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압제자들-사 10:1-4 |
1 불의한 법령을 만들며 불의한 말을 기록하며 2 가난한 자를 불공평하게 판결하여 가난한 내 백성의 권리를 박탈하며 과부에게 토색하고 고아의 것을 약탈하는 자는 화 있을진저 3 벌하시는 날과 멀리서 오는 환난 때에 너희가 어떻게 하려느냐 누구에게로 도망하여 도움을 구하겠으며 너희의 영화를 어느 곳에 두려느냐 4 포로 된 자 아래에 구푸리며 죽임을 당한 자 아래에 엎드러질 따름이니라 그럴지라도 여호와의 진노가 돌아서지 아니하며 그의 손이 여전히 펴져 있으리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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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새 정부의 인사청문회와 함께 새삼 주목받는 말이 바로 <전관예우>입니다. 전관예우란 판사나 검사로 재직했던 사람이 변호사로 개업하여 수임한 사건에 대해 법원과 검찰에서 유리하게 판결하는 법조계의 오랜 관행과 특혜를 이르는 말인데 이게 바로 우리나라 법조비리의 온상이라는 지적입니다. 그런데 이사야 시대 유다사회도 이런 법조계의 비리와 죄악이 만연해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을 피할 수 없었다는 것입니다.
불의한 법령 <불의한 법령을 만들며 불의한 말을 기록하며>(1절). 불의한 법령이란 하나님의 뜻에 합당하지 않은 오직 지배자, 권력자의 사욕과 이익만을 위해 제정된 법을 가리킵니다. 그들은 약자를 보호하고 백성들의 권익을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들의 치부와 권력을 지키기 위한 악법만을 만들어 가난한 자들을 합법적으로 수탈하고 백성들을 억압하고 고아와 과부들을 착취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어느 시대나 법이란 약자들을 위한 제도이고, 사회 정의를 위한 장치입니다. 하나님도 그런 목적으로 율법을 주셨고, 또 각 민족과 나라의 헌법 제정을 허락하셨습니다. 그러나 현실은 언제나 그것과는 달랐습니다. 오히려 법이 가진 자들, 권력자들의 기득권 수호의 수단에 지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힘없는 사회적 약자들을 억압하고 사회 정의를 유린하고 부정으로 축재하게 하는 도구가 되어 왔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지금 하나님이 <포로>와 <죽음>을 말씀하시며 심판을 경고하고 계신대 심지어는 <그럴지라도 여호와의 진노가 돌아서지>(4절) 아니하리라고 하십니다. 법을 만들고 법을 집행하는 자들이 훗날 더 엄정하고 더 무서운 하나님의 법의 심판을 받게 된다는 사실을 절대 잊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오만한 권력 <벌하시는 날과 멀리서 오는 환난 때에 너희가 어떻게 하려느냐 누구에게로 도망하여 도움을 구하겠으며 너희의 영화를 어느 곳에 두려느냐>(3절). 불의한 법령을 만들어 백성들의 권리를 유린하고 가난한 자들의 보잘 것 없는 소유마저 약탈하는 불의한 권력가, 오만한 지배자들은 결국 하나님의 벌하시는 날을 피해갈 수가 없습니다. <너희가 환난 때에 어떻게 하고, 어디로 도망하고, 누구에게 도움을 구하겠느냐>는 것은 그 어디에도, 그 누구도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더구나 <너희의 영화를 어디에 두려느냐>는 것은 지금까지 합법의 이름으로 남을 착취하고 수탈한 모든 부와 영광을 결코 제대로 누리거나 어디 감출 수 없을 것이라는 선언이십니다. 우리는 어디서 무엇을 하며 어떻게 살든, 또 어떤 영화와 권력과 부를 누리며 살든 반드시 여호와께서 죄악과 부패와 모순을 벌하시고 징계하신다는 이 환난의 날, 최후 심판의 날을 잊지 않고 살아야 합니다. 지금도 여전히 강자에게는 약하고 약자에게는 강한 법과 또 그 위에 군림하여 제멋대로 법을 농단하는 권력가들이 없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제 머지않았습니다. <너희가 그 날에 어떻게 하려느냐?>는 하나님의 이 준엄하신 물음 앞에서 특히 법조인들과 권력가들은 부단히 자신을 성찰 할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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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 조성노 독일 본(Bonn) 대학교 신학부 졸업 뮌헨(Muenchen) 대학교 신학부 졸업 장로회신학대학교 조직신학 교수 역임 푸른교회(분당 소재) 담임목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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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계획
하나님께서 이루시는 꿈의 통로는 주도면밀하다. 애굽행 대상이 아니었다면 요셉은 엉뚱한 곳으로 끌려가서 여러 해 헛고생을 했을 것이다. 하나님께서 붙들지 않으셨다면 이스마엘 대상은 평생 자신들의 노예로 끌고 다녔을지 모른다. 보디발과 그의 아내, 감옥에서 만난 술관원장, 그리고 바로 왕. 이것은 요셉의 꿈을 이루는 데 가장 단거리 코스요 직행노선이다. 꿈의 전달이 이보다 빠르고 안전하고 정확할 수는 없다. -강정훈의 [신수성가] 중에서-
