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歷史. 文化參考

[스크랩] 日本人의 역사 왜곡 (1)

鶴山 徐 仁 2013. 11. 15. 15:07
 日本人의 역사 왜곡 (1)

 

 

일본 하면 무엇 보다도 국민들이 청결하고 정직하고 공중 도덕을 잘 지키고 남에게 폐를 끼치지 않는(메이와쿠)

다는 것이 떠오른다. 일본 사회 전체가 이를 몸소 실천하는 교육의 결과 이기도 하다. 지난 고오베 대지진 때

일본인의 고통 속에서도 질서를 지키는 것을 보고 세계인이 감동 한 바 있다.

 

그러나 최근 아베 정권의 철학과 행태를 보면 대다수 일본인의 사고와는 달리 역사를 왜곡하고 부정하고있다.

최근 일본 아베 총리의 독도 영유권 주장 뿐 아니라 미야자와(宮澤)총리의 "2차 세계대전 중 일본의 식민지와

침략으로 많은 나라, 특히 아시아 제국(諸國) 여러분에게 많은 손해와 고통을 준 것에 대해 통절한 반성의 뜻을

표하며 진심으로 사죄한다"는 담화를 부정할 뿐아니라 성노예(위안부) 문제에 관해서도1993년 8월 4일 당시의

고오노(河野) 관방장관이 위안소는 당시의 군 당국의 요청에 의해 설치되었으며   수많은 위안부가 존재했음을

시인한 공식 성명을 발표하였으나 이 마져 부정하고 있다.

 

여기서 왜 일본의 지도자들은 역사 앞에서 독일 처럼 정직하지 못하고 역사를 왜곡하고 수시로 말을 바꾸는 이유

를 역사적으로 광개토대왕비와 칠지도와 임나일본부설과 끝으로 고류지(광륭사)의 반가사유상의 경우를 예로 

들어 서 살펴볼까 한다.

 

1)  광개토대왕비의 변조

 

일본서기(AD 720년) 보다 300 여년 앞서 414년에 호태왕의 아들 장수왕이 세운 광개토대왕 비문에 씌인 "왜가

바다를 건너와 신라,백잔,임나가라를 파하여 신민으로 삼았다"라는 문귀를 근거로 신공황후가 일본서기에서 신라를

쳤다는 기록을 칠지도의 명문과 함께 주장하는 것이다..


잠시 호태왕비를 살펴보면,
중국 지린성[吉林省] 지안현[集安縣] 퉁거우[通溝]에 있는 고구려 제19대 광개토대왕의 능비(陵碑)로서 비신(碑身)

높이 5.34m. 각 면 너비 1.5m. '국강상광개토경평안호태왕'(國岡上廣開土境平安好太王)이라는 광개토왕의 시호(諡號)

를 줄여서 '호태왕비'라고도 한다.

 

  모두 4면에 총 1,802자인 이 비문은 상고사(上古

史), 특히 삼국의 정세와 일본과의 관계를 알려 주는 금석문이다.
내용은 크게, ① 서언(序言)격으로 고구려의 건국

내력을, ② 광개토대왕이 즉위한 뒤의 대외 정복사

업의 구체적 사실을 연대순으로 담았으며, ③ 수묘

인연호(守墓人烟戶)를 서술하여 묘의 관리 문제를

적었다.


<광개토대왕비>

 

 

 

 

 

원문의 일부를 소개하면,

百殘新羅,舊是屬民]由來朝貢.而倭以辛卯年,來渡□破百殘□□[新]羅以爲臣民.

以六年丙申, 王躬率□軍, 討伐殘國. 古利城, □]利城, 雜珍城, 奧利城, 勾牟城,

古[模]耶羅城, [頁]□□□□城, □而耶羅[城 ], [ ]城, 於[利]城, □□城, 豆奴城,

沸□□]利城, 彌鄒城, 也利城, 太山韓城, 掃加城, 敦拔城, □□□城, 婁賣城, 散[那*]城,

[那*]旦城, 細城, 牟婁城, 于婁城, 蘇灰]城, 燕婁城, 析支利城, 巖門□城, 林城, □□□

□□□□[利]城, 就鄒城, □拔城, 古牟婁城, 閏奴城, 貫奴城, 穰]城, [曾]□[城], □□盧城,

仇天城, □□□□, □其國城. 殘不服義, 敢出百戰, 王威赫怒, 渡阿利水, 遣刺迫城. □□]

[歸穴]□便[圍]城, 而殘主困逼, 獻出男女生口一千人, 細布千匹, 王自誓, 從今以後,

永爲奴客. 太王恩赦□]迷之愆, 錄其後順之誠. 於是得五十八城村七百,將殘主弟幷大臣十人,

旋師還都.


"백잔(百殘)과 신라는 옛적부터 [고구려의] 속민으로서 조공을 해왔다. 그런데 왜가 신묘년(391)에

건너와 백잔을 파하고 신라 하여 신민으로 삼았다.

