링거 병, 마저 포장해 드리세요.”
그러고 나니까 잠시 속은 후련했지만 생각해 보십시오. 여러분, 의사와 환자의 관계는 그냥 상거래가 아닙니다.
환자는 나에게 생명을 맡기는 사람이에요. 그 사람에게 제가 사약을 먹으라고 하도 먹지 않겠습니까? 그런 환자가 조금 까다롭게 한다고 “남은 링거 병 포장해 드려라.” 한 것은 나쁜 의사였다고 생각합니다.
그렇게 참 많은 것을 뉘우쳤습니다.
그러니까 ‘의사의 의무가 무엇인가? 의사라는 의미가 어떤 것인가?’를 생각하며 아무리 싫고 힘든 환자라도 최선을 다해서 봐야 하는 것이 의사입니다.
그런 생각을 하니까 때로 귀찮은 환자도 성심성의껏 보게 될 수 있습니다.

내가 부모로서, 상사로서, 선배로서 자식이나 부하 직원 또는 후배에게 이해시킬 때에도 ‘네가 왜 이렇게 싫은 일을 해야 하는지’ 그 의미를 분명히 알게 해 줄 의무가 있습니다.
공부라는 것도 참 싫은 것입니다. 공부가 취미인 사람이야 얼마나 행복하겠습니까?
그렇지만 공부라는 것도 왜 공부를 해야 하는지, 그 의미를 알고 하면 별로 힘들지 않습니다.
저는 평생을 공부한 사람입니다. 의사라는 것이 그렇습니다. 왜 제가 이렇게 평생을 공부해도 괜찮겠습니까?
우리가 어렸을 때부터 여러분이나 저나 항상 어머니께 들었던 이야기가 있습니다.
“공부를 해야 착한 아이다. 공부를 해야 훌륭한 사람이 된다.” 이 개구쟁이가 비록 싫어도 공부를 왜 해야 하는지를 알고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공부한다고 절대 병이 되지 않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아마 여러분 중학교 동창 중에도 1~2년 공부를 너무 많이 해서 불행히도 정신병원에 입원했다는 사람도 더러 있을 겁니다.
그러나 그것은 잘못된 것이에요. 공부를 많이 해서 정신병원에 간 것이 아니고, 어쩌면 정신병이 들었기 때문에 그렇게 공부를 많이 한 것일 겁니다.

이것도 우리가 의미를 잘 새겨들어야겠습니다. 얼마 전 일입니다. 응급실에 갈비뼈가 부러진 여인이 찾아왔어요.
이 여자가 자꾸 웃다가 울다가, 웃다가 울다가 그래요.
“여보세요. 갈비뼈가 부러진 분이 왜 웃습니까?”
“사실은 남편이 출장을 갔다 오면서 얼마나 제가 그리웠던지 포옹을 하다가 부러졌습니다.”
얼마나 세게 포옹을 하다가 갈비뼈가 부러졌는지 몰라도, 여자는 비록 아프지만 ‘남편이 나를 얼마나 사랑했으면 갈비뼈가 부러지도록 포옹을 했을까?’ 생각하니 기뻐서 웃음이 나온 거지요.
아프다는 것도 때로는 행복이 될 수 있습니다. 아프다는 것은 사랑이기도 하고 애정이기도 하지요.
만약 이 여자가 지나가는 건달에게 맞았다고 하면 평생에 한이 되었겠지요.
그래서 아프다는 의미를 우리가 제대로 이해를 하면 절대로 아프지가 않습니다.

여러분, ‘죽음의 수용소에서’란 책을 쓴 빅터 프랭클이라는 아주 유명한 정신과 의사가 나치 수용소에 있을 때 어느 노인이 찾아왔습니다.
“선생님, 제 아내가 죽고 나서 너무나 외롭고 괴로워서 못 살겠습니다.”
“하지만 만약에 당신이 먼저 죽고 부인이 살아 있다면 어떻게 됐겠습니까?”
“아이고! 선생님, 제가 아내를 너무나 잘 압니다. 도저히 그 어려운 일을 감당할 수가 없을 것입니다.”
“그렇게 당신이 그만큼 아내를 사랑하고, 또 당신이 그만큼 아내를 그리워하기 때문에 당신이 그렇게 괴로운 것이오.”

