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교종이 울린다. 우리반 아이들은 쉬는 시간이 끝남을 알리며 울려퍼지는 종소리에 교실 안으로 우르르 들어왔다. 하지만 부천석천중학교 3학년 4반에서는 아이들의 왁자지껄하게 떠드는 소리가 교실 안을 떠날 줄을 몰랐다. 그 당시는 2학기기말 고사까지 끝이 나서 모두 들 곧 다가올 겨울방학과 졸업식에 분위기가 한창 들떠 있었다. 선생님들은 학생들이 수업시간에 자거나, 다른 일을 하여 수업에 전혀 집중을 하지 못하는 것을 예상하여, 매시간 자습시간이나 독서시간을 주셨다. 나도 아빠가 전날 서점에서 사주신 책을 가지고 학교에 갔다.
그 책은 연두색 커버에 고등학생으로 보이는 두 쌍둥이 형제의 밝게 웃는 모습이 표지에 있는, <쌍둥이형제, 하버드를 쏘다>라는 책이었다. 두번의 자습시간에 나는 그 책을 다 읽었다. 그 책은 너무나 흥미로웠기 때문에, 쉬는 시간에도 나는 자리를 뜨지 않고 문장들을 읽어 내려갔다. 두 말썽쟁이형제 (안재우&안재연)가 부모님의 권유로 미국 펜실베니아주의 밸리포지 사관학교로 유학을 가,영어와의 싸움에서, 그리고 음악과 스포츠 활동에서 자신들의 엄청난 노력으로 ‘노력하는 바보가 천재를 이긴다’라는 말이 진심임을 증명하며 당당히 하버드 대학에서 입학허가를 받은 내용은 내 자신에게도‘노력’이라는 것이 얼마나 중요하며 큰힘을 가지고 있는지 보여준 좋은 예시였다.
다만 정말 이상했었던 건, 한 장 한 장을 경외심과 존경으로 읽어가며, 마지막 책장을 넘기는 순간, 내게는 무엇인가 알지 못할 이상한 감정이 퍼뜩 지나갔다는 점이었다. ‘나는 그분들을 만나야 한다, 그리고 그분들을 꼭 만날것이다’라는 생각이 말이다.
책 뒷장의 날개를 보니, 두 쌍둥이 형제의 이메일 주소가 나와 있었다.
나는 몇달을 한참을 고민하다가 그분들께 내 고민을 풀어놓기로 마음먹었다. 내가 어렸을 적부터 아빠가 내 방벽에 붙여 놓으셨던 세계지도를 보면서 외국에서 공부하기를 꿈꾸었던 것을 다시금 희망하는 것이 현재로서 너무 늦지는 않은 것인지, 그리고 얼마나 성공가능성이 있는지를 말이다. 내 주변인들은 지금 유학을 시작하는 것은 한국에서 알아주는 유명한 대학교로의 입학에 가능성이 희박하다는 점에서 내 유학을 극구 반대했다. 부모님도 마찬가지로 내가 첫딸이고, 가족중에 누구 한명 외국에서의 생활경험이 없었기 때문에 내 유학결정에 강경하게 반대하셨다. 나도 내 선택이 너무 두려웠고, 단순히 한 책을 통해 살아난 내 꿈의 불씨가 너무나 갑작스럽게 타올랐다가 꺼지는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무서웠다. 하지만 나는 그 순간 더 큰 확신이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내 꿈의 불씨가 더욱 커져 큰 불꽃을 만들어낼 것이라는 생각을 말이다.
이메일을 확인했다. 두 쌍둥이 형제중에 큰형인 안재우씨가 나에게 값진 조언이 담긴 메일을 보내주셨다. 이때부터 나는 안재우씨를 선생님이라고 불렀었는데, 이는 그분이 내 인생에서 큰 영향을 주신 멘토였기 때문이었다. 선생님은 내게 자신이 여태껏 받았던 수천 통의 편지중 내것 만큼 큰 호소력을 가진 내용은 없었다고 했다.
선생님도 유학을 가기 전에 나와 똑같이 힘들어 했었고, 고민했었다고 말이다. 선생님은 또 다음날 직접 전화를 내게 해주신다고 했다. 그리고 다음날 아침, 나는 선생님과 전화를 통해 내 고민에 대해서 이야기를 해볼 수 있었다. 선생님은 나의 미국 유학 선택을 적극 찬성했다. 왜냐하면 미국 유학으로 내가 한국의 고등학교 시절엔 배울 수 없는 것들을 더 많이 보고 경험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따라서 내가 그곳에서 시간이 지남에 따라 훨씬 더 성숙해질 수 있음을 그분은 확신했다. 또한 내 꿈과 포부가 큰 이상, 내 선택에 내가 후회할 일은 없을 것이라고도 했다. 물론 선생님은 내게, 미국에서곧 겪게 될 많은 시련과 逆境(역경) 그리고 헤쳐 나가야 할 많은 장애물들을, 절대 포기하지 말고, 끊임 없는 노력으로 이겨내기를 서로 약속하자고 했다. 나는 선생님과 이를 굳게 약속했고, 이로써 내 미국 유학 항해의 첫 서막이 올랐다.
조인정
누군가의 힘이 필요한 순간이었다. 뿐만 아니라, 내가 가기를 원했던 미국 동부의 사립학교나 보딩스쿨은 대부분 가격이 오천만원 이상이었기 때문에, 나는 그 놀랄 만한 액수에 기겁했고 부모님께 재정적인 부담을 여쭙기 죄송했다. 조금 더 저렴하게 미국유학을 갈 수는 없을까? 나는 며칠 인터넷을 통해 저렴한 방법으로 갈 수 있는 미국유학을 조사해보았고, 그 당시 내가 읽었던 어떤 캐나다 유학생들을 소개한 책을 통해 ‘고등학교 교환학생 프로그램’을 접할 수 있었다.
대학생들만 할 수 있는 것이라고 여겼던 교환학생 프로그램을 미국 국무부에서 외국의 고등학교 학생들에게도 1년 동안 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 것을 알게 된 순간, 나는 너무 기뻐 환희의 소리를 질렀다. 교환학생 프로그램을 하는 학생들은 미국의 사립 또는 공립 학교 중 한 개를 선택할 수 있었고, 미국 현지에서 호스트를 하는 가족들과 일년 동안 함께 살 기회도 동시에 있었기에, 나로서는 공부와 호스트 생활을 한꺼번에 할 수 있어 一擧兩得(일거양득)이었다. 그리고 여기의 호스트 가족들은 학생들에게서 따로 급여를 받는 것이 아니라, 순수하게 봉사를 하며 외국 문화를 접하는 것이 가장 큰 목적이었기 때문에, 사립학교 유학보다 훨씬 더 저렴했다.
그러할 무렵, 엄마가 강남의 모 유학원을 내게 소개해줬다. 나는 그곳의 오리엔테이션에 참가했고 교환학생 프로그램 신청도 했다. 내 영어실력을 평가하는 SLEP TEST도 쳤다. 이제 남은 건 나를 한 명의 가족으로 환영하는 한 호스트 가족과 학교에서의 연락을 기다리는 것뿐이었다.
미국의 고등학교 학기는 한국과는 다르게 9월에 시작했기 때문에 나는 중학교 졸업 후 남은 반년 동안 부천 여자고등학교에 재학하기로 했다. 더군다나 내가 당시에 미국에서 3년의 고등학교 생활을 모두 이수할 것인지, 아니면 짧게 일 년만 경험을 하고 올 것인지에 대해 불확실했기 때문에, 만약 일 년 후 한국 고등학교로 돌아올 것에 대비하여 女高를 다니기로 결정한 것이기도 했다.
어느 날 학교에 있는 나에게 아빠로부터 한 통의 전화가 왔다. 우울하게 가라앉은 목소리였다. 나는 당연하게 이쯤에서 나를 받아줄 호스트와 학교를 유학원에서 찾았기 때문에 아빠께 알려줘서 그 소식을 아빠가 나에게 전달하기 위해 전화를 하신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하지만 아빠가 하신 말씀은 불행하게도 오하이오주에 있는 한 학교에서 내 프로필을 보고 나를 학생으로 원하지만, 그 주변의 한 호스트는 유럽인만을 원하기에 나를 가족의 일원으로 받아줄 수 없다는 내용이었다. 순간 너무나 억울해서 눈물이 내 앞을 가렸다. 미국에 인종차별이 많다는 것을 예전부터 빈번히 들어왔지만, 미국을 가기 전부터 내가 차별의 피해자가 되니 나의 두려움은 한층 더 증폭되었다.
