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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석동의 한민족 성장DNA 추적/ 조선일보

鶴山 徐 仁 2013. 12. 4. 15: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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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 고성장 1등 공신은 스키타이와 몽골 유전자

    김석동
     
    전 금융위원장
    E-mail : seyfert213@naver.com
    경제 정책을 군사 작전에 비유할 정도로 강력한 추진력과 리더십으..
     
 
입력 : 2013.11.05 05:30 | 수정 : 2013.11.08 18:41

 

 

 

가난했던 한국, 반세기 만에 세계사의 중심무대에 등장

지난 50년간 세계 GDP는 약 7배 증가했고 한국 GDP는 약 35배 증가했다. 그래서 한국은 가장 가난하고 미래가 보이지 않던 나라에서 반세기만에 세계사의 중심무대에 등장했다.

한국 고성장 1등 공신은 스키타이와 몽골 유전자

중상주의시대 이후 「16세기 스페인」이 1940만㎢에 달하는 大식민제국을 건설할 당시(1500~1600년) 세계 GDP가 1.3배 증가하는 동안 스페인은 1.6배 증가했다. 「17세기 네덜란드」는 해양·상업강국으로(1500~1700년) 세계 GDP가 1.5배 증가하는 동안 5.6배의 GDP 확장이 이루어졌다. 「18~19세기 영국」은 산업혁명 이후 세계의 공장으로 부상했고 3670만㎢의 영토를 지배하면서(1700~1870년) 세계 GDP가 3.0배 증가하는 사이에 9.4배 증가했다.

「19~20세기 미국」은 세계 최강국으로 등장하면서 1870~1940년중 세계 GDP가 4.1배 증가하는 동안 9.5배 증가했다. 20세기 1·2차 세계대전 이후 공업화와 수출주도로 경제강국을 이룩한 일본은 1913~1970년에 세계 GDP가 5.0배 증가하는 동안 14.1배 증가했다. 세계적인 고성장으로 거대국가를 건설한 사례와 비교해보더라도 대한민국이 이루어낸 것은 역사가 기억할 작품이다.

이제 한국은 세계 15번째 국가로 발돋움했다. 우리 앞에 있는 14개 국가는 「미·중·일 등 G7 국가」 그리고 우리나라 면적의 「170배인 러시아」, 「100배인 캐나다」, 「85배인 브라질」, 「77배인 호주」, 「33배인 인도」, 「20배인 멕시코」, 「5배인 스페인」이다. 1인당 국민소득을 보면 1960년에 79달러에서 70년에 243달러, 77년에 1000달러, 96년에 1만달러, 2007년에 2만달러를 돌파했다.

수출은 70년 8.4억달러, 77년에 100억달러, 95년에 1000억달러를 각각 돌파하고 2012년 5478억달러를 기록하여 세계 7위 수출국가, 9위 무역국가로 등장했다. 1950년대 이후 세계 10대 수출국가로 진입한 국가는 일본(1960년), 중국(2000년), 한국(2009년)의 3개국 뿐이다. 우리 주력수출상품을 보면 DRAM 세계1위(65.3%), 휴대폰 세계1위 (31.1%), 자동차 세계5위 (5.8%), 조선 세계1위(48.1%), 디스플레이 세계1위(53.8%), 철강 세계6위(4.1%)다.

해외건설시장에서도 초대형 프로젝트와 플랜트시장의 강자로 자리 매김하고 세계 최고층 빌딩 중 1,2,5위는 한국건설사가 건설했다. 스포츠 강국으로 부상해서 하계․동계를 막론하고 메달 순위는 5~10위 사이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맹위를 떨치는 한류의 지구촌 확산 또한 국력과 무관하지 않다 하겠다.

이러한 국력을 토대로 한국은 80년대 후반 세계무대의 중심에 등장한다. IMF 개도국 졸업, 올림픽 개최('88), GATT개도국 졸업('90), OECD 가입('96), 월드컵 개최(2002), OECD 원조공여국(2009), G20정상회의(2010), 세계육상선수권대회(2011), 동계올림픽(2018) 등 숨 가쁘게 달려오고 있다. 물론 우리 현대사에 수많은 주름과 명암이 있었고 한국경제의 미래에 대한 걱정과 우려가 있다. 그러나 이 또한 한국민이 이룩한 위업을 덮어버릴 순 없다.