영락 6년(396) 병신년에 왕이 친히 군을 이끌고 백잔국을 토벌하였다. 고구려군이 하여 영팔성(寧八城),

구모로성(臼模盧城) 등을 공취하고, 그 수도를 하였다. 백잔이 의(義)에 복종치 않고 감히 나와 싸우니

왕이 크게 노하여 아리수(한강)를 건너 정병(精兵)을 보내어 그 수도에 육박하였다. [백잔군이 퇴각하니]

곧 그 성을 포위하였다.

이에 백잔주([百]殘主)가 인핍(因逼)해져, 남녀 생구 1천명과 세포 천필을 바치면서 왕에게 항복하고,

이제부터 영구히 고구려왕의 노객(奴客)이 되겠다고 맹세하였다. 태왕은 [백잔주가 저지른] 앞의 잘못을

은혜로서 용서하고 뒤에 순종해 온 그 정성을 기특히 여겼다. 이에 58성(城) 700촌(村)을 획득하고 백잔

주의 아우와 대신 10인을 데리고 수도로 개선하였다.

광개토대왕이 한강(아리수)을 넘어 백제를 토벌한 사실을 기록한 부분인데 놀랍게도 40여개의 함락시킨

城의 이름들이 일일이 기록되어있다.
그런데 왜가 신라를 신민으로 했다는 비문의 사실여부와 해석이 각각인데
광개토재왕릉 비문의 변조설은 다음과 같다.(최인호의 "잃어버린 왕국"의 내용과 유사)

 
< 가츠라 국장과 탁본을 뜬 사쿠오 중위 >



1880년 가을, 일본 육군 참모본부는 포병 중위 사쿠 오에게 스파이 임무를 맡겨 중국에 파견하였다.

그는 북경에서 중국어를 배운 뒤 신분을 감추고(소설에는 떠돌이 한의사 ) 만주일대를 누비다가,

1883년 4~7월경 광개토왕릉비가 있는 통구(通溝)로 들어갔다. 우연히 능비를 본 사쿠오는 이를 직접

해독한 뒤, 그 이용 가치가 큰 것을 알고는 현지인을 조수로 고용하여 탁본을 만들었다. 이때 그는

일본에 유리하도록 이른바 신묘년조 기사의 '來渡海'등 25를 변조하였다.

1884년, 스파이 사쿠오는 131장이나 되는 능비 탁본을 가지고 일본으로 돌아왔다. 수년간 비밀리에 해독

작업이 진행된 뒤 탁본은 천왕에게 헌상되었고, 해독작업의 결과는 국수주의 단체의 기관지인 회여록

(제 5집)에 발표되었다(1880).

참모본부(가츠라 국장)는 여러 차례 스파이를 파견하여 능비를 조사하였으며, 1889년 이전 어느 해에

사쿠오의 비문 변조 사실을 은폐하려고 석회를 칠하였다는 것이다. 여러개의 비문 탁본을 자세히 살펴

보면, 탁본이 만들어진 시기에 따라 글자가 다른 부분이 있다. 이는 언젠가 칠해놓았던 석회가 시간이

지나면서 떨어져 나가서 생긴 현상이다.

이는 중국으로 망명한 신채호가 1914년 현지에 가서 직접 확인하고, 〈조선상고사〉에서 비문의 "결자

(缺字)에 석회를 발라 첨작(添作)한 곳이 있으므로 학자가 그 진(眞)을 실(失)함을 한(恨)한다"고 언급한

사실이 뒷바침하고 있다.

여기서 軍國 日本이 광개토대왕 비문의 조작의혹을
김병기(51) 전북대 중어중문학과 교수가 서예학적으로 밝히고 원래의 글자를 복원했다고 주장했다.

즉 ‘百殘新羅舊是屬民由來朝貢而倭以辛卯年來渡海破百殘□□新羅以爲臣民’ 의 비문 가운데

‘渡海破(도해파)"는 원래의 入, 貢, 于가 변조된 것으로 渡, 海, 破를 겹치면 변조방식이 드러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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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작 방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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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비문에 나오는 동일 한자와 조작된 서체의 차이점>



渡자의 획이 入자의 획으로 반대 방향으로 휘어져 있는 것을 알수 았다.

한가지 재미난 얘기는 김교수가 비문을 붓으로 써내려 가다 보면 渡海破라는 곳에 오면 붓이 움직이지

않는다고 한다.

入, 貢, 于로 복원한 내용을 해석하면

‘백제와 신라는 예부터 (고구려의) 속민이었다. 그래서 줄곧 조공을 해 왔다. 그런데 왜가

신묘년 이래로 백제와 00와 신라에 대해 조공을 들이기 시작했으므로, (고구려는) 왜도 고구려

신민으로 삼았다.’로 해석한다.

 

 

           참고로 얼마전에 아깝게도 일찍 세상을 떠난 문단의 거목 최인호가 쓴 "잃어버린 왕국"의 일독을 권한다.


참고문헌:

1.차석찬의 역사창고

2.日 광개토대왕비문 이렇게 조작했다/임종업 기자

3.잃어버리 왕국/최인호

 

출처 :京畿高等學校 제56회 同期會  글쓴이:愚羊

출처 : 碧波 藝術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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