다행히 며칠 후, 미국 중북부 위스콘신 주의 어느 호스트 가족이 나를 가족 구성원으로 수락한다는 소식을 들었고, 나는 그 집 주변에 있는 Eagle Christian Academy라는 크리스천 학교에서 고등학교 수업을 받을 것이라고 했다. 안타깝게도 위스콘신의 호스트 가족은 내 사진과 프로필, 학교 성적에 대한 세세한 사실까지 알 수 있었지만, 나는 그 가족의 기본적인 정보만 제공받았다. 내가 살게 될 곳은 정확히 Wisconsin주 Richland Center라는 동네였고, 나는 Jongquist 가족과 살게 될 것이었다. 그 가족은 현재 집에 엄마, 아빠, 10살 짜리 딸, 9살 짜리 아들, 그리고 여덟 살의 쌍둥이 딸들이 함께 살고 있었다. 이것이 내가 알 수 있는 최대한의 정보였다. 나는 아이들이 많은 집으로 가는 것이 조금은 힘들 것이라는 것을 예상했지만, 한편으로는 그들과 놀며 쉽게 영어를 배울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나는 그 집에 대한 한 줄의 프로필을 보며 따뜻한 가정집으로 상상하여 이미지화 시켰고, 그 한 줄 외 베일에 가려진 더 많은 진실들을 그때는 알지 못했다.
인천공항에서 시카고를 거쳐 위스콘신 주의 중심 도시 메디슨에 도착하기까지 약 14시간의 긴 비행을 했다. 미국행 비행기를 타기 위해 인천공항에서 부모님과 마지막으로 작별 인사를 할 시간이 오자 나는 내 앞을 흐르는 눈물을 멈출 수 가 없었다. 나의 17년 인생에서 처음으로 가족과 오랜 시간, 그것도 나 혼자서 他地에 떨어져서 남과 함께 새로운 환경에서 살아야 한다는 것을 생각해보니 지레 겁이 들고 앞이 캄캄했다.
여권을 검사하고 게이트 문이 열리자 마치 나의 새로운 미래로 향하는 문이 열리는 듯했고, 나는 그 문이 다시 닫힐 때까지 엄마와 아빠가 나를 향해 손을 흔드시는 것을 끝까지 지켜보았다. 내가 탄 첫번째 비행기는 인천공항에서 시카고 공항까지 13시간을 쉬지 않고 비행했는데, 내 좌우로 모두 외국인이 탔기 때문에 나는 더 겁이 났다. 다행히도 내 왼쪽에 앉아 있었던 혼혈인 (한국인과 미국인 사이에서 태어난) 언니가 내가 비행기 안에서 작성해야 할 몇 가지 서류들을 어떻게 쓰는지 도와주었기에 많이 어렵지 않게 해낼 수 있었다.
그런데 내가 이 서류를 작성할 때 필요한 여권번호를 찾기 위해 비자가 있는 부분의 여권을 펼치는 순간 나는 깜짝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 안에는 엄마가 비밀로 보내신 작은 분홍색 봉투에 담긴 편지가 끼여 있었기 때문이다. 편지 봉투에는 엄마의 트레이드 마크인 하트가 그려져 있었고, 그 안에는 ‘내 사랑 인정’이라는 말이 쓰여져 있었다. 편지를 감히 열어보기도 전에 눈물이 볼을 타고 흘러내렸다.
편지에는 엄마가 얼마나 나를 자랑스러워 하는지, 나를 떠나 보내는 것이 얼마나 마음이 아프고 허전한지, 하지만 꿈을 향해 떠나는 내 旅程(여정)을 엄마가 얼마나 흐뭇하게 생각하시는지에 대한 모든 사랑의 마음이 한 장의 종이에 다 담겨져 있었다. 이 편지는 훗날에도 내가 지갑속에 넣고 다니면서 힘들 때마다 꺼내어 보곤 했는데, 그때마다 한국에 남아 있는 가족들을 생각하면서 내가 하루하루를 견뎌낼 수 있는 원기회복제와 같이 큰 힘이 되었다.
위스콘신의 메디슨 공항에 드디어 도착했다. 문제는 어디에서 내가 한국에서 보냈던 수화물을 찾느냐였다. 너무나 많은 미국인들이 공항에 있는 모습에, 나는 곧 낯선 이방인이 되어버렸고 그들의 視線(시선) 하나하나가 곧 레이저 빔으로 나를 압박했으며, 내 심장 박동수는 거의 절정에 달했다. 다행히도 나는 내 앞 좌석에 앉아 있었던 한 남자의 옷모양을 기억해놓고 있었으므로 비행기에서 내리자 그의 뒤를 조심스럽게 밟았다. 그도 분명히 짐을 찾아야 할 거라는 예상 하에 말이다. 다행히도 내 예상은 적중했고 그는 수화물을 찾는 곳으로 갔으며, 나도 내 수화물을 찾을 수 있었다.
그곳에는 또 내가 한국에 있는 동안 그토록 상상했었던 나의 호스트 가족이 ‘InJung, Welcome to Wisconsin!’이라는 종이를 들고 서있었다. 나는 떨리는 목소리로 어색하게 웃으며 첫 인사를 건냈다. 호스트 엄마는 조금 뚱뚱한 백인이었고, 한 통통한 여자 백인 아이와 라틴계로 보이는 세 명의 아이들이 나에게 자기들 소개를 했다. 곧 호스트 아빠가 내 짐을 자신의 차에 옮겨 줬고 드디어 나는 정식적으로 Jongquist 가족의 한 멤버가 되었다. 작은 벤 안에 있는 동안, 분명히 여러가지 이야기를 했던 것 같은데, 현재로서는 생각이 잘 나질 않는다. 이건 분명 그 당시 내가 너무나 떨려서 제대로 호스트 부모님과 아이들 얼굴을 쳐다보면서 이야기를 할 수 없었고, 또 나는 겁을 먹어 전혀 집중을 할 수 없는 정신분열의 상태였기 때문에 우리가 나눴던 모든 이야기들은 내 한 귀로 흘러 들러와 한 귀로 흘러나갔다.
나의 첫 음식은 호스트 엄마가 사준 페퍼로니 피자 한 쪽과 라지 사이즈의 콜라였다. 나는 배가 고파서 콜라를 큰 걸 시켜 주신다길래 속으로 좋아했었는데, 막상 직접 본 콜라는 거인이 먹어도 될 만큼 엄청난 슈퍼사이즈였다. 피자도 한국 것과는 다르게 너무 짜서 결국 먹다가 버리기를 택할 수밖에 없었다. 내가 그 당시 쓰던 일기에 따르면 ‘저녁은 우유에 찐 감자와 고기국물을 섞은 것이었는데 너무 짜서 먹다가 남겼다’고 나오는데, 찐 감자와 고기국물은 mashed potato와 gravy sauce를 말하는 것으로 정말 미국에서 먹은 최악의 음식이었다.
일단 그 음식은 그 자체만으로 엄청난 문화적 충격이었다. 어떻게 으깬 감자에 고기국물을 섞어서 먹는 음식이 있단 말인가? 어떻게 그 음식이 한끼의 식사가 될 수 있단 말인가? 엄마의 얼큰한 김치찌개와 따뜻한 밥이 너무나 그리웠다.
나의 호스트 엄마는 유치원 선생님이셨는데, 내가 다니던 학교에서 근무하셨다. 우리 학교는 작은 크리스천 학교였고, Pre kid라고 불리는 유치원생부터 고등학교 학생들까지 같은 건물 안에서 공부를 했다. 호스트 아빠는 트럭 관련 일을 하셔서 아침에 일찍 나가셨다. 에비라고 하는 여자애는 그 두분 사이에서 태어난 열 살짜리 딸아이였는데, 나와 같이 한 방을 쓰게 되었다. 또 주싸야라고 하던 귀여운 남자아이와 쌍둥이 자매인 제니퍼와 지오마라는 사실 혈연이었는데, 그들은 라틴계 미국인으로 나의 호스트 부모님께 어릴 때 입양된 아이들이었다. 다행히 첫 날에는 아이들이 내게 친근하게 다가와 자기 소개를 하며 잘해줘서 너무나 고마웠고, 내 침대를 에비 옆에 내 주시며 잠자리를 잘 챙겨주시는 호스트 부모님께 너무 감사했다. 물론 이 날은 내 호스트 생활이 행복의 시작을 알리는 동시에 마침표를 찍는 날이었다. 그날부터의 생활들은 하루하루가 내게 엄청난 고통과 시련이었다.
조인정
두 번째 날부터 나는 호스트 엄마의 진짜 모습을 보게 되었다. 남들 앞에서의 상냥한 모습은 온데간데 사라졌고, 그녀는 가족들을 100% 다른 모습으로 대했다. 나는 그녀의 시중 노릇을 해야 했으며, 동시에 보모 역할을 소화해야만 했다. 호스트 엄마는 우리 학교의 유치원 선생님이었기 때문에, 나는 수업이 3시에 끝나는 동시에 호스트 엄마가 있는 교실로 갔다. 나와 같은 학교를 다니는 내 호스트 동생들 (에비, 주싸야, 제니퍼, 지오마라)도 그곳으로 왔고, 우리는 그녀가 퇴근할 때까지 참을성 있게 그녀를 기다려야만 했다. 문제였던 것은 유치원 아이들 몇 명이 항상 부모님께서 데리러 올 때까지 있어야만 해서 우리는 그들이 떠날 때까지 마찬가지로 교실을 뜰 수가 없었다. 나는 호스트 엄마의 명령대로 그 유치원 아이들을 돌보았고, 동시에 네 명의 호스트 동생들 (10살, 9살, 두명의 8살)까지도 돌보았다. 나는 그들과 장난감 놀이를 하고, 색칠공부를 하고, 그네를 밀어주고, 미끄럼을 타는 등 나로서는 할 수 있는 최대한의 노력을 들여 호스트 엄마를 조금이라도 더 도와드리려고 했다. 그런데 호스트 엄마는 교실 청소도 나와 내 호스트 동생들에게 시켰고, 나는 그녀가 업무를 마치는 밤 8시까지 학교에서 아이들과 놀아주고 청소를 하며 집에 가기를 손꼽아 기다렸다.
