鶴山의 草幕舍廊房

Free Opinion

[스크랩] 포항 피서

鶴山 徐 仁 2012. 8. 28. 10:53

 

 

포항 피서

 

해마다 여름이면 전국각지를 돌아가며 피서 여행을 하고 있다.


올해는 뜻하지 않은 교통사고로 시일을 끌어 지난 8월 24일에야 피서를 떠날 수 있었다. 지난 8월 20일에야 꿰맨 상처의 실을 풀고, 며칠간 상처의 상태를 살핀 후 의사가 피서여행을 떠나도 좋다는 허락을 하였다.


올해는 피서지로 포항을 선택하였다.


포항은 세계 제일의 제철공장인 포항제철이 있는 산업도시임과 동시에 세계 굴지의 공과대학인 포스텍이 있는 교육의 도시이며, 천혜의 북부해수욕장이나 송도해수욕장 그리고 호랑이 꼬리같다하여 붙인 호미곶 해수욕장이 있는 피서지이기도 하다.


산업과 교육시설과 피서시설을 두루 갖춘 포항을 이제껏 찾지 못한 것이 오히려 늦은 감이 있었다. 포항은 대구를 제외하면, 인구 58만의 대도시로서 경북 제일의 대도시이다. 가까이 경주가 있어서 산업과 교육 그리고 역사성까지 갖추어 찾는 사람들이 끊이지 않는 곳이다.


인구 흡인력이 너무나 강한 서울로 진입하지 못한 사람들이 사는 경기도의 서울 주변의 대도시들 의정부, 인천, 수원, 부천 등을 제외하면, 지방도시로서 인구 50만을 넘는 도시들은 아주 드물다. 청주, 전주, 천안 등이 고작이다. 대도시로 알려진 경주, 목포, 여수, 광양, 마산, 창원, 충주, 원주, 춘천, 강릉, 안동, 통영, 나주, 제주 등은 고작해야 2,30만이다.


KTX가 두시간 남짓 걸려 신경주역에 닿은 시간은 9시 10분 가량이었다. 비가 억수처럼 내렸다. 리무진으로 갈아타고 포항으로 들어갔다. 근 한 시간이 걸렸다. 포항 시외뻐스 터미널에서 이른 점심을 먹었다. 평범한 식당이었으나, 음식이 정갈하고 반찬이 풍부하여 좋은 인상을 받았다.


숙소(필로서호텔)로 가서 체크인하고 제일먼저
학도의용군 전승기념관을 찾았다. 나의 머리 속에 가장 강하게 포항에 대해 각인되어 있는 것은 6.25시 포항여중에서 북한군 전규 대대와 싸운 이곳 중,고등학교 학생 71명의 전투였다. 이들 중 48명이 전사하고 23명이 살아남았는데, 게중에는 아직까지 생존하시는 분이 있고, 지금도 이 기념관에 가끔 나오신다는 신문기사를 본 적이 있었는데, 혹시 이분을 만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가 있었다.


2층으로 웅장하게 지어진 기념관과 뒤산에서 충혼탑을 들러 묵념하였다.


그 생존하신 분은 방금 기념관을 다녀가셨다고 안내가 말했다. 그분이 바로 이 기념관을 지으신 바로 장본인이라고 말했다. 국가에서 지어준 것이 아니라고 했다. 한가지 기이한 것은 택시 기사가 이 기념관을 잘 모른다는 사실이었다. 왜냐하면 그곳에 가자고 하는 사람이 도무지 없다는 것이었다. 어디론가로 전화를 걸어 위치를 확인하는 것이었다. 역시 관광코스가 아닌 모양이었다.


북부테마거리
로 가서 해변을 따러 천천히 걸어내렸다. 안개낀 바다의 수면 저 너머로 수평선마저 시야에 잡히지 않았다. 우리는 포항여객선터미널과 롯데 백화점에 들려 구경하였다.


바다의 안개와 가늘게 내리는 빗줄기, 그리고 낯선 곳이 주는 여수에 잠겨 우리는 근 1 킬로의 해변도로를 걸었다. 포항에 오는 외지인들은 꼭 들른다는 영포회센타에 들러 문우인
서동훈에게 전화했다.


