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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사르트르 문학사상의 핵심은 무엇인가.

鶴山 徐 仁 2010. 3. 23. 23:25

사르트르 문학사상의 핵심은 무엇인가.

정소성(소설가, 단국대 명예교수)

 

나는 사르트르를 전문적으로 연구한 사람이 아니다.

그러므로 이 글은 전문적이고 학술적인 글이 아니다.

20세기 대중적으로 가장 영향력이 있는 한 사람의 소설가 겸 사상가를 그야말로 상식적으로 조망해보는 정도의 글이다.

사르트르 문학사상의 핵심을 가장 잘 들어내는 단 한 마디의 단어를 든다면 무엇이 될까. 그것은 아마도 <반항>이 될 것 같다.

이것을 좀더 구체적으로 세분하면, 실존적 반항과 정치적 반항으로 심화시켜 볼 수 있을 것이다.

실존적 반항이란, 사르트르가 독일의 실존주의 철학자 하이덱거의 영향을 받아, 인간은 어떤 필연성도 없이 태어나 일생 허우적거리며 생을 이어가다가, 우연히 죽어버리는 존재라는 사실의 깊은 인식에서 비롯되었다.

세상은 이런 인간존재들로 우글거린다는 것이다. 무엇이든지 넘치면 토해내는 것이다. 그래서 그의 첫 번째 소설은 <구토>이다.

두 번째 소설집 <벽>도 같은 맥락에서 집필된 다섯편 단편들의 모음 집이다.

사르트르의 첫 번째 철학적 에세이집 <존재와 무>도 같은 사상을 담고 있다.

 

사르트르의 사상을 가장 집약적으로 풀이해 놓은 <천년색판 소 라루스> 사전을 완역해 보는 것이 그의 전모를 가장 간단히 파악하는 한가지 방법이 될 것같은 생각이 든다.

 

<사르트르, 쟝 뽈, 프랑스의 철학자 겸 소설가, 1905년 빠리 출생(1905-1980). 현상학의 영향을 받아, 인간의식의 개념을 구축했다( 즉자 l'en soi 와 대자 le pour soi, 즉 자유가 그것이다.) 그래서 그는 실존주의자로 분류된다. 이 개념을 다룬 저서가 1943년에 출판된 <존재와 무>다. 이어서 1960년에 맑스주의적 경향으로 흐르는 철학에세이를 출간하는데, <변증법적 이성 비판>이 그것이다.

동시에 그는 자신의 철학사상을 소설의 장르로 확산하는 작업을 한다. 1938년(34세)에 출간한 <구토>가 있고, 미완성 장편소설인 <자유의 길>이 있으며, 1944년부터 대중적인 인기를 불러온 여러 가지 희곡작품들을 발표한다(<닫힌 방>,<더러운 손>,<악마와 선신>). 그리고 단편집<벽>과 철학적 에세이집 <상황>을 발표한다.

그리고 괄목할만한 자전적 에세이집인 <말>과 플로베르 연구서인 <가족의 천치바보>를 발표한다. 1964년에 <말>에 주어지는 노벨문학상을 거부한다. 그의 다수 철학적이고 문학적인 텍스트들은 <상황> 열권 속에 잘 정리되어 있다.>

 

상당한 부피가 있는 소 라루스 판 사전의 설명을 보아도 사르트르의 철학적사상의 전모는 잘 들어나지 않는다.

대중들은 사르트르를 소설가로 알지만 사실 그에게는 본격적인 소설이 없다. 다만 <구토>만이 제대로 격조를 갖춘 소설이다. 단편집인 <벽>과 미완성 장편소설인 <자유의 길>은, 단편집이라는 한계점과 미완성장편소설이라는 사실 때문에 본격적인 소설로 볼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20세기 프랑스의 가장 뛰어난 소설가의 한 사람으로 분류되는 이유는 <구토>의 유니크한 주제 때문이다. 그런 철학적 소설을 누구도 쓴 적이 없기 때문이다.

그의 첫 번째 철학서 <존재와 무>의 주제를 한 마디로 요약할 수는 없지만, 가장 근원적인 사상의 흐름은, 인간존재는 별로 쓰일 데 없는 헛된 정열 그 자체라는 것이다. 이 책이 나온 것이 그의 나이 마흔살 때이니 비교적 그의 저작활동의 초창기에 속하는 편이다.