하나님은 우리 인생을 움직여 가십니다. 우리 안에 허락하신 꿈을 이루기 위해 훈련의 과정을 허락하십니다. 꿈이 전혀 이루어지지 않을 것 같은 험난한 고난도 넘어야 합니다. 그러나 이 모든 과정은 하나님의 손안에 있습니다. 가장 안전하며, 가장 정확한 방법과 시간에 꿈을 완성시켜 가시는 하나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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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 이재학 연세대학교 연합신학대학원을 졸업 웨스터민스터신학대학원대학교(선교학)박사학위(Ph.D) 수료 하늘땅교회 담임목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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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함으로 받으라 |
하나님께서 지으신 모든 것이 선하매 감사함으로 받으면 버릴 것이 없나니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로 거룩하여짐이라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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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 안유미 프리랜서 시각편집디자이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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앗수르 사람아! - 사 10:5-14 |
5 앗수르 사람은 화 있을진저 그는 내 진노의 막대기요 그 손의 몽둥이는 내 분노라 6 내가 그를 보내어 경건하지 아니한 나라를 치게 하며 내가 그에게 명령하여 나를 노하게 한 백성을 쳐서 탈취하며 노략하게 하며 또 그들을 길거리의 진흙 같이 짓밟게 하려 하거니와 7 그의 뜻은 이같지 아니하며 그의 마음의 생각도 이같지 아니하고 다만 그의 마음은 허다한 나라를 파괴하며 멸절하려 하는도다 8 그가 이르기를 내 고관들은 다 왕들이 아니냐 9 갈로는 갈그미스와 같지 아니하며 하맛은 아르밧과 같지 아니하며 사마리아는 다메섹과 같지 아니하냐 10 내 손이 이미 우상을 섬기는 나라들에 미쳤나니 그들이 조각한 신상들이 예루살렘과 사마리아의 신상들보다 뛰어났느니라 11 내가 사마리아와 그의 우상들에게 행함 같이 예루살렘과 그의 우상들에게 행하지 못하겠느냐 하는도다 12 그러므로 주께서 주의 일을 시온 산과 예루살렘에 다 행하신 후에 앗수르 왕의 완악한 마음의 열매와 높은 눈의 자랑을 벌하시리라 13 그의 말에 나는 내 손의 힘과 내 지혜로 이 일을 행하였나니 나는 총명한 자라 열국의 경계선을 걷어치웠고 그들의 재물을 약탈하였으며 또 용감한 자처럼 위에 거주한 자들을 낮추었으며 14 내 손으로 열국의 재물을 얻은 것은 새의 보금자리를 얻음 같고 온 세계를 얻은 것은 내버린 알을 주움 같았으나 날개를 치거나 입을 벌리거나 지저귀는 것이 하나도 없었다 하는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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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강력한 세력이었던 앗수르의 산헤립 왕은 선왕 살만에셀이 북왕국 이스라엘을 멸망시킨 것에 고무되어 히스기야 14년 남왕국 유다의 모든 성읍들을 쳐 점령하고 예루살렘마저 포위하였습니다(왕하 18:13,17). 하나님은 당신의 뜻을 이루시기 위해 때로 이방인들을 동원하시기도 하는데 물론 당시 앗수르는 그 사실을 알 턱이 없었습니다. <여호와께서 온갖 것을 그 쓰임에 적당하게 지으셨나니 악인도 악한 날에 적당하게 하셨느니라>(잠 16:4).
진노의 막대기 손의 몽둥이 <앗수르 사람은 화 있을진저 그는 내 진노의 막대기요 그 손의 몽둥이는 내 분노라>(5절). 유다는 겉으로만 선하게 보일 뿐 실은 극히 악한 위선적인 나라였습니다. 그들은 신앙을 고백하기도 했고, 특히 이 때는 히스기야 왕에 의해 우상을 소탕하는 종교개혁마저도 실시했지만 정작 백성들의 삶은 지극히 세속적이고 위선적이었으며 전혀 경건하지 못했습니다. 이런 민족이나 나라는 반드시 하나님의 진노를 불러일으킵니다. 개인도 마찬가집니다. 위선적인 신앙만큼 하나님의 진노를 사는 죄악은 없음을 명심 하십시오. 한 때는 하나님의 택하심을 입고 거룩한 백성이 되었던 선민이 이제는 다른 어느 민족보다 더 혹독한 하나님의 진노에 직면하게 되었습니다(암 3:2). 주님이 가장 분노하시고 가장 심한 말씀으로 비판하시며 심판을 경고한 사람들이 바로 위선적인 종교지도자들이었다는 사실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회칠한 무덤 같으니 겉으로는 아름답게 보이나 그 안에는 죽은 사람의 뼈와 모든 더러운 것이 가득 하도다>(마 23:27). 표리가 부동하지 않은 진실한 모습으로, 정직한 심령으로 하나님을 경외하시고 이웃을 사랑하십시오. 그런 자에게 주님의 은혜가 임하고 축복이 주어집니다.