동훈은 젊은 시절 가장 깔끔하고 정선된 단편작가로서 크게 활동하였으나, 직장을 따라 서울을 버리고 포항으로 낙향하여 근 15년 이래로 작품활동을 하지 않고 있다. 부인 이정희여사도 언론인 겸 작가로서 활동한 적이 있었다.


우리 두 가족은 근 두 시간동안 시간가는 줄 모르고 정담을 나누었다. 동훈이 지난 봄에 그야말로 몇십년만에 단편 한 편을 써서 문예지에 넘겼다는 말을 했다. 동훈은 회를 샀으나, 나는 포항의 명물인
포항물회를 먹어보고 싶다고 하여 그에게 이중의 부담을 지웠다. 동훈의 차를 타고 포항의 밤거리를 한바퀴 돌며 여러 가지 설명을 들었다.


숙소에서 저 멀리 포항의 밤바다가 보였다. 온밤 낯선 곳의 밤바다를 바라보며, 깊은 생각과 독서로서 시간을 보냈다. 숙소의 아침 부패가 깨끗하여 좋은 식사를 할 수 있었다.


이튿날에는 포항시청에서 시행하고 있는 시티투어에 예약한 대로 대형뻐스를 타고 포항의 주요 관광지를 둘러보았다. 제일먼저
포항제철을 견학하였다. 시티두어의 장점이 이런 것이다. 개인이 오면 이런 국가기간시설을 관람할 수 없다. 포항시청에서 시행하는 시티투어이기 때문에 쉽게 포항제철과 포항제철 역사관을 둘러볼 수 있었다.


등소평이 죽으면서 포항제철! 했다는 말이 있지만 사실이다. 그만큼 그는 포항제철을 부러워했다고 한다. 우리나라의 현대 산업이 이 정도로 일어난 근본적인 힘이 포항제철이 쏟아내는 철이 아니고 무엇인가. 포항제철에 가면 우향우! 라는 말이 유행하고 있다. 포항제철단지에서 우향우 하면 바로 영일만이다. 그래서 포항제철을 제대로 지어서 가동하지 못하면 영일만에 빠져 죽겠다는 창설당시의 관련 인사들의 결심을 말하고 있다고 한다. 기획을 한
박정희 전대통령박태준이라는 창설자의 혼을 느끼게 하는 것이다.


당시 추진하던 일본의 한국식민지배 청구권 중 7000만 달라를 농수산분야에 쓸수 있도록 되어 있는 것을 포항제철의 건설에 전용토록한 것이 당시 집권자였다. 나라를 기아에서 구하겠다는 집권자의 혼을 박태준이라는 분이 실천에 옮긴 것이다.


역사관
을 돌아보고, 콧잔등이 시큰한 감동을 억제하지 못했다. 나라와 백성을 굶어죽는 보릿고개에서 구하겠다는 관련자들의 강한 집념을 볼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버스는
호미곶으로 향했다. 호랑이 꼬리처럼 바닷 속으로 튀어나왔다하여 호미라고 한다. 등대박물관과 새천년기념관 등대박물관은 볼만했다. 요사이는 전국 어디로 가든지 관광객들을 위한 박물관이나 기념관들의 질이 아주 향상되었다. 내용이 풍부하였고, 질적으로 아주 향상되어 있었다. 등대 횟집에서 바닷 속으로 돌출한 호미곶의 신비스러운 분위기를 감상하면서 포항의 명물인 물회를 또 먹었다. 바다 속으로 그냥 들어온 기분이었다.


이어서
구룡포로 가서 일본인거리를 걸어보았다.


인간의 본성은 성악설인가, 성선설인가.


아무래도 성악설인 것같다. 이웃하고 사는 나라치고 정답게 사는 나라가 드물다. 이웃하고 있는 나라들은 서로 침략하고 모략하고 헐뜯어서 결국 원수가 되는 것이 보통이다. 우리나라와 일본이 바로 그 예다. 요사이 일본사람들이 우리에게 하는 꼴을 보면 정말 때려주고 싶은 정도다. 임진왜란부터 시작해서 나라 자체를 먹어치운 한일합병까지 오래고 오랜 역사를 통해 그들은 우리를 얼마나 못살게 했는가. 반대로 우리가 그들을 못살게 한 적이 있는가. 오만 문화를 전수해주는 등 그들에게 우리는 좋은 일만 하였다. 어찌 이 사실을 모르는가.


