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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매 없는 나무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아무 실패도 하지 않을 것입니다. 비방도 조롱도 받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동시에 우리는 하나님의 기적도 경험하지 못할 것입니다.
-강준민 목사의 ‘기적을 창조하시는 예수님의 은혜’ 중에서-
매일 시간에 쫓기며 바쁜 하루를 보내도 그 안에 그리스도의 소망과 꿈이 없다면 아무것도 하지 않고 살아가는 것과 같습니다. 내 자신의 계획이 아닌 하나님의 계획에 주목하며 자신을 통해 이루실 하나님의 소망을 기대하는 사람. 그래서 하나님의 비전이 곧 자신의 비전이 되어 늘 새로운 만남과 도전에 감사하는 그런 믿음의 사람이 되길 간구하십시오. 포도나무 되신 하나님의 싱싱한 가지가 되어 삶 가운데 더욱 풍성한 열매를 맺길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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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들레 |
하나님을 향한 내 마음과 사랑이 일편단심 민들레 였으면 좋겠습니다.
세상에 한 눈 팔지 않고 하나님만 사랑하고, 내 이웃을 사랑 할 수 있도록...
내 안에 있는 이 작은 복음의 씨앗들 멀리 멀리 퍼트릴 수 있도록...
일편단심 민들레였으면 좋겠습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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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 최문숙 예수님의 지상명령을 전하라는 '땅 끝까지 증인이 되리라_Project 1'의 임무를 띠고 1982년 9월 19일 세상에 내려왔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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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4월 14일 - 마태복음 18:21-35 |
21. 그 때에 베드로가 나아와 이르되 주여 형제가 내게 죄를 범하면 몇 번이나 용서하여 주리이까 일곱 번까지 하오리이까 22.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게 이르노니 일곱 번뿐 아니라 일곱 번을 일흔 번까지라도 할지니라 23. 그러므로 천국은 그 종들과 결산하려 하던 어떤 임금과 같으니 24. 결산할 때에 만 달란트 빚진 자 하나를 데려오매 25. 갚을 것이 없는지라 주인이 명하여 그 몸과 아내와 자식들과 모든 소유를 다 팔아 갚게 하라 하니 26. 그 종이 엎드려 절하며 이르되 내게 참으소서 다 갚으리이다 하거늘 27. 그 종의 주인이 불쌍히 여겨 놓아 보내며 그 빚을 탕감하여 주었더니 28. 그 종이 나가서 자기에게 백 데나리온 빚진 동료 한 사람을 만나 붙들어 목을 잡고 이르되 빚을 갚으라 하매 29. 그 동료가 엎드려 간구하여 이르되 나에게 참아 주소서 갚으리이다 하되 30. 허락하지 아니하고 이에 가서 그가 빚을 갚도록 옥에 가두거늘 31. 그 동료들이 그것을 보고 몹시 딱하게 여겨 주인에게 가서 그 일을 다 알리니 32. 이에 주인이 그를 불러다가 말하되 악한 종아 네가 빌기에 내가 네 빚을 전부 탕감하여 주었거늘 33. 내가 너를 불쌍히 여김과 같이 너도 네 동료를 불쌍히 여김이 마땅하지 아니하냐 하고 34. 주인이 노하여 그 빚을 다 갚도록 그를 옥졸들에게 넘기니라 35. 너희가 각각 마음으로부터 형제를 용서하지 아니하면 나의 하늘 아버지께서도 너희에게 이와 같이 하시리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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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면서, 그 맛을 체험하기 전에는 결코 알 수 없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용서”입니다. 용서는 경험하지 못하면, 그 맛을 알 수 없습니다. 내가 누군가를 용서한 경험이 없다면, 오늘 성경을 통해서 주시는 용서의 메시지를 깨달을 수 없습니다.
오늘 베드로는 예수님에게 일곱 번 정도 용서하면 되느냐고 묻습니다. 베드로 마음에는 율법에 3번 용서하라고 적혀 있으니까, 7번이면 많이 하는 것이라고 생각했을 겁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대답이 파격적입니다. 예수님은 “70번씩 일곱 번을 용서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은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는 겁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까? 그 말씀은 용서에는 횟수가 정해져 있지 않다는 말입니다. 쉽게 말해서, 용서는 죽을 때까지 하는 것이라고 말하는 겁니다.
예수님이 490번 용서하라는 것은 무조건 용서하라는 말입니다. 인생은 용서하는 삶입니다. 우리가 수없이 내 안에서 이해할 수 없고, 견딜 수 없는 일들에 대해서 용서했기 때문에 우리가 지금 살아갈 수 있는 겁니다. 만약에 나 자신을 용서하지 못하고, 나에게 상처를 준 누군가를 용서하지 못했다면, 우리는 지금 세상을 살아갈 수 없을 겁니다.
아마도 베드로는 예수님의 말씀을 도무지 이해하지 못했을 겁니다. 율법에 나오는 것과 차이가 나도 너무나 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좀 이상한 사람이라고 생각했을지 모릅니다. 베드로가 예수님을 배반하지 않겠다고 자신 있게 대답하고서, 배반할 수 밖에 없는 자신을 보고서야 깨달았을 겁니다. 아마도 닭이 두 번 울었을 때, 왜 용서에는 횟수가 필요 없는지를 깨달았을 겁니다.
용서는 몇 번으로 족한 것이 아니구나!! 벌써, 내가 예수님께 수없이 용서받고 있었다는 것을 깨달았을 겁니다.
그래서 주기도문에 “우리가 우리에게 죄지은 자를 용서한 것 같이, 우리의 죄를 용서하여 주옵소서!”라고 기도를 요청하셨을 겁니다.
오늘 용서하는 삶을 살아가는 용기를 내봅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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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 전기철 서울신학대학, 연세대 연합신학대학원 졸업 미국 보스톤 조직신학 석사(S.T.M)/연세대학교 박사학위(Ph.D) 강남새사람교회 담임목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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