괴로움에도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그 노인이 한참 앉아 있다가 편안한 기분으로 돌아갔다는 이야기가 ‘죽음의 수용소에서’의 마지막에 나옵니다.
그래서 이분은 ‘의미 치료’라는 것을 주창하게 됩니다.
그러니까 내가 아무리 싫고 힘든 일이지만 그 뒤에는 숭고한 인생의 의미가 있다는 것을 읽어 낼 수 있는 슬기가 있어야 하겠습니다.





아프지 않게 해야 '명의(名醫)'
김서곤

지난번에 말씀드렸듯이 지금은 자연 수명과 건강 수명을 일치화시키는 것이 매우 중요한 삶의 지표가 되는 세상입니다.
다시 말하면 그냥 단순히 오래 사는 게 아니라, 건강하게 오래 사는 게 중요합니다.
건강하게 오래 산다는 것은 질병이 없고 허약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육체적으로 정신적으로 사회적으로 안녕한 상태까지 겸해진 상태로 오래 사는 것이고 이것이 가장 중요한 이슈가 되었죠.
오늘날, 질병의 문제는 과거의 전염병이 아니라 성인병, 환경 병과 같은 생활습관병입니다.
생활습관병이라는 것은 생활습관을 바꾸면 낫는 병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기원전 4~5세기경 중국에는 편작(編鵲)이라는 명의가 있었습니다.
비슷한 시기에 서양에는 히포크라테스(Hippocrates)가 있었습니다. 오늘날 의사들이 '히포크라테스 선서'를 할 만큼 대단한 명의입니다.
어느 날 편작을 부른 황제는 삼 형제가 모두 명의인데 그중에 누가 최고의 명의냐고 물었습니다.
"큰 형님이 최고의 명의입니다. 두 번째는 둘째 형님이고 세 번째가 접니다."
그러자 황제는 "세상 사람들은 네가 최고의 명의로 알고 있는데 그게 무슨 소리냐?"라고 되물었습니다.
"큰 형님은 건강한 사람이 아프지 않게 합니다. 둘째 형님은 아플만한 사람, 병이 들만한 사람이 병이 들지 않게 합니다.
저는 이미 병든 사람을 고치다 보니 사람들이 명의로 아는데, 정말 명의는 건강한 사람을 아프지 않게 하는 큰 형님입니다."

편작의 말처럼 건강한 사람을 아프지 않게 하는 게 명의입니다. 이보다 좋은 명의가 없겠죠.
우리가 알고 있는 좋은 의사, 유명한 의사란 흔히 수술이나 진단을 잘 하는 의사입니다.
하지만 수술이나 진단조차 필요 없게, 건강하게 만든다면 그보다 더한 명의가 세상에 있을까요?

일반적으로 건강한 사람과 환자를 나누자면
아주 건강한 '건강인', 병은 아닌데 뭔가 시원치 않은 '반(半) 건강인' 혹은 '미병자' 그리고 '질병자'나 '환자' 이렇게 셋으로 나눕니다.
세계보건기구(WHO)에서 발표한 건강한 사람과 환자의 비율은 '건강한 사람 5%, 미병자 75%, 환자 20%'입니다.
병원에 가면 모든 사람이 아픈 것처럼 보이지만 그중에 20%만 환자입니다. 나머지 대부분의 사람들이 미병자나 반(半) 건강인입니다.