구룡포에서 돌아와 포항읍내에 있는
시민미술관에 들렀다. 포항사람들은 쇳덩이만 아는 사람들이라는 오명에서 벗어나기 위해 시에서는 전국 어디에 내어놓아도 빠지지 않는 최신 시설의 미술관을 지었다. 전시된 작품들도 서울 어떤 미술관보다 어쩐지 우수한 것 같았다.


미술관을 보고나서, 우리는 한서린 천안함과 똑같은 모양의
포항함을 보러갔다.


우리를 호시탐탐히 노리고 있는 북의 도발의지를 우리는 천안함을 보면서 뼈저리게 느꼈다. 나라를 지키다가 산화한 48명의 해군들을 보니 눈물이 솟구쳤다. 특히 부하를 사랑하고 나라를 사랑한 한주호 준위의 동상을 보니 그의 위대한 애국심에 고개가 숙여졌다. 이들 해병과 해군 그리고 젊은 군인들의 의식 세계 속에는 일상인들이 상상할 수 없는 나름대로의 애국심이 있는 것같다. 그들의 젊은 피는 분명 나라의 생명이 아니고 무엇인가. 나라와 부하의 안전과 생명을 위해 자기 목숨을 초개처럼 던지는 사나이들의 세계가 분명히 있는 것같다.


또 다른 관광코스가 있었으나, 우리는 마침 버스가
포스텍 앞을 지나가길래 기사에게 말하여 차를 세우고 차에서 내렸다. 자기 버릇 남 못 준다고 일생 대학에서 밥 벌어먹은 버릇을 버리지 못하고, 우리는 세계적인 공과대학인 포스텍을 견학하기로 하였다. 포스텍 견학은 포항시청에서 시행하는 시티투어에는 포함되어 있지 않았다. 서두에 말했듯이 학도의용군 기념관 관람도 시티투어에는 포함되어 있지 않았다.


집사람은 내일모레, 그러니까 27일 35년간 근무하던
공주대학을 정년한다.이번 여행은 어느면 집사람의 정년 기념여행의 의미를 띄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이렇게 들렀으니 학교 시설을 찬찬히 둘러볼 여유가 없기는 당연했다. 우리는 다만 학교의 전모를 천천히 걸으면서 감상하였다. 본부 건물과 수많은 공학관들의 겉모습만을 돌아볼수밖에 없었다. 기숙사가 엄청나게 많은 것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포항의 지리적인 위치가 한반도의 남동부 깊이 위치하고 있음으로 해서 교수들과 우수한 학생들을 유치하기 위해서는 기숙사 시설이 좋아야했을 것이다.


물론 이 대학의 설립이사장은 포스코와 같이 박태준씨였다. 여기 저기 그의 이름이 박힌 기념비들이 서 있었다. 교육자가 아닌 그가 이렇게 훌륭한 대학을 단기간에 만들어낸 것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포스텍 역시 그가 포서코를 만들었던 방식으로 우향우 정신으로 시종했을 것 같았다.


우리는 넘어가는 햇살에 황금의 물살을 뿌리는 분수가 내려다보이는 교수 식당 창가에서 저녁을 사서 먹었다. 이제 우리 시대는 지나갔고, 아들놈들이 대학에서 일생 강좌를 가지고 일할 수 있게 되기를 기다리는 도리밖에는 없다. 고즈넉하기 짝이 없는 포스텍의 캠퍼스 분위기가 나의 영혼 속으로 깊이 파고 들었다. 우리는 저녁을 끝내고 근 삼십분 캠퍼스를 산책하며 대화를 이어갔다.


숙소로 돌아와서 잠시 휴식을 취한 뒤, 숙소 근처에 있는 포항의 명물인
실개천상가 구경을 나갔다. 우리를 태운 택시의 기사에게 실개천이 뭐냐고 물었더니, 서울로 치면 청계천과 같다고 했다. 다만 상가 한 복판을 흐르는 개울이 너무나 작아서 실개천이라고 한다는 것이다. 과연 화려한 상가 한복판으로 가느다란 개천이 흐르고 있었다.


낯선 포항의 여수를 달래면서 실개천 상가의 좋은 까패에 들어가 차를 마셨다.


온종일 돌아다닌 탓으로 몸이 너무나 피곤해 기다시피 숙소로 돌아와 침대에 뻗어 버렸다.