2500년간 유라시아 대륙 제패한 기마민족 DNA 덕택

기적을 이룬 고속성장의 원동력은 어디에서 기인할까. 우선 경제성장은 인력(L), 기술(T), 자본(K)의 결합이므로 이 요소들이 결정적인 뒷받침을 해왔을 것이다. 먼저 「노동력」이 우수하고 근면한 것은 세계정상의 교육열과 교육투자, OECD 국가 최고의 근로시간 등 수많은 통계가 뒷받침한다. 「기술」은 GDP대비 R&D 투자가 세계 3위, R&D 투자 절대규모 세계 7위, 국제기능올림픽에서 부동의 1위, 기술성취도(TAI) 세계 3위, 정보통신기술지수(ICT) 세계 1위 등 그동안 기술입국이라는 기치하에 성공한 나라다. 한편 「자본」은 6․25의 폐허 속에서 내․외자 총동원체제가 가동되면서 총저축률의 급격한 상승, 대외개방을 통한 외자도입 그리고 정부주도 자본조달과 배분이라는 틀을 활용하면서 열악한 자본 환경을 극복했다.

그러나, 기적은 평범한데서 나오지 않는다. 우리나라는 L,T,K 3대 요소 외에 다른 나라가 활용하지 못했던 2가지 근본적인 에너지원이 있었다. 그 하나가 「수출지향형 확장경제」, 「신산업에 대한 도전」으로 요약되는 『선택과 집중의 전략』이다. 다른 하나는 「시장·경쟁 친화적인 문화」, 「강한 성취동기와 불굴의 의지」로 표현될 수 있는 『한국인의 DNA』다.

특히, 한국인의 DNA는 주목할 부분이다. 한국인은 과거 유라시아 대초원을 무대로 활약하던 기마유목민의 DNA를 가지고 있으며 그 DNA는 엄격한 자연조건 속에서 살아남기 위해 「용감」하고 동시에 「유능」해야 살아남을 수 있었던 이들이 가지고 있던 독특한 인간유형에서 유래한다. 단재 신채호 선생은 1931년 조선일보에 연재한 「조선사」(오늘날의 조선상고사)에서 “여진·선비·몽골·흉노 등의 본래 아(我)의 동족”이라 하여 기마민족국가인 고조선에서 흉노·돌궐이 분파된 것을 갈파한 바 있다.

기마 유목민은 개개인이 강한 자부심을 가지면서 사회전체가 풍부한 자립심, 개방적이고 진취적인 가치관으로 무장되어 있으며, 탁월한 지도자의 등장, 집단의 위기 등의 시기에는 강력한 결속력을 유감없이 발휘하곤 했다. 이 기마 유목민이 주축이 된 기마군단은 혁명적인 전투력을 발휘하면서 약 2500년간 유라시아 스텝지역에서 동·서양에 걸쳐 거대국가를 끊임없이 건설해온 주역이다. 스키타이, 흉노, 선비, 유연, 돌궐, 위구르, 거란, 몽골, 티무르·무굴, 셀주크·오스만 튀르크, 금·청나라 등을 건설한 세력이 바로 그들이다. 이들이 바로 고대로부터 우리와 연결고리를 가지고 있다.

이들 역사를 재조명 하면서 한민족의 성장 DNA를 탐구해 보는 것은 의미가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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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족에 패망한 흉노, 서진해 터키를 세우다

 

 

  • 김석동
     
    전 금융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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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제 정책을 군사 작전에 비유할 정도로 강력한 추진력과 리더십으..

입력 : 2013.11.19 03:56

 

한국 고대사와 터키(上)

한족에 패망한 흉노, 서진해 터키를 세우다
1. 터키는 어떤 나라인가, 역사적 배경은?

터키는 우리 고대사와 관련해서 빠뜨릴 수 없는 국가다. 터키는 국토의 3%가 유럽인 발칸반도 남단에, 그리고 97%는 아시아인 아나톨리아 반도에 위치한 나라로 인구 8천만명, 면적 78만㎢ (우리나라의 약 8배), 8대 자원국, 6대 관광국, 그리고 6·25 참전국가로 튀르크족의 후예가 세운 국가다.

흉노의 후손으로 알려진 튀르크족은 최초의 스텝제국인 흉노(Hunnu Empire)가 한과의 전쟁 등으로 분열·멸망한 후 (AD 155) 「부민카간」이란 영걸이 나타나 552년 돌궐을 건국한다. 돌궐은 기마민족국가의 전형으로 기마유목문화의 완성기에 해당하며 최초로 유라시아에 걸친 대제국을 건설했고 그 면적은 1040만㎢에 달했다. 이후 동·서돌궐로 분리되고 각각 당나라와 위구르에 패망한 이후 일부세력은 아랍권과 연맹하여 이슬람세력화하면서 당나라에 대항했고 751년 고선지장군이 이끄는 당나라군을 탈라스강에서 격파하여 중앙아시아지역에서 이슬람세력이 뿌리 내리게된다. 이후 동돌궐부족은 유목민족의 전통을 유지하다가 불교화하고 元의 지배로 이어진다.