그렇지만 밤이 너무 늦어, 호스트 엄마가 저녁 식사를 차려 주실 수가 없었으므로 우리는 항상 가까운 패스트푸드 레스토랑에 들려 끼니를 해결해야만 했다. 거짓말이 아니라 우리는 거의 매일을 맥도날드, 피자헛, 서브웨이, KFC, Dairy Queen, Culver’s 와 같은 패스트푸드 레스토랑에 들러 드라이브 스루로 음식을 주문한 후, 그 음식을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차에서 먹거나 아니면 집에 돌아와 함께 먹었다. 나는 처음 두 달간 내가 먹고 싶은 패스트푸드를 메뉴판에서 골라 시킬 수 있었고, 열 살 에비도 자신이 원하는 음식을 주문했다.
하지만, 불행히도 9살 남자아이 주싸야와 8살 쌍둥이 자매 제니퍼와 지오마라는 그러할 권리가 전혀 없었다. 내가 전에 이야기에서 언급했듯이, 이 세 명은 라틴계 미국인으로 血緣이었고, 우리 호스트 부모님에게 어렸을 때 입양 되었다. 호스트 엄마는 입양된 이 아이들에게 정말이지 심하게 엄격했는데, 특히 음식을 주문할 때 이 아이들은 맥도날드에서 가장 싼 달러메뉴나 다른 패스트푸드 레스토랑의 키즈밀밖에 시킬 수 없었다.
가끔 인스턴트 음식을 집에서 요리한 날도 상황은 예외가 아니었다. 예를 들어, 냉동피자를 오븐에 데운 날에는 그 입양된 아이들은 한 쪽이나 두 쪽이라는 특정 양의 피자를 호스트 엄마로부터 지정 받았고, 그 들은 그릇을 손과 혀로 깨끗이 닳도록 핥아먹었지만 더 달라는 말을 전혀 입 밖으로 낼 수 없었다. 하지만, 호스트 부모님 사이에서 태어난 에비라는 아이의 상황은 전혀 달랐다. 에비는 빈 접시를 받아 자신이 먹고 싶은 종류의 피자를 맘껏 받을 수 있었고, 접시를 다 비운 후에도 피자를 더 가져와 먹을 수 있었다. 물론 음식을 더 가져오는 것은 부모님의 동의가 필요했다. 나는 가끔 모두 식사를 끝내고 부엌에서 나가, 나와 입양된 아이들이 식탁에 홀로 남아 있던 경우에 내 음식을 몰래 그들의 접시에 덜어주곤 했는데 그 때마다 아이들은 처음에는 사양을 하다가 곧 그 음식들을 허겁지겁 목구멍으로 넘겼다. 통통한 에비에 비해 한참 말라있던 그 아이들을 보면 볼수록, 동화 속 계모가 자신의 자식들과 신데렐라를 차별하는 것 같이 보여 너무나 안타까웠다.
학교에서 집으로 돌아왔을 때는 이미 늦은 밤이었는데, 이때부터 나의 청소는 시작되었다. 호스트 엄마 자신은 전혀 집 안 청소에 손을 대지 않았는데, 그녀는 나와 호스트 동생들에게 모든 청소를 분담시켰고, 따라서 나는 매일 밤 화장실 청소를 해야만 했다. 일층과 이층에 있는 화장실의 바닥을 닦고, 변기통 안을 솔로 문지르고 닦고, 너저분해 있던 세면도구와 빨래더미, 수건더미를 정리했다. 또 매일은 아니지만 이틀에 한 번 꼴로 나는 居室, 차고, 부엌 그리고 내 방을 청소해야만 했다. 그러던 중 생겼던 몇 가지 가슴 아팠던 에피소드를 말해보고자 한다.
어느 날 혼자 이층의 화장실 청소를 하던 중 나는 이상하게 생긴 내 팔뚝만한 길이의 나무 판자를 발견했다. (이층 화장실은 사실 내가 가장 청소하기 싫어하는 구역이었는데, 그 이유는 바로 화장실 옆에 호스트 부모님이 주무시던 안방과 연결되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이 곳은 가장 신중하게 어떠한 실수도 내지 않고 청소를 해야 했고, 그렇지 않다면 그 다음날 나는 된통 혼이 났다.) 내가 발견한 그 나무 판자에는 “Board of Education”이라고 쓰여져 있었고, 한참이 흐른 후에야 나는 그 나무판자의 용도를 알게 되었다. 호스트 엄마는 정말 세상에서 가장 사소하고 쓸데없는 일로 자신의 아이들을 혼냈는데, 예를 들어 어느 날 아침에 모두가 학교에 가기 위해 차에 올랐는데 호스트 엄마는 자신이 깜박하여 들고 오지 않은 검은 색 점퍼를 주싸야에게 시켜 가져오게 하였다. 그 아이는 조금 늦게 왔고, 엄마에게 점퍼가 안방 어디에 있는지 몰라서 한참을 찾았다고 해명했지만, 그 날 밤 그 아이의 취침시간은 평소보다 한 시간 반이나 앞당겨졌고, 저녁을 굶어야 했으며, 그는 그 나무판자로 매 타작을 받았다. 이렇다 할 일이 거의 매일 끊이지 않고 일어났기 때문에, 나는 밤마다 일층에서 들려오는 아이들의 울음소리에 마음이 저려 내 방에서 몰래 눈물을 훔치곤 했다.
나의 기상 시간은 아침 6시였던 걸로 기억한다. 그런데 어느 날 아침 5시 30분쯤에 침대에서 잘 자고 있던 나는 난데없는 봉변을 당했다. 호스트 엄마가 갑자기 방문을 덜컥 열고 들어오셔서 방 불을 키더니, 나에게 소리를 지르며 당장 일 층에 있는 부엌을 청소하라고 했다. 이게 도대체 왠 새벽의 날벼락인가? 그 이유인 즉슨, 내가 어젯밤에 부엌을 청소했고, 호스트 아빠가 아침에 출근하실 때 그곳을 검사했는데, 썩 마음에 들지 않았던 모양이었다. 나는 잠이 덜 깬 눈으로 비틀거리며 일 층으로 내려가 싱크대를 빛이 나도록 행주로 문질러 닦았고, 食器세척기 안에서 깨끗하게 씻겨진 접시들을 찻장 안에 넣어 정리한 후 호스트 엄마에게 다시 검사 받았다.
하지만 청소뿐만이 아니라 그녀의 말 한 마디 한 마디와 내게 대하는 행동은 시간이 지나면서 점점 더 심해졌고, 이는 내 숨통을 쥐어 고통을 줬지만 나는 반항 한 번 할 수 없었다. 약간의 반항은 곧 내 인생의 종말을 부르는 일과 마찬가지였으므로. 나는 그녀에게서 핸드폰을 하나 받았는데, 이것은 가족 요금제로 되어있었으며, 그녀는 내게 매달 사용비로 $40를 요구했다. 한국은 미국보다 15시간이나 빨랐기 때문에, 한국에 있는 가족에게 전화를 하기 위해서는 밤 9시에서 10시 사이가 가장 적합했다. 그런데 나와 한 방을 쓰던 에비에게는 bed time이 있었기 때문에 9시면 방 불을 꺼야만 했다. 나는 그 날 에비에게 엄마와 잠깐의 전화를 하는 것에 대해 미리 용서를 구하며, 깜깜한 방 안에서 조심스럽게 한국 번호를 눌렀다.
조용히 엄마와 행복한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그 순간, 갑자기 방문이 열리더니 호스트 엄마가 내게 소리를 지르며 지금 뭘 하고 있느냐고 물었다. 그녀의 악랄한 목소리와 인상을 쓴 얼굴은 나를 고양이 앞에 놓인 작은 생쥐처럼 공포감에 휩싸여 바들바들 떨게 했다. 그녀는 내게 에비를 방해하지 말고 당장 일 층으로 내려가 전화를 받으라며 손찌검을 했고, 나는 일층과 이층 사이의 계단에 쪼그려 앉아 조용조용히 울며 전화를 받았다.
전화가 끝난 후에도 그녀는 내게 엄마가 도대체 어떠한 연유로 내게 전화를 걸었냐고 물어보았고, 이 시간에 전화하는 엄마가 이상하다고 말했다. 그녀에게 한국과 미국 시간의 차이를 설명하고 싶었으나, 내 온몸은 그녀의 차가운 시선에 굳어버렸고 목도 메여서 한 마디도 내뱉을 수가 없었다. 후에도 가끔 한국에 있는 가족들과 짧게 전화를 할 때, 그녀는 내게 집안에서 한국어를 쓰지 말라고 겁을 주었다. 그녀에게 난 단지 영어를 배우러 온, 그래서 영어만 써야 할 의무를 가진, 더불어 그녀의 말에 복종해야 할 외국인이었기 때문이었다.