미병 상태의 사람이 환자가 되지 않게 한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생활습관이 중요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미병자가 환자가 되는 이유가 바로 생활습관병에 있기 때문입니다.
앞으로 미병자가 어떻게 환자가 되고, 환자가 되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와
환자에서 미병자로 미병자에서 건강한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에 대해서 생각해보는 시간을 갖도록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도대체 놀 줄 모르는 남 편, 왜?
이병준

오늘은 ‘도대체 놀 줄 모르는 남편, 왜?’라는 제목으로 말씀 드리겠습니다.
어느 날 한 부인이 상담을 오셔서 이런 고백을 합니다. “우리 남편은요, 애들하고 놀아줄 줄 몰라요.
어쩌다 한번 놀아주면 꼭 막판에는 애들을 울립니다. 그래서 애들도 싫어해요.”
아내는 아빠랑 놀고 있는 아이들의 행복한 웃음소리를 들을 때에 그 웃음소리가 남편이 자기를 사랑하는 것 같은 착각을 불러일으키게 됩니다.
그 반대가 되면 ‘남편이 나를 사랑하지 않을지도 몰라.’라는 의심을 살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이들과 놀아주는 고마운 남편이 있는 아내가 있는 반면, 아이들과 놀아주지 못하는 남편에 불만이 있는 아내들도 적지 않습니다.

아빠가 아이들과 놀아주지 않을 때에 아이들은 과격해지고요, 자기들끼리 전쟁을 하게 됩니다.
그래서 아들만 둘 키우는 집의 아내는 아주 무서운 여자가 됩니다.
흔히 거울도 안 보는 여자가 되지요. 거울을 보면 눈썹이 V자 형으로 부리부리한 눈이 돼 있구요, 팔뚝은 굵고, 목소리는 앙칼져서 금방이라도 터질 것 같은 여전사가 거울 속에 있다는 것입니다.
아내들은 그런 자신의 모습을 보면서 짜증이 나고, 거울도 보기 싫어진다는 것이지요.
그래서 동창회 가는 것도 발을 끊고 사람들 만나는 것도 싫다고 이야기를 합니다.

사실 남편들이 바깥일에 신경을 쓰다 보면 아이들 양육은 엄마만의 몫이 됩니다.
너무 바쁜 남편을 둔 아내들의 경우에 이런 현상들이 많이 생기지요. 그래도 오기로 몇 년을 버티다가 한계선을 넘으면 그때부터는 매일 매일 분노를 화산처럼 쏟아내게 됩니다. 흔히 말하는 아주 못된 성질을 가진 여자가 될 수 있지요.

사실 못 놀아 주는 남편은 너무 일찍 어른 되었을 가능성이 다분히 높습니다.
우리 문화는 유교문화권입니다. 유교문화권에서는 아이들에게 ’점잖을 것’을 요구합니다. 이 ’점잖다’는 말은 ’젊지 않다’에서 온 말입니다.
애는 젊어야 되고 어려야 되는데 ’젊지 않다’는 이 말은 천진함을 상실한 채 어른으로 살라는 말입니다. 어릴 때부터 애 늙은이로 살라는 뜻이 됩니다.
사실은 그 애 늙은이 마음속에는 놀고 싶은 마음이 숨어 있을 뿐이지요.

또 남편들이 아이들하고 놀아주기 싫어하는 이유는 사실 그게 엄청난 체력과 인내력을 동반합니다.
물론 아이들하고 놀아주는 아빠의 역할은 만9세 이전까지가 최고입니다.
그러나 그때는 대부분의 아빠들이 사회적으로 한창 바쁠 때고 가정경제의 기반을 잡아갈 때이기 때문에 아이들하고 놀기가 쉽지 않다는 것입니다.
아빠들이 대부분의 에너지를 밖에서 다 쓰고 돌아오면 아이 눈에는 항상 아빠는 바쁜 아빠로 각인되어 있고요. 그래서 아이가 ‘아빠, 나빠, 바빠’ 이렇게 말을 한다고 하지요.