신의 존재를 부정하고 있는 이 책에서는 예수를 “무지한 사람들을 허황된 말로 유혹하다가 처형된 로마의 선동인”이라고 적혀 있다.

그러나 이 책에서는 한편으로 프랑스 중산층에 대한 신랄한 비난의 숨결이 스며 있음을 보게 된다.

이 철학적 이에시집의 이 점이 사르트르를 일생 서재 안의 사색하는 철학자로 묶어놓지 않고 펜을 들고 인간들의 삶의 현장으로 뛰어들게하는 행동주의로 몰아가게 하는 요소로 작용하였다.

이 요소가 결국 사르트르를 일생을 통해 인간사회를 계급투쟁의 현장으로 보고, 일생 갖지 못한 자의 편에 서서 투쟁하고 글을 쓴 붕아라고 볼 수 있다.

또한 이 책에서 사르트르는 대자와 즉자의 개념을 도입하였다. 즉 인간의 의식을 대자(le pour soi) 존재로 의식하는 동시에, 물질과 동물을 즉자(l'en soi)로 표현하고 있다. 즉 대자은 끊임없이 즉자로의 지향을 계속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 책과 더부러 사르트르는 <상상력>과 <상상적인 것>이라는 두 개의 철학에세이를 발표한다. 이 책들 속에서 인간은 특유의 상상력을 통해 얼마나 자유를 그리워하는가를 설파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르트르는 20세기 프랑스에서, 아니 전세계 문단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작가로 군림했으며, 절대적인 대중의 사랑을 받았다. 그것은 18세기 프랑스 문화계를 석권한 볼테르의 수준을 오히려 능가했다.

사르트르가 이런 대중적인 인기를 누리게 된 가장 큰 이유가, 바로 몇 안되지만 그의 사상을 가장 잘 반영하고 있는 몇몇 희곡 작품의 대 성공에서 비롯되었다.

문제가 되는 희곡들은 <파리떼><닫힌 방><더러운 손><악마와 선신><알토나의 유폐자><네크라소프> 등이다.

<파리떼>는, 프랑스를 점령한 나치와 친독정권이랄 수 있는 페뗑정권 간의 야합에 의해 유린된 프랑스의 자유를 되찾기 위해서는 무자비한 레지스땅스가 불가결하다는 사실을 주장하기 위함이다.

그리스의 왕인 아가멤논의 아들 오레스테스는, 정부인 아이기토스와 내통하여 남편을 죽인 어머니 클리뎀네스트를 죽여야 한다는 결론을 내린다. 그것을 실천에 옮기기 위해 아르고스로 귀환한다. 나치와 내통하여 프랑스의 자유(남편 아가멤논)를 죽인 비시정권을 응징하여야 한다는 사르트르의 주장이 담겨 있다. 젊었을 때부터 한 쪽 눈이 거의 실명 상태였던 사르트르가 직접 총을 들고 레지스땅스에 참여한 것은 기적적인 일이다.

오레스트전설을 잘못 해석한 나치 담당자의 실수로 공연허가가 나서 빠리에서 상연된 이 연극은 공전의 히트를 쳤다.

사르트르의 인간관을 가장 잘 표현한 희곡이 <닫힌 방>이다. 이 연극은 사르트르가 인간을 얼마나 부조리하고 리리시시즘적인 존재로 보고 있는 가를 부각하고 있다.

세 사람의 배우가 등장하는데, 비겁자 가르셍과 레즈비언 이네, 유아살해범 에스텔이 그들이다. 이들은 정신적인 고통으로 괴로워하고 있는데, 그것은 이들의 정신상태에서 비롯된 것이다. 물질적인 것에서 오지 않았다.

사르트르의 또 다른 스승이랄 수 있는 헤겔은, 인간의 마음은 언제나 타인과 충돌한다고 말하고 있으며, 본질적으로 인간은 언제나 가까이 있는 타인의 죽음을 원하고 있다고 말한다.

하나의 방 안에 두 사람이 있으면, 두 사람 다 자신들이 생각하는 자신의 모습대로 상대방이 자신을 봐주기를 바란다고 한다. 이런 자기 중심적인 사고가 이룩되지 않으면 사람들은 각자 괴로움의 심연으로 빠지게 된다. 그것이 바로 닫힌 방이다. 즉 타인의 지옥이다.

지옥을 탈출하는 방법이 바로 행동이다.