나의 학교였던 Eagle Christian Academy에서 나는 컴퓨터, 스피치, 생물II, 바이블, 드라마, 그리고 지리를 수강했다. 시간표는 A day와 B day로 나누어져 있어서, A day에는 컴퓨터, 스피치, 생물 II, 바이블을 들었고, B day에는 컴퓨터, 드라마, 지리, 바이블을 들었다. 하지만 일 교시를 시작하기 전 15분 정도는 디보션(devotion)이라고 하는 성경책의 몇 구절을 읽으며, 학생들과 선생님이 그 구절의 깊은 교훈에 대해 이야기를 해보는 시간을 가졌다.
나는 그 학교에서 두 명의 한국인이었던 녹경언니와 충희를 만났고, 이 둘은 내가 이 곳에 진학 할 동안 호스트 엄마에게 시달려 정신적으로 힘들었던 나를 항상 가장 옆에서 도와주고 진심으로 걱정해주며, 내가 어려운 일이 있을 때마다 기댈 수 있었던 고마운 존재였다. 이 학교는 또 코스타리카의 어떤 국제 학교와도 연관되어 있어서, 매 년 몇 명의 코스타리카 학생들이 미국 교육을 받기 위해 이 학교로 전학을 왔다. 내가 다니던 때에도 남자 다섯 명과 여자 한 명이 코스타리카에서 왔는데, 스페인어를 쓰는 그들과 많이 친해지면서, 스페인 단어들도 배웠고 수업시간에도 그들과 잘 어울려 어렵지 않게 미국 학교 수업에 적응할 수 있었다.
물론, 나는 친하게 지냈던 미국 친구도 많지는 않았지만 몇 명 있었다. 그 중에 한 명이 라이베리아 라고 하는 작은 아프리카의 나라에서 이민 온 메이라고 하는 여자 아이였는데, 그녀는 착한 심성을 가지고 있었으며 그녀의 재미있는 이야기들을 듣고 있노라면 나는 호스트 엄마에게서 받았던 스트레스를 금세 잊어 버리곤 했다. 그런데, 어느 날은 수업이 끝나고 돌아온 내게, 한 번도 그런 적 없던 호스트 엄마가 진지한 목소리로 내게 할 이야기가 있다고 말했다.
그녀는 내게 얼마나 내가 메이와 가깝게 친구로서 지내는지에 대해서 물어보았다. 그리고는 곧 메이의 흉을 보면서 메이는 곧 나를 배신할 것이며 가깝게 지내서는 안 될 사악한 아이로 비유했다. 내 마음 속의 메이는 전혀 이렇다 할 아이가 아니었으므로, 나는 호스트 엄마 말에 그 순간만 응수하려고 하였지만, 그녀는 순간 내가 메이와 학교에서 같이 말을 섞는지 쭉 지켜볼 것이라고 겁을 주었다. 대신 그녀는 학교에 다니던 다른 미국 아이의 이름을 언급하며, 그녀와 친하게 지낼 것을 내게 권유했다. 후에 내가 알게 된 사실은, 호스트 엄마는 메이와는 다른 기독교 교단을 따랐고 따라서 내게 자신과 같은 기독교 교단을 믿는 미국의 여자아이와 내가 친하게 지내기를 바랐던 것이었다.
미국 학교에서는 선생님들이 학생들에게 숙제를 내 주고, 학생들이 그 숙제를 얼마나 노력하여 수행했는지를 중요하게 여기는데, 이것은 이제 내게도 해당되는 문제였다. 하지만 나로서는 숙제를 할 수 있는 충분한 시간과 여건이 전혀 주어지지 않았는데, 이는 앞서 말했듯 학교를 마친 후, 나는 호스트 엄마의 유치원 교실에서 아이들을 돌보아야 했고, 그녀의 업무가 끝난 후 밤 늦게 집으로 돌아오면 곧바로 청소를 시작해야 했기 때문이었다. 또한 애비에게 bed time이 주어졌기에 늦어도 9시 반에는 방 불을 꺼야 했으므로, 나는 전혀 숙제를 끝낼 수 있는 여유가 없었다. 하지만, 나는 재우 선생님과 유학 전 한국에서 했던 ‘어떠한 장애물이 내 앞길을 막더라도 그것을 헤쳐나가야 한다’ 라는 약속을 절대로 잊을 수가 없었다.
나의 목표와 꿈을 이루기 위해서 숙제는 내 인생의 길목에 선 한 부분이었고, 나는 무슨 일이 있더라도 이를 끝내야만 했다. 어떠한 역경도 나의 앞길을 막을 수는 없었다. 방은 불을 꺼 칠흑같이 깜깜했는데, 또 우리 방문은 호스트 엄마의 명령으로 닫을 수가 없었다. 잠자리에 들어 몇 분 후면 호스트 엄마가 나와 애비가 잠을 자고 있는지 체크를 하러 잠시 들렀고, 잠이 오지 않는 날에는 일부러라도 눈을 감고 있었지만 나는 그녀의 따가운 시선을 감지할 수 있었다. 한 2미터 정도 되는 복도를 앞에 두고 우리 방과 안방은 마주보고 있었는데, 나는 얼마 있지 않아 11시 또는 12시가 되면 호스트 부모님도 잠자리에 드신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왜냐하면 이 순간, 바로 그들이 방에서 시청하고 있던 TV소리가 꺼지는 순간이었기 때문이었다.
나는 9시부터 그들이 방에서 TV를 보는 동안, 이불을 푹 덮고 엎드려 한국에서 비상용으로 가져온 휴대용 손전등의 불빛을 의지해 영어 단어를 외웠다. 그리고 몇 시간 후 TV소리가 멈추는 순간에는, 제대로 침대에 앉아 숙제를 하거나 그 다음 날 있을 시험 공부를 했다. 물론 왼손에 들고 있던 손전등은 몇 분 동안 들고 있으면 팔이 떨어져 나갈 만큼 큰 고통이었지만, 숙제와 시험공부를 마쳐야 한다는 내 강한 의지에 비하면 이 정도의 아픔은 별 것도 아니었다. 왼손으로는 손전등을 들고, 오른쪽 발로는 교과서의 책이 다음 장으로 넘어가는 걸 막고, 오른손에는 연필을 잡고 노트에 숙제를 해나갔던 것은 곧 영화에서의 007작전을 방불케 했다. 안 방에 있던 두 부부의 작은 뒤척임에도 나는 소스라치게 놀라, 손전등을 엄청난 속도로 껐고, 微動(미동)도 하지 않아 내가 아직도 깨어있다는 것을 그들이 눈치채지 못하게 했다. 매일 밤 나는 긴장의 끈을 놓을 수가 없었지만, 동시에 나의 학교성적은 우수하게 유지될 수 있었다.
조인정
그 날 저녁, 호스트 엄마는 나를 불러내어 내가 들고 잤던 손전등의 용도를 물어보았다. 그 전날 밤, 사실 그녀는 새벽에 화장실에 가기 위해 잠시 일어났고 방으로 돌아오는 길에 잠깐 내 방에 들렀는데, 곯아 떨어졌던 나의 모습과 그 손전등을 목격한 것이었다. 내 얼굴은 붉게 상기되었고, 그녀가 분명 어떠한 벌을 내릴까 싶어 속이 타고 입술이 바짝바짝 말랐다. 그녀는 더 이상 한 밤중에 공부하지 말라고 내게 호통을 쳤지만, 목표를 이루어야 한다는 나의 강한 집념은 꺾지 못했다. 나는 그녀에게 학교에서 좋은 성적을 받아야 함은, 내가 이루고자 하는 목표에 다가갈 수 있는 한 단계임을 힘주어 강조했지만, 그녀는 강경히 내 의견에 반대했다.
자유롭게 공부 한 번 할 수 없었던 그때에 나는 한국에서의 ‘야자’시간이 너무 그리웠고 한국으로 다시 돌아가고 싶었다. 나는 내가 하고 싶었던 공부를 하지 못하는 것에 너무 억울해 울분이 터졌다. 그 사건 후, 매일 밤 9시 30분만 되면 그녀는 더욱 철저히 내 잠자리를 검사했고, 내가 공부를 할 수 없도록 주의를 주었다. 하지만 며칠 후, 호스트 아빠가, 공부 문제로 혼이 났던 내가 안쓰러워 보였던지, 호스트 엄마에게 부탁을 해 내가 밤 11시까지 부엌의 식탁에서 공부와 숙제를 할 수 있도록 허용해 주었다. 부엌은 1층에 있었는데, 居室(거실)이 바로 그 옆에 있었고, 호스트 부모님은 항상 그곳에서 컴퓨터를 하거나 TV를 시청하셨기 때문에 나는 그 소음 속에서 모든 정신을 집중하여 숙제를 마쳐야만 했다. 다행히도 점점 시간이 지날수록 호스트 엄마는 내가 11시가 넘어 까지 하는 공부에 대해 별 신경을 쓰지 않아서, 나는 부엌에서 내가 하고 싶어 했던 공부를 맘껏 할 수 있었다. 이 때 나는 처음으로 이 집에서 진정한 행복과 환희를 느낄 수 있었다.