서돌궐부족 일부는 서진을 계속했고, 960년경 셀주크의 지휘로 실크로드를 따라 부하라·사마르칸트로 이주했고, 1037년 토그릴이 셀주크튀르크를 건국한다. 셀주크튀르크는 1071년 만지케르트 전투에서 비잔틴 제국을 격파하고 오늘날 터키 지역인 아나톨리아 반도를 차지했고 「콘야」를 수도로 룸셀주크를 건국했다. 셀주크제국이 바로 십자군 전쟁의 주인공이며 후에 몽골제국에 복속하게된다.(1243년)
셀주크제국을 계승한 나라가 1299년 Osman 1세가 건국한 오스만 튀르크다.

오스만튀르크는 발칸반도, 아나톨리아, 흑해, 헝가리, 이집트는 물론 지중해를 장악하는 대제국을 건설하였다. 발칸반도는 16세기부터 오스만 튀르크가 400년간 지배했는데 395년 동·서 로마제국이 분리 될 당시 이 지역을 경계로 하여 서부는 서로마의 카톨릭, 동부는 동로마의 정교 영향권에 있다가 오스만 튀르크 지배로 이슬람화 했다. 이후 이 지역은 종교와 민족이 복잡하게 혼재된 문명충돌의 화약고라 불리우다가 크로아티아․ 보스니아․ 코소보 등지에서 1990년대까지 현대사의 가장 참혹한 전쟁을 경험하게 된다.

승승장구하던 오스만 튀르크는 최대영토가 560만㎢(한국56배) 달했으나 에스파냐·베네치아·교황청 연합함대와 싸운 레판토해전(1571) 패전으로 지중해의 주도권을 상실하고 점차 쇠퇴하게 되었다. 1차 세계대전 패전 이후 오늘날 터키지역 이외의 지역을 대부분 상실하고, 1923 케말 아타튀르크가 대통령에 취임하면서 오늘날 터키로 계승하게 되었다.

2. 터키와 한국

터키는 1950년 6·25 당시 1개 여단병력을 파병했으며 UN군 가운데 네번째로 많은 군대를 파병했다. 참전 결정당시 터키 신문에서는 「우리는 형제를 위하여 피를 흘리러 간다.」는 제목으로 기사를 실었다 한다. 그리고 당시 출정식 터키군 여단장은 “장병여러분, 한국은 우리와 피를 나눈 혈맹국‥”이라고 하는 인상적인 연설을 했다. 즉 UN군으로 참전하여 형제국가가 된 것이 아니며, 형제국가이므로 참전한다는 선후관계를 우리는 너무 모르는 것이 아닐까.

터키군은 1만 5천명 참전하여 3번째로 많은 741명이 전사했고 UN군 중 가장 용맹했던 군대로 알려져 있다. 터키군은 6·25의 10대전투 중 2개 전투를 해낸 강군이다. 즉, 청천강변에서 중공군을 저지하고 UN군의 후퇴를 지원한 「군우리 전투」, 그리고 지금 용인시 김량장역 인근에서 중공군이 구축한 진지를 백병전으로 돌격·분쇄하여 중공군 1900명을 섬멸한 「금양장리 전투」에서 터키군의 전투력을 유감없이 세계에 과시했다.

과거 몽골고원에서 유래한 기마민족국가는 스키타이, 흉노, 선비, 돌궐로 이어지면서 하루에 200㎞를 달리는 놀라운 기동력과 강궁으로 무장한 공포의 전투력을 과시했고 이후 거란․여진․몽골도 이를 유감없이 이어받아 중세 유라시아스텝지역의 주인공으로 등장한 것이다. 과거 레판토해전에서 기마민족세력인 오스만튀르크가 패배한 것은 아무래도 기마군단이 해전에는 취약하다는 전통과 관계있다 하겠다.
터키 사람들은 한국과 같은 형제라는 의식이 있어서 애정이 남다르다./조선일보DB
터키 사람들은 한국과 같은 형제라는 의식이 있어서 애정이 남다르다./조선일보DB
내가 터키 여행시에 들은 얘기다. 터키 국민들은 축구를 너무 사랑하며, 혼자 TV를 보는 것이 아니라 광장 같은데서 모두 모여 응원을 하는 유별난 문화를 갖고 있다. 이들은 유럽리그에 참가하고 있고 터키게임은 대다수 국민이 열광적으로 응원한다고 한다. 2002년 한·일 월드컵 당시 예선전인 터키-브라질전이 한국에서 개최되고 한국인이 주심을 맡게 되었다. 그동안 유럽리그에서 편파적인(?) 대우로 가슴앓이를 해온 터키 국민은 이 소식을 접하고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한다. 그러나 전반전 터키가 브라질에 리드하던 경기가 후반 동점골이 나왔고 종료직전 브라질 선수의 헐리우드액션으로 한국주심이 터키선수를 퇴장시키는 사태가 일어났다. 결국 터키는 역전패하게 된다. 터키인들의 실망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고 하며 한국에 대해 극도의 서운함을 나타냈다고 한다.