놀아달라고 떼를 쓰는 아이에게 ‘아빠가 다음에 놀아 줄게.’라고 말을 해보지만 시간 여유가 되어서 그 다음이 실천될 쯤엔 놀아줄 아이는 더 이상 아빠를 필요로 하지 않고 친구들에게로 힘이 바뀌게 되어 있습니다.
그때쯤이면 아이들이 아빠를 위해서 놀아주는 특별혜택을 베풀 때가 될 겁니다.

저도 한번은 아들 녀석과 놀아주겠다고 덤볐다가 끝까지 놀아주었던 적이 많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이 녀석의 장난기가 발동이 되면 이게 끝까지 가기 때문에 정말 지치고, 짜증이 납니다.
그렇게 되면 은근히 장난치던 수준에서 레슬링 수준으로 살짝 바뀌고 나중에는 폭력수준까지 가게 됩니다.
그럼 아이는 ‘아빠가 장난 같은데 당하는 고통은 아프니깐 표정이 좀 야릇해 지다가 결국은 울음을 터뜨리게 됩니다. 
그때 아내가 “얘, 네가 장난이 너무 심하니까 그렇지."라고 오히려 아이를 혼내지요.
그때 남편이 ‘여보 사실은 내가 좀 심하게 했어.’라고 반응을 했으면 좋지만 그때는 나도 화가 나이 있는 상태라서 아내가 아이 편을 들지 않고 내 편을 들어주니깐 고소하기도 하더라구요.

사실 놀이는 ‘생존과 직결되는 탁월한 기술’입니다.
우리가 흔히 세렌디피티(Serendipity-기대하지 않은 것을 뜻 밖에 찾아내는 재능, 행운)라는 용어를 쓰지요.
우연히 부자가 되거나 우연히 어떤 능력을 발견하는 것을 말하는데요.
이것은 ‘놀거나 쉴 때 생겨나는 것들’입니다.
아르키메데스는 ‘부피의 원리’를 목욕탕에서 발견하게 되지요.
목욕탕에 들어갔다가 물이 넘치는 것을 보고 ’이게 무슨 원리일까?’ 생각하다가 부피를 발견하게 됐습니다.
또 뉴턴도 사과나무 아래서 쉬다가 ‘사과가 왜 밑으로 떨어질까?’ 생각하다가 만유인력의 법칙을 찾게 됩니다.
즉 놀거나 쉴 때 새로운 창의성을 발견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화장실을 영어로 레세트룸(Restroom)이라고 하는 이유도 어쩌면 쉬는 공간이지만 거기에서 많은 아이디어가 생각났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최근에 이런 추세는 기업들의 Fun 경영에도 연결이 됩니다. 재미있는 회사, 행복한 회사, 살맛나는 회사 등입니다.
그 이유는 직원들로 하여금 충분히 놀게 할 때, 직원들이 충분히 재미있어 할 때 그 속에서 에너지가 생겨난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곧 팀의 연합과도 직결되고 생산성과도 직결됩니다. 결코 마이너스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지금 미국 젊은이들이 가장 가고 싶어 하는 회사 중의 하나인 ‘구글’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구글도 직원을 뽑는 기준 중 한 가지는 ‘잘 노는 직원을 뽑자’입니다.
왜냐하면 잘 노는 직원에게서 독창적인 아이디어가 많다는 것입니다. 물론 업무의 효율성도 높겠지요. 그래서 개인적으로 뛰어나는 것보다 서로가 연합해서 뛰어난 것, 시너지효과를 기대한다는 취지입니다.