학교에서 나의 이미지는 ‘공부 잘하는 한국인’으로 점점 刻印(각인)되어 갔고, 나는 이 이미지를 계속 유지하기 위해 꾸준히 학교생활에 나의 모든 힘과 노력을 쏟았다. 이때의 이미지 덕에 웃지 못할 에피소드가 하나 있었는데, 이날은 호스트 엄마가 나의 체육시간에 찾아와, 우리의 피구 경기를 갑자기 중단 시키더니 나를 화장실로 따로 불러내었다. 호스트 엄마는 나를 내 호스트 남자동생인 주싸야의 체육복 바지를 훔쳐간 범인으로 몰며, 많은 아이들이 보는 화장실 안에서 당장 바지를 벗으라고 소리 질렀다. (나는 새 학기가 시작되기 전에 호스트 엄마로부터 학교 체육복을 한 벌 받았었다. 그리고 나는 집안에서 내 빨래만 모아서 직접 했기 때문에, 호스트 가족의 빨래와 섞일 일은 전혀 없었다.) 나는 너무 억울하고 황당해서 호스트 엄마가 던지며 내 것이라고 말했던 바지로 갈아입으며, 흐느껴 울었다. 다시 체육관의 피구 경기로 돌아 가 게임에 임하자, 한국인 녹경 언니가 울고 있던 나를 달랬다. 그 다음 시간은 지리시간이었는데, 나는 수업까지도 방해하며 친구들 앞에서 나를 도둑으로 몰았던 호스트 엄마에게 쌓인 원망 때문에 눈물을 계속 훔쳐내었다. 그날은 또 地理(지리) 단원 평가가 있는 날이었는데, 내 뒷줄에 앉아 있던 4명의 코스타리카 남자애들은 녹경 언니에게 “인정이 왜 울어? 오늘 시험인데 공부 못했나?” 라고 물었고, 지리 선생님은 “인정이가 시험 보는 걸 잊었었나 보다”라고 말했다. 내가 우는 이유를 쉬는 시간을 통해서 알고 있었던 녹경 언니는 내게 ‘제대로 된 한국인 이미지를 심어줬다’며 배를 잡고 웃어서, 나도 울다가 웃을 수밖에 없었다.
지옥 같았던 호스트 집에서의 생활에, 나는 점점 더 웃음을 잃어갔고, 공포와 불안감에 싸여 내 방에서 나가기를 꺼려했다. 미국의 주와 도시마다, 그곳에서 생활하고 있는 교환학생들을 위하여 일 처리를 하는 지역관리자들이 있는데, 유학 전 오리엔테이션을 통해서 알게 된 사실이었지만, 그들과 친하게 지내는 것은 성공적인 교환학생 프로그램을 이수하기에 필수적이었다.
나는 당시 나를 담당하고 있었던 지역관리자 데브라에게 안부 메일을 보내기도 했는데, 10월에 들어서기 시작하면서는 나는 그녀에게 얼마나 지금 내 호스트 생활이 고통스럽고, 얼마나 내가 다른 학교와 새로운 호스트 가정의 경험을 원하는지를 강조하는 메일들을 여러 번 보냈다. 하지만 나의 희망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답은 항상 똑같았다. 교환학생이 시작되는 가을학기인 8-9월 또는 봄 학기인 3-4월을 제외한 때에는 새로운 호스트를 찾는 일은 하늘의 별을 따는 것과 같다고.
절망적이었지만 또 다른 방도가 없었기 때문에 나는 새로운 학교와 호스트를 찾을 수 있다는 기대 자체를 버렸다. 그런데, 나는 곧 암울한 상황을 뒤로 할 수 있는 좋은 기회를 잡았다. 나는 나와 같은 프로그램의 교환학생들과 함께 2010년 11월 20일에 미네소타 주에 있는 미국에서 두 번째로 큰 쇼핑몰인 ‘Mall of America (몰 오브 아메리카)”로 가기로 예정되어 있었다. 그런데, 여행 날 이틀 전쯤에 나는 지역관리자로부터 일리노이 주에서 새로운 호스트를 찾았다는 반가운 소식을 전해 들었다. 세달 남짓 겪었던 엄청난 마음고생을 새로운 보금자리에서 이제는 한시름 놓을 수 있다는 생각에 나는 너무 행복했다. 나는 이것이 현실인지 꿈인지, 기쁨에 제대로 숨을 가누지 못한 채로 그 메일을 몇 번이고 읽고 또 읽었다.
호스트 부모님은 이 사실을 지역관리자에게서 곧 전해 들었고, 호스트 엄마는 나를 ‘호스트 가족을 배신하고 떠나는 이기적인 자’로 몰아 붙였지만, 나는 곧 그녀와 작별을 할 거라는 생각에 그녀의 말들은 더 이상 내 마음속에 깊은 상처를 내지 못했다. 하지만 한 가지 걱정은 내가 사랑하던 친구들과의 작별이었다. 내가 가끔 마음고생을 심하게 하며, 울고, 한국의 가족들을 그리워할 때면, 녹경 언니와 충희는 내 옆에서 항상 내 이야기를 잘 들어주며 많은 조언을 해 주었다. 또한 우리는 언제나 무슨 일이 생길 때마다 서로 고민을 나누며, 한국인의 깡으로 모든 시련들을 잘 이겨내리라고 다짐했다. 따라서 그들과의 작별이란 곧 내가 사랑하는 가족과의 작별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뿐만 아니라, 나는 나의 정신적인 지지자였던 코스타리카에서 온 남자아이 대니와의 작별이 너무 가슴 아팠다.
내가 앞 이야기에서 말했듯이 나는 호스트 엄마의 업무처리로 인해 밤 8-9시까지 학교에 남아 호스트 동생들을 돌보아야만 했다. 그때, 나를 제외하고 유일하게 학교에 남아있던 고등학생이 대니였는데, 그는 곧 내게 살사 댄스도 가르쳐준 좋은 친구가 되었다. 대니는 미국 교육을 받고 싶어, 엄마를 설득해 이 학교로 내가 다니던 연도에 처음 미국에 왔는데, 그의 엄마는 코스타리카인이었고 아빠는 이스라엘에서 온 유대인이었다.
그는 학교 수업을 마친 후, 몇 시간을 학교에 남아 학교 부엌 청소를 했는데, 이로서 그는 학교로부터 얼마 정도의 등록금을 減額(감액)받을 수 있었다. 학교에서 서로 같이 보낼 시간이 많다 보니 우리는 서로 여러 가지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는데, 처음에 시작했던 한국과 코스타리카 문화에 대한 우리의 이야기 주제는 곧 나의 호스트 가족 문제로까지 이어졌다. 대니는 내게 있어 ‘기쁨은 나누면 배가 되고, 슬픔은 나누면 반이 된다’는 말이 진실이라는 것을 몸소 깨닫게 해주었다. 내가 호스트 엄마에 대한 고민거리를 풀어놓을 때면, 항상 그는 따뜻한 마음과 동정으로 내 ‘슬픔’을 반으로 줄였고, 그의 갚진 조언과 위로는 나를 더 성숙한 사람으로 만들어 내게 닥쳤던 시련들을 극복할 수 있도록 큰 도움을 주었다.
그는 내게, 그의 인생에서 겪었던 가슴 아팠던 사건을 말해주었는데, 이는 그의 ‘부모님의 이혼’이었다. 그 당시 어렸던 대니는 얼마 후 엄마와 단 둘이 살게 되었고, 급작스러운 변화에 따른 정신적 충격으로 다른 사람을 만나기를 꺼려했을 뿐만 아니라 집 밖으로 나가기도 두려워했다고 했다. 그런데, 우연히 다락방에서 발견한 성경책을 읽고, 그 책 속에 등장하는 엄청난 시련과 고난의 주인공들이 자신의 모습과 너무나 꼭 닮아있는 것을 발견하였다고 했다. 대니는 성경책을 한 구절 한 구절 읽기 시작했고, 하느님의 사랑과 보살핌으로 자신도 그 주인공들처럼 곧 모든 시련을 감당하고 이겨낼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게 되었다고 했다. 이러한 마음으로 대니는 나의 행복을 위해 하느님께 항상 기도를 드렸다.
내가 모든 짐을 싸 들고 위스콘신을 떠나기로 되어 있었던 바로 그 전날, 나는 학교에 도착하자마자 대니에게 달려가 내가 다른 호스트 가족과 생활하게 되었음을 그에게 알렸다. 물론, 너무나 갑작스러운 소식에 그는 깜짝 놀라서 마시고 있던 오렌지 주스 병을 거의 식탁에 떨어뜨리다시피 내려놓았지만, 내가 다시 행복해질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되었음에 얼싸안고 축하해주었다. 녹경 언니, 충희, 미국 친구들, 코스타리카 친구들, 그리고 선생님 한 분 한 분에게 작별을 하기란 마음이 찢어질 듯 힘들었다. 인간관계에서는 항상 ‘만남이 있다면 동시에 헤어짐이 존재한다’는 것을 알고는 있었으나, 헤어짐은 내게 언제나 너무 힘든 일이었다. 친구들은 새로운 곳에 잘 도착하여, 좋은 호스트 가족을 만나 즐거운 미국 생활을 하기를 응원해주는 편지들을 내게 직접 전해주거나 내 서랍장에 몰래 넣어두었다. 녹경 언니, 충희, 라이베리아에서 온 친구 메이, 코스타리카에서 온 캐런과 마지막으로 포옹을 나눌 때, 우리는 거의 울음바다를 만들었고, 우리의 흐느낌은 곧 학교 전체를 울렸다.