그런데, 다행이 터키는 사상 처음 4강까지 진출하게 되었다. 이후 전 터키국민이 TV로 지켜보는 가운데 한국·터키간의 3·4위전이 시작되었다. 터키국가와 함께 초대형 터키국기가 한국관중석을 덮으면서 내려왔고 한국관중은 열화와 같이 터키를 응원했다. 바로 이 순간 모든 TV앞의 터키인들이 기립하여 울었다 한다. “역시 피는 물보다 진하다”라고. 아무튼 터키 사람들은 한국민과 한국문화에 대해 가지는 심정적 태도가 애틋하고 특별하며, 이는 과거 역사에 대한 인식에 기초한다고 본다. 이제 그 배경이 되는 과거 역사를 돌아보는 것도 의미가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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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옛날 중앙아시아에서 한국과 터키는 옆집이었다

 

 

김석동

 

전 금융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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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정책을 군사 작전에 비유할 정도로 강력한 추진력과 리더십으..

 

 
입력 : 2013.12.03 04:32

 

한국 고대사와 터키(下)

터키인들의 역사인식

터키는 기마민족이 세운 국가다. 터키에서는 그들의 조상이 몽골초원에서 유래한 튀르크족이며 서쪽으로 계속 진출하면서 건국한 셀주크, 오스만 제국까지 자기들의 역사로 인식하고 있다. 1952년 터키는 건국 1400주년 기념제를 가졌는데 그 건국기념 년도가 「부민카간」이 돌궐을 건국한 AD552년인 것이다. 터키인들은 이런 인식을 공유하고 있고 자기들의 유래에 대해 강한 자부심을 갖고 있다.

터키 초등6학년 사회 교과서에서는 튀르크의 최초 국가는 흉노(Asian Hun Empire)라고 하고 그 영역을 만주․몽골․남시베리아․북중국․위구르․티벳․중앙아시아 지역까지 포괄하여 소개하고 있다. 그리고 튀르크라는 이름으로 건국한 최초의 나라는 돌궐(the Gok Turk Empire : AD552~744)이며 위구르가 돌궐을 멸망시키고 이어 받았다 기술하고 있다.
터키 교과서의 돌궐 영토.
터키 교과서의 돌궐 영토.
초등 7학년 과정에서는 아나톨리아반도에 진출한 과정과 오스만제국의 건국에 대해 가르친다. 초등8학년 과정에서는 「아타튀르크 케말 파샤」의 현대 터키건국, 2차 세계대전 및 한국동란 참전에 대해 자세히 기술하고 있다. 중급9학년 역사교과서에서는 튀르크가 중앙아시아에서 동서로 확장되는 과정, 그들이 과거에 건국했다는 흉노, 돌궐, 위구르제국의 영역에 대해 자세히 기술하고 있다. 중급 12학년 역사 교과서에서는 제2차 세계대전과 한국동란참전에 대해 자세히 기술하고 있다.

이와 같은 터키인들의 역사인식에서 한국과 터키는 남다른 관계가 형성되는 것이라 하겠다. 우선 몽골고원에서 유래한 흉노제국을 터키의 고대역사로 보기 때문에 한민족과 혈통적으로 매우 가깝다는 인식을 갖고 있다. 그리고 역사적으로 볼 때도 돌궐이 당나라와 대결할 당시 고구려와는 동맹국가였기 때문에 지금도 한국을 형제국가로 생각하고 「칸카르데시(피를 나눈 형제)」라고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1965년 동돌궐의 영역이었던 지금의 우즈베키스탄 사마르칸트의 아프라시압궁전에서 7세기경의 벽화가 발견되었고 고구려인 사신 2명의 모습이 보이는데 우리민족이 중앙아시아 지역과 활발히 교류했던 역사가 입증된 바 있다.
그 옛날 중앙아시아에서 한국과 터키는 옆집이었다