그런데 노는데 젬병인 남편, 노는 것을 어려워하는 아내, 어쩌면 우리가 투자해서라도 배워야 할 기술일겁니다.
펀매니지먼트라든지 웃음치료라든지 유머를 가르쳐 주는 곳들이 꽤 많이 생겨나고 있고, 그런 쪽의 강좌들도 많아지고 있습니다.
한번 투자해 보십시오. 내가 노는 법을 배우는 것, 잘 노는 것을 배우고 아이들에게 가르치는 것은 반드시 배워야 될 기술 중의 기술입니다.
또한 부부사이에 잘 노는 것은 부부 사이에 Fun 더하는, 그래서 애정 적립금을 쌓게 되는 아주 탁월한 방법이 될 것입니다.
잘 노는 부부, 재밌게 사는 부부가 되시기 바랍니다.





자유를 꿈꾸는 사람
박상희

오늘 주제는 ‘자유를 꿈꾸는 사람’입니다. 자유는 듣기만 해도 기분이 좋아지는 단어인데요.
저의 학생 중에 한 친구는 여러 가지 모습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 중에서도 아주 대비되는 모습이 있습니다. 하나는 아주 주어진 틀 안에서 예의 바르고 모범적이고, 아주 착실한 모범생의 모습이 있고요.
어떤 때는 남들이 하지 않는 외모와 생각과 행동을 하면서 사람들을 깜짝 놀라게 할 때가 있습니다. 물론 그 모습을 보는 우리는 기쁘고 재미있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본인이 그것으로 인해 갈등을 겪는다는 것이지요.
나는 이 모습이기도 하고, 저 모습이기도 하고, 이것도 해야 하고, 저것도 해야 하고, 이것도 안 해야 하고, 저것도 안 해야 하는 딜레마에 자주 빠져서 걱정이 많습니다.

그런데 이 친구의 경우는 꼼꼼하고 시간 관리가 철저하고, 자기 관리가 철저한 어머니 밑에서 양육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O시 O분이 되면 부모님과 함께 일어나서 식사를 하고 그 후에 짜여 있는 일정에 따라서 짜여 있는 생활을 하고 그것을 못 했을 경우에는 자녀들은 그것에 맞는 벌을 받는 생활을 오래 한 것이지요.
그러다 보니까 이 학생의 마음속에는 어머니와 아버지처럼 짜여 있는 완벽한 인생을 살아야 한다는 것과 으레 엄격하고 완벽한 부모님으로부터 자란 자녀들이 그렇듯이 항상 ‘자유롭고 싶다.’, ‘도피하고 싶다.’, ‘도망가고 싶다.’ 이런 욕구가 아주 많았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런 생각이 들 때마다 주기적으로 아주 짧은 치마를 입는다든가, 머리 염색을 한다든가, 아주 생각하지도 못한 일을 저지른다든가, 이런 일탈의 모습을 보여 주었습니다.

그런데 이런 모습을 보일 때마다 본인의 갈등은 너무나 커지고 심지어는 우울하기까지 했습니다.
물론 이 친구한테 제가 객관적으로 더 어울리는 것이 무엇인가고 생각해 보면 물론 자유로운 모습이 살아날 때입니다.
그런데 참 재미있는 것은 이 친구와 제가 같이 분석 작업을 하면서 제 안에도 정말 자유롭고 싶은 마음이 있는데 일이나 가정생활, 교회생활 등으로 억눌려 있는 것을 보면서 이 친구와의 작업이 아주 잘 맞는 즐거운 일이 되었습니다.

이 친구와의 작업에서 저희는 첫 번째로 정말로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무엇을 하면 안 돼.’라는 억압하는 목소리 때문에 못 하고 있는 것은 말고, 내가 무언가 하고 싶을 때 묻어 두고 이렇게 억압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정말로 하고 싶은 것이 무엇인지 충분히 내놓는 작업을 했습니다. 그래서 우리 안에 하고 싶은 작업들이 이만큼 쌓이게 되었지요.