호스트 엄마는 그 때도 내게 “울면서 드라마를 찍지 마라”고 다그쳤고, 내가 마지막으로 녹경언니네서 친구들이 열어 줄 작별파티에 참석하는 것도 반대했다. 녹경 언니의 호스트 엄마가 나의 호스트 엄마를 설득해보았지만 전혀 소용없었다. 이렇게 헤어질 것을 생각하니 다시금 눈물이 샘솟았고, 나는 언젠가 다시 서로 만날 것을 약속하면서 그들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 하지만 호스트 엄마는 내가 우는 모습에 화가 나서 호스트 동생에게 당장 나를 그녀가 있는 교실로 데리고 오라고 시켰고, 나는 몸을 숨길 곳을 향해 도망쳤다. 다행히도 그날에 학교 부엌에서 대니가 청소를 하고 있었고, 그는 겁을 잔뜩 먹은 나를 위해, 청소 중 부엌의 문을 닫으면 안 된다는 규율을 어기고, 부엌의 모든 문과 창문들을 닫고 기둥 뒤에 숨죽여 울고 있는 나를 안아주며 위로를 건넸다. 호스트 동생에게는 미안했지만, 대니는 나를 데리러 온 호스트 동생도 겁을 주어 돌려보냈다. 모든 일이 다 잘 될 거라고, 하루만 더 참으면 된다고, 새로운 호스트는 분명 다를 거라며 대니는 나를 달랬다. 몇 분 후 호스트 엄마는 학교 밖에서 차의 경적을 울리고 내게 소리를 지르며, 당장 차로 올 것을 지시했다. 나는 대니와 조금만 더 헤어지기 전에 대화를 하고 싶었고, 그 동안 내가 졌던 모든 신세에 대한 감사를 다 표현하고 싶었지만, 밖에서 들려오는 계속되는 경적소리에 우리는 마지막 포옹으로 작별을 했다.
조인정
저녁을 먹은 지 얼마 안 된 후였는데도 불구하고, 먹었던 것은 양에 차지 않았었는지, 그들은 과자를 눈 깜짝할 새 싹 다 먹어 치웠다. 호스트 동생들은 내게 이렇게 맛있는 과자는 생전 처음 먹어본다고 하니, 여태껏 그들에게 조금 더 먹을 것을 주며 잘해주지 못한 나 자신을 반성했다. 호스트 동생들은 또 그 한글이 써져 있는 과자 봉지들이 신기했던지, 자기 방에 가져가 벽에 한 개씩 붙여 놓았다. 그 다음 날 아침이면, 나는 다른 교환학생들과 함께 미네소타 주의 ‘Mall of America (몰 오브 아메리카)’에 가기 위해 약속장소로 집합해야 했다.
더욱이 나는 일리노이 주의 어느 호스트 가족들과 새로운 생활을 시작해야 했기 때문에, 호스트 집에 있던 모든 짐을 밤이 늦도록 정리했고 떠날 채비를 모두 마쳤다. 짐을 쌀 때도 호스트 엄마는 내게 정리를 서두르라며 화를 내고, 휴대폰을 당장 반납하라고 하고, 방 정리를 할 때 절대 문을 닫고 하지 말라는 등 여러 명령을 했지만, 나는 곧 다가올 내 밝은 미래를 생각하며 전혀 낙담하지 않았다. 설레는 맘에 밤 잠도 설치며, 아침 일찍 눈을 떴다. 호스트 아빠는 나를 차로 약속 장소까지 데려다 주기 위해 居室에서 나를 기다리고 계셨고, 호스트 엄마도 그곳에 계셨다.
현관문을 열고 정말로 마지막 인사를 하려니, ‘미운 정이 고운 정’이라는 말처럼 떠나려니 그 동안의 정에 가슴이 먹먹해져 왔다. 그러나 마지막까지도 호스트 엄마는 ‘Good Luck (행운을 빌어)’이라는 말만 내게 남긴 채, 다시 2층의 안방으로 올라갔다. 약속 장소에 도착하여 모든 짐을 차에서 내리고, 나는 호스트 아빠와도 마지막 인사를 했다. 호스트 아빠는 그래도 지난 석 달 동안 호스트 엄마와는 다르게 나를 조금은 더 딸처럼 아껴주었다. (나뿐만이 아니라 호스트 동생들도 아빠와 있을 때는 여느 다른 부모와 아이들처럼 생기발랄 했고, 웃음이 끊이질 않았다. 물론 이 밝은 분위기는 호스트 엄마를 만남과 동시에 깨져버렸고, 아이들은 집에서는 숨을 죽인 채 오로지 제 각자 할 일을 했다.) 그렇기 때문에, 그와의 마지막 헤어짐은 못내 섭섭했고, 그가 아빠처럼 나를 안아주며 ‘항상 건강하게 잘 살아라’라고 했을 때에는 눈물이 쏟아져 나오려는 것을 억지로 참아내었다.
2010년 11월 20일부터 21일의 1박 2일 동안 나는 미네소타 여행을 통해서 많은 國籍(국적)의 교환학생들을 만날 수 있었다. 여행을 함께 했던 충희와도 20일 저녁에 ‘마지막 만찬’을 성대하게 하자며, 쇼핑센터 안에 있던 이탈리아 레스토랑에서 호화롭게 파스타와 통감자를 즐겼다. 그런데, 21일 아침 나는 뜻밖의 소식을 전해 들었다. 나는 충희와 아침에 호텔에서 일어나 朝食을 먹기 위해 일층의 카페테리아로 갔는데, 나의 지역관리자인 데브라가 나와 할 이야기가 있다며 따로 나만 불러내었다.
그녀는 자신의 옆에 서있던 위스콘신 주 총 지역 관리자인 마가렛을 내게 소개했다. 평소와는 다르게 경직되었던 데브라의 표정은 왠지 모르게 나를 불안하게 만들었다. 마가렛은 내게 “I am so sorry to tell you about this. (나는 너에게 이 것을 말하게 되어 유감이다)”라는 말로 첫 문장을 시작하더니, 내가 곧 같이 살게 될 거라며 기뻐했던 새로운 호스트가 내가 오는 것을 반대하는 통보를 그 전날 저녁 그녀에게 보냈다고 했다. 따라서 나는 이 여행이 끝남과 동시에 다시 위스콘신의 끔찍했던 그 호스트 집으로 돌아가야만 했다.
너무 기가 차서 나는 한참을 멍하니 넋을 잃고 서 있었다. 다시 예전 호스트 집으로 가는 것은, 갓 지옥에서 빠져 나와 세상의 자유와 행복을 맛본 나에게 다시 지옥의 문을 열고 하루하루 고통인 그곳으로 되돌아가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그러한 공포에 다시 사로 잡힐 것을 상상하니, 나는 나도 모르게 그녀들 앞에서 울음을 터뜨리며 다시 예전의 호스트 집으로만 제발 돌려보내지 말라고 애걸복걸했다. 호스트 엄마가 다시 돌아온 나를 보면 분명 ‘이 요망한 계집애가 다시 제 발로 우리 집에 찾아왔네!’라 생각하며 나를 조롱할 것이 뻔했다.
내가 간절히 애원했음에도 불구하고, 답은 여전히 ‘예전의 호스트 집으로 돌아가는 것’이었다. 나와 지역관리자들의 심각한 대화를 눈치챘는지, 카페테리아에 있던 교환학생들과 호스트 가족들의 시선은 모두 우리를 향해 있었다. (그 때 저 뒤쪽 테이블에서 팬케잌, 소시지, 그리고 머핀까지 챙겨온 어떤 미국 남자 아이와 그의 엄마처럼 보이는 분이 다른 지역 관리자 한 명과 한 테이블에 앉아있었는데, 이때 반짝 스쳐간 이 인연이 후에는 내 인생의 지대한 부분을 차지하는 이들이 되었으니 이 장면을 꼭 기억하기를 바란다.)
데브라는 나의 고생 하나하나를 내가 그녀에게 여태껏 보냈던 메일들을 통해 알고 있었기에, 이를 모두 마가렛에게 설명해주었고, 마가렛은 그렇다면 다른 지역관리자들과 한 번 더 토의를 해본 후에 마지막 결정을 이번 여행이 끝나기 전까지 알려주기로 나에게 약속했다. 여행이 곧 끝나갈 무렵, 마가렛은 나를 위한 마지막 결단을 내렸다. 그녀의 대답은 나의 모든 예상을 깨는 것이었는데, 이는 ‘나의 지역관리자인 데브라의 집에 가 새로운 호스트 가족과 학교를 찾을 때까지 잠시 동안 그녀의 가족과 함께 생활하는 것’이었다. 물론 이는 곧 예전 호스트의 집으로 다시 가지 않아도 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었기 때문에, 나는 당연히 이 선택에 찬성했다.
