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軍事 資料 綜合

두목 혼자 잘난 척 할 수는 없다 [ 2 ]

鶴山 徐 仁 2010. 9. 18. 14:20

august 의 軍史世界

 

두목 혼자 잘난 척 할 수는 없다 [ 2 ]

 

 

 

아르헨티나, 남미의 맹주를 꿈꾸다

 

유럽과 태평양 일대가 쑥대밭으로 변한 제2차 대전 종전 직후만 해도 아르헨티나는 세계6대 경제 대국으로 손꼽힐 만큼 경제력이 뒷받침되는 나라였습니다.  세계가 전쟁으로 치고받을 때 불꽃에서 멀리 떨어져 전화를 입지 않았고 넓은 국토를 발판으로 성장한 축산업과 농업의 막강한 경쟁력을 이용하여 세계의 식량공급지가 되면서 엄청난 부를 축적 할 수 있었는데, 이러한 자신감을 바탕으로 군비도 증강시켰습니다.

 

[ 한 때 세계적인 경제 강국이었던 아르헨티나는
불안한 정국과 포퓰리즘이 국가를 거덜 낸 대표적인 사례입니다 ]

 

그러한 군비 확충에는 해군력 확장도 포함되었습니다.  아르헨티나는 브라질, 칠레와 더불어 남미 국가 중 연안 해양이 넓어서 해군력을 확충할 필요가 있었고 이러한 재해권 확보의 일환으로 대양에서 작전이 가능한 항공모함의 도입을 고려하게 되었습니다.  이때 한국전쟁 참전을 끝으로 치장물자로 보관 중이던 영국의 경항공모함을 1958년 7월 구입하여 ARA V-1 Independencia라는 이름을 명명하여 취역시킵니다.

 

[ 아르헨티나 최초의 항공모함 Independencia ]

 

이 항공모함은 원래 제2차 대전도중 영국에서 건조를 시작한 18,400톤급의 호위항공모함이었습니다.  하지만 1946년에 취역을 하여 제2차 대전에는 참전하지 못하였고 곧바로 캐나다해군에 임대되어 HMCS R31 Warrior라는 이름으로 활약하였습니다.  이후 몇 번의 개장공사를 통해 앵글드데크(Angled Deck)와 사출기를 갖춘 현대식 항모로 옷을 바꿔 입고 한국전쟁을 거친 후 새로운 주인을 맞이하였고, Independencia로 새롭게 탄생한 항공모함은 도약하는 아르헨티나 해군의 중추로 자리 잡게 되었습니다.

 

[ 현대화 개장 전 Warrior로 캐나다해군에서 활약하던 당시 ]

 

아르헨티나는 Independencia를 바탕으로 항공모함과 함재기 운용능력을 배가 시켜 남미의 맹주로써의 역할을 확고히 하였습니다.  하지만 급속히 노후화되어 기능이 저하되자 아르헨티나는 마침 네덜란드 해군이 불의의 사고를 당하였으나 수리하지 않고 매각물건으로 내어놓은 경항공모함 HNLMS R81 Karel Doorman을 아르헨티나의 두 번째 항모로 인수하여 개장공사를 거친 후 ARA V-2 Veinticinco De Mayo (5월 25일, 이하 25 De Mayo)라 명명하여 1968년 취역시키고 Independencia를 1970년 퇴역조치 하였습니다.

 

[ 네덜란드 해군 소속이었을 당시의 Karel Doorman ]

 

새로 도입한 25 De Mayo도 원래 영국에서 제작한 항공모함이었는데 1942년 12월 건조되어 1945년 1월 취역한 19,900톤 규모의 Venerable급 항모로, 그동안 여러 번의 개장 공사로 앵글드데크와 캐터펄트를 갖춘 경항모함이었습니다.  아르헨티나는 25 De Mayo에 총 21기의 A-4Q Sky Hawk 공격기, Super Etendard 공격기, 헬기를 탑재하여 연안 해상항공지원 및 대잠초계용도로 운영을 하여 왔습니다.

 

[ 아르헨티나의 새로운 항공모함 25 De Mayo ]

 

그런데 어쩌면 여기까지는 당시 아르헨티나 경제력이나 국토 그리고 항공모함의 운용목적을 고려 할 때, 과하거나 모자라지 않는 적절한 규모의 항모를 효과적으로 운용하였다고 평가할 수 있습니다.  잠재적인 적대 세력인 브라질, 칠레, 우루과이의 군비와 비교 하였을 때는 25 De Mayo는 충분히 적절한 항모였기 때문이었습니다.  한마디로 동네에서 대장노릇하기에 더할 나위 없었습니다.

 

[ 25 De Mayo에 탑재 된 A-4Q 공격기 ]

 

하지만 이놈이 허우대만 큰 애물단지로 전락하는 운명에 처하는데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습니다.  비록 25 De Mayo가 경항공모함이라서 미국의 초대형항모와 같은 막중한 임무를 수행할 수는 없었지만 정작 결정적으로 중요할 때 능력을 발휘할 수 없었습니다.  지역에서 대장 노릇을 하던 두목이 이처럼 난감하게 되었던 가장 큰 이유는 이놈을 호위할만한 지원전력이 크게 뒤졌기 때문이었습니다.

 

[ 포클랜드 전쟁 전인 1978년 25 De Mayo의 분주한 갑판 모습 ]

 

단순 초계임무에 25 De Mayo를 투입 하였던 평화시에는 이러한 불균형이 제대로 보이지 않았지만, 막상 아르헨티나가 국운을 건 거대한 전쟁에 돌입하자 커다란 문제로 부각되었습니다.  더구나 상대는 주변의 고만고만한 해군이 아니라 한때 세계의 바다를 지배했고 아르헨티나와 전쟁을 벌였을 당시에도 세계 2~3위를 다투고 있던 전통의 해군 강국 영국이었습니다. ( 계속 ) [ august 의 軍史世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