이 친구와 제가 마음껏 내놓은 바람들 속에서 저희는 이제 고르는 작업을 시작했습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이고, 할 수 없는 것은 무엇인지. 타협점을 찾기 시작한 것이지요.
그래서 할 수 있는 것에 대해서는 정말 억압하지 않고 억압된 목소리에 무서워하지 않고, 두려워하지 않고 마음껏 하기로 하였습니다. 할 수 있는 것이니까요.
그러나 하지 않아야 할 것, 하고 싶지만, 나를 도리어 위협할 수 있는 것들은 서로가 스스로 찾아내어 그것들을 하지 않을 수 있는 규칙을 세우는 작업을 했습니다.

그러니까 쉽게 이야기하자면 몇 가지의 규칙을 가지고 그 규칙 안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을 마음껏 하는 작업을 한 것이지요.
그래서 더 이상 부모님의 내면화된 목소리 때문에 우리를 억압하고 양면성을 갖고 괴롭게 살아가는 것으로부터 벗어나서 이제는 자유를 찾는 작업을 하고 있습니다.
여러분들도 행복하고 자유로운, 그러나 규칙 안에서의 자유를 마음껏 누리시기를 바랍니다.





찰스 멍거의 '인생역전 프로젝트'
공병호

1959년 7월 남부 오마하에 한 카페에서 역사적인 만남이 이루어지게 됩니다.
그 역사적인 만남의 주인공은 여러분이 잘 아시는 세계 최고의 투자가 워런 버핏과 지금 그와 동업관계에 있는 부회장 찰스 멍거(Charles Thomas Munger)입니다.
그 당시만 하더라도 두 사람은 굉장히 젊은 나이였고 특히 찰스 멍거씨는 변호사로 개업해서 상당한 명성을 누리고 있던 시점이였습니다.
워런 버핏은 사람을 알아보는데 탁월한 능력을 가진 사람이였습니다. ‘지금도 투자를 할 때 그 사업의 전망뿐만 아니고 어떤 대표이사, CEO 가 회사를 이끌고 있는가’이와 같은 부분에 대해서 대단히 관심있게 지켜보는 분입니다.
그런데 찰스 멍거씨를 봤을 때 “저 사람은 평생을 함께 할 만한 멋진 사람이다.” 이렇게 판단을 하게 됩니다.

그래서 찰스 멍거씨에게 이렇게 권유를 합니다.
‘당신이 아무리 변호사로서 명성을 누린다고 하더라도 큰 부자가 되기는 힘들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나와 함께 투자업을 해보면 어떻겠습니까?’라고 권유하게 됩니다.

그래서 찰스 멍거씨는 좀 망설이게 됩니다.
1965년도까지 한 6년 동안에는 전업형 투자가가 아니고 변호사업을 하면서 이따금 워런 버핏을 도와주는 관계를 유지하게 됩니다.
1965년도에 비로서 그는 변호사업을 그만두고 투자업에 전념하게 됩니다.

누군가 찰스 멍거 부회장에게 "당신은 정말 엄청난 부를 축척하게 됐는데 젊었을 때 왜 투자업에 뛰어 들기로 결심하셨습니까?, 당신은 변호사업으로도 얼마든지 성공할 수 있는 자질을 갖춘 사람인데 왜 그런 결정을 내렸습니까?"라는 질문을 했습니다.

그러자 찰스 멍거씨가 대단히 흥미로운 이야기를 하게 됩니다. ‘언제부터인가 돈을 위해서가 아니라 독립을 위해서 부자가 되기로 결심했습니다.
저는 누군가가 기대하는 것을 말하는 대신 제 자신을 말하는 것을 무척 좋아하는 스타일입니다.
워런처럼 저도 아주 멋진 페라리라는 차를 사기 위해서 투자업으로 뛰어 든 것이 아니고 제 자신의 독립을 원했기 때문에 저는 투자업에 과감하게 뛰어 들었습니다.“라고 이야기를 합니다.