완악한 마음 높은 눈 <그러므로 주께서 주의 일을 시온산과 예루살렘에 다 행하신 후에 앗수르 왕의 완악한 마음의 열매와 높은 눈의 자랑을 벌하시리라>(12절)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그게 유다의 왕이든 이방 앗수르의 왕이든 완악한 마음과 교만한 높은 눈은 반드시 응징하시고 벌하십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면전에서 완악하고 교만해도 좋은 인생은 아무도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의 초대 왕이었던 사울을 폐하신 것도 그의 완악함 때문이었습니다. <이는 거역하는 것은 점치는 죄와 같고 완고한 것은 사신 우상에게 절하는 죄와 같음이라 왕이 여호와의 말씀을 버렸으므로 여호와께서도 왕을 버려 왕이 되지 못하게 하셨나이다>(삼상 15:23). 당시 앗수르의 완악함과 교만도 가히 하늘을 찔렀습니다. 그런데 보십시오. 그 앗수르 왕의 교만한 눈을 하나님이 어떻게 응징하셨습니까? 히스기야 왕 14년 산헤립이 유다를 침공하여 예루살렘을 포위한 채 유다 방언에 능한 랍사게를 보내 온갖 모욕과 위협과 비방을 다 퍼부었던 날 밤 하나님이 사자들을 보내셔서 앗수르 군사 18만 5천 명을 몰살시키셨습니다. 그리고 본국으로 퇴각한 산헤립은 그의 두 아들에게 살해를 당케 하셨습니다(사 37:38, 왕하 19:36-37). 더욱 겸허하십시오. 더 많이 눈높이를 낮추십시오. 하나님은 그런 자를 쓰시고, 그런 자에게 은혜를 베푸십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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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 조성노 독일 본(Bonn) 대학교 신학부 졸업 뮌헨(Muenchen) 대학교 신학부 졸업 장로회신학대학교 조직신학 교수 역임 푸른교회(분당 소재) 담임목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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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복
창세기는 아브라함이 열방의 복이 되게 하시겠다고 하셨다. 다른 사람들을 복 주기 위해서는 누군가 모델이 되어 통로 역할을 해주어야 하는데, 이 역할을 아브라함에게 감당시키겠다는 말씀이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다른 사람들에게 복을 나누기 위해 노력하라고 말씀하지 않으셨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이 순종하여 믿음으로 떠난 그 모습을 근거로 그에게 복을 흘러 보내시고, 또한 그를 통로 삼아 세상의 많은 사람들에게 그 복을 흘려보내시길 원하셨다. -이용규의 [떠남] 중에서-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복은 나를 통해 온 열방으로 흘러가야 하는 복입니다. 나만 누리고 마는 것이 아니라 함께 나눌 사람을 찾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큰 민족을 이룰 수 있는 복을 주셨으니 그 복은 계속해서 흘러가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사용하시는 복의 통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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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 이재학 연세대학교 연합신학대학원을 졸업 웨스터민스터신학대학원대학교(선교학)박사학위(Ph.D) 수료 하늘땅교회 담임목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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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을 선으로 바꾸사 |
당신들은 나를 해하려 하였으나 하나님은 그것을 선으로 바꾸사 오늘과 같이 많은 백성의 생명을 구원하게 하시려 하셨나니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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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 안유미 프리랜서 시각편집디자이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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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명에 순종하는 믿음 - 히 11:8-10 |
8 믿음으로 아브라함은 부르심을 받았을 때에 순종하여 장래의 유업으로 받을 땅에 나아갈새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나아갔으며 9 믿음으로 그가 이방의 땅에 있는 것 같이 약속의 땅에 거류하여 동일한 약속을 유업으로 함께 받은 이삭 및 야곱과 더불어 장막에 거하였으니 10 이는 그가 하나님이 계획하시고 지으실 터가 있는 성을 바랐음이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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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을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믿음은 전적 신뢰이며, 온전한 자기위임으로 내 인생을 맡기는 것입니다. 신앙인은 믿음으로 사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주님이 기뻐하시는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일반적인 믿음이나 지식적으로 동의하는 믿음이 아니라, 구원에 이르는 믿음입니다. 하나님은 믿음의 사람들을 찾아 쓰셨고,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은혜를 주시며 역사를 행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제자들을 선택하시고, 병든 자를 치유하시고, 기적과 이적을 베푸실 때에도 보신 것은 믿음이었습니다(막9장). 믿음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요1:12), 믿음으로 구원받게 됩니다(엡2:8-9). 믿음은 부르심에 대한 반응입니다(8).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부르신 것은 남보다 좋은 조건을 갖추어서가 아닙니다. 그냥 은혜로 부르셨으며, 이는 우리에게도 동일합니다. 그러나 부르심에 대한 반응은 각 자 다를 수 있습니다. 그는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나아갔음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소명이 있었다면 주저함 없이 떠나야 합니다. 그 때 그분의 나를 향한 아름답고 놀라운 계획들을 펼쳐지게 될 것입니다. 부르심은 있었지만 반응이 없다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 것입니다. 부르시는 분이 누구인지 확실히 알고 믿고 바라보아야 합니다. 때문에 오늘 우리에게 있어서 가장 위대한 만남은 하나님을 만나는 것이요, 가장 위대한 결단은 하나님을 믿는 것이요, 예수 믿는 것은 기적 중에 기적이며, 복중에 가장 큰 복입니다. 그러므로 부르심에 순종하여 제대로 한번 하나님을 만나고, 그분과 동행하면 전혀 새로운 삶을 살아갈 수 있을 것입니다. 어떻게 반응해야 할까요?(9-10). 부르심을 받고 말씀에 따라 구체적으로 행동해야 합니다. 행동하지 않으면 소용이 없으며, 그 믿음 또한 죽은 믿음입니다(약2:26). 행동에는 모험이 필요하고, 모험은 용기있는 사람만이 할 수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많은 지역으로 이주하면서도 하나님이 하실 일들을 바라보았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떠나고 버리고 드리며 순종할 수 있었습니다. 나의 야망을 내려놓고 하나님이 주신 비전을 붙잡아야합니다. 주의 말씀을 따라 그의 기뻐하시는 일을 위해 목숨 걸고 도전하십시오. 답답한 현실만 바라보고 낙심하지 마시고, 하나님을 향하여 시선을 고정하시고, 그 분과 함께 새롭게 시작하십시오. 분명 준비하시고 책임져 주시며 길을 열어 주실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믿음의 확신입니다. 살아계신 하나님은 우리와 함께하시고 말씀하십니다. 부르심에 믿음으로 반응하고 말씀따라 살아가십시다. 사탄의 소리를 거부하고 세상과 타협하지 말고 죄를 멀리하십시오. 용기있게 결단하고 미래를 향해 모험의 길을 떠나시기 바랍니다.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선한 길로 인도해 주실 것입니다.