모든 교환학생들은 짧고 즐거웠던 여정을 뒤로 하고, 아쉽지만 다시 본래의 학교 생활을 하기 위해 집으로 떠나는 버스에 올랐다. 나도 내 짐들을 모두 싣고 버스에 오르려는 순간, 어떤 여자가 내 이름을 부르더니 나를 잠시 불러 세웠다. 그녀는 자신을 에이미라고 소개하면서, 자신의 집에서 한 명의 스웨덴에서 온 남자 아이를 호스트 하고 있다고 했다. (내가 보기에 에이미는 그 날 아침에 카페테리아에서 그녀의 아들과 함께 테이블에 있던 바로 그 여자였다.)
그녀는 또 나의 복잡한 상황들을 지역관리자들을 통해 전해 들었다고 하면서, 내가 괜찮다면 자신의 집으로 와 함께 살아도 된다고 했다. 뜻밖에 내게 찾아 온 기회가 너무 반가웠고, 이 또한 天運(천운)이라고 생각 했다. 하지만 곧 그녀의 집이 위스콘신에 있고, 그 집에는 자신과 스웨덴 남자 아이, 두 명의 아들, 그리고 남편이 모두 함께 산다는 이야기를 듣는 순간, 나는 이 제안을 거절할 수밖에 없었다. 그 이유는 일단, 나는 전 호스트 때문에 위스콘신 주에서 사는 것에 치를 떨었고, 어쩌면 호스트 엄마를 만날 수도 있다는 생각 때문에 겁이 났다. 뿐만 아니라, 나는 17년 인생 동안 한 번도 많은 남자들과 한 지붕 아래에 살았던 적이 없었기 때문에, 어떻게 한국에 돌아가기 전까지 약 일곱 달을 그들과 함께 살 수 있을지 전혀 상상할 수 없었다.
솔직하게 말하면, 나와 그 진지한 대화를 나누는 동안 에이미는 담배를 피우고 있었는데, 그녀에게서 풍기는 카리스마에 나는 기가 완전 눌려 있었다. 어쩌면 그녀의 터프한 성격 때문에 예전 호스트 집에서와 같이 내가 항상 긴장을 늦추지 못하고 살아야 할 것만 같았다. 나는 그녀에게 죄송하다고 사과하며 그 제안을 거절했다. 그녀는 괜찮다며 오히려 나를 달랬고, 지역관리자와 함께 하게 될 생활에 행운을 빌었다. 참 이상하게도, 나는 오는 내내 버스 안에서 그 기회를 놓친 것이 후회되어 계속 ‘주사위는 던져졌다’라는 말을 되풀이 하며 나 자신을 달랬지만, 그녀의 말 하나하나와 이미지는 내 머릿속에서 생생히 반복되며 기억되었다.
나의 지역관리자인 데브라는 위스콘신 주의 쿠바시티(Cuba City)라는 작은 도시에 살았는데, 이곳은 나의 예전 호스트 가족이 살던 리치랜드 센터(Richland Center)로부터 차로 약 한 시간 반 정도 떨어져 있던 곳이었다. 데브라의 남편은 낙농업이 유명한 위스콘신의 다른 사람들처럼 농부였고, 옥수수 밭을 소유하고 있었으며, 젖소도 길러 젖을 우유공장에 납품했다.
데브라의 아들도 자신의 아버지와 공동으로 일하는 농부였으며, 둘은 항상 밭에서 그리고 사육장에서 함께 일했다. 이 때문에, 데브라의 집 마당에는 거대한 사이즈의 사일로(silo) – 가축을 위한 木草의 발효와 저장을 위해 세워진 탑 모양의 건조물 - 가 세워져 있었으며, 땅에 뿌려져 있던 거름냄새는 항상 내 코를 찔렀다. 그리고 그녀는 한 명의 독일인 남자아이를 호스트 했는데, 그의 이름은 벤이었고 우리는 그렇다 할 친한 사이는 아니었지만 내가 이 집에 있는 동안 서로 말은 주고 받는 사이였다.
내 방은 2층에 있는 벤의 방 바로 앞이었다. 혼자 방을 쓸 수 있었기 때문에 더 이상은 잠을 잘 때 누구의 신경을 쓰지 않아도 된다는 생각에 너무 편했다. 그렇지만 나는 또 엄청난 문제에 직면했는데, 그것은 데브라의 집이 약 100년 전에 지어진 집이었기 때문에, 새롭게 개조한 쪽에 살고 있는 벤의 방까지만 들어오는 보일러가 내 방에는 전혀 들어오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위스콘신에 한번쯤 살아본 사람이라면 잘 알겠지만, 위스콘신 주는 미국의 캐나다의 국경지대와 맞닿아 있는 북쪽에 있기 때문에 항상 다른 州보다 더욱 길고 추운 겨울을 지낸다. 겨울의 위스콘신 주는 영하 15도를 밑돈다.)
내 방에는 오직 한 장만의 이불이 있었고, 이 한 장으로는 전혀 위스콘신의 강력한 추위를 이겨낼 수가 없었다. 따라서 나는 한국에서 엄마가 보내준, 두꺼운 털이 안쪽에 있는 야상잠바의 단추를 다 잠가 입었고, 목에는 털 목도리를 둘렀으며, 손에는 장갑을 꼈고, 조금이라도 더 추위를 피하기 위해 발에는 두꺼운 수면양말을 신었다. 누가 보면 꼭 나를 에스키모라고 부를 만한 복장이었다 유리창을 흔들며 사납게 돌진하는 강추위에 내 입술은 바르르 떨렸고, 손가락과 발가락은 추위에 점점 움직임이 둔해져 갔다. 하지만 위스콘신의 차디찬 겨울 바람도 예전 호스트 엄마의 冷氣(냉기)가 흐르는 말투와 視線(시선)에 비하면 훨씬 견딜 만했고, 오히려 내 마음은 이곳에서 평화로운 온기로 가득했다.
조인정
아직까지도 새로운 호스트 가족과 학교를 찾지 못했으므로, 나는 이 기간 동안 지역관리자 집에서 여유롭게 자유를 만끽할 수 있었다. 하지만 무엇인가를 지나치게 누리면, 금 새 싫증이 나지 않던가? 점점 시간이 흐르면서, 데브라의 가족과 함께 시청하던 TV도, 인터넷 서핑도, 독서도 곧 신물이 나서 이제는 전혀 흥미롭지 않았고 지루했다. 오히려 아침에 학교에 가는 벤이 부러웠고, 그가 학교에서 하는 아메리칸 풋볼(미식축구)과 집에 돌아와서 해야만 하는 숙제 또한 너무 부러웠다. 나도 무엇인가를 하고 싶었고, 누군가가 나에게 그러한 숙제를 주기를 원했다. 당시에 나는 아침에 눈을 떠 1층에 있는 부엌으로 내려갈 때가 가장 행복했었는데, 그 이유는 바로 ‘시리얼을 아침식사로 먹어야 한다’는, 해야 할 일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데브라는 내가 속해 있던 교환학생 프로그램의 지역관리자 일을 했을 뿐만 아니라, 몇 가지의 다른 직업도 동시에 병행했다. 그녀는 私服(사복)을 입은 채로 어떤 음식점을 돌아다니며 음식을 주문해 먹어보고, 그 음식의 맛과 웨이터의 서비스를 평가하여 어딘가에 보고하는 일을 했으며, 주유소 Citgo를 여러 군데 다니며 외관 사진을 찍어 Citgo회사에 보고했다. 또한, 농부인 자신의 남편을 도와 소젖을 우유공장에 납품하는 일도 했다. 그녀는 낮에는 마치 스파이처럼 레스토랑과 주유소를 돌아다니기에 바빴지만, 밤에는 마음 따뜻한 지역관리자로서 학생들과 개인적으로 연락하며 그들의 안부를 살폈다. 나도 그녀를 몇 번 따라다니며 하루의 일과를 체험해 보곤 했는데, 아침 일찍 집을 나갔다 들어왔을 때에는 이곳 저곳을 돌아다니느라 시간은 저녁 8시를 이미 훌쩍 넘었다.
독일 친구 벤을 통해 나는 그리운 가족들 및 친구들과 인터넷을 통해 이야기를 주고 받을 수 있게 되었다. 나는 벤이 아침에 학교에서 수업을 받는 동안에 집에 남아 영어공부를 하거나, 데브라의 일을 따라다니거나, 居室(거실)에 남아 미국 드라마를 보면서 시간을 보냈었는데, 그 시간 동안에는 집안이 적막강산이라 할 만큼 조용했다. 하지만, 저녁이 되면 학교에서 돌아오는 벤, 일을 마치고 돌아오는 데브라, 그리고 그녀의 남편과 아들 때문에 다시 집안에는 活氣(활기)가 넘쳤다. 어느 날 밤, 벤은 독일에 있는 자신의 친구들과 畵像(화상) 통화를 하면서, 나에게 그들을 향해 손을 흔들어 달라고 부탁했다. 나는 영문도 모르는 상태에서 한 번도 만난 적이 없던 화면의 사람들에게 멋쩍은 인사를 건넸다. 통화를 마치고, 내가 그 화상전화를 너무 신기해 하며 무엇이냐고 묻자, 벤은 웃으며 내게 스카이프(Skype)라고 부르는 그 프로그램을 알려주었다.