이런 이야기를 제가 읽을 때 최근에 만난 한 젊은이가 생각이 났습니다.
그 젊은이는 진로 선택을 앞두고 큰 고민에 빠져 있었습니다.
한쪽의 길은 공적인 임무를 수행하는 길, 공직자로 가는 길이고, 다른 한 업무는 사업의 길로 뛰어드는 사적인 이익을 추구하는 길을 두고 무척 망설이고 있었습니다.

저는 그 젊은이에게 멍거씨의 이야기를 해주었습니다.
“저는 대가족의 가장이였으며, 제 아내 낸시와 저는 모두 8명의 아이들을 갖고 있습니다. 투자업은 갑자기 번창할 수 있지만 변호사업은 그렇게 될 가능성이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저는 물론 1965년 정도에 투자업을 통해 상당한 손실을 보기는 했지만 부자가 될 수 있는 매력 때문에 투자업을 선택했습니다.”
이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공적인 길을 선택하게 되면 큰 부자가 되기는 쉽지 않죠. 그러나 사적인 길을 선택하게 되면은 가능성은 그렇게 높지 않지만 부자가 될 수 있는 길은 이미 열려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젊은 날 전공이나 또 진로나 직업을 선택 했을 때 ‘자신의 기질, 자신이 진정으로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좀 더 면밀히 살펴 볼 수 있으면 선택에서 후회하는 일들이 드믈지 않겠느냐는 생각이 듭니다.
워런 버핏의 선택, 부회장 찰스 멍거씨의 선택은 과거만의 이야기가 아니고 오늘까지도 우리에게 주는 교훈은 무척 크다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인생을 통해서 무엇을 추구할 것인지, 또 우리가 진정으로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이와 같은 부분들을 정확히 알고 그것에 걸맞는 선택을 우리가 내릴 수 있을 때 더 나은 세상을 살 수 있지 않겠느냐는 생각을 합니다.
찰스 멍거 부회장은 하버드 경영대학원에서 강의할 때 흥미로운 이야기를 합니다.
“저는 독립적인 인간이 되고 싶어서 부자가 되려고 했고 그래서 심리학과 경제학의 교차점에서 일을 할 수 있었습니다. 저는 부의 축척에만 완전히 집착하는 것은 원치 않습니다.”라는 그의 말처럼 자선활동도 무척 열심히 하는 멋진 부자 가운데 한 사람입니다.

여러분 인생도 멋지게 한번 개척해 보시기 바랍니다.





즐기면 스트레스 뚝!
이시형

오늘 드릴 말씀은 ‘스트레스 작전’입니다.
어떻게 하면 스트레스를 잘 이겨낼 수 있는가, 스트레스를 이겨냄으로써 오히려 우리 몸을 튼튼하게 하고, 저항력을 기르고, 단련할 수 방법에 대해 말씀드리겠습니다.
스트레스라는 것은 굉장히 주관적인 것입니다. 스트레스를 객관화시켜서 이야기할 수가 없습니다.
똑같은 일도 이 사람에게는 스트레스가 되고 병이 되지만 다른 사람에게는 스트레스가 해소될 수도 있습니다.
가령 등산만 해도 그렇습니다.
대게 도시인들은 산을 올라갑니다. 스트레스를 해소하기 위해서 가는 것입니다.
그러나 등산이라는 것은 굉장히 위험한 것입니다. 자칫 잘못하면 사람이 다치거나 혹은 사람이 죽을 수도 있습니다.
그렇지만 우리는 산을 갑니다. 그 힘든 스트레스도 우리는 즐겨서 좋아서 하는 것이에요.
그 말은 스트레스도 즐겨서 신나게 재미있게 잘만 할 수 있다면 그것이 오히려 스트레스 해소가 되고 이것이 약이 될 수도 있습니다.