(적용) - 내가 가지고 있는 믿음은 어떤 믿음인지, 정말 구원에 이르는 믿음인지 살펴봅시다. - 나를 향한 부르심은 무엇이며, 이에 어떻게 구체적으로 반응하고 있는지 점검해 봅시다. - 나의 형편을 보고, 그 분의 부르심과 무슨 관계가 있는지, 새롭게 접근키 위해 기도합시다.
[기도] 살아계신 하나님, 저를 찾으시고 불러 믿음주심을 감사합니다. 이젠 어떤 형편에서도 하나님의 뜻에 반응하고 순종하며 살게 하시고, 말씀따라 행하게 하시옵소서. 세상보지 않고 하나님 바라보며 용기있게 살아가는 믿음의 사람되게 하시옵소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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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 윤영대 총신대학교 대학원 석사 미국 Reformed Theological Seminary 실천신학 박사 백석대학교 기독교학부 교수 행복누리교회(서울 잠실 소재) 담임목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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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자랑
우리의 자랑은 모두 십자가 안에서 하는 자랑이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다면 아직 진정한 그리스도인이 아닙니다. 결국 사람이 무엇을 자랑하는가를 보면 그 사람의 영적 상태를 알 수 있습니다. 십자가를 통해 자기를 부인한다는 말의 의미는 십자가가 아닌 다른 것에는 인생의 궁극적인 소망을 두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같이 십자가를 통해 세상을 거부할 능력을 갖게 됩니다. -라원기의 [다시 보는 십자가] 중에서-
십자가는 우리를 하나님께로 인도합니다.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와 하나님을 하나로 연결해줍니다. 그렇기에 십자가는 생명을 얻는 유일한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우리는 십자가를 바라보아야 합니다. 그렇기에 우리의 자랑은 십자가외에 없습니다. 끊어진 생명이 생명 되게 하시는 하나님의 유일한 초청이 십자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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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 이재학 연세대학교 연합신학대학원을 졸업 웨스터민스터신학대학원대학교(선교학)박사학위(Ph.D) 수료 하늘땅교회 담임목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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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자가 온 것은 |
인자가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니라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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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 안유미 프리랜서 시각편집디자이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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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협하지 않는 믿음 -단 3:13-18 |
13 느부갓네살 왕이 노하고 분하여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를 끌어오라 말하매 드디어 그 사람들을 왕의 앞으로 끌어온지라 14 느부갓네살이 그들에게 물어 이르되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야 너희가 내 신을 섬기지 아니하며 내가 세운 금 신상에게 절하지 아니한다 하니 사실이냐 15 이제라도 너희가 준비하였다가 나팔과 피리와 수금과 삼현금과 양금과 생황과 및 모든 악기 소리를 들을 때 내가 만든 신상 앞에 엎드려 절하면 좋거니와 너희가 만일 절하지 아니하면 즉시 너희를 맹렬히 타는 풀무불 가운데에 던져 넣을 것이니 능히 너희를 내 손에서 건져낼 신이 누구이겠느냐 하니 16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가 왕에게 대답하여 이르되 느부갓네살이여 우리가 이 일에 대하여 왕에게 대답할 필요가 없나이다 17 왕이여 우리가 섬기는 하나님이 계시다면 우리를 맹렬히 타는 풀무불 가운데에서 능히 건져내시겠고 왕의 손에서도 건져내시리이다 18 그렇게 하지 아니하실지라도 왕이여 우리가 왕의 신들을 섬기지도 아니하고 왕이 세우신 금 신상에게 절하지도 아니할 줄을 아옵소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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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은 어디에 있으며, 어떻게 하면 행복한 삶을 살아갈 수 있을까요? 행복한 삶은 바른 삶의 목표를 정하고 평생 치우침 없이 달려가는데 있습니다. 여러분은 어떤 목표를 가지고 있으며, 어디를 향해 어떻게 달려가고 있으신가요? 다니엘의 세 친구들을 만나봅시다. 그들은 바벨론 왕 느브갓네살에 의해 포로로 잡혀온 젊은이들이지만, 지혜롭고 똑똑하여 나라의 중요한 직책을 맡았으며 왕의 총애를 받고 있었습니다(2:49). 그들은 행운아들로 출세도 하였고, 누구보다도 축복받은 사람들이었습니다. 아마 적당히 타협하고 살았다면 미래는 보장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백절불굴의 신앙으로 하나님 앞에서 부끄럽지 않는 삶을 살았으며, 자신들의 안일을 위해 현실과 타협하지 않았습니다. 신앙의 길은 평탄한 것만이 아닙니다. 그들은 이미 1차 시험을 통과하였지만, 이제 그보다 더 강한 불같은 시험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왕이 만든 금 신상에 절하고 섬기지 않는다고 참소를 당하게 됩니다. 만약에 왕의 명을 계속 어기면 풀무 불에 던짐을 당하게 되는 죽고 사느냐의 시험입니다. 왕은 총애하는 그들을 불러 다시 기회를 주고 있습니다(13-15). 그러나 그들은 단호하며 타협하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이 일에 대하여 왕에게 대답할 필요가 없나이다. 