한 사람의 작가의 경우, 빼앗긴 자 경제적인 생존이 어려운 자 못배운 자를 위해 펜을 들때만이 진정한 가치를 획득하게 된다. 그것이 바로 참여문학이다.

이런 문제를 집중적으로 다룬 책이 <문학이란 무엇인가>이다. 사르트르에게 있어서 문학이란 참여이며 행동이다.

그의 이런 생각이 정치사상화 한 것이 바로 그의 일생을 통한 사회주의와 공산주의의 그리고 식민지인들의 정치활동을 적극적으로 옹호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그는 프랑스가 50년 가까이 지배한 베트남의 독립전쟁을 적극 지지하였으며, 두 번이나 심각한 테러 위협으로 이사까지 하면서 프랑스가 100년 이상 지배한 알제리독립전쟁을 지지하였다.

일생 맑스주의와 실존주의의 접합을 위해 노력하였고, 러시아 혁명을 지지하였던 사르트르가 소련공산 정권이 체코슬로바키아와 헝가리를 침공하자, 태도를 바꾸어 오랜 공산주의 지지자에서 반대자로 자신의 입장을 정리한다.

사람이 죽어 버리면 그의 생각은 무로 돌아간다.

그러므로 인간은 철저하게도 자신의 행동으로만 자신을 설명할 수 있을 뿐이다.

전업작가로서 활동하기 우해 그가 교수직 사표를 낸 것은 1945년이었다. 우리 나이 41세 때였다.

1947년에 발표된 <더러운 손>은 1944년에 공연된 <파리떼>와 여러 가지로 대비되는 희곡이다. <파리떼>는 공산주의자들과 손잡고 나치에 대항하는 레지스땅스를 그리고 있다. 하지만 <더러운 손>은 공산주의의 순수성을 지키려다 오히려 살인을 하게 되는 경우를 그리고 있다.

2차 대전 당시 독일군이 점령하고 있던 동유럽 어느 국가가 무대로 등장한다. 외드레르와 위고 바린은 공산주의자이지만 조금 노선이 다르다. 외드레르는 수정주의자이며 현실주의자이다. 그러나 위고는 공산당 강령에 충실한 정통공산주의자다.

외드레르는 레지스땅스 운동 조직 내에서 비공산당원들과도 협력하자는 주의다. 그러나 위고는 공산당만으로 레지스땅스를 해야한다고 주장한다. 당에서는 위고에게 레지스땅스조직으로 들어가 외드레르의 비서로 활동하는 척하다가 그를 쏘라고 지시한다.

그러나 위고는 원수를 죽이는 오레스테스가 아니었다. 그는 오히려 외드레르를 존경하게 되고 그를 따른다. 엉뚱하게도 위고는 자신의 아름다운 아내 제시카가 외드레르의 품에 안겨 있는 장면을 보게 되어 그를 쏴 죽인다.

당 노선이란 살인을 정당화할 만큼 절대적인 것인가. 이 연극은 공산당에 대한 공격으로 주로 이용되고 있는 것 같다.

1950년대에 발표된 <악마와 선신>과 <네크라소프>는, 주인공 괴츠와 주인공 조르즈 드 발레라를 통해, 자유에 대한 실존주의의 주장이 어느 정도 효과를 보고 있으며, 맑스주의가 노동계급의 자기 인식과 노동의 정당성의 획득에 어느 정도 기여하고 있음을 표현하고 있다. 괴츠는 지독한 악마도 그렇다고 위대한 선신도 존재하지 않음을 증언하고 있고, 사기꾼 발레라는, 자신이 공산당을 버리고 서구로 망명한 것의 사기성에 대해 증언하고 있음을 본다.

이 두 개의 희곡은 잠시 사르트르가 가졌던 사회주의와 공산주의에 대한 희망을 나타내고 있는 것 같다. 그러나 사르트르의 이런 일말의 희망은, 소련의 체코 침공과 헝가리 침공으로 여지없이 부셔지고 만다.

그 밖에 사르트르의 성가를 올려주는 희곡으로 “알토나의 유폐자들”이 있다. 이 작품은 다른 것은 다 양보해도 알제리만큼은 절대로 내줄 수 없다는 <프랑스의 알제리> 주장자을 각성시키기 위해 쓰여졌다고 볼 수 있다.