반대로 될 수도 있습니다.
산에 올라간다고 모두 스트레스 해소가 됩니까? 그렇지가 않습니다.
산에 나물을 캐러 가는 사람도 있고, 등산 안내자도 있습니다.
그 사람에게도 스트레스 해소가 됩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그 사람들에게는 오히려 스트레스가 축적이 되어 병을 만들 수 있습니다. 그 사람들은 싫어도 해야 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렇게 내가 좋아서 하느냐, 싫어도 억지로 하느냐, 이 차이입니다.
좋아서 하면 우리는 그것을 레저(여가)라고 부릅니다.
그러나 싫어도 억지로 하는 것, 직업은 어쩔 수가 없습니다. 취미일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이것은 노동이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스트레스에는 즐겁고 신나는 스트레스도 있습니다. 전문 용어로 ‘유스트레스(Eustress)’라고 부릅니다.
서커스를 본다든가, 아슬아슬한 영화를 본다든가, 아슬아슬한 스포츠 경기를 볼 때 손에 땀이 납니다.
정말 얼마나 아슬아슬합니까? 그렇지만 즐기는 것입니다. 이런 것이 ‘유스트레스’입니다.

여러분, 도박도 마찬가지예요. 왜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도박장에 갑니까? 스트레스를 해소하려고 가는 것입니다.
아슬아슬하고 스릴 있고 얼마나 멋있습니까?
정말 딴다는 보장만 있으면 도박도 괜찮은 것입니다. 조금 불경스러운 이야기를 했나요?

정말 레저(여가)와 레이버(노동)는 마음먹기에 달린 것입니다. 내가 신나는 일을 하면 좋은 스트레스가 됩니다.
같은 낚시도 그렇지 않습니까?
내가 신나서 취미나 재미로 하는 사람에게는 도파민, 엔돌핀 등의 좋은 물질이 분비되는 것입니다.
축구에서 한 골 넣었을 때 “와!” 하는 굉장히 감격적이고 환호에 찬 반응을 하지 않습니까?
이보다 더 좋은 스트레스가 어디 있습니까?
그러나 그것도 스트레스입니다.
얼마 전에 축구팀이 이겨서 너무 좋다고 흥분한 어느 노인이 TV 앞에서 사망한 것도 신문에서 보았습니다.
그만큼 스트레스가 신나는 것이에요.

그런가 하면 나쁜 스트레스도 있습니다.
이것을 ‘유스트레스’에 비해서 ‘디스트레스(Distress)’라고 전문가들은 말합니다.
이런저런 말 없이 그냥 스트레스라고 하면 나쁜 스트레스를 뜻합니다.
지난번에도 말씀드린 것처럼 교감신경이 흥분이 되고 고혈압이 생기고, 여러 가지 우리 몸에 질병을 만들어 낼 수도 있습니다.
우리가 비록 남들이 보기에 하찮고 싫은 일이더라도 내가 즐겨서 하게 되면 이것은 절대로 병을 만들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저는 초등학교를 4군데나 다녔습니다. 아버지가 공무원이셔서 전학을 많이 다녔습니다.
그런데 저는 전학 가는 것이 그렇게 신이 났습니다. 어렸을 때부터 외향적인 성격이었는데 우리 형은 반대였습니다.
굉장히 내성적이에요. 전학 간다고 하면 잠을 못 잡니다.
걱정이 되어 안 간다고 울기도 하고, 그러니까 똑같이 전학 가고, 똑같이 이사를 가지만 저에게는 그것이 흥분이고 유스트레스이고, 형에게는 굉장한 디스트레스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똑같은 일이지만 그 사람의 성격이나 과거의 경험, 혹은 그 사람의 생활환경에 따라서 똑같은 일도 이렇게 많이 달라집니다.

여러분, 야구 시합에서 9회 말에 감독이 “너 나가.” 했을 때 이게 그 사람에게는 핀치(위기)일 수도 있고 굉장한 찬스일 수도 있습니다.
그것이 어느 쪽이냐 하는 것은 그 사람의 성격에 달려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우리는 어떤 경우에도 스트레스를 디스트레스로 만들지 말고 유스트레스로 만드는 지혜가 필요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