우리 하나님이 살아 계시다면, 풀무불속에서도 건져 내실 것이고 왕의 손에서도 건져 내실 것입니다.(16). 그리 아니 하실지라도 우리는 왕의 신상에 절하지도 섬기지도 아니할 것입니다(17). 이런 대단한 용기와 믿음은 하나님 앞에서 말씀을 지키기 위하여 내린 결론입니다. 그들은 삶의 목표가 분명하며 단순하였던 것입니다. 그들이 어떻게 되었나요? 결단하고 나아갔더니 죽기는커녕, 하나님께서 책임져 주시어 머리털도 거슬리지 않았고 불탄 냄새도 없었습니다(19). 오히려 왕은 살아계신 하나님을 알게 되었고, 하나님을 찬송하고 그들을 더욱 높여 줌으로 전화위복의 결과를 가져 왔습니다(28-29). 이제 적용해 봅시다. 남은 생을 살아갈 때에 세상과 불의와 더불어 타협하지 맙시다. 하나님의 살아계심과 그의 능력을 믿고 믿음으로 선포하십시다. ‘그리 아니 하실지라도’의 신앙으로 살아갈 때 우리의 삶을 책임져 주실 것입니다. 타협하지 않는 신앙으로 새 출발하십시다. 과거의 실패는 잊어버리고 지금부터 새롭게 결단하고 목표를 향하여 거침없이 나아가십시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풀무 풀 앞에서도 뜻을 굽히지 않고‘아니오’라고 거절할 수 있는 신앙의 용기입니다. 세월이 흘러가고 있습니다. 온갖 유혹이 난무한 세상에서 사탄의 달콤한 유혹을 이기고, 오직 믿음으로 타협하지 말고 살아가십시다. 하나님은 분명히 때마다 일마다 사람을 통해 환경을 통해 믿음의 사람들에게 은혜를 주실 것입니다.
(적용) - 나는 어떤 목표를 가지고 있으며, 어디를 향해 어떻게 달려가고 있는지 살펴봅시다. - 목표를 위해 시험의 과정을 통과해야 하는데, 나는 세상과 타협하지 않는지 점검해 봅시다. - 타협하지 않는 신앙으로 새 출발을 위해 결단하고 하나님께 기도하십시다.
[기도] 역사의 주인되시는 하나님, 저의 생각과 뜻을 감찰하시사 믿음으로 살아가게 하시옵소서. 어떤 시험이 다가와도 오직 주만 바라보게 하심으로 거룩한 삶의 목표를 분명히 하고 타협하지 않게 하시고, 죄악을 멀리하고 말씀 붙들고 살아가게 하시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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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 윤영대 총신대학교 대학원 석사 미국 Reformed Theological Seminary 실천신학 박사 백석대학교 기독교학부 교수 행복누리교회(서울 잠실 소재) 담임목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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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구원
하나님께서는 죄인들을 죄에서 해방시키기 전에 그들로 하여금 인간 스스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다는 것을 깨닫도록 하신다고 성경은 가르친다. 예를 들어,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에서 해방시키시기 전에 그들로 하여금 자신들의 고통을 깨닫고 하나님께 울부짖도록 만드셨다(출 2:23) -조나단 에드워즈의 [영적 감정을 분별하라] 중에서-
하나님은 우리의 죄악을 용서해주시기 위해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 주셨습니다. 누구든지 자기 안에 있는 죄와 맞닥뜨리면 그때부터 하나님의 은혜만을 바라봅니다. 죄는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삶에서 빗나가는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을 바라보면 살 소망이 생깁니다. 죄를 덮으시는 주님의 보혈을 통과하면 살 소망을 얻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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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 이재학 연세대학교 연합신학대학원을 졸업 웨스터민스터신학대학원대학교(선교학)박사학위(Ph.D) 수료 하늘땅교회 담임목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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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자는 자여 깨어라 |
그러므로 이르시기를 잠자는 자여 깨어서 죽은 자들 가운데서 일어나라 그리스도께서 너에게 비추이시리라 하셨느니라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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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 안유미 프리랜서 시각편집디자이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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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은 서로에게 위로가 되어야 합니다 - 창 24:61-67 |
61 리브가가 일어나 여자 종들과 함께 낙타를 타고 그 사람을 따라가니 그 종이 리브가를 데리고 가니라 62 그 때에 이삭이 브엘라해로이에서 왔으니 그가 네게브 지역에 거주하였음이라 63 이삭이 저물 때에 들에 나가 묵상하다가 눈을 들어 보매 낙타들이 오는지라 64 리브가가 눈을 들어 이삭을 바라보고 낙타에서 내려 65 종에게 말하되 들에서 배회하다가 우리에게로 마주 오는 자가 누구냐 종이 이르되 이는 내 주인이니이다 리브가가 너울을 가지고 자기의 얼굴을 가리더라 66 종이 그 행한 일을 다 이삭에게 아뢰매 67 이삭이 리브가를 인도하여 그의 어머니 사라의 장막으로 들이고 그를 맞이하여 아내로 삼고 사랑하였으니 이삭이 그의 어머니를 장례한 후에 위로를 얻었더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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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상글] 오늘 성경말씀은 아브라함의 종이 리브가를 데리고 가나안땅으로 돌아오는 장면입니다. 그 먼 길을 낙타를 타고 달려온 리브가는 이삭을 처음 만나게 됩니다. 63절에 보니까, ‘이삭이 저물 때에 들에 나가 묵상하다가 눈을 들어 보매 낙타들이 오는지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아마도 이삭은 종이 자신의 아내감을 찾으러 갔을 때, 하나님께 자신의 아내를 위해서 간절히 기도했을 겁니다. 