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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갑식의 세상읽기] 그 '골수 공산당'은 왜 한국에 반했을까/ 조선일보

鶴山 徐 仁 2011. 6. 28. 22:10
사설·칼럼
종합

[문갑식의 세상읽기] 그 '골수 공산당'은 왜 한국에 반했을까

입력 : 2011.06.27 23:31 / 수정 : 2011.06.28 13:54

문갑식 선임기자

1934년 처음 밟은 땅
지금은 세계 유일의 100% 조선족 마을 만융촌
이제는 심양특구의 핵심리더 이문길이 말했다
미제에 신음하는 한국인 줄 알았지만
20년 넘게 살펴보니 그곳이 바로 우리의 모델

'만융촌'은 중국 심양(瀋陽) 남쪽에 있다. 우리 한강처럼 심양을 동서로 가로지르는 혼하(渾河)를 껴안은 지세가 척 봐도 요지다. 그래서인지 이름도 범상치않다. '가득찰 만(滿), 녹을 융(融)'이다. "돈이 가득차 녹은 마을"이란 뜻이다.

먼 옛날 혼하가 넘쳤다. 황토물이 심양을 뒤덮었다. 딱 한 군데 육지가 남았는데 토끼 세 마리가 살고 있었다고 한다. 그게 지금의 만융 땅이다. 1934년 그곳에 조선인들이 들어왔다. 일제의 등쌀을 피해서 온 평안도 머슴 출신 정(鄭)씨 일가들이었다.

만주인이 버린 황무지였다. 땅을 신앙처럼 여기는 조선인들은 거기에 물길을 내고 모를 심었다. 중국인들이 비웃었지만 물기 흠뻑 머금은 두툼한 토층(土層)에선 이삭이 토실하게 익어갔다. 1945년 광복 때 조선인 수가 400호(戶)에 달했다.

지금 만융 인구는 2000명쯤 된다. 한창때의 6000명보다 많이 줄었다. 그래도 변하지 않은 게 있다. 한족(漢族)이 단 한 명도 살지 않는 순수 혈통이다. 몰래 들어와 사는 이가 있긴 하겠지만 법적으론 100% '조선 사람' 마을이다.

만융의 개발사는 유명하다. 1970년대 미국·독일학자들이 찾아왔다. 주택개량이 공산주의 농촌의 모델 격으로 알려진 것이다. 1995년엔 한국식 고층 아파트가 들어섰다. 노인용 시설도 제일 번듯하니 실버타운의 원조격이라 할 만하다.

일러스트=박상훈 기자 ps@chosun.com
그런 만융이 재변신을 꿈꾸고 있다. 중국 최대의 '코리아타운'으로 발돋움하려는 것이다. 김치냄새, 마늘냄새 물씬 풍기는 한국 음식으로 관광객을 부르는 거리가 아니다. 760만 심양 경제개발특구의 선봉에 조선인마을이 서 있는 것이다.

앞으로 5년 후 이곳에는 최고 22층 아파트에 금융·산업시설이 들어선다. 우리말 신문, 우리말 TV, 우리말로 학생을 가르치는 국제학교가 있는 곳으로 바뀐다. '한국 따라 하기'를 작정한 듯 설계부터 한국의 동일건축에 맡겨버렸다.

2000명인 조선족을 5만명으로 늘리겠다는 야심 아래 만융촌을 이끄는 이가 이문길(李文吉·58) 중공 화평구 혼하 서가도(西街道) 만융위원회 서기다. 그는 '골수 빨갱이'다. 청년시절부터 공산당 우두머리 노릇을 해왔다.

그의 원래 직업은 중의(中醫), 즉 한의사다. 1984년 병원을 열었고 1997년 만융에 홍십자(紅十字)병원을 세웠다. 그는 '휠체어의 부도옹(不倒翁)' 정인영(鄭仁永) 한라그룹 회장을 휠체어에서 일어서게 만든 것으로 이름을 날렸다.

"두 달 반 치료해 드리니 정 회장께서 저보고 그러시더군요. '이 의장, 나 지팡이 버리게 생겼다'고." 그는 중풍뿐 아니라 골다공증 전문가이기도 하다. 성사되진 않았지만 한국 구주제약, 삼천리제약과 치료약 개발을 추진하기도 했다.

그런 실력이면 돈 버는 데 매진해도 될 텐데 그의 관심은 온통 만융이다. "아버지 고향이 평안북도, 어머니는 전남 장흥입니다. 일본강점기 때 개척단원으로 왔다 만났대요. 통화(通化)에 살다 두 살 때 만융으로 왔어요. 그래서 애정이 많습니다."

만융을 한국형 모델로 개조하겠다는 그의 꿈은 1989년에 시작됐다. 그는 그때 시작된 조선족 고향방문 프로그램에 참가했다.

"전 그때까지 한국이 미제(美帝)의 발톱에 신음하는 나라로만 알았습니다. 그래서 그 처참한 실상을 직접 보고 오겠다고 마음먹었습니다. 그 와중에 웃지 못할 일도 겪었지요. 지금 생각해도 허허…."

직항(直航)이 없던 시절 그가 한국에 오는 데 1주일이 걸렸다. 심양~심천까지 완행열차로 3박4일, 홍콩서 비자 받는 데 사흘이 걸렸다. 황하(黃河)를 건너고 양자강(揚子江)을 넘는, 대륙종횡 끝에 그는 서울 낙성대 옆 3층 양옥에 짐을 풀었다. 그를 반겨준 건 당시 74세 류씨 할머니였다. 할머니와 달리 딸은 그를 탐탁지 않게 여겼다. 그런 어느 날 반전(反轉)이 왔다. "그 딸의 몸이 갑자기 차갑게 굳더군요. 대침을 40분 꽂아줬지요." '명의(名醫)'란 소문에 다음 날부터 집앞에 환자들이 줄을 섰다.

나쁜 기억도 있었다. 한 사기꾼이 돈 좀 벌겠다고 가져온 6만위안짜리 그의 코뿔소뿔을 가져가더니 이 핑계 저 핑계를 댔다. 그는 이씨가 중국으로 떠나는 날 새벽 2시에 나타나 돈 대신 칼에 쭉 찢긴 가방을 내밀었다. 순진한 '공산당'은 결국 '1000달러'를 받고 물러났다. 그런데 오는 길에 세어보니 돈은 앞뒤만 100달러였고, 나머진 1달러였다. 그는 후일 어느 부잣집에서 그 코뿔소뿔을 봤지만 조금 긁어서 약을 지어주고 말았다. 인연이 끝났다고 판단한 것이다.

십수 회에 걸친 한국 방문에서 이런 일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그런데도 이 공산당 서기는 만융의 활로를 한국에서 찾기로 했다. "사기꾼, 양아치는 어디나 있는 법입니다. 목표를 향해 매진하는 한국의 방식이 만융에 가장 잘 맞습니다!"

사족(蛇足)-문제의 사기꾼은 요즘도 가끔 중국으로 전화를 걸어 수작을 부린다고 한다. 이 서기는 "한탕의 추억을 아직 못 잊는 것 같다"며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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