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박해현 논설위원
최근 탈북한 북한 주민들은 '스토리가 뻔한 한국 드라마에 식상한 북한 청년'일수록 미국 영상물을 좋아한다고 전했다. 집단수용소나 다름없는 북한에서 '프리즌 브레이크' 같은 탈옥극이 청년들을 사로잡는다는 사실 자체가 그 어떤 드라마보다 더 절박한 메시지를 상징적으로 던져준다.
수많은 탈북자가 증언했듯이 북한 주민들도 내부 모순과 외부 현실에 대해 알 건 다 알고 있다. 현재 국내에 정착한 탈북자 중엔 조선작가동맹 소속이었던 여성 시인 최진이(51)가 있다. 1999년 탈북에 성공한 그녀는 책 '국경을 세 번 건넌 여자'(2005년)를 통해 시인의 섬세한 감각으로 북한 실상을 그려냈다. 그녀는 북한의 젊은 작가들이 감시와 통제 속에서도 힘겹게 체제 비판의식을 다듬는다고 전했다. 김정일 찬양시를 잘 써서 촉망받았던 그녀였지만 "문학의 생명은 인간의 생활이라고 배운 내가 다들 인정하지도 않는 찬양문학을 써야 하나, 말아야 하나"라며 괴로워했다. 작가동맹의 문인들 대다수가 공유하는 고민이었다.
물론 북한 정권에 스스로 아첨하는 작가들도 많았지만, 문단에선 '삼류 작가' 취급을 받는다고 그녀는 전했다. 실제로 최진이를 비롯한 시인들이 한 소설가에게 "너는 짬만 있으면 김일성 부자를 욕하면서 그자를 찬양하는 작품은 도맡아 쓰고 있으니 말이 되느냐"고 면박을 준 일이 있었다. 그 작가의 대답이 걸작이었다. "아, 난 김일성 김정일을 노래한 것이 전혀 아니오. 내 하느님을 바라보면서 쓴 것이오!" 이 말에 모두 배꼽을 잡고 웃었다. 재능있는 작가일수록 다른 인물을 상상하면서 찬양문학을 쓴다는 것을 동료들끼린 다 알고 있었다.
북한의 어떤 작가들은 이야기를 전개하다가 '막다른 골목에 이른 인간관계'를 해결할 때가 되면 갑자기 수령님과 장군님을 찬양해 얼렁뚱땅 넘어가서 다시 이야기를 풀어갔다고 한다. 고대 그리스 연극에선 주인공이 위기에 빠지면 신(神)이 하늘에서 도르래를 타고 내려와 상황을 해결하곤 했다. '데우스 엑스 마키나'(Deus ex machina: 기계 장치로 내려온 신)라는 기법이다. 북한 작가들은 현대문학에선 말도 안 되는 옛날 기법을 이용해 검열을 통과하면서 속으론 체제를 조롱해 작가적 양심을 지키려 한다는 슬픈 얘기다.
최진이와 동료 작가들은 요즘보다 외부 정보에 더 밝지 않았던 90년대였지만 독재 체제의 모순을 똑바로 볼 줄 알았다. 기성 질서에 비판적인 젊은이답게 '빅 브라더'가 만들어놓은 가짜 낙원에 속지 않고, 장벽 너머의 세계를 끊임없이 꿈꿨다. 이젠 최진이의 뒷세대가 탈옥극 '프리즌 브레이크'를 보면서 그 꿈을 이어가고 있을 것이다. 바로 이때 역사의 신이 도르래를 타고 내려오면 안 되나. 신이 감옥에 갇힌 사람들을 구출하는 북한판 '프리즌 브레이크'가 전 세계에 방영될 날은 언제일까. 꿈도 함께 꾸면 이뤄진다고 했으니, 눈을 감고 기다릴 수밖에 없는 걸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