그리고 지금 이 장면을 보면, 해가 저무는 순간에도 들에 나와서 하나님께 묵상하며 간구하고 있습니다. 이삭이 그렇게 들에서 묵상하는 순간에 리브가는 도착합니다. 리브가 역시 눈을 들어서 이삭을 봅니다. 이삭이 누구인지를 확인한 리브가는 다시 너울로 얼굴을 가립니다. 종은 이삭에게 다가가서 밧단아람에 있었던 이야기와 어떻게 리브가를 선택하게 되었는지를 모두 설명합니다. 그리고 나서 이삭과 리브가는 이삭의 어머니 사라의 장막에 들어갑니다. 이 대목에서 성경은 이렇게 기록합니다. “이삭이 그의 어머니를 장례한 후에 위로를 얻었더라.” 그러니까 리브가는 이삭의 어머니 사라가 죽은 이후에 이삭에게 위로를 주는 사람이 되었다는 말입니다. 오늘 이 말씀을 묵상하면서, 우리 가족을 떠올렸습니다. 우리가족은 서로에게 위로가 되며 살아가고 있는가? 아니면, 서로에게 상처를 주면서 살아가고 있는가? 우리가 가장 상처를 받는 곳이 어디인 줄 아십니까? 그것은 바로 가장 가까운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알지 못하는 머나먼 곳에 있는 사람들 때문에 상처받고, 아파하는 것이 아니라, 가장 가까운 주변 사람으로부터 상처받고 아파합니다. 만약에 가족이 이 모든 상처를 치료하고 위로할 수 있는 곳이라면, 가정이 마치 천국과 같은 곳이 될 겁니다. 우리가 밖으로 나가서 세상을 바꾸려하기 전에, 다른 사람들을 일으켜 세워주기 전에, 매일 만나는 가족을 위해서 위로하는 자로 살아가는 것이 가장 현명하고, 가장 필요한 일입니다. 오늘 하루, 우리 가정이 서로의 상처와 아픔을 위로하는 공동체로 세워지기 위해서 내가 해야 할 일들을 기록하고 행동하는 하루가 되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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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 전기철 서울신학대학, 연세대 연합신학대학원 졸업 미국 보스톤 조직신학 석사(S.T.M)/연세대학교 박사학위(Ph.D) 강남새사람교회 담임목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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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통의 물을 흐르게 하심은
아무런 노여움도 증오심도 없이 마치(바위를 지팡이로 내리쳐 물을 솟아나게 한)모세처럼 그래서 네 눈꺼풀에서 고통의 물을 흐르게 하여 네 마음의 사하라 사막을 적실 것이니라. -보들레에르의 시 ‘자기자신을 벌하는 사람’에서-
모세가 지팡이로 바위를 쳐 물을 솟게 한 것처럼 매로 사람을 쳐서 고통의 눈물이 흐르는 때가 있습니다. 마른 바위에서 물이 솟는 기적처럼 불모의 정신에 이따금 기적의 지팡이가 가슴을 칠 때가 있을 것입니다. 나를 향한 것이든 무엇을 향한 것이든 고통의 눈물을 무조건 두려워 마십시오. 그 눈물이 솟아날 때 비로소 마음의 사하라 사막이 거칠고 강팍함을 벗고 따뜻하게 젖을 수 있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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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 김옥엽 국제펜클럽 회원 순수문학인협회 상임 이사 크리스챤문학상 수상 대한예수교장로회 숭인교회 유병수 담임목사 사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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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권도 주께 속하였사오니 |
여호와여 위대하심과 권능과 영광과 승리와 위엄이 다 주께 속하였사오니 천지에 있는 것이 다 주의 것이로소이다 여호와여 주권도 주께 속하였사오니 주는 높으사 만물의 머리이심이니이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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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 안유미 프리랜서 시각편집디자이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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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끼가 어찌 톱이 어찌 - 사 10:15-23 |
15 도끼가 어찌 찍는 자에게 스스로 자랑하겠으며 톱이 어찌 켜는 자에게 스스로 큰 체하겠느냐 이는 막대기가 자기를 드는 자를 움직이려 하며 몽둥이가 나무 아닌 사람을 들려 함과 같음이로다 16 그러므로 주 만군의 여호와께서 살진 자를 파리하게 하시며 그의 영화 아래에 불이 붙는 것 같이 맹렬히 타게 하실 것이라 17 이스라엘의 빛은 불이 되고 그의 거룩하신 이는 불꽃이 되실 것이니라 하루 사이에 그의 가시와 찔레가 소멸되며 18 그의 숲과 기름진 밭의 영광이 전부 소멸되리니 병자가 점점 쇠약하여 감 같을 것이라 19 그의 숲에 남은 나무의 수가 희소하여 아이라도 능히 계수할 수 있으리라 20 그 날에 이스라엘의 남은 자와 야곱 족속의 피난한 자들이 다시는 자기를 친 자를 의지하지 아니하고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이 여호와를 진실하게 의지하리니 21 남은 자 곧 야곱의 남은 자가 능하신 하나님께로 돌아올 것이라 22 이스라엘이여 네 백성이 바다의 모래 같을지라도 남은 자만 돌아오리니 넘치는 공의로 파멸이 작정되었음이라 23 이미 작정된 파멸을 주 만군의 여호와께서 온 세계 중에 끝까지 행하시리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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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끼가 어찌 찍는 자에게 스스로 자랑하겠으며 톱이 어찌 켜는 자에게 스스로 큰 체하겠느냐 이는 막대기가 자기를 드는 자를 움직이려 하며 몽둥이가 나무 아닌 사람을 들려 함과 같음이로다>(15절). 앗수르 왕 산헤립의 오만방자함과 뻔뻔스러움을 우화적으로 표현하신 말씀입니다. 교만한 자가 늘어놓는 자기 자랑이 어처구니가 없다는 것입니다. 산헤립은 하나님을 향해 신성을 모독하며 열국의 신들과 마찬가지로 유다 백성의 하나님도 자기를 섬겨야 할 것이라고 기고만장했습니다. 그것은 마치 도끼가 나무를 찍는 대신 사람의 얼굴을 향해 날아드는 격이고 진흙이 토기장이에게 대드는 꼴과도 같았습니다.