다음날 우리는 예정대로, 오천읍에 있는
포은 정몽주 유허비를 찾아 가기로 했다. 필자는 포은 어른의 22대 손이다. 우리 영일정씨(연일 정씨, 혹은 오천 정씨)는 시조가 신라건국의 6촌장의 한분이었다. 그분들은 박혁거세를 왕으로 추대하였다.


그러나 신라 천년을 지나고 고려 한 300년을 지날 때까지 족보상의 기록이 전혀 없어서 계대를 알 수 없다. 그러다가 고려 의종 때 세자의 스승이었고, 크게 국사에 참여하였던 정습명어른 때부터 그 계대의 기록이 존재한다. 포은 어른은 습명 중시조의 11대 손이다. 그러니까 나는 습명 중시조로부터는 33세 손이다.


포은 어른의 사당은 영천군 임고면과 경기도 용인군 모현면에 있다. 사당의 규모가 엄청나게 크고 두 군 데 다 성역화되어 있다.


그러나 우리 영일정씨의 원고향인 오천을 방문해 보지 못해 언제나 늘 죄스러움을 가지고 있었다. 바로 영일 정씨가 발상한 곳이다. 이번에 여행의 목적지로 포항을 선택한 것도 사실은 포항시 오천읍에 위치한 포은 유허비(遺墟碑)를 찾아보기 위함이었다.


몇 대의 택시를 잡고, 기사에게 오천에 있는 포은 유허비를 아느냐고 물어도 안다는 사람이 없었다. 하는 수 없이 개인 택시를 잡아 타고, 네비게이션을 돌려보라고 했더니 과연 포은 유허비가 나타났다. 그대로 가자고 해서 길을 떠났다. 택시비가 한 만원정도 나왔다.


한산한 인가 사이에 쓸쓸하게 서있는 포은 어른의 유허비에 조금은 실망하였다. 유허비라는 말 자체가 역사의 쓸쓸한 현장에 세워진 비석이라는 뜻이다. 큰 기대를 하지는 않았지만, 영천군 임고면과 용인 모현면의 거대하게 성역화된 사당과 묘역에 비하면 포은 어른께서 어린 시절을 보내시고 공부하신 오천의 유허비는 퍽 초라하였고, 쓸쓸하였다. 내 성씨의 원고장이라서 그런지 알 수 없는 감회가 가슴을 파고 들었다. 나는 아픈 마음을 쓰다듬으며 오천의 포은 유허비 앞의 거리 이름이
정몽주로라는 사실만으로 위안을 삼으며 조상의 서기어린 유허비를 떠났다.


태풍 볼라벤이 올라오고 있다는 뉴스가 연속적으로 나와서 나는 상경을 하루 앞당기기로 했다. 그래서 오늘 오후 기차를 타기로 했다. 마침 신경주역까지 나가지 않고도 탈 수 있는 새마을호에 딱 두 자리가 남아 있다 하여 예약을 하였다.


그러니 이번 점심이 포항에서의 마지막 식사가 되는 것이다. 나는 이 점심을 누구와 뜻깊게 할까 하고 생각하다가, 포항이 고향은 아니지만 부인의 신병으로 여기 포항 바닷가에 별장을 사서 잠시 살러와 있다는 중학교 동기생
서정후를 생각했다. 가벼운 뇌졸중으로 몸이 약간 불편한 정후의 부인은 바다를 그렇게 좋아한다고 한다. 그래서 정후는 여기 포항 바닷가에 서른 평 짜리 빌라를 한 채 샀다고 한다. 대도시 주변이 아니라 이런 집들이 그렇게 비싸지 않다고 한다.


정후는 즐거운 목소리로 전화를 받았다. 그의 목소리는 차분히 가라앉아 있었고, 나의 전화를 퍽 반기었다. 그는 자신이 당장 포항으로 나오겠다고 했다. 그는 포항에서 한 4,50리 떨어진 북쪽 해변에 살고 있었다.


우리는 바다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포항 롯데백화점 10층 식당에서 만났다. 분위기가 그만이었다. 우리는 무한한 기쁨과 반가움을 가지고 근 두 시간 점심을 먹으면서 대화를 했다.