그 프로그램을 다운 받는 일부터 프로필을 만드는 일 하나하나까지, 아는 것이 없는 나를 위해 벤은 모든 일을 꼼꼼하고 자상하게 알려주었다. 뿐만 아니라, 벤은 페이스북(Facebook)이라는 소셜네트워크도 소개해 주었다. 나는 이 날 이후로 예전 학교의 그리웠던 친구들과 메시지를 주고받으며 못 나눴던 이야기를 나눌 수 있어서 너무 행복했고, 한국에 계신 엄마와 아빠도 곧 이 프로그램을 내게 듣고 난 후, 나와 화상통화를 할 수 있었다. 첫 날에 부모님과 나는 화면에서 서로의 모습을 확인한 순간, 우리는 기쁨의 환호를 질렀다. 나의 얼굴을 오랜만에 보아서 그랬는지 부모님은 나를 너무나 반가워 하셨으며, 우리는 세 달 남짓 겪었던 그 동안의 고생들과 아픔은 이제는 잊어버린 채 다시 예전처럼 환하게 웃을 수 있었다.
11월 넷째 주 목요일은 Thanksgiving Day(추수감사절)인데, 우리나라의 추석과 같이 그 해의 추수를 축복하고 친지들과 이웃들과 함께 축하하는 날이다. 나도 하루 전 날에 데브라와 함께 오렌지 껍질, poppy seed(양귀비 씨: 빵&과자들의 재료나 장식용으로 쓰임.), 시나몬 등을 이용하여 여러 가지 종류의 맛있는 빵을 내 일생 처음으로 만들어 보았고, 내일 있을 가족모임이 너무 기다려졌다. 데브라의 가족들은 위스콘신의 남서쪽에 위치해 있는 아이오와 주에 많이 살았기 때문에, 가족모임은 그 곳에서 이루어질 예정이었고, 나와 벤도 특별 게스트로 초청받았다.
아이오와에 도착해서 모임이 있던 집 문을 열자마자, 시끌벅적한 웃음소리가 가득했고, 20명 정도 되는 사람들이 서로 반갑게 많고 많은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또, 한 쪽에서는 모여서 카드게임, 주사위 게임 등을 하고 있었는데, 나와 벤도 그 게임을 배우고 즐길 수 있었다. 우리는 저녁에 추수감사절에는 빠질 수 없는, 오븐에 구워내 육즙이 풍부한 칠면조 고기를 비롯하여, 나와 데브라가 어제 만든 빵, 프렛즐, 사과파이, 칵테일 새우, 샐러드, mashed potato(매시드 포테이토: 감자를 삶아 으깨어 우유, 버터, 소금으로 맛을 낸 요리) & gravy sauce(그레이비 소스: 고기의 육즙에 버터와 밀가루를 넣어 만든 걸쭉한 소스로서 삶은 요리나 육류에 뿌려 먹음)와 같이 각자 집에서 손수 만들어 온 요리를 뷔페 식으로 차려놓아 함께 먹었다.
가족의 情(정)이란 무엇인지 알 수 있었던 추수감사절을 지내고 나니 11월도 거의 끝나갔다. 나는 데브라로부터 새로운 호스트 가족을 찾았다는 기쁜 소식을 마침내 전해 들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이 집 또한 위스콘신에 위치해 있어서 예전의 호스트 가족을 다시금 만나게 될까 봐 걱정이 되었지만, 이 가족이 유일하게 현재 나를 호스트 가능한 집이며 동시에 나를 호스트 할 의향도 가지고 있었으므로, 나는 이 결정을 거절할 수 없었다. 하지만 다른 말로 하면, 나는 이 새로운 호스트 집으로 무조건 보내져야 했다. 만약 이 선택을 거절한다면 이제는 봄 학기가 시작되는 3-4월까지 호스트 가족을 구할 수 없었을 뿐만 아니라, 학교까지 다닐 수가 없었다. 결국 나는 데브라와 위스콘신 주 총 지역관리자인 마가렛과 함께 캐스빌(Cassville)이라고 하는 미시시피 강 옆의 작은 마을로 새로운 호스트 가족을 만나러 갔다.
큰 옥수수 밭과 사일로를 겸비하고 있어 시골집을 연상케 했던 데브라의 집과는 달리, 이 새로운 호스트의 집은 미국 영화에서 자주 나오던 예쁜 집들이 옹기종기 모여 타운을 이뤄 살던 곳에 있어서 사람 사는 느낌이 물씬 풍겼다. 조금 더 차로 언덕을 올라갔더니 우리는 많은 집들이 모여 있던 그 마을에서 가장 높은 터에 다다랐다. 그런데 그 많은 집들 사이에 가장 먼저 잔디밭에 세워 둔 눈사람 모형의 조형물과 집 외관에 붙여둔 크리스마스 리스, 그리고 정원수에 감겨 있던 크리스마스 電球(전구)가 벌써부터 크리스마스 분위기를 물씬 내는 아름다운 집이 내 눈을 완전히 사로잡았다. 동화책을 펴면 등장하는, 그 아담하면서도 아름답던 바로 그 집이 내가 곧 함께 살게 될 그 호스트 가족의 집이었다.
집안 현관의 벨을 울리고 집 안에서 누군가가 문을 열어주기 전까지의 짧은 순간 동안에, 나는 ‘과연 새로운 호스트 가족은 어떤 사람들일까?’ 하는 걱정 반 설렘 반에 마음속은 긴장감으로 잔뜩 고조되어 있었다. 그런데 놀랍게도, 문을 열고 나온 사람은 내가 얼마 전 교환학생들과 미네소타 여행 중에 만났던 에이미라는 여자였다. 그녀는 나를 반갑게 맞이하며, 집 안으로 함께 온 지역관리자들과 나를 안내했다. 집안을 본 순간, 나는 눈이 휘둥그레질 수밖에 없었는데, 왜냐하면 이 집은 내가 여태껏 살면서 방문했던 집 중 단연 가장 깨끗하게 정리되어 있었고 아름다운 소품들로 가득한 그야말로 ‘모델하우스’와 같은 집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나를 데리고 집 안 곳곳을 소개해 주었다. 거실은 크리스마스 하면 떠오르는 木刻(목각) 호두까기 인형들로 아기자기 하게 꾸며져 있었고, 조금 전 것보다는 작은 또 다른 거실에는 예술적인 장식들이 그 화려한 자태를 뽐내며 크리스마스 트리에 매달려 있었다. 트리 아래에는 많은 선물들이 쌓여 있기도 했다. 또 집안 곳곳에서 나는 그녀가 얼마나 가족들을 사랑하는지 느낄 수 있었는데, 한 쪽 벽에는 세 아들의 얼굴 사진이 걸려 있었고, 장식장 위에도 액자에 담겨 있던 가족사진들을 많이 볼 수 있었다.
뿐만 아니라, 지하에는 영화를 볼 수 있는 벽걸이 TV 와 비디오 게임기가 있었고, 위스콘신 주 미식축구 팀인 그린베이 패커스(Green Bay Packers)의 사진들, 선수들의 사인과 작은 기념품들로 꾸며진 작은 홈바(home bar)도 있었다. 그녀의 집 소개가 끝난 후, 나와 그녀는 다시 데브라와 마가렛이 있는 1층으로 올라가 내가 처한 상황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때, 다른 남자 지역관리자가 이 집을 방문했는데, 그는 자신을 몬티라고 소개하며, 만약 내가 캐스빌에서 살게 된다면 그가 곧 내 지역관리자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몬티는 또 내게 에이미가 여태껏 5년 동안 브라질, 네덜란드, 스웨덴에서 왔던 여러 명의 교환학생들을 호스트 하는 동안, 어느 누구도 지역관리자인 그에게 어떠한 불평이나 불만을 표한 적이 없었다고 했다. 따라서 그는 만약 내가 이 집으로 와 살게 된다면, 분명 나는 그녀의 가족들과 함께 행복한 미국 생활을 할 수 있을 거라고 말했다. 나는 사실 저번 여행 때에도 에이미가 자신의 집에서 생활해도 된다는 제안을 거절한 것이 너무 마음에 걸렸었고, 어서 빨리 새로운 호스트 가족을 만나고 싶다는 생각과, 에이미의 家族愛(가족애)가 담긴 집안의 여러 사진들을 보니, 분명 에이미의 가족은 예전의 호스트 가족과는 다른 따뜻한 마음씨의 화목한 가정일 거라는 생각에 나는 흔쾌히 찬성표를 던졌다. 어쨌든 나는 내일부터 이 집의 일원이 될 것이었고, 또 달라진 환경에서 새로운 생활을 하게 될 것이었다. 그렇지만, 이제는 새로이 맞서게 될 운명과의 만남이 더 이상 두렵지 않았고, 예전 호스트 가족과의 생활에서 보다는 분명 좀 더 나은 생활을 하게 될 거라는 생각 때문에 밤잠을 설치지도 않았다. 지난 석 달 동안 구름에 가려져 있던 태양이, 내일은 밝게 다시 떠올라 내가 새로운 인생의 길로 들어서는 것을 환한 불빛으로 밝혀주기를 나는 진심으로 바랐다.
[ 2013-07-02, 23:53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