불꽃이 되실 것이라 <이스라엘의 빛은 불이 되고 그의 거룩하신 이는 불꽃이 되실 것이니라 하루 사이에 그의 가시와 찔레가 소멸되며>(17절). 사람의 손에 들린 회초리가 자기를 든 사람의 손을 자기 마음대로 움직일 수 있다고 생각하고 온갖 말로 도발하는 짓은 참으로 어리석습니다. 아무리 남을 응징하는데 사용되는 몽둥이라 해도 몽둥이는 여전히 나무일 뿐 그 이상이 아닙니다. 앗수르의 산헤립처럼 교만하고 거만한 자에 대해서는 하나님이 반드시 그 책임을 물으십니다. 교만한 자를 낮추시는 것은 하나님의 능력과 주권을 보여주시는 가장 확실한 증거기 때문에 하나님은 그 일을 통해 필히 영광을 받으십니다(욥 40:4). 하나님은 빛이십니다. 뿐만 아니라 불꽃이십니다. 그래서 못된 가시와 찔레를 소멸하십니다. 하나님의 진노의 불은 맹렬하여 순식간에 모든 것을 삼키십니다. 산헤립과 그의 대군을 보십시오. 하룻밤 사이에 모두 쓰러졌습니다. 이렇듯 하나님은 우리의 영혼과 육신을 다 멸하실 수 있는 타오르는 불꽃이심을 잊지 마십시오.
작정된 파멸을 행하시리라 <이미 작정된 파멸을 주 만군의 여호와께서 온 세계 중에 끝까지 행하시리라>(23절). 영국의 작가 러디어드 키플링의 <만약에>라는 시입니다. <네 곁에 있는 뭇 사람이 이성을 잃고 너를 탓할 때/ 너 만은 이성을 지킬 수 있다면 … /인생에서 승리할 때나 패배할 때나/ 이 두 가지를 똑같이 받아들일 수 있다면 …/ 아들아 그 때 비로소 너는 남자가 되리> 유럽인들은 대개 감정을 잘 다스리고 어떤 경우에도 차분하게 행동하도록 교육받습니다. 그러나 우리나라 사람들은 그들에 비해 욱하는 문화에 너무 익숙한듯 합니다. 자제 보다는 거의 무절제에 빠져 사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유난히 우발적인 사건 사고가 많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는 결코 그런 일이 없으십니다. <이미 작정된 파멸을 행하신다>고 합니다. 하나님은 절대 충동적이거나 욱하는 성질로 세계를 심판하시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신실하심과 공평하심을 찬양하십시오. 우리는 우리가 욱하고 충동적이어서 하나님도 그런 분 인양 착각합니다.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심판도 그렇지만 택하심도 그렇습니다. 이미<창세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다>(엡 1:4-5)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이 미리 예정하심과 택하심에 진심어린 감사와 영광을 바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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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 조성노 독일 본(Bonn) 대학교 신학부 졸업 뮌헨(Muenchen) 대학교 신학부 졸업 장로회신학대학교 조직신학 교수 역임 푸른교회(분당 소재) 담임목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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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더는 모든 대원들을
리더와 추종자 사이에 좋은 관계를 형성해 나가는 과정에서 각 사람은 진지하게 대우받을 권리가 있다. 누구든 그 단체의 일부인 이상 그 사람은 꼭 필요한 사람이다. 그가 비록 잔소리꾼이거나 약하디 약한 사람이거나 지나친 야망가라 할지라도 진지한 대우를 받을 자격이 있음을 리더가 간과해서는 안 된다 -맥스 드프리의 ‘권력 없는 리더쉽은 가능한가?’에서-
리더를 진지하게 대하지 않는 부서원들이 있을 때 리더가 모든 사람을 진지하게 대하지 못하는 함정에 자주 빠집니다. 그렇다고 해서 그것이 부서원들을 소홀히 대하거나 푸대접을 할 이유가 될 수 없음을 알아야 합니다. 이것이 리더가 가진 어려움 중의 하나지만 리더가 되었음은 모든 부서원들을 사랑하고 존중할 의무가 주어졌다는 말과 동의어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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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 김옥엽 국제펜클럽 회원 순수문학인협회 상임 이사 크리스챤문학상 수상 대한예수교장로회 숭인교회 유병수 담임목사 사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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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인은 소망이 |
악인은 그의 환난에 엎드러져도 의인은 그의 죽음에도 소망이 있느니라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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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 안유미 프리랜서 시각편집디자이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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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혁한 위력 - 사 10:24-34 |