그리고 정후가 살고 있는 곳 바로 옆에 있다는
보경사를 보러갔다. 정후는 좋은 차를 가지고 있어서 질주가 아주 기분이 좋았다. 이 지역에서는 가장 잘 알려진 명찰이고 거찰이다. 절의 창설자인 원진국사 탑은 보물로 지정되어 있다.


이 시간 이 신비스러운 도시에는 폭풍전야의 고요가 서리어 있어서 아주 조용했고, 태풍의 경보와는 달리 햇살이 찬란하였다. 어제와 그제에 비가 내리던 것에 비하면 날씨가 그만이었다.


정후는 중학교 때 교실 좌석이 바로 나의 뒷자리였다. 그의 낭랑한 목소리가 언제나 지금도 내 귀 근처에 맴도는 것같다. 중학교 때도 언제나 그 특유의 목소리로 웅변인가를 나와 함께 하였다. 그는 우리들 중학교 동기생들은 누구나 다 진학하던 같은 계열의 고등학교에 진학하지 않고, 서울로 진학하였다. 그래서 그는 우리와 헤어졌던 것이다. 그 학교가 아마도 이화여대부속고등학교가 아닌가 기억된다. 그리고 우리들은 그를 잊어 버렸다.


인생을 다 산 언제쯤에 나는 그의 소식을 들었는데, 무슨 군장교로 입신출세하여, 육군 항공단의 여단장이라고 했다. 그래서 그의 여단장 취임식전에 간 적이 있었다. 찦에 올라서서 정면으로 천천히 굴러가면서 도열해 서 있는 육군항공병들을 사열하는 그의 늠름한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내가 알기로는 대한민국 육군 항공단에는 두 개의 여단이 있는데, 그는 제2 여단장이었던 것 같다. 그후 그는 육군 항공단의 부사령관까지 지낸 것으로 알고 있다. 대단한 군내 중요 포지션이다. 그는 미국 공군군사학교에 세 차례나 파견되어 각종 비행기의 조종술을 익혔다.


그후 그는 오십대 초기에 전역하여, 계명대학에서 박사학위를 하고, 경북과학대학에서 전임교수로 근 십년 근무하였다. 군 경력과 대학교수로서의 경력, 그의 열과 성실한 인생자세가 빚은 결과였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남은 3시간을 보경사를 보는 것으로 할당했다. 보경사는 이 지역에서는 가장 크고 역사가 깊은 거찰이고 명찰이다. 포항에 왔다가 보경사를 보고가지 않는다면 그것도 큰 실수라고 말한다. 이 지역민들의 긍지가 바로 보경사이다. 정후는 보경사 바로 옆 동네에 살고 있었다.


보경사 관람을 마치고 기차 시간에 맞춰서 포항으로 돌아오면서 정후는 잘 닦인 포장도로를 버리고, 해변도로를 택했다. 파도가 흰 물거품을 품고 끝없이 밀려오는 동해를 바라보면서 우리는 천천히 남하했다. 중학교 때 이야기를 많이도 했다.


그와 보낸 세 시간은 내 중학생 때로 돌아간 시간여행이었다. 나는 그 사이 까맣게 잊어 버리고 있었던 중학교 동창생들의 이야기를 정후에게서 많이도 들었다. 사실 서울에서 50년 가까이 살고 있는 나는 고향 대구와 고향에 남아 있는 중, 고등학교 동기생들은 거의 잊고 살고 있는 것이다. 그들이 내 삶의 바운다리 속에 있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그냥 중학교 동기생이라는 사실만으로 그들을 의식하기에는 나의 서울 생활이 너무나 바쁘다.


우리는 정말 전망 좋은 언덕위 횟집에 들어가 도다리 자연산 회를 시켜 먹었다. 그 광경이 사진으로 남아 있을 것이지만 그 때의 그 황홀한 기분을 잊을 수 없다.


포항을 느끼고, 포항의 신비스러움과 포항의 선진성을 느끼고 보았다. 그리고 아득하게 잊고 있던 두 서씨성을 가진 구우들인 서동훈과 서정후를 만났다. 이 어찌 기쁘고 보람찬 올해의 피서여행이 아닐 수 있겠는가.
 

 

조상인 포은의 유허비에 인사하는 필자


호미곶을 방문하고 있는 노부부, 아내는 올 8월에 정년을 앞두고 있다.

 

 

 

출처 : 경대사대 부중고1215회 동기회
글쓴이 : 정소성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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