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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물상] 이순신 '구국의 길'/ 조선일보

鶴山 徐 仁 2013. 10. 18. 15:17

[만물상] 이순신 '구국의 길'

 

  • 오태진 수석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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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입력 : 2013.10.18 03:14 | 수정 : 2013.10.18 11:08

     

    경남 진주 서쪽 끝자락, 수곡면 원계마을 안쪽에 슬레이트 지붕을 얹은 한옥이 있다. 밀양 손씨가 550년 넘게 살아온 '손경래 고택(古宅)'이다. 마루 위에 빛바랜 영정 하나가 걸렸다. 충무공 이순신이다. 마당엔 이순신이 삼도수군통제사로 다시 기용된 것을 기리는 비가 서 있다. 이순신은 1597년 8월 이 집에서 임금 선조의 부름을 받고 백의종군을 끝냈다. 삼도수군통제사 원균이 거제에서 배 300척을 잃고 죽은 뒤였다.

     

    ▶이순신은 그해 정월 모함에 걸려 서울 의금부에 갇혀 있다 석 달 만에 풀려났다. 진주까지 백의종군 길을 내려오며 관아 대신 민가에 묵은 것은 벼슬이 없는 처지였기 때문이다. 하룻밤 노비 집 신세를 지기도 했다. 이순신은 합천의 도원수 권율이 보낸 병사들을 마을 앞 진배미에서 훈련시켰다. '냇가로 나가 군사를 점고했으나 말도 없고 활에 화살도 없으니 소용없다.' 이순신이 절망하던 진배미 들엔 이제 비닐하우스가 들어찼다.

    
	만물상 일러스트

    ▶이순신은 삼도수군통제사가 된 그날로 진주를 떠났다. 해남 전라우수영까지 남해안을 가며 군사를 일으키고 군수품을 모았다. 이 '연안 답사' 첫날 구례를 거쳐 이튿날 곡성 능파정에서 신씨 5형제와 밤새 나라를 걱정했다. 지금 석곡 코스모스축제장이다. 순천 낙안향교를 지날 땐 백성이 눈물을 흘리며 맞았다. 보성 득량 박실마을에선 수군 폐지에 반대해 임금에 보고를 올렸다. '신(臣)에겐 아직 배 열두 척이 있나이다(尙有十二).'

     

     

    ▶이순신은 장흥 회령포에서 군사 120여명을 모아놓고 결의했다. "나라의 위태로움이 여기에 이르렀으니 어찌 한 번의 죽음을 두려워하랴. 모두 충의(忠義)에 죽어 나라 지킨 영광을 얻자." 이순신은 진도 벽파진에 진을 쳤다가 명량대첩 전날 우수영으로 옮겼다. 결전을 앞두고 이순신은 다시 군사들 앞에 섰다. "죽기를 각오하면 살고, 살려고 꾀를 내면 죽는다(必死則生 必生則死)."

     

    ▶이순신은 진주에서 해남까지 나라의 명운을 두 어깨에 지고 갔다. 393㎞ 기나긴 길 끝 울돌목(명량·鳴梁)에서 열세 척으로 왜선 133척을 물리쳤다. 그 '구국(救國)의 길'을 광양제철고 학생들이 그제부터 나흘간 가고 있다. 진주 손경래 고택과 진배미, 순천 낙안읍성 길, 회령포 해안 길은 하루 다섯 시간씩 걷는다. 포스코가 마련한 '신(新)난중캠프' 첫 행사다. 애국심, 불굴의 의지, 리더십처럼 거창한 단어는 말하지 않아도 된다. 이순신이 남긴 말과 흔적을 새롭게 듣고 보는 것만으로 가슴이 벅차오를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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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鶴山 ;

    오늘날 우리사회에서 기생충처럼 국민의 혈세나 갉아먹으며, 애국은 커녕 매국노같은 추태나 부리지 않았으면 하는 한심한 바램의 대상에 속하는 여야정치패거리들에게 고하고 싶으니, 소에게 경 읽는 꼴이긴 하겠지만 그래도 아직까지 일말의 양심이라도 남아있다면, 제발 한생을 살아가는 인생여정에서 고만들 싸우며 이속 채우기에 급급하지 말고, 감언이설과 선전선동으로 선량한 국민들 농락하지 말고 성웅으로 추앙받고 있는 이순신제독의 발꿈치에라도 미칠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제발, 원균같은 놈은 되지 말거라!

    결코, 인생은 길지 않다. 정신 좀 제대로 차려라, 에이 빌어먹기도 시원찮을 저질 정치꾼들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