희곡은 1959년 폐허에서 회복되고 있는 서독에서 전개되고 있다. 프란츠라는 독일 병사는 자신이 1945년 러시아로부터 돌아왔을 때 폐허이던 독일을 상상하며 자신을 자신의 2층 방에 유폐시킨 채 전쟁의 당위성을 주장하며 과거 전생시의 자신을 회고하면서 지낸다.

사실 그는 지독한 고문기술자였다. 그는 그 고통을 조금이라도 상쇄하기 위해 위대한 나치의 부흥을 꿈꾸지만 나치는 철저하게 망해 버렸다. 그는 결국 사업가로 대성한 나머지 사업에 먹혀 인생을 버린 아버지와 함께 동반자살한다.

이 희곡은 현실 속의 진상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과거 속에 붙잡혀 허상을 그리는 프랑스의 알제리자들을 꼬집는 것이 목적이다.

사르트르는 이외에도 중요한 문학평론서라고 할 수 있는 <보들레르론>과 프랑스 최고의 소설가로 치는 구스타브 풀로벨을 분석한 <가족의 천치바보>가 있다. 보들레르 론을 쓰면서 사르트르는 프로이드를 공격하였다. 프로이드 심리학의 기본적인 대들보라 할 수 있는 무의식의 존재를 사르트르는 거부하고 있다.

프로이드는 아이가 생후 8개월 가량부터 의식하지 못하는 무의식이 정신 속에 축적되어 성장 후에 큰 의식의 작용으로 나타난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사르트르는 아이가 여덜 살이 되어서야 드디어 제대로 된 의식을 가지게 된다고 생각하고 있다. 두 사람 사이에는 큰 차이가 있다. 그래서 사르트르는 자신이 8살 쯤 되었을 때, 자신의 외조부 샤를 슈바이처에게서 영향받은 여러 가지 정신적인 파편들이 어떻게 자신의 인생을 만들었는가를 <말>에서 분석하고 있다. 결코 무의식같은 것은 없었다고 말한다.

플로벨은, 사르트르와 프로이드가 장남이었지만, 플로벨은 차남이라서 너무나 똑똑한 장남 때문에 부모에게서 소외되었고 그래서 그는 문학을 할 수밖에 없었다는 점을 지적하고 있다. 그래서 플로벨은 소설을 써도 수백번 고쳐쓴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가족의 천치바보라는 것이다.

사르트르는 1960년에 <변증법적 이성비판>이라는 책을 썼는데, 상당히 중요성을 가지고 있는 철학에세이이다. 이책의 요지는 <타성태>라는 개념을 도입하여, 현대인들의 삶을 향유하기 위한 실천적인 노력이 결국은 인간을 파멸시키는 방향으로 가고 있다는 사실의 지적이다.

사르트르는 그 좋은 예를 중국인들을 들어 설명하고 있다.

중국인들은 뗄감과 건축자제의 획득을 위해 국토를 개간하다가, 역으로 엄청난 수해를 당하고 있다는 것이다. 인간이 조금 편리하자고 자동차를 발명하였지만, 자동차들로 인한 교통체증과 사망자들의 발생은 인간이 치르는 어떤 비극보다도 심각하다는 것이다.

사람들은 일상의 편리를 위해 로봇을 발명하고 기능을 강화하지만, 언제 인간이 로봇의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발달한 지능에 의해 지배당할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일생 좌파을 지지하는 사르트르의 맞수로 우파의 수호자 인 동갑내기 레이몽 아롱이 있다. 그는 사르트르만큼 출중한 자본주의 옹호론자이다. 그의 이론의 탁월함은 사르트트를 능가할 정도이다. 그렇지만 사후 두 사람의 성가는 판이하다. 프랑스인들은 레이몽 아롱을 잊어버릴지라도 사르트르를 잊지 못한다.

그것은 레이몽 아롱의 이론이 다소 사르트르를 능가하더라도, 사르트르가 세계의 비극적인 현안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면서 시의적절하게 자신의 생각을 철학적 에세이로, 그리고 희곡으로 발표하여 공연함으로써 세계인들의 자유를 향한 마음을 환기시키곤 했기 때문이다.

사르트르는 인간의 선천적인 인간조건인 자유를 향해 끊임없이 행동하였으며, 그것을 억누르는 어떤 개인 사회조직 하물며 국가 특히 조국 프랑스라도 서슴없이 <반항>하였기 때문이다.

출처 : 경대사대 부중고1215회 동기회
글쓴이 : 정소성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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