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박은주 기획취재부장
'정의'라는 화두가 반년 이상 독점적 지위를 누리면서 모두가 정의를 말하는 시대가 됐다. 정부는 정의라는 단어를 '공정'이라는 단어로 살짝 바꾸어 서민중심 정책이, 공정이 그에 가깝게 가는 길이라 주장한다. 야권에서는 쉽게는 무상급식으로 상징되는 보편적 복지가 정의로운 사회를 구현하는 길이라고 목소리를 높인다.
이런 가치는 정치적 구호로 머무는 게 아니라 실제로 작동한다. 지난해 5000원짜리 치킨을 시장에서 퇴출시킨 것도 '공정사회'를 지향한다는 정부의 입김이었고, 새해가 시작되자 각 지자체에서는 '공정한 ○○시'식의 결의대회를 잇달아 열고 있다. 심지어 '이명박 정권을 죽여 버려야 하지 않겠느냐'는 천정배 민주당 의원 말에 정부와 한나라당이 뒤집히자, 이인영 민주당 최고위원은 "민심을 말하는 것이 뭐가 잘못됐나. 지난여름에 이명박 대통령이 읽은 '정의란 무엇인가'는 정말 잘못 읽은 것"이라고 했을 정도다. 이제 '정의'라는 이름만 걸치면 뭐가 됐든, 그야말로 '먹히는' 세상이 됐다.
지난해 한 남자가 자살을 했다. 새 직장에 적응하지 못해 생긴 일로 알려졌다. 다른 얘기가 들려왔다. 자살한 남자 A가 직장을 옮겨 보니, 그의 상급자인 B와 특별한 관계로 추정되는 여성 C의 태도가 지나치게 안하무인인 것을 발견했다. A는 C를 나무랐는데, 이후 A는 주요 프로젝트에서 배제됐다. B가 그렇게 결정했다. 이어 C는 A로부터 성희롱을 당했다고 신고했고, 직장에서는 A가 성희롱을 한 것으로 결론을 냈다. 그 결정이 내려진 날 A는 자살했다. 망자의 명예를 걱정하는 A의 부인은 이런 사실이 담긴 유서를 공개하지 않고 있다. 물론 주변 이야기만 듣고 진실을 다 밝혀낼 수는 없다. 그러나 A의 가족들은 지금도 C가 복수할 요량으로 '성희롱'이라는 무기를 들고 나왔다고 생각하고 있을 것이다.
우리나라에서는 지금도 우위에 있는 남성이 여성을 희롱하는 일이 벌어지고 있다. '성희롱을 당했다'는 고백을 하는 데는 상당한 용기가 필요하다. 그러므로 '성희롱을 당했다'는 주장과 '하지 않았다'는 주장이 맞붙을 경우, 대부분 '당했다'는 주장에 귀를 기울이게 된다. 증거가 존재하지 않는 성희롱을 '박멸'하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는 선택이다. 약자를 보호하기 위한 '정의'의 한 방편이다.
그러나 세상사는 매우 복잡한 것이어서, 한쪽에서는 여전히 성희롱을 당하고 고발조차 못하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한쪽에서는 상대를 생매장하는 방법으로 '성희롱'을 이용한다. 대학에 있는 한 지인은 "여학생이 지나치게 친밀감을 표시해오는 것이 무섭다. 자기한테 불리한 일이 생기면 교수가 희롱했다는 식으로 소문을 내는 경우가 있기 때문"이라고 했다. 정의를 위한 방편이 불의의 앞잡이가 되는 일은 종종 있다.
'정의'만큼 정의로운 것은 없다. 그래서 정의가 맹목이 될 때 누구도 그걸 막기는 어렵다. 그러나 바로 그 순간, 또 다른 진실은 질식되곤 한다. '정의사회 구현'을 위해 사회 쓰레기를 청소하겠다던 삼청교육대의 폭력적 아이러니를 사람들은 모두 기억하고 있다. '정의'라는 명분이 맹수처럼 돌진하는 중이다. 여도, 야도, 있는 자도, 없는 자도 '정의'를 말하는 지금, 그 어떤 진실이 질식하고 있는지 눈여겨보는 자 누구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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