24 그러므로 주 만군의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시온에 거주하는 내 백성들아 앗수르가 애굽이 한 것처럼 막대기로 너를 때리며 몽둥이를 들어 너를 칠지라도 그를 두려워하지 말라 25 내가 오래지 아니하여 네게는 분을 그치고 그들은 내 진노로 멸하리라 하시도다 26 만군의 여호와께서 채찍을 들어 그를 치시되 오렙 바위에서 미디안을 쳐죽이신 것 같이 하실 것이며 막대기를 드시되 바다를 향하여 애굽에서 하신 것 같이 하실 것이라 27 그 날에 그의 무거운 짐이 네 어깨에서 떠나고 그의 멍에가 네 목에서 벗어지되 기름진 까닭에 멍에가 부러지리라 28 그가 아얏에 이르러 미그론을 지나 믹마스에 그의 장비를 두고 29 산을 넘어 게바에서 유숙하매 라마는 떨고 사울의 기브아는 도망하도다 30 딸 갈림아 큰 소리로 외칠지어다 라이사야 자세히 들을지어다 가련하다 너 아나돗이여 31 맛메나는 피난하며 게빔 주민은 도망하도다 32 아직 이 날에 그가 놉에서 쉬고 딸 시온 산 곧 예루살렘 산을 향하여 그 손을 흔들리로다 33 보라 주 만군의 여호와께서 혁혁한 위력으로 그 가지를 꺾으시리니 그 장대한 자가 찍힐 것이요 그 높은 자가 낮아질 것이며 34 쇠로 그 빽빽한 숲을 베시리니 레바논이 권능 있는 자에게 베임을 당하리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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앗수르 대군이 갑옷을 입고 창을 곧추세우고 도열한 모습이야말로 레바논의 빽빽한 삼림처럼(34절)장관이었을 것입니다. 또 그 군대를 지휘하며 온갖 교만을 다 떨었을 산헤립은 그야말로 <장대한 자>, <높은 자>(33절)였을 것이 분명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위력은 그것들 보다 더욱 혁혁하여 그들을 다 꺾으시고 찍으시고 베실 것이라고 합니다.
내 진노로 멸하리라 <내가 오래지 아니하여 네게는 분을 그치고 그들은 내 진노로 멸하리라 하시도다>(25절). 고대 헬라 철학자들인 견유학파와 스토아학파는 <신에게는 진노가 없다. 사랑만 있을 뿐이라>고 했습니다. 애굽의 철학자들도 <신은 사랑도 진노도 없는 존재>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성서의 하나님은 인격적인 분이셔서 감정에 충실한 신이십니다. 사랑이 풍성하실 뿐 아니라 분노와 진노 또한 가차 없으신 분이십니다. 따라서 우리는 어떤 경우에도 하나님의 진노를 사서는 안 됩니다. 천하의 앗수르 군대와 산헤립도 하나님의 진노의 대상이 되자 하룻밤 사이에 모두 죽어 시체가 되고 말았습니다. <아버지여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막 14:36). 여기서 주님이 옮겨 달라고 하신 <잔>도 인간의 모든 죄악을 응징하시고 심판하시는 하나님의 <진노의 잔>을 뜻합니다. 그런데 그 잔을 주님이 우리 대신 받으셨기에 이제 우리는 더 이상 하나님의 진노의 대상이 아님을 깨달읍시다. 주님의 그 대속의 희생 덕분에 진노가 아니라 이제 사랑의 대상으로 거듭난 것에 대해 깊이 감사합시다.
멍에가 부러지리라 <그 날에 그의 무거운 짐이 네 어깨에서 떠나고 그의 멍에가 네 목에서 벗어지되 기름진 까닭에 멍에가 부러지리라>(27절).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불같은 진노로 원수들을 진멸하기도 하시지만 또 앗수르 군대의 모진 멍에로부터 당신의 백성들을 자유하게도 하시고 앗수르 왕에게 바쳤던 조공을 더 이상 바치지 않게 하심으로 혹독했던 그간의 짐을 다 내려놓게도 하십니다. 주님은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마 11:30)고 하셨고,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마 11:28)고도 하셨습니다. 당신은 지금 어떤 짐 때문에 고통하며 힘들어 하십니까? 내 무거운 짐과 멍에의 실체가 무엇이고 그게 어디서 오는 것인지를 알고 싶으시다면 지금 당신의 삶을 짓누르는 그 고통과 진솔하게 대면하십시오. 냉철한 자기 성찰이 있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어떤 일이건 그게 나와 상관이 있을 때만 내게 짐이 되고 멍에가 됩니다. 나와 상관이 없다면 사실 누가 십자가에 못 박힌다 한들 그게 내게 무슨 짐이 되겠습니까? 따라서 지금 나를 짓누르고 나를 힘들게 하는 모든 멍에는 피할 수 없는 나의 운명입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주님이 나의 그 짐을 당신께로 가져오라 하시며 나의 그 멍에를 부러뜨리시겠다고 합니다. 유다의 경우 실제 그 목에서 앗수르라는 무거운 멍에를 벗겨 주셨습니다. 전쟁의 공포와 조공의 혹독한 짐에서 놓여나게 하신 것입니다. 모든 무거운 짐과 멍에를 주님 앞에 내려놓으십시오. 쉼과 자유함을 주시는 주님의 은혜를 마음껏 누리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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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 조성노 독일 본(Bonn) 대학교 신학부 졸업 뮌헨(Muenchen) 대학교 신학부 졸업 장로회신학대학교 조직신학 교수 역임 푸른교회(분당 소재) 담임목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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