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관광객들이 많이 찾는 체코 프라하의 프라하성(城) 앞에는 한 신사의 동상이 서 있다. 동상에는 TGM이라고 쓴 동판이 붙어 있다. 바로 체코의 국부(國父) 토마스 개릭 마사리크의 동상이다. 그는 1620년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 제국 군대에게 정복된 후 지구상에서 존재조차 잊혀졌던 나라를 300년 만에 다시 일으켜 세운, 아니 만들어낸 사람이다. 그가 만들어낸 나라가 바로 체코슬로바키아라는 나라다 (1993년 체코슬로바키아는 체코와 슬로바키아로 분리되었다).
이 책은 체코의 국부 마사리크와 대한민국의 국부 이승만의 비교평전이다. 마사리크는 우리에게는 생소한 인물이지만, 구미에서는 체코의 국부로, 또 사회학의 창시자 가운데 한 사람으로 높이 평가받고 있는 사람이다.
이승만과 마사리크 두 사람 모두 당대 최고 수준의 지식인이었다. 해외로 망명한 후에는 외교-선전활동을 통한 독립운동을 했으며, 일찍부터 미국의 세계사적 역할에 주목하여 친미 노선을 견지한 투철한 반공-반소주의자라는 점에서도 공통된다. 두 사람 모두 자유민주주의의 신봉자이면서도, 건국 후에는 오랜 식민지배로 인해 국민들이 민주주의를 제대로 실천하기 어려운 상황 아래서 다소간 권위주의적 통치체제를 수립했다는 점에서도 공통된다. 심지어 두 사람이 외교독립운동 과정에서 동원한 인맥도 상당 부분 겹친다.
저자는 1부에서 두 사람의 특징을 비교한 후 2부에서는 이승만의 생애와 사상을, 3부에서는 마사리크의 생애와 사상을 살펴본다.
특히 2부에서는 이승만의 저서인 <독립정신>과 박사학위 논문 <미국 영향 하의 중립>을 중심으로 이승만의 외교독립노선의 철학적 바탕을 탐구한다. 여기서 저자는 이승만이 ‘통상(通商)을 통한 영구평화’를 추구했던 칸트, 미국 건국의 이념적 바탕이자 모교인 프린스턴대의 건학 이념인 ‘스코틀랜드 자유주의’의 영향을 받았음을 밝힌다.
마사리크의 생애와 사상을 다룬 3부는 우리에게 잘 알려지지 않은 나라와 인물을 처음 접하는 재미를 안겨준다.
저자는 두 사람의 공통점을 강조하지만, 두 사람, 아니 이후 두 나라의 역사 사이에는 커다란 차이점이 있다.
마사리크가 죽은 후 50년 동안 체코슬로바키아의 역사는 퇴행을 거듭했다. 마사리크가 죽은 다음해에는 히틀러에게 주데텐 지방을 빼앗겼고 다시 나치독일에 의해 국가 자체가 해체되었다. 2차 대전 후에는 좌우합작정부가 들어섰지만, 1948년 공산주의자들의 쿠데타로 공산정부가 들어섰다. 1989년 벨벳혁명으로 민주주의를 회복했지만, 체코와 슬로바키아 간의 오랜 지역갈등을 가라앉히지 못하고 결국은 두 나라로 갈라섰다. 분리가 평화롭게 이루어졌다는 것, 그리고 그 이후에는 두 나라 모두 정치-경제적으로 비교적 안정적으로 발전하고 있다는 것이 그나마 다행이다.
반면에 대한민국은 6.25의 참화를 겪었고, 아직도 통일을 이루지는 못하고 있지만, 지난 50여년 사이에 세계 최빈국에서 정치-경제 양 측면에서 선진국 대열에 올라섰다.
이런 차이는 어디서 나왔을까? 체코의 경우 나치독일이라는 고약한 이웃을 만난 불운을 먼저 탓해야겠지만, 결국은 동맹외교에 실패한 것이 가장 큰 원인이라고 하겠다. 반면에 이승만은 ‘벼랑끝 외교’로 한미동맹을 쟁취, 이후 대한민국이 누린 자유와 번영의 기반을 마련했다.
마치 쌍둥이 같은 두 사람의 이야기를 보면서 느끼게 되는 것은 ‘나라 세우기의 어려움’이다. ‘우리가 겪었던 건국 전후의 분열과 시행착오, 불완전한 민주주의는 우리만 겪은 것이 아니었고, 우리는 그만하면 어려운 고비를 잘 이겨내면서 여기까지 왔다’는 안도감과 함께, 세계인들이 존재조차 모르는 나라를 되찾기 위해 고군분투했던 두 나라 ‘건국의 아버지’들과 그 세대가 겪었을 노심초사를 생각하면 가슴이 아려온다.
* 월간조선 11월호에 김학은 교수가 이승만과 마사리크에 대해 기고한 글이 실렸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