그 옛날 중앙아시아에서 한국과 터키는 옆집이었다
우리 고대사에서 본 터키

단재 신채호선생이 1931년 조선일보에 연재한 「조선사」(오늘날의 조선상고사)에 따르면 “조선족·흉노족은 우랄어족으로 조선족이 분화하여 조선·선비·여진·몽고·퉁구스 등의 종족이 되고, 흉노족이 흩어져서 돌궐·헝가리·터키·핀란드 등의 종족이 되었는데…”, “여진·선비·몽골·흉노 등은 본래 아(我)의 동족”, “조선·만주·몽골·터키 네민족은 혈족”,“조선이나 만주나 몽골·터키·헝가리·핀란드가 3천년 이전에는 적확히 하나의 혈족”으로 밝히고 있다. 행촌 이암선생의 단군세기(※논란이 있는 기록임)는 단군시대 초기에 흉노·몽골이 고조선으로부터 분리되어 나간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기마민족국가인 고조선에서 흉노·돌궐이 분파되었고 이들 일파가 오늘날의 터키로 이어지게 되어 우리와 오늘날 터키가 남다른 깊은 관계가 있다는 것이다.

이를 좀 더 부연한다면 단군조선이 BC 2333년에 건국되었고 단군조선건국세력인 고조선족은 세월이 흐르면서 부여·선비·몽골·오환·거란·여진 등으로 이어지고, 보다 일찍이 분파된 흉노족은 이후 훈족·돌궐·위구르·셀주크튀르크·오스만튀르크·터키 등으로 이어지게 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사마천의 사기에서는 흉노를 ‘호(胡)’로 칭하고 선비 등 그동쪽 민족을 ‘동호(東胡)’로 칭하고 있다. 당시 문헌에서 호와 동호의 구별이 분명치 않으나 대체로 ‘호’는 튀르크계, ‘동호’는 몽골·퉁구스계로 보여진다. 이들이 지내온 곳, 살고 있는 곳에서는 언어는 물론, 생활풍습, 사회체제, 전쟁양식 등에서 너무나 많은 유사점들이 나타나고 있어 고대로부터의 그들의 관계가 남다르지 않다는 것을 충분히 상상할 수 있다 하겠다.

주터키 한국대사관 공관 홈페이지에는 “우리나라와 터키는 중앙아시아 부근 이웃에서 같이 활동하다가 우리나라는 동진하여 한반도에 정착하고, 터키는 서진을 거듭하여 약 8000㎞ 떨어진 아시아대륙의 서단 아나톨리아 반도와 유럽의 동남쪽 끝인 트레이스 반도에 정착하게 된 먼 역사적 배경을 공유하고 있습니다. 고려말에는 원나라를 통하여 들어온 튀르크계 위구르인들이 한반도에 정착하여 현재 3만명 가까운 후손들이 한국에 살고 있습니다. 이러한 역사적 관계는 6․25전쟁을 통하여 다시 맺어지게 되었습니다.”라고 쓰고 있다.

기마군단이 맹활약하던 유라시아 대초원(동·서 스텝지역)의 양단에 지금까지 건재한 국가가 한국과 터키가 아니겠는가? 터키인들이 민족의 기원과 자기 역사에 대해 인식하고 후손에 교육하고 있는데 반해, 오랜 고대역사를 가지고 있는 우리는 오히려 한민족의 활동 무대를 한반도 중심으로 축소하고 우리 역사를 고구려·백제·신라의 삼국시대 이후로 위축시키는 교육을 하고 있지 않은가? 과거 박은식·김교현 선생은 금사(金史)를 한국사에 포함시켜야 한다고 주장한바 있으며, 손진태 교수가 여진사와 금사를 한국사에 포함시켰던 것은 시사하는 바가 있다 하겠다. 근간에 일부 학자들을 중심으로 고조선사와 부여사를 비롯한 한국 고대사에 대한 연구와 저술활동이 계속되는 것은 다행스러운 일이다.

역사는 왜곡되어서도 과장되어서도 안된다. 그러나 보다 넓은 시야로 역사의 흐름을 꿰뚫어 보는 노력이 필요하다. 그래야 대한민국이 이룩한 현대사의 기적을 설명할 수 있고 한국경제의 성장 에너지원을 찾아나가면서 우리의 미래에 대한 청사진을 보다 자신